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 ~ 1825)의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의 초상’ (Portrait of Antoine-Laurent Lavoisier and his Wife)
자크루이 다비드 / 유화 / 194 x 259cm / 1788년 / Metropolitan Museum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의 초상은 프랑스의 화학자인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이자 동료인 마리안느 피에레트 폴즈를 그린 초상화이다.
마리안느 폴즈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년 8월 30일, 프랑스 파리 ~ 1825년 12월 29일, 벨기에 브뤼셀)가 1788년 마리안느로부터 의뢰 받아 완성한 작품으로,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의 초상 (Portrait of Antoine-Laurent Lavoisier and his Wife)
.작가: 자크루이 다비드
.연도: 1788년
.매체: 캔버스에 유채
.사조: 신고전주의
.장르: 초상
.크기: 194 x 259 cm
.위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라부아지에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뛰어난 과학자로 1743년 파리에서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법학 외에도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고 자연과학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94년 5월 8일 단두대에서 참수되며 생을 마감했다.
○ 역사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 ~ 1825)는 1788년 12월 16일에 그림 값으로 7천 리브르를 받았다.
1836년에 이 그림은 마리안느의 종손녀에게 상속되었고,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그림을 구매한 1924년 이전까지 샤젤 백작부인과 그 후손들의 소장품으로 남아있었다.
1927년에 이 그림은 록펠러 의학연구 기관에 기증되었고, 1977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 묘사
이 그림은 나무로 마감된 바닥과 세 개의 벽 기둥이 있는 가짜 대리석 벽이 보이는 라부아지에의 연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라부아지에 부부는 정면을 마주보고 있으며 두 사람의 머리는 사 분의 삼 정도 기울어져 있다.
마리-안느의 복장은 흰색 가발, 레이스 깃이 달린 흰 드레스, 푸른색 천 벨트 등으로 18세기 말에 유행했던 것들이다. 그녀는 오른손을 테이블에 올린 채로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검은색 조끼와 퀼로트, 스타킹, 버클 달린 신발을 착용하고 있으며, 흰색 셔츠와 목에 두르는 스카프를 입고 파우더를 뿌린 가발을 쓰고 있다.
그의 얼굴은 아내를 향하고 있고, 왼팔을 테이블에 기대고 있다.
그의 오른 손은 깃털 펜을 들고 있다. 테이블에는 진홍색 천이 덮여 있으며, 종이들과 장식함, 두 개의 깃털 펜이 꽂힌 잉크 병, 기압계, 가스저장소, 물병, 유리 덮개 등이 놓여 있다.
바닥이 둥근 커다란 플라스크와 마개가 테이블 옆 바닥에 위치해 있다.
그림의 가장 왼쪽에는 커다란 서류 상자와 검은 천이 놓인 의자가 있다.
이 그림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라부아지에가 책상 밖으로 오른발을 길게 내뻗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사가 마르코 베레타 (Marco Beretta)는 다비드가 17세기에 그려진 데카르트의 초상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당시에 라부아지에가 데카르트나 뉴턴같이 100 ~ 150년 전에 과학혁명을 완성했던 과학자들과 비교되곤 했기 때문에, 다비드가 데카르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개연성이 있다.
요하네스 탕헤나 (Johannes Tangena)가 그린 초상화에서 집필 중인 데카르트는 오른발을 길게 뻗어서 책을 한 권 밟고 있는데,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폐기처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비드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 그림에서 라부아지에는 어떤 책의 원고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초상화를 그린 다음 해인 1789년에 출판된 ‘화학의 원리’이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책으로 평가되었다. 라부아지에 부인의 뒤로 화집이 보이는데, 이는 라부아지에 부인이 실험 기구를 그렸음을 암시한다.
○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에 대하여
앙투안 로랑 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년 8월 26일 ~ 1794년 5월 8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짧게 줄여 ‘라부아지에’라고도 표기한다.
그는 뛰어난 실험자였으며, 화학 이외의 다른 방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공직에 있기도 하였다. 연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면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산화 과정에서 산소의 작용, 산화나 호흡 간의 정량적인 유사점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으며 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근대 화합물 명명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한편 마리안느 피에레테 폴즈 (Marie-Anne Pierrette Paulze, 1758년 1월 20일 ~ 1836년 2월 10일)는 프랑스의 화학자, 번역가, 과학삽화가이다.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의 아내이자 연구 동료로서 화학 연구 활동을 했다. 라부아지에의 사후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이후 과학자 럼퍼드 백작 벤저민 톰슨과 재혼했다.
라부아지에 부인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앤 피에레테 폴즈)의 아버지 자크 폴즈는 세금 징수원, 변호사,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감독을 지냈다. 그녀는 라부아지에 동료들에게 과학을 배웠고, 영어를 잘해서 당시 영국 과학자 리처드 커원 (Richard Kirwan)의 ‘플로지스톤과 산의 구성’이라는 책을 번역해 플로지스톤 이론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녀는 또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다비드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이러한 경험으로 나중에 실험 기구나 실험 과정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녀가 그린 실험 기구들은 너무나 정교해서 지금도 독자를 놀라게 한다. 프랑스 혁명 한 해 전에 다비드가 이 부부의 초상화를 그린 데는 이런 인연이 있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같은 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뒤에, 그녀는 남편의 작업을 정리해서 ‘화학 논고’를 출판하였다. 라부아지에 부인은 과학 연구와 실험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라부아지에의 실험 모습과 실험 기구를 그리는 방식으로 남편을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재능 있는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는 결국 남편의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한 세대 이전의 샤틀레 부인 (Emilie du Chatelet)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라부아지에 부인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유명한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
.생사: 1743년 8월 26일, 프랑스 왕국 파리 ~ 1794년 5월 8일 (50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국적: 프랑스
.분야: 화학
.소속: 세금 징수 조합,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출신 대학: 파리 대학교
.주요 업적: 플로지스톤설 부정, 질량 보존의 법칙 확립, 원소와 화합물 구분, 산소 명명
.영향받음: 기욤프랑수아 루엘,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약
라부아지에는 1772년에 다이아몬드를 병 속에 넣어 밀봉한 후 렌즈를 이용해 태워서 이산화탄소를 얻어냄으로써 다이아몬드가 흑연과 마찬가지로 탄소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실험 기구들은 라부아지에의 실험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라부아지에는 천칭 저울을 사용해서 화학반응 전후의 무게를 재곤 했는데, 이 저울은 그의 연구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핵심 실험 기구였다. 모든 화학반응에서 반응 전후의 무게가 같아야 하고, 모든 계산과 과정에서 방정식의 좌변과 우변이 같아야 하며, 합리적인 세계에서는 변화의 와중에서 무언가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이기도 했다.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 (Antoine Lavoisier)는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은 불행한 과학자다. 라부아지에는 최초로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리하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인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펴낸 ‘화학의 원리’는 근대 물리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뉴턴의 ‘프린키피아’ (Principia, 1687)에 비견될 만한 책이다.
– 플로지스톤설 부정
18세기 내내 화학은 슈탈과 같은 화학자들이 제창한 플로지스톤 (phlogiston) 이론을 바탕으로 삼았는데, 이에 따르면 물질이 연소하거나 하소할 때 물질에서는 플로지스톤이라는 가상의 입자가 빠져나와서 공기 중으로 흡수된다. 물질이 탈 때는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물체가 더 가벼운 재로 변한다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물질이 타면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연소란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창했다. 간단히 말해 라부아지에는 공기를 구성하는 원소 중에 산소라는 새로운 원소가 있음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물질의 연소를 설명했던 것이다.
– 질량 보존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質量保存─法則)은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법칙이다.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닫힌계에서의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의 질량) = (결과물의 질량) 이란 수식을 만족한다. 질량 보존의 법칙은 비상대론적인 법칙이며, 상대성이론을 고려할 경우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상대론을 고려할 경우에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성립한다.
이 법칙은 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최초로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미하일 로모노소프 (Mikhail Lomonosov) 등이 언급한 바가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이 에너지로도 변환될 수 있다.
– 질량 / 물질 보존의 예외
1) 물질은완벽하게 보존되지 않는다.
물질 보존의 법칙은 특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은 고전적 이론에서만 참인 근사적인 물리 법칙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특정 높은 에너지 활용을 제외하고는 거의 참이다. 보존의 개념에 특정한 어려움은, ‘물질’이 과학적으로 잘 정의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물질들이 ‘물질’이라고 생각될 때, (예를 들어 전자나 양전자) 등은 광자를 생성하기 위해 없어진다. (광자는 종종 물질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면 물질의 보존은 고립계에서도 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 보존은 방사능과 핵반응이 포함되지 않는 화학 반응에서 안전하게 추정될 수 있다. 물질이 보존되지 않더라도, 계 안에서의 질량과 에너지의 총 합은 보존된다.
2) 열린계와 열역학적으로 닫힌 계
또한 질량은 열린계에서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계 내부나 외부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들이 투입될 수 있거나 나갈 수 있는 경우가 그런 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방사능과 핵반응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계에서 도망가는 열, 일, 전자기적 방사선은 계의 질량의 감소로 측정하기에는 사실 너무 작다. 고립계에서의 질량 보존의 법칙 (질량과 에너지가 전부 닫힌계) 은 어떤 관성계에서 봐도 게속 현대 물리학에서 참으로 여겨진다. 이것의 이유는, 상대성 방정식이 심지어 ‘질량이 없는’ 입자들, 예를 들어 광자들이 고립계에 질량과 에너지를 더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질량 (물질이 아니지만)이 에너지가 도망가지 않는 계의 과정에서 엄격하게 보존되도록 허락한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다른 관찰자들이 주어진 계에서의 보존된 특정 값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관찰자들은 이 값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계가 모든 것에 대해 고립되어 있다면)
3) 일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팽창하는 부피의 우주에서 광자의 변치 않는 총 질량은 적색 이동 때문에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질량과 에너지의 보존은 이론에서 에너지로 만들어진 다양한 수정들에 의존한다. 그러한 계들의 변하는 중력 퍼텐셜 에너지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토록 위대한 화학자가 왜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을까?
라부아지에는 밤에는 화학자였지만 낮에는 징세청부인 (국가에 고용된 세금 징수업자)이었다. 그가 25세 때 징세청부인이 된 것은 연구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국가나 기업의 지원 없이 개인이 자기 돈을 들여 연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직접세는 행정조직이 걷고, 간접세는 징세청부인에게 맡겼다. 약 3만명에 달했던 징세청부인들은 일정액의 세금을 정부에 납부하면 나머지는 자기 수입이 되므로 폭력과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시민들에게 악명 높은 존재였으며, 성서에서도 부패한 세리 (稅吏), 즉 징세청부인이 대표적인 죄인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도 본래 세리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징세청부인은 귀족,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타도 대상이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1794년 끝내 사형 판결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급진적인 자코뱅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 구체제에서 세금 공무원으로 일했던 라부아지에의 전력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연구를 위해 남은 생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 재판정의 판사는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우리 공화국은 과학자도, 화학자도 필요하지 않다. 정의는 연기될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죽은 뒤에 당이 유명한 수학자 라그랑주 (Joseph-Louis Lagrange)는 “그의 머리를 베어버리는 데는 순간으로 족하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라고 한탄했다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