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자크루이 다비드의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Andromache Mourning Hector)’
자크루이 다비드 / oil paint / 1783년 / 루브르 박물관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년 8월 30일 ~ 1825년 12월 29일)는 1783년 8월 23일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를 제출하여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작품은 살롱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것은 ‘일리아드’의 한 장면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 의해 살해된 남편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애통해 하는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아스티아나스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모습을 담았다.

– 자크루이 다비드의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Andromache Mourning Hector)
.작가: 자크루이 다비드
.크기: 2.75m x 2.03m
.시대: 신고전주의
.제작: 1783년
.재료: Oil paint
.위치: 루브르 박물관
아버지를 잃은 아스티아나스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는데, 아스티아나스의 나이가 다비드의 아버지가 결투로 세상을 떠났을 때의 다비드 나이쯤 된다.
남편을 잃은 여인과 아버지를 여읜 아이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연상해서 그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가 이 그림을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은 자신의 처지와 일치되게 그렸다고 추측하는 이유는, 빙켈만이 설명한 『일리아드』에서의 아스티아나스는 이 그림에 그려진 8-9세보다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일리아드』에서 안드로마케가 독백한 그리스어 첫 귀절을 오른쪽 큰 촛대에 적어 넣었다.
“남편이여, 당신은 젊은 나이에 날 과부로 남기고 죽었구려. 당신과 내가 세상에 내놓은 우리의 아들은 불행하게도 아직 너무 어리다오.”

다비드는 1783년의 살롱전에 이 작품 외에도 여섯 점을 더 출품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매우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노아이유 부부를 위해 그린 것이다.
노아이유 부부는 다비드와 그 밖의 두 화가에게 카퓌시느 성당 내 가족 예배당을 위한 종교화를 의뢰했다.
다비드는 종교화를 그리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종교화로는 마지막작품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특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므로 군인을 모델로 그렸다.
노아이유 부인은 군인을 모델로 그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스러움이 손상되었다고 다비드를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신성을 손상시켰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어 유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노아이유 부부는 이 작품을 예배당에 걸지 않고 자신의 집에 장식했다.
혁명 후에 이 부부의 작품 대부분이 압수당했는데 흥미롭게도 노아이유 부인은 이 작품을 덮개로 가려 보존했다.
다비드는 1783년의 살롱전에 초상화 두 점도 함께 소개했는데 하나는 이모부 <자크-프랑수아 드마이송의 초상>이고 다른 하나는 <알폰스 르로이의 초상>이다.
르로이는 산부인과 의사로 1783년 초, 다비드의 첫 아들 샤를의 출산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다비드는 르로이를 매우 지성적이며 세련된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그의 실제 모습과 많은 차이가 났다.
르로이는 성을 곧잘 냈고, 논란이 되는 의학적 견해를 고집했으며, 무능하고 태만했고, 결국 자신의 종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런 그를 다비드가 자신의 직업에 존엄성을 가진 계몽주의의 상징이 될 만한 인물로 만든 것이다.
이런 변형의 기교에서 말하면 다비드는 매우 훌륭한 초상화가였다.

○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에 대하여
– 헥토르
헥토르 ( Ἕκτωρ)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아 왕자로, 트로이아 전쟁 때 트로이아측 전사의 필두였다.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 사이의 장남으로, 트로이아의 건설자 타르다누스와 트로스의 후손이 된다. 안드로마케와 결혼하여 사이에 스카만드리우스 (트로이아인들에게는 아스티아낙스라고 불림)를 낳았다. 트로이아 방어전에서 트로이아 및 그 동맹군의 총사령 역할을 했으며, 그리스인 3만 1천명을 쳐죽였다.
헥토르는 그 용맹 뿐 아니라 고결한 성품으로 중세 유럽의 구위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헥토르는 대담한 전사인 만큼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고 사려깊으며 성실한 아들이자 남편이고 아버지인, 부정적인 면 하나 없는 무결한 인물로 묘사된다.
– 안드로마케
안드로마케 (Ἀνδρομάχη)는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헥토르의 아내이다. 그녀는 킬리키아 테바이의 왕인 에에티온의 딸로 킬리키아 테바이에서 나고 자랐다. 헥토르와의 사이에서 아스티아낙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 에에티온은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었고 다섯 명의 오빠들 역시 아킬레우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 역시 아킬레우스의 노예가 되었으나 살해되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원인인 듯하다. 다른 전설에는 에에티온은 헤라클레스의 아들이라는 전승도 있다. 헥토르 또한 아킬레우스 손에 죽었는데 나중에 트로이아가 함락되고 나서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노예로 끌려가서 그의 첩이 되었다. 아들 아스티아낙스는 그리스 군 네오프톨레모스 또는 오디세우스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트로이 성벽에서 던져졌다는 전설과 곤봉으로 맞아죽었다는 전승, 우물에 던져졌다는 전승이 있다. 다른 전설로는 아스티아낙스 역시 그리스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스로 끌려간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와의 사이에서 몰로소스, 피에로스, 페르가모스 라는 아들을 낳았고 네오프톨레모스가 죽자 다시 헥토르의 동생인 헬레노스와 결혼하여 아들 케스트리노스를 낳고 에페이로스의 여왕이 되었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네오프톨레모스 생전에 헬레노스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헤르미오네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를 헬레노스에게 넘긴 것이다. 한편 아스티아낙스는 죽지 않고 그와 함께 그리스로 끌려왔다는 전승도 있다. 후에 라신느는 아스티아낙스 생존설을 취하여 작품 앙드로마크를 썼다.
전설에 의하면 네오프톨레모스가 죽자 막내아들 페르가모스를 따라 소아시아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는 페르가몬에서 죽었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안드로마케는 트로이가 함락될때 아스티아낙스를 안고 비밀통로를 통해 트로이를 빠져나갔다고도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