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
Oil on canvas, 81×65.5㎝, 1988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소장
빈센트 빌럼 반 고흐(네덜란드어: Vincent Willem van Gogh, 1853년 3월 30일~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쥔더르트에서 출생하였다. 1876년 16살에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네 살 아래 동생이자 빈센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이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 모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보존되어 오다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그 편지들은 그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한 마음의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다음에는 파리로 발령했다.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76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 때,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켄트 주의 감리교학교 램스게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1877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1878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결국 그는 6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80년에, 빈센트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Anton Mauve)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1881년에 그는 과부인 사촌 케이 보스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는 매춘부 신 호르닉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엄격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그의 동생 테오도 그것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신 호르닉과 고흐는 성격차이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헤어졌다.
1885년과 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화를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다. 즉, 고흐의 그림 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그를 ‘미친 네델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는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1890년 7월 27일, 빈센트 반 고흐는 들판으로 걸어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는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후, 심하게 앓고 난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매독을 앓다가 죽었다. 두 형제의 시신은 나란히 묻혔다.
반 고흐의 작품으로는 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 1888년 ‘아를의 침실’, 1888년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붉은 포도밭’, 1889년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아이리스’, 1889년 ‘정물: 꽃병에 꽂힌 열 두 송이 해바라기’, 1889년 ‘수염 없는 예술가의 초상’, 1890년 ‘가셰 박사의 초상’, 1890년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이 있다.
반 고흐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반 고흐는 흔히 후기인상주의 화가로 분류 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수집을 보유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미화 5390만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 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화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 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한편 ‘밤의 카페 테라스’(영-Cafe Terrace at Night, 프-Terrasse du café le soir, 네-Caféterras bij nacht)는 1888년 9월에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유화 그림이다.
프랑스 아를의 포룸 광장(Place du Forum)의 한 카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는 Le Café La Nuit라는 가게이다. 이 그림에서 고흐는 처음으로 검정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밤하늘을 그렸다.
네덜란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국의 미술 연구가 제러드 백스터는 이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이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하며, 고흐가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의 작품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려냈다는 주장을 하였다.
배문규의 “고흐 ‘밤의 카페테라스’에 예수와 12제자가 그려져있다?”(경향신문, 2015년 3월 9일자)는 제목의 글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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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는 2015년 3월 7일(현지시간) 미술 연구가 재러드 백스터가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흰 옷 차림에 긴 머리를 한 사람은 예수를, 검은 옷이나 모자를 쓰고 테이블에 앉거나 주변에 서 있는 열두 명은 12제자를 상징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카페에서 걸어나가는 한 명은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라고 주장했다. 고흐가 은밀한 형태로 자신의 작품 속에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1888년 작인 이 작품은 고흐가 프랑스 남부에서 생활할 때 그렸다. 아를의 포럼광장에 있는 카페의 저녁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백스터는 고흐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색을 작품에서 천국을 나타내는 색상으로 연결지었으며, 카페를 밝히는 노란 불빛의 전등은 ‘후광’이라고 봤다. 또한 서있는 사람의 뒤편에 있는 카페 창틀이 희미하게 십자가 형태인 점도 지적했다. 백스터는 고흐가 종교적 상징을 의도치 않게 사용했을 수 있지만, 일본 미술사가가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 등장인물 머리 뒤편의 해를 ‘후광’처럼 사용한 예를 들어 고흐가 신화와 기독교를 그림에 사용했다는 주장이 이미 제기된 바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종교적 암시’는 고흐의 성장 배경과 부합한다는 분석도 있다.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 목회자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고흐의 아버지도 네덜란드개혁교단의 목사였다는 것이다. 고흐의 숙부는 저명한 신학자로 고흐가 목회자의 꿈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 고흐는 ‘밤의 카페테라스’를 그릴 무렵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을 직접 언급하면서 “나는 신앙심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썼다고 허핑턴포스트는 전했다.
백스터는 “예술을 해석할 때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면서 “이 그림에는 추정이 맞다고 볼 만한 충분한 증거와 정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허핑턴포스트에 밝혔다. 이어 “당신이 12명의 미술사가를 방에 넣는다면 예술의 상징에 대해 13개의 정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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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규 목사(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