만절필동 (萬折必東) “만 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東)으로 간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黃河)가 만 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東)으로 간다’는 뜻으로, ‘순자'(荀子)의 ‘유좌편(宥坐篇)’에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뜻이 굳은 사람은 이를 반드시 관철시킨다는 의미로 쓰였다.
조선 후기에 현실은 청(清)나라를 섬길 수 밖에 없지만,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미로 쓰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 신종(神宗, 1563 ~1620)을 모신 사당 만동묘(萬東廟)가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줄인 명칭인 것과 같이 현실의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고 망하고 없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식을 드러내는 말이다.
○ 출전과 뜻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순자(荀子)’의 ‘유좌편(宥坐篇)’에 나오는 말에서 유래한다.
第二十八. 宥坐. 유좌의 교훈.
孔子觀於東流之水. 子貢問於孔子曰, 君子之所以見大水必觀焉者, 是何? 孔子曰, 夫水, 大徧與諸生而無爲也, 似德. 其流也埤下, 裾拘必循其理, 似義. 其洸洸乎不淈盡, 似道. 若有決行之, 其應佚若聲響, 其赴百仞之谷不懼, 似勇. 主量必平, 似法. 盈不求槪, 似正. 淖約微達, 似察. 以出以入, 以就鮮絜, 似善化. 其萬折也必東, 似志. 是故君子見大水必觀焉.
공자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보고 있었다. 그때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께 여쭈었다.
“군자가 큰 물을 볼 때는 반드시 관찰하듯 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물이란 모든 생물에게 두루 미치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으니, 이것은 마치 덕(德)을 가진 사람과 같다. 흐르는 곳은 낮은 곳으로 향해 가며 옷자락에 잡히듯 도리어 따르니, 이것은 마치 의로운 사람과 같다. 한없이 흘러나오는 것은 마치 도(道)와 같다. 만약 제방이 무너져 물이 흘러가면 그 반응은 메아리처럼 빠르며, 백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떨어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마치 용기 있는 사람과 같다. 작은 곳이라도 가득 채워서 평평하게 한 다음에 흘러가니 이것은 마치 법도를 지키는 사람과 같고, 어느 곳이든 가득 채워서 평미레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은 공정한 사람과 같으며, 물속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신선하고 깨끗하게 되어 나오는 것은 마치 잘 교화하는 사람과 같다. 만 번을 꺾어서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것은 의지가 굳은 사람과 같다. 이 때문에 군자는 큰 물을 볼 때 반드시 관찰하듯이 보는 것이다.”
당나라 양경(楊倞)의 순자(荀子) 주석에는 강물이 여러번 꺽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것은 뜻이 굳은 사람은 꺾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唐楊倞注 : 折,縈曲也。雖東西南北,千萬縈折不常,然而必歸於東,似有志不可奪者。
○ 중국에서 쓰이는 의미

흔히 말하는 “사필귀정(事必歸正)” 등의 의미 보다는 “뜻을 세우면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반드시 이루어 낸다”는 의미로 많이 쓰는 것 같다.
– 万折必东
河流不论有多少曲折,最后都东流入海。比喻事物不管有什么曲折,总要按着应有的规律发展。
《荀子·宥坐》孔子观于东流之水。子贡问于孔子曰:“君子之所以见大水必观焉者是何?”孔子曰:“夫水,大遍与诸生而无为也,似德。其流也埤下,裾拘必循其理,似义。其洸洸乎不淈尽,似道。若有决行之,其应佚若声响,其赴百仞之谷不惧,似勇。主量必平,似法。盈不求概,似正。淖约微达,似察。以出以入,以就鲜洁,似善化。其万折也必东,似志。是故君子见大水必观焉。”
示例:言鸿之往来有候,居处有常,犹水之流必循理,万折必东,以喻君子之仕非其道不由,非其位不处也。 *汉·扬雄《法言义疏·学行》
今天,面对深水区和攻坚期,担当起该担当的责任,以“ 万折必东不回头 ”的决心,以“赴百仞之谷而不惧”的勇气,我们就能大步涉险滩、啃下硬骨头,不断为中国的发展注入新的活力和动力。
– 萬折必東
解釋:河流不論有多少曲折,最後都東流入海。比喻事物不管有什么曲折,總要按著應有的規律發展。
出處:《荀子·宥坐》:“以出以入,以就鮮絜,似善化。其萬折也必東,似志。是故君子見大水必觀焉。”
示例:言鴻之往來有候,居處有常,猶水之流必循理,~,以喻君子之仕非其道不由,非其位不處也。 *漢·揚雄《法言義疏·學行》
今天,面對深水區和攻堅期,擔當起該擔當的責任,以“ ~不回頭 ”的決心,以“赴百仞之谷而不懼”的勇氣,我們就能大步涉險灘、啃下硬骨頭,不斷為中國的發展注入新的活力和動力。
○ 조선에서 쓰인 의미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망한 뒤 현실적으로 청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저버릴 수 없다는 의미로 쓰던 말이었다.
– 승정원 일기 : 영조 1년 을사(1725) 12월 13일(병자) 맑음 : 한국고전번역원
홍호인이 아뢰기를,
“청주 화양동의 만동사우는 누가 주관하는가? 우리나라를 떠도는 황조 사람 중에서 전가 외에 거두어서 쓸 만한 다른 사람이 또 있는지를 물어서 아뢰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한 칸의 초옥에서 주 소왕(周昭王)을 제사 지냈던 뜻으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만동사(萬만절필동(萬折必東)祠)를 지어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제사 지내고서 ‘중국에 대한 절의는 변함이 없다[萬折必東]’라는 뜻을 붙이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는데, 갑신년(1704, 숙종30) 연간에 비로소 창설되어 권상하가 그대로 주관하였으며 이후에는 호서(湖西)의 사림들이 서로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조(皇朝) 사람으로 쓸 만한 자를 두 전조(銓曹)에 물으니 전가 외에 전 현령 이동배(李東培), 전 만호 이면(李葂)이 모두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洪好人啓曰, 淸州華陽洞萬東祠宇, 誰其主管? 皇朝人流落我國者, 田哥外, 又有他收用者乎? 問啓事, 命下矣。先正臣宋時烈, 以一間茅屋, 祭昭王之義, 欲爲營立萬東祠, 以祀神宗皇帝, 以寓萬折必東之意而未果。臨終時, 屬託於先正臣權尙夏, 甲申年間, 始得創設, 權尙夏仍爲主張, 伊後湖西士林, 相與看護, 而皇朝人收用者, 問於兩銓, 則田哥外, 前縣令李東培·前萬戶李葂, 俱是李如梅之後耶云矣, 敢啓。傳曰, 知道。]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黃河)가 굽이굽이 흘러서 결국은 동쪽 황해(黃海)로 흘러든다는 뜻인데, 명(明)나라가 망한 뒤에 조선에서 현실적으로 청(靑)나라를 섬기고는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저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보통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 조선의 만절필동(萬折必東) 각자(刻字)
–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 : 가평 조종암의 각자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조종암(朝宗巖)의 각자로 조선 선조(宣祖)의 글씨다.
조선 숙종 10년(1684) 당시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 1626~1687)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취지로 새겼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나 의미가 확대되어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을 말한다. 재조번방(再造蕃邦)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 조선(蕃邦)을 구해냈다(再造)는 의미이다.
조종암(朝宗巖)에는 이외에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글씨 ‘사무사(思無邪)’, 효종의 글을 송시열이 쓴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낭선군 이우(李俁, 1637-1693)가 쓴 ‘조종암(朝宗巖)’이란 글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화양동 계곡의 만동묘(萬東廟)처럼 조종암에도 대통묘(大統廟)가 있고, 명나라 태조(太祖), 신종(神宗), 의종(毅宗)과 김상헌(金尙憲) 등 조선 문무(文武) 9현 및 왕미승(王美承) 등 명나라 9의사(義士)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 화양동 계곡 만절필동 각자와 만동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華陽洞) 계곡에 만절필동은 가평 조종암의 선조 글씨를 모사해와 옮겨 쓴 것이다.
화양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 신종(神宗, 1563 ~1620)을 모신 사당 만동묘(萬東廟)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줄인 말이다.
1689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죽자 제자들은 이곳에 그를 기리는 서원을 세우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이라고 이름했다. ‘화양(華陽)’은 중국 문화가 햇빛처럼 빛난다는 뜻도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