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 1791 ~ 1824)의 ‘메두사호의 뗏목’ (Le Radeau de la Méduse)
테오도르 제리코 / 캔버스에 유화 / 716 x 491cm / 1819년 / 700번 방, 프랑스 정부 (1919 ~ )
테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 1791년 9월 26일 ~ 1824년 8월 31일)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 테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
.출생: 1791년 9월 26일, 프랑스 루앙
.사망: 1824년 1월 26일, 프랑스 파리
.전시 장소: J. Paul Getty Museu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찬틸리 성 등
.제자: Joseph Simon Volmar
.부모: Louise-Jeanne-Marie Caruel, 조르주 니콜라스 제리코
.자녀: Georges-Hippolyte Géricault
고전주의에서 해방된 낭만파의 선구자이다.
그는 루벤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1816년 이탈리아에 유학하였다.
들라크루아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은 1점에 불과하지만, 그는 자성 (資性) 웅대함에 프랑스 회화가 낳은 가장 대형의 천재였다.
〈메두사호의 뗏목〉(1819)은 대담한 구도와 명암의 강한 구성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다른 작품으로 〈에프솜의 경마〉(1821), 〈미친 여인〉(1822)등이 있다.
○ 메두사호의 뗏목 (Le Radeau de la Méduse)
메두사호의 뗏목 (프: Le Radeau de la Méduse)은 테오도르 제리코가 1823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루브르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당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구도는 당시 평면적 전개를 피하고 피라미드형 구조인데, 희망과 감동의 초점을 멋지고 힘차게 그렸다.

– 메두사호의 뗏목
.작가: 테오도르 제리코
.연도: 1819년
.매체: 캔버스에 유화
.사조: 낭만주의
.장르: 역사화
.크기: 716 x 491 cm
.위치: 700번 방
.소장: 프랑스 정부 (1919 – )
이 대작은 당시 사건을 그리고 있다. 1816년에 범주 전함 (帆走戰艦) 메두사호는 식민지로 향해 가는 관원 (官員)과 함께 약 4백 명을 태우고 출발했으나 암초에 걸렸다. 배를 버리고 승원은 구명정 (救命艇)에 분승 (分乘) 했으나 나머지 149명 때문에 커다란 뗏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양에 나와 밧줄이 끊어져 뗏목 위에서는 물과 음식 때문에 피로 물든 싸움이 벌어졌다.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생존자는 115명이고 모두 빈사 (瀕死) 상태였다. 이 보도는 세론을 들끓게 했는데, 제리코는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흥분한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제리코는 제작에 임하여 생존자를 남김 없이 방문, 같은 모양으로 뗏목의 모형을 만들고 시체를 화실로 가져다가 그 경직 (硬直) 상태를 조사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빈사의 인체를 연구하였는데, 제작할 때 외젠 들라크루아가 선배를 위하여 포즈를 취한 것은 또한 미담이다.

○ 1816년 7월 2일, 메두사호의 침몰 : 무능·부패 정부가 만든 인재 (人災)
1816년 7월 2일, 아프리카 서안 브롱곶 (지금의 모리셔스 중부 해안) 50㎞ 해상.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암초에 걸렸다. 보름 전 프랑스 중서부 로슈포르 항구를 떠난 메두사호의 목적은 세네갈 식민지 개척. 나폴레옹의 명으로 45척을 건조했던 40문 프리깃 중 한 척으로 1810년 건조된 메두사호의 출항은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패전으로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식민지 개척을 ‘과거의 영광 재현을 위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왕정복고로 즉위한 루이 18세는 메두사호뿐 아니라 보급선 등 3척을 딸려 보냈다.
화려한 출항과 달리 메두사 선단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장의 자질이 떨어졌다. 45세 쇼마레 선장은 승선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왕당파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감투를 썼다. 자리를 얻으려 돈을 쓴 쇼마레 선장은 뒷돈을 받고 사람을 더 태웠다. 정원 326명인 메두사호에 400명이 넘게 탔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도착하려는 욕심에 쇼마레 선장은 선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연안에서 속도를 올렸다. 결국 사구와 암초를 만나 난파했지만 구명정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쇼마레 선장은 귀족과 장교 등 ‘고귀한 신분’을 구명정 6척에 먼저 태웠다. 나머지는 메두사호에서 나온 판자로 길이 20m, 폭 7m짜리 대형 뗏목을 급조해 실었다. 쇼마레 선장은 뗏목을 연결한 구명정의 속도가 나지 않자 로프를 끊어버렸다. 망망대해에 버려진 159명이 탄 뗏목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격랑에 몸을 맡겨야 할 양쪽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보다 안전한 중앙을 차지하려 싸웠다. 넷째 날 67명만 남은 상황에서 일부가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육을 먹고 피를 마셨다.
함께 출항했던 쌍범선 아르고호가 사고 보름 뒤 뗏목을 발견했을 때 생존자는 15명만 남았다. 발견 즉시 5명이 더 죽어 결국 10명만 살았다. 프랑스 왕정은 사건 자체를 숨겼으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사건을 숨길 수는 없는 법. 사고 두 달 보름 뒤부터 왕정 반대 논조의 글이 신문에 실리며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왕정의 습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뗏목에 남기를 자원했던 군의관과 항해사가 이듬해 책을 내서 사건을 고발하고 28세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1819년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렸다. 무능하고 부패한데다 국민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 부르봉 왕가는 1830년 끝내 무너졌다. 분노를 넘는 날카로운 기억과 기록의 힘, 그 파장이 역사를 만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