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명 황제 영락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영락대전’ (永樂大典)
‘영락대전’ (永樂大典)은 명의 황제 영락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중국의 칙찬 유서 (類書)이다.
‘영락대전’은 명나라 성조 (成祖) 영락제 (永樂帝)의 명에 따라 1415년 (명 영락 13) 9월에 편찬된 ‘사서대전’ (四書大全), ‘오경대전’ (五經大全),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통칭하는 말로, ‘영락 3대전’ (永樂三大全)이라고도 부른다.
성조 영락제는 1414년 11월에 한림원학사 (翰林院學士) 호광 (胡廣), 시강 (侍講), 양영 (楊榮) · 김유우 (金幼㪀) 등에게 칙명 (勅命)을 내려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편찬 작업에는 위에서 언급한 3명 외에도 한림편수 (翰林編修) 엽시중 (葉時中) 등 39명이 더 참여하였다. 성조는 호광등에게 대전의 편찬을 지시하면서 기본적인 편찬의 범례를 제시하였다. 오경과 사서에 대한 전주 (傳註)와 여러 유학자들의 경학 논설 중에서 중요한 것을 편집·정리하여 전서 (全書)를 편찬할 것, 주돈이 (周惇頤)의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통서’ (通書), 장재 (張載)의 ‘정몽’ (正蒙)과 ‘서명’ (西銘) 등 여러 성리학자들의 저술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편집할 것 등이 그것이다.
1415년 9월 ‘영락대전’의 편찬이 완료되자 성조는 어제서문 (御製序文)을 붙이고 예조에 명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 연혁
1404년 문헌대성 (文獻大成) 완성
1407년 영락대전으로 명칭 변경, 사본 (寫本)으로 정본 (正本) 1부를 제작
1562년 부본 (副本) 1부 제작
명조 말기에 혼란으로 화재와 도난 등으로 소실됨. 정본 1부 (1407)를 제외하고 원본과 부본은 소실되었음. 청조 사고전서 편찬 중에 참조됨.
1860년 영국, 프랑스군에 의한 애로호 사건으로 약탈 및 소실.
1909년 의화단 운동 등으로 소실을 입음.
○ 내용
경사자집 (經史子集), 제자백가, 천문, 음양, 의복 (醫卜), 승도 (僧道), 기예 등의 여러 책들을 수집하여 홍무정운에 따른 운자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다.
‘영락대전’의 체재와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사서대전’은 ‘대학장구대전’ (大學章句大全), 『대학혹문 (大學或問)』, 『논어집주대전 (論語集註大全)』, 『맹자집주대전 (孟子集註大全)』, 『중용장구대전 (中庸章句大全)』, 『중용혹문 (中庸或問)』 등 6종의 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집주 (集註) · 장구 (章句) · 혹문 (或問)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희의 주석에 대한 송·원대 성리학자들의 학설들을 모아서 편집·수록하였다.
『오경대전』은 『주역대전 (周易大全)』, 『서경대전 (書經大全)』, 『시경대전 (詩經大全)』, 『예기대전 (禮記大全)』, 『춘추대전 (春秋大全)』 등 5종의 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역』에서는 정이의 『이천역전 (伊川易傳)』과 주희의 『주역본의 (周易本義)』, 『서경』에서는 채침 (蔡沈)의 『서집전 (書集傳)』, 『시경』에서는 주희의 『시집전 (詩集傳)』, 『예기』에서는 진호 (陳澔)의 『예기집설 (禮記集說)』 등을 기본 토대로 하면서 정주학 (程朱學)에 입각한 송 · 원대 여러 학자들의 주석들을 모아 편집하였다.

『성리대전』은 송대의 성리학자 120가 (家)의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중에서 원서 (原書)를 채록(採錄)한 것으로는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통서』, 장재의 『정몽』과 『서명』, 소옹 (邵雍)의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 주희의 『역학계몽 (易學啓蒙)』과 『가례(家禮)』,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 채침의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 등 9종이며, 그밖에 이기(理氣) · 귀신(鬼神) · 성리(性理) · 도통(道統) · 성현(聖賢) · 제유(諸儒) · 학(學) · 제자(諸子) · 역대(歷代) · 군도(君道) · 치도(治道) · 시(詩) · 문(文) 등 성리학의 주요 개념 13가지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모아 항목별로 분류하여 정리·편집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갖춘 『영락대전』은 편찬 직후 간행되어 중앙과 지방의 각 학교에 반포되어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또 과거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영락대전』은 당나라 때의 『오경정의 (五經正義)』에 비견될 만큼 명대 학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영락대전』에 의거한 성리학은 명나라의 체제교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또 『영락대전』은 간행 직후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 학자들의 경학 및 성리학 연구의 기본 교재로 활용되는 등 대외적인 영향력도 매우 컸다.
하지만, 『영락대전』 편찬에 따른 성리학의 교학화에는 상당한 부자용과 그에 대한 비판이 뒤따랐다. 먼저, 방대한 분량의 3대전이 불과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완성되면서 그 내용 자체가 상당히 부실하며 많은 부분이 기존 저술들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영락대전』이 교육과 과거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면서 이를 이용하여 학자들이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학풍 역시 성리학이 가지고 있는 이론 탐구와 윤리 실천의 두 측면 중에서 후자의 측면만 강조되었고, 도(道)를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나 자유로운 비판정신은 사라지게 되었다. 즉, 국가가 공인한 범주 안에서만 연구와 실천이 가능하게 되면서 명대의 성리학은 경직되었고, 학문적·이론적 발전은 크게 뒤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