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 대몽골국 (Mongol Empire) 역사
대몽골국 (Mongol Empire, 몽: 예케 몽골 울루스), 또는 몽골 제국은 보르지긴 테무친이 1206년에 건국한 국가로, 대영제국에 이어 세계 역사상 2번째로 큰 제국이다.
몽골 제국은 칭기스 칸의 중앙 울루스를 중심으로 주치 카사르 (1164? ~ 1219?) 이하 동생들에게 흥안령 지역을, 장남 주치에게 알타이산에서 이르티시강 유역 (킵차크 초원)을, 차가타이에게 알타이산에서 주변 츄강 유역(카라 키타이 고지), 그리고 우구데이에게 알타이산에서 우룽구강 일대 (나이만 고지)를, 막내아들인 톨루이에게 몽골리아 지역을 분봉했다.

– 몽골 제국 / 대몽골국 (Mongol Empire)
.시기: 1206 ~ 1368년
.수도: 아바르가 (1206–1235), 카라코룸 (1235–1260), 칸발리크 (1271–1368)
.정부 형태: 군주제 – 대칸 (大汗), 황제 (皇帝) / 입법부: 쿠릴타이
.대칸: 칭기즈 칸 (초대) 1206 ~ 1227년, 툴루이 칸(임시) 1227 ~ 1229년, 오고타이 칸
1229 ~ 1241년, 귀위크 칸 1246 ~ 1248년, 몽케 칸 1251 ~ 1259년, 쿠빌라이 칸 1260 ~ 1294년, 토곤 테무르 칸 (말대) 1333 ~ 1368년
.국성: 보르지긴
.위치: 유라시아 일대 – 몽골, 중국 대륙, 한반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 북부, 동유럽
.면적: 어림 33,000,000km (1279년)
.통용어: 중세 몽골어, 투르크어, 중국어, 페르시아어 등
.민족: 몽골족
.인구: 어림 110,000,000명 (1279년)
.종교: 텡그리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경교, 샤머니즘 등 공존
.주요 사건: 1206년 건국, 1294년 실질적인 제국 분열, 1368년 원의 대도 상실, 1388년 북원 왕조 멸망 · 쿠빌라이 칸 직계 원 황실 멸망, 1487년 다얀 칸의 몽골 제국 재건, 1635년 청의 외몽골 합병 · 칭기즈 칸 직계 대칸 지위 단절
.통화: 교초
.이전 국가: 몽골부, 메르키트부, 케레이트부, 나이만부, 타타르부
.이후 국가: 원나라, 킵차크 칸국, 우구데이 칸국,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현재 국가: 몽골
몽골제국은 13세기 몽골족이 세운 제국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제국, 가장 큰 유목 제국, 가장 큰 황제국으로 이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중세 몽골어 또는 몽골 문자로는 ‘예케 몽골 울루스 (Yeke Mongɣol Ulus)’라고 했으며 “대몽골국” 이라는 뜻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이흐 몽골 올스 (Их Монгол улс / Ih Mongol Uls) 라고 한다. 수도는 칭기즈 칸 때는 오논, 2대 ~ 4대 칸 때는 카라코룸, 5대 쿠빌라이 칸 이후부터는 대도 (베이징). 몽골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금기이자 최전성기이다.
동서양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연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가로써 몽골이란 이름을 전 세계가 기억하도록 만든 국가이다.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어린 소년이 세계의 공포 칭기즈 칸으로 자리잡아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을 갈아마시며,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전쟁사를 갈아치운다.
당시 서쪽 끝으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부터 동쪽 끝으로 일본의 후쿠오카, 남쪽 끝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까지 몽골 제국군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유라시아 국가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의 몇몇 국가 정도뿐이다.
구대륙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전 세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밖에 없었던 시절에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를 경험한 국가는 몽골 제국이 유일하다.
단기간에 정복으로 세워진 거대 제국이라는 점에서 나폴레옹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흔히 비교되기도 하지만, 한 세대 만에 붕괴한 이들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로 백 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몽골 중심의 패권을 구대륙에서 유지하기도 했다.

○ 국호
몽골제국의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국호를 언제 공식적으로 선포했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예케 몽골 울루스’가 처음부터 고정된 국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은 점차 국호처럼 사용되어 갔다.
1271년 이전에는 ‘대조 (大朝)’와 ‘대몽고국 (大蒙古國)’이라는 두 가지 한자 국호가 주로 사용되었다.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이 ‘건국호조’를 반포함으로써 한자 국호는 ‘대원 (大元)’으로 확립되었다.
몽골제국이 막북으로 위축되기 전까지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몽골어 국호는 계속 사용되었는데, ‘장씨선영비’ (張氏先塋碑, 1335)에서 ‘황원’ (皇元)을, ‘칙건흥원각비’ (勅建興元閣碑, 1346)에서 ‘아원’ (我元)을 몽골어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한 것이 그것이며, 나아가 네이멍구자치구 웡뉴터 기에 위치한, 노국대장공주의 잉신 (媵臣) 제군타이 (Jeγüntai)를 높이는 ‘달로화적죽온태비’ (達魯花赤竹溫台碑, 1335)에는 ‘대원이라 불리는 예케 몽골 울루스’ (몽: Dai Ön qemeqü Yeqe Mongγol Ulus)가, ‘추봉서녕왕흔도 (Hindu/Indu) 비’ (追封西寧王忻都碑, 1362)에는 ‘대원 예케 몽골 울루스’ (몽: Dai Ön Yeqe Mongγul Ulus)라는 호칭이 나타난다.

○ 역사
- 칭기즈 칸
1206년 카마그 몽골을 다스리던 보르지긴 씨족의 수장인 테무친이 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오논 강에서 개최된 쿠릴타이 회의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몽골 제국이 시작되었다.
제국 건국 이전 칭기즈 칸은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 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군인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정복 전쟁의 야심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1219년부터는 서아시아에 원정해 호라즘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편, 캅카스를 함락해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빼앗고 1225년 귀환했다.
아시아 내륙 지방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의 영토를 현저히 확대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 제국을 정벌하던 중 1227년 진 중에서 전사했다.
칭기즈 칸 사후 당시 몽골 제국의 영향력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 평원에 접해 있었다.
또한 제국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 오고타이 칸
칭기즈 칸이 서하 제국과 전쟁 하던 중 전사한 후 2대 황제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의 잔존 기병대, 보병대와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년에는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키예프 루스와 중앙 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 불가르인들의 제국은 1~2년 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키예프 루스의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 무렵 여러 소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키예프 루스는 몽골의 침입으로 붕괴하였다.
발트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수도였던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루스인들의 일부 도시는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 왕국의 일부를 정벌했으며 전위 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 왕국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 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 근처 발슈타트에서 수부타이의 몽골군에게 1242년 4월 9일 궤멸에 가까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몽골군은 독일 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사조 강 유역에서 완파한 몽골군은 헝가리 왕국에서의 몽골 지배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한편 그에 앞서 몽골군은 이란 · 그루지아 · 아르메니아에서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

- 귀위크 칸
귀위크 칸 또는 구유크 칸 (Güyüg Qan, 貴由 汗, 1206년 3월 19일 / 음력 2월 9일 ~ 1248년 4월 20일 / 음력 3월 25일)은 몽골 제국의 3대 칸으로 1246년부터 124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우구데이 카안의 장남이었다.
원조비사에는 고여극 (古余克)으로 나타난다. 휘는 보르지긴 귀위크 또는 구유크, 묘호는 정종 (定宗), 시호는 간평황제 (简平皇帝)이다.
겁이 많고 힘이 약하였으나,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 정치면에서는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귀위크 칸은 카안이라고 칭해졌던 경우도 보인다. 예를 들어 회력 646년 (1248년경) 그루지야 지방에서 다비드 5세가 주조한 은화 (dirham)에 Gūyūg Qā’ān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보고된 바 있다. 또한 동시대의 라틴어 자료에서도 귀위크는 chaam이라고 표기되었는데, 이 역시 카안을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
1236년부터 몽골의 서방 원정에 참여하고, 킵차크 한국의 바투와 갈등하다 1240년 오고타이 칸의 명령으로 회군했다. 1241년 아버지 오고타이 카안의 급서 이후 모후 퇴레게네 카툰의 책략으로, 후계자로 내정된 시레문, 잠재적 후보군 몽케를 제치고 1246년 8월 24일 몽골의 대칸이 되었다. 그해 10월 친정하였고, 자신을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바투와 갈등했다. 1248년 4월 바투를 정벌하러 가던 길에 비쉬발리크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아버지 오고타이 카안은 생전에 카안이라 칭했지만, 그는 카안의 칭호가 아버지 오고타이만의 칭호라고 생각하여 카안이라 하지 않고 스스로 칸 칭호만을 자칭했다.
오고타이 칸의 전사 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몽골군 군사령관들이 모여서 전쟁과 황제 선출에 관해서 회의를 하는 군사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의견 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 칸의 제자 귀위크 칸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246년 오고타이 칸의 아들 귀위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3년 만에 원정길에서 전사하고, 다시 군사 회의인 쿠릴타이가 계속되었다.
아버지 오고타이 카안은 생전에 카안이라 칭했지만, 그는 카안의 칭호가 아버지 오고타이만의 칭호라고 생각하여 카안이라 하지 않고 스스로 칸 칭호만을 자칭했다.
그의 치세에 대해 청나라의 필원의 속자지통감, 위원의 원사신편에는 그의 치세에 가뭄이 심했고, 풀도 마르고, 말과 소가 죽고, 사람들도 죽고 황폐해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 몽케 칸 전쟁
이처럼 칸위의 공백기가 계속된 것은 오고타이 칸 일가와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군대는 내전을 치렀고 여기서 툴루이 측이 승리하면서,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가 제4대 칸이 되었다.
그 후 몽골 제국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칸위는 툴루이 자손에 의해 독점되었다.
몽케는 이미 서정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고 전장에서도 공적을 쌓았다.
몽케는 1252년 훌라구로 하여금 아바스 왕조를 멸하게 하고 이라크 · 이란 방면을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1257년 남송 정벌을 노렸으나 1259년에 죽었다.
몽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훌라구의 제3차 서방 원정이 전면 중단되었다. 그의 동생 쿠빌라이 칸과 아리크 부케 사이의 대칸 지위를 놓고 갈등이 발생, 이후 몽골 제국은 국가의 분열 로 이어졌다. 몽케의 아들들은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1259년 조지아의 왕 데이비드 6세는 몽케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몽고에 종주권을 거부했다가, 킵차크 한국에서 보낸 몽골군에 패해 쿠타이시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그는 사실상 별도의 통치자로 조지아 서부의 이메레티를 통치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자, 훌라구는 귀환하지 않고 중앙아시아에 정착, 일 칸국을 세웠다.
몽케칸의 아들들은 아리크 부카를 지지하였다. 일찍 죽은 장남 반독을 제외하고는 몽케의 아들들은 나이가 어려 대칸 선출에 입후보 할 수 없었으며, 이후 아리크부카를 지지한다.
아들 아수타이는 쿠빌라이 칸의 견제를 받아 몽골 고원에서 추방됐다.
몽케 칸의 옥새를 가지고 있던 아들 우룽타시는 아리크 부카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할 때까지도 아리크 부카 곁을 지켰다.
아리크 부케의 패배 후에도, 몽케의 자손들은 쿠빌라이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쿠빌라이와 카이두와의 전쟁 중 진중반란인 시리기의 난을 일으켰고, 몽케계 왕손들은 카이두의 세력에 가담하기도 했다.

- 쿠빌라이 칸
1260년 몽케 칸의 동생인 쿠빌라이 칸이 뒤를 이었다.
그는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대도 (현재의 베이징)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였으며, 1268년부터 대대적인 남송 정벌을 시작했고, 1279년 애산전투에서 비로소 남송을 정벌하여 역사상 최초로 중국 전체를 정복하는 이민족 국가가 되었다.
한편 고려를 부마국 (駙馬國)으로 삼았으며, 1274년과 1281년에는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원정에 나섰고, 그 밖에 1288년 대월 원정, 1292년 참파 원정 등 수많은 정복 전쟁을 감행하였다.
만년의 쿠빌라이는 폭음과 폭식으로 인한 소화불량과 위장질환, 통풍,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혈전을 앓았다.
아리크 부케와 그의 잔당이던 두아 등 한국의 리더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1294년 2월 18일 대도 황궁 자단전 (紫檀殿)에서 79세를 일기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 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과 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에 뛰어났다.
시신은 1294년 2월 20일 발인, 영여는 대도를 떠나 현재의 몽골 켄티 주의 부르칸칼둔에 매장되었다.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 (起輦谷)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5월 10일 손자 테무르가 상도에서 즉위,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아 등 서북의 카안들의 반란은 계속되고, 제국의 북방은 쿠빌라이 사후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서북의 칸국들은 1303년 손자 테무르와 최종 협상, 형식적인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몽골식 존호는 세첸 칸, 설선황제로 몽골어로 현명, 예지 (睿智)를 뜻한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 (呼必賚)라 불렀다.
청나라 때 건륭 말년에 건륭제의 명으로, 사서에서 그의 명칭을 홀필렬에서 호필내로 개정되도록 했다. 이는 청나라 멸망 후 회복되었다.

- 제국의 내분과 대원
몽케 칸이 전쟁터에서 죽자,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 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는, 그의 군인과 오고타이계 제왕의 지지를 얻어 황제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심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상도에서 제5대 카안에 올랐다.
그 후 아리크부카의 군사 반란을 진압하고 1271년 국호를 대원 (大元, 몽: Dai Ön)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 칸에게 불만을 품은 카이두의 군대는 오고타이 카안의 후계자인 카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 칸과 군사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은 카이두의 군대편에 서고, 일 칸국은 쿠빌라이 칸의 군대 측에 가담함으로써 전세계를 지배하던 대 몽골 제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게된다.
특히 카이두가 사망 (1301년)하고 차파르의 투항과 귀순 (1308년)으로 오고타이 칸국이 원나라 안으로 이동한 14세기 초가 되면, 몽골제국은 4개의 대형 울루스가 정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유라시아 동부의 원나라,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킵차크 칸국, 그리고 서아시아의 일 칸국이었다.
그러나 이들 4개 울루스를 제외한 다른 울루스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4개 울루스 내부에는 여전히 여러 개의 소형 울루스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 팍스 몽골리카
대형 울루스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칸’을 추대했고, 카간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그를 추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울루스들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연대성’이 존재했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카간은 여전히 한 사람에 불과했고 여러 칸국의 칸들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카간이 즉위하면 그는 제국의 여러 울루스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렸고, 칸국의 칸들도 즉위하면 카간에게 사신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카간은 중국에서 거두어지는 재정수입의 일부를 여전히 칸들에게 보내주었고, 칸들 역시 각 칸국에서 거두어지는 수입의 일부를 카간에게 보냈다.
이러한 느슨한 칸국들의 연맹으로서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상당 부분 보존은 칸국들 사이에 활발하고 빈번한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했고, 그리하여 ‘팍스 몽골리카 (Pax Mongolica)’를 탄생시켰다.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인간과 물자의 광역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기반은 단연 ‘역참 (驛站)’ 제도였다. 오늘날 역 (驛)을 뜻하는 중국어 단어 ‘참 (站)’의 기원이 된 몽골어 ‘잠 (jam)’은 본래 초원을 지나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숙소 시설을 지칭했는데, 이것이 제국의 교통 네트워크로 채택되어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때부터였다. 그는 카라코룸을 수도로 정하고 서쪽의 차가타이 칸국 ㆍ 킵차크 칸국과 연락을 하기 위해 역참제를 실시했다. 또한 몽골 초원과 북중국 사이에는 ‘나린 (narin; 秘道)’, ‘모린 (morin; 馬道)’, ‘테르겐 (tergen; 車道)’이라는 세 역로를 설치하였다. 이후 제국의 영역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역참망도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부분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발전하여, 고려나 러시아와 같은 속국에도 역참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쿠빌라이 칸의 시대가 되면 원나라 내부에만 1,400여 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이들 역참을 관리하는 참호 (站戶) 또한 35~70만 호 정도가 배정되고 있었다. 참호에 배정된 이들은 마필 ㆍ 선박 ㆍ 수레 등의 교통수단과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를 책임졌으며, 식량과 사료를 항시 준비해두어야만 했다. 또한 역참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규정이 있어서, 역참 사용자는 신분을 증명하는 ‘패자 (牌子; paiza)’와 ‘포마차찰 (鋪馬差札; belge)’이라는 문건을 소지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일반 사무와는 별도로 군사적인 긴급 사무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급체포 (急遞鋪; paykan)’라는 제도를 마련해두기도 했다. 당시 몽골인들이 운영했던 이러한 역참 제도에 대해서는 유명한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에서 경탄어린 어조로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
몽골 제국 시대에 마련된 이와 같은 역참 네트워크는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내륙 교통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이 격화된 1280년대 말부터 10여 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원활하게 운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역참 네트워크를 따라 칸국 간의 외교가 이루어지면서 사신의 왕래 이외에 군인 ㆍ 종교인 ㆍ 학자 ㆍ 기술자 등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원나라에서 일 칸국으로 파견되어 라시드 앗 딘의 ‘집사’의 편찬을 도왔던 볼라드 칭상 (Bolad Chingsang)이나, 일 칸국에서 원나라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 휘하에서 중용되었던 자말 앗 딘 (Jamal al-Dìn)ㆍ이사 켈레메치 (Isa Kelemechi) 등은 그러한 칸국 간 다양한 교류의 구체적인 사례들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 제국 지배층들의 재정관리 파트너가 되어 그들의 자본을 운영하던 ‘오르톡 (ortoq; 斡脫)’ 상인들의 존재 또한 ‘팍스 몽골리카’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르톡 상인들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원거리 무역을 수행했는데,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에게 자본을 제공한 제국의 지배층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 방면에서는 고리대업에 종사하여 고액의 이자를 요구하는 ‘알탈전 (斡脫錢)’을 운용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다른 한편으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차원의 경제적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은본위 제도를 시행하고 각 지역 간의 교환 단위를 통일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은괴 2kg은 중국에서는 ‘정(錠)’, 중앙아시아에서는 ‘야스툭 (yastuq)’, 서남아시아에서는 ‘발리시 (balish)’, 몽골 초원에서는 ‘쉬케 (süke)’ 등으로 지칭되면서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경제 단위로서 통용되었다. 은 4g의 ‘전 (錢)과 ’40kg의 ‘량 (兩)’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유라시아 대륙 간 교류의 활성화라는 관점에서의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 제국 시기 동안 여러 영역에서 그 양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몰락
몽골 왕공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고있던 불교 교단을 모체로 할 것을 상징하 백련교도들이 조직한 홍건군의 수령 중 한 명인 주원장은 다른 반란세력을 제압한 뒤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그는 북상하여 대도와 상도를 장악하고 몽골 세력을 장성 이북으로 몰아냈다. 토곤테무르 칸은 응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고, 고려 여인 기황후가 낳은 아들 아유시리다르가 카안으로 즉위하여 근거지를 카라코룸으로 옮겼다. 울루스들의 연합체라는 구성적 원리인 ‘울루스 체제’는 이때 최종적으로 붕괴했다.
○ 사회 제도
몽골 제국은 흉노 이래의 몽골 제국 유목 국가의 전통을 따라 지배하던 유목민을 병정일치의 사회 제도로 편성하였다. 몽골에 있어 유목집단의 기본 단위는 천호라고도 불린 천명 부대라고 할 수 있는데, 10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유목집단을 다스리는 장군이나 부족장을 그 수장, 즉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호 가운데 1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백호, 백호 안에는 1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십호가 설치되어, 각각의 장에는 그 소속 천호장의 근친 가운데 유력한 자가 지명되어 십호 이상의 유목 전사가 몽골 제국의 지배층이었던 유목 귀족 (노얀)을 형성하였다. 천호장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는 다수의 천호를 거느린 만호장이 되어, 전시에는 군사령관직을 지냈다.
칭기즈 칸의 씨족인 보르지긴은 황금씨족 (알탄 우룩)이라 불리며, 영지 백성 (우르스)으로 나뉜 천호ㆍ백호ㆍ십호 집단의 위에 상급 영주 계급으로써 군림했고, 몽골 황제 즉 대칸은 크고 작은 우르스의 가장 큰 부분을 가진 맹주였다. 대칸이나 왕족들의 막영은 오르도라 하여, 유력한 후비마다 오르도를 갖고 있었다. 각각의 오르도에는 게린 코우 (게르 백성)라 불리는 영민이 있었는데 그 관리는 오르도의 수장인 황후가 관리하였다.

○ 행정 제도
대칸의 궁정에는 케식이라는 측근 관료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칸의 친위대를 맡는 동시에 케식텐이라 불리는 가정기관을 형성하였다. 케식은 코르치 (화살통지기), 우르두치 (큰칼잡이), 시바우치 (매부리), 비치크치 (서기), 바르가치 (문지기), 바울치 (요리사), 다라치 (술 담당), 우라치 (수레몰이), 모리치 (말치기), 스쿨치 (옷 담당), 테메치 (낙타치기), 코니치 (양치기) 등 다양한 직제로 나뉘어 노얀 (귀족)의 자녀와 대칸에게 개인적으로 기용된 자들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가정제도는 다른 주치 가문이나 툴루이 가문에도 존재하였으며, 이들 직종을 맡았던 케식텐들은 각 왕가의 당주격인 칸을 가까이서 섬기며 우르스의 여러 일들을 맡았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 연합 국가였지만 중앙 정부와 점령지 통치 기관은 대칸 직할지배 아래 두는 것으로 이들은 케식 출신에 의해 형성된. 중앙에서는 케식 내의 몽골 귀족이 임명한 쟈르구치 (단사관)이 놓여 행정 실무와 소송을 담당했다. 그 정점에 서는 것이 대단사관 (예케ㆍ쟈루그치)으로 최초의 대단사관은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의 양자가 되었던 시기 쿠툭이 맡았다. 지방에서는 대부분이 몽골인으로 임명되는 다루가치 (감독관)이 도시마다 놓여 점령지 통치를 관장했다.
그리고 실무에서 쟈르구치나 다루가치를 도와 말단 문서 및 재무 행정을 맡아보는 중요한 직책이 비치크치 (서기)였다. 비치크치는 현지 점령지의 언어에 통달한 자로 한족이나 서하, 거란, 여진, 고려 등은 한인, 위구르인, 무슬림 (이슬람교도) 등의 색목인 출신자가 다수 참가하였다.
대칸을 섬기는 비치크치들은 케식의 일원으로서 군주의 측근에서 피지배자에게 내리는 명령인 칙지 (쟐리그)를 기록하고 번역하여 문서로 발급하였다. 중앙에서 나온 명령은 쟈무치라 불리는 역참제도에 따라 하루에 100km 이상의 속도로 제국의 간선로를 따라 신속하게 제국 구석구석에 미칠 수 있었다.
이어 몽골 제국은 대칸뿐 아니라 황족과 귀족, 황후의 오르도에도 케식에 준하는 조직이 있어서 그 장교와 영민, 출입하는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그들의 소궁정에도 대칸과 같은 행정기관이 생겨나고, 우게 (말)라 불리는 명령을 내릴 권력을 지녔다. 14세기 초까지 왕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분할된 정주지대의 도시나 농촌에 자신의 궁정에서 다루가치와 징세관을 보내 그 지방의 행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 군사 제도
몽골 제국의 군대는 세계사에서 최초로 군인들 간의 계급과 체계적인 군사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세계 대전 이후에서나 볼 법한, 오늘날의 대령 · 소령 · 중령 등과 같은 체계적인 계급을 갖춘 제도였다. 중세 시대까지 동서를 불문하고 병사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약탈하기 위해 모인 존재였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그런 군 편제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강점은 심리 전술에 있었다. 중세 시대까지 세계의 군대는 백병전과 같은 즉발적인 전투를 하는 정도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심리 전술을 덧붙였다.
몽골 제국의 군대는 십진법 단위로 편성된 만호 (토우만)ㆍ천호 (민한)ㆍ백호 (쟈간)ㆍ십호 (아르반)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천호는 유목민 군의 계급이기도 했는데, 일상에서 각 군은 장의 장막 (게르)을 중심으로 휘하 군인 게르가 모여서 둥근 진을 짠 ‘쿠리엔’이라는 형태로 유목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함께 유목 생활을 하고 때로는 집단으로 사냥 시합을 하여 단결과 규율을 강화하였다.
원정 (정복 전쟁)이 결정되면 천호 단위로 일정한 징집 머릿수가 배정되고, 각 병사는 본인 부담으로 말과 무기, 식량, 군수 물자 및 일용품 일체를 자비로 준비했다. 군단은 엄격한 상하 관계에 따라 병사는 소속 십호장에게, 십호장은 소속 백호장에게, 백호장은 소속 천호장에게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었고, 천호장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칸이나 왕족, 만호의 지배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군율 위반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했고, 가죽으로 싸인 채 말이 그 위에서 죄인이 죽을 때까지 뛰어 다니게 한다거나 산 채로 가마솥에 삶기기도 했다. 한편, 반역한 여러 무장이 참수되는 사례도 있는 등 일률적인 처형법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렇듯 몽골군은 기본적으로 유목민으로서 유목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고, 방목에 적합하지 않은 남쪽의 다습한 지대나 서아시아의 사막, 수상 전투에서는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러시아나 아나톨리아,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 킵차크 초원, 중국 등 피지배 정착민들을 적절하게 징모하는 비율이 그만큼 늘어났다. 이들 피지배 민족의 군대는 원나라의 경우는 세습 농지와 면세 특권을 받은 군호에 속한 자들로 징집됐다. 이는 천호제를 정착민에게 맞춘 것으로, 군호는 백호소 및 천호소로 불리는 집단 단위로 만들어져 한 지방에 존재하는 천호소는 만호부에 총괄되었다. 병사의 군역은 군호 몇 가구마다 한 명이 배정돼 병사를 내지 않은 호에서 아우루크(후방대)가 되어 그 무기와 식량을 충당했다.
- 편성
원군은 우익 (바르운 갈)ㆍ중군 (코르)ㆍ좌익 (쥬운 갈)의 3군단으로 나뉘어 중군 가운데서도 각각의 우익과 좌익이 존재했다. 이는 몽골의 평소 유목 형태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고 중앙의 칸이 남쪽을 향한 상태에서 서부의 유목집단을 우익, 동부의 유목집단을 좌익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의 군단은 아르긴치 (선봉대), 코르 (중군), 아우루크 (후방 보급대)의 세 부대로 나뉘었다.
선봉대는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 중심으로 편성되며 전선에서 조우한 적군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다. 중군은 선봉대가 전력을 무력화한 뒤 전투 지역에 들어가 거점의 제압과 잔존 세력의 소탕, 그리고 전리품 약탈을 맡았다. 전군의 끝에는 후방대가 가축 방목을 하면서 천천히 뒤를 이어 전선을 뒤에서 밀었다. 후방대는 사병들의 가족 등 비전투원을 거느리고 정복이 진행되면 제압이 완료된 지역 후방 거점에 대기하고 몽골 본토에 있던 때와 거의 변하지 않는 유목 생활을 보낸다. 전선의 부대는 일정한 군사 활동이 된다고 일단 후방대의 대기 후방에서 보급 받을 수 있었다. 부대 사이에는 기마의 전령이 오가고 왕족, 귀족이라도 전령을 만나면 길을 양보하도록 규정됐다.
군인들은 모두 기병대이며 속도가 빠르고 사정거리가 긴 복합궁을 주무기로 했다. 유목민은 어렸을 때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데에 익숙하여 강력한 궁기병이 되었다. 군인은 정복전쟁에서 1인당 7, 8마리의 말을 데리고 자주 갈아타는 방법으로 경이적인 행군 속도를 자랑하였으며, 경기병이라면 하루 70km를 주파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보병의 행군 속도는 하루 20km). 또 쇠약해진 말을 잡아 식량 (고기, 내장, 피), 무기 (뼈, 힘줄), 의류 (모피)로 철저히 이용하는 등 편성과 식량 조달에 오랜 시간을 할애할 걱정이 적었다.

○ 몽골 제국의 분열과 계승 제국들
사실상 몽골 제국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원나라는 강남에서 명나라를 건국하고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올라오던 주원장의 세력에 밀려 1368년 대도를 버리고 내몽골의 후룬부이르 초원으로 후퇴해서 (중국 사관 기준의 원 멸망) 북원으로나마 잔존하였으나 1388년 쿠빌라이 칸 가문의 마지막 황제 평종 토구스 테무르가 암살당하고 대칸을 이은 조리그투 칸도 몽골의 대칸 자리만 이었으며 원나라 황제라는 중국식 칭호는 포기하면서 이때부터 중국 왕조로서의 원은 사실상 끝났고, 몽골 대칸의 지위는 실질적인 권위를 많이 잃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부족 단위로 쪼개진 몽골족은 명나라의 영락제에게 토벌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외몽골의 오이라트는 에센 타이시 등이 허구한 날 북원과 그 후예 차하르부를 사막을 건너와 레이드를 뛰곤 했으나, 다얀 칸, 알탄 칸 등의 시대에 다시 부흥하면서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1634년 만주족 청태종이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겸하게 되었고 역대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대칸 자리를 겸하는 식으로 칭호는 유지하게 된다.
이후 내몽골의 차하르부는 청나라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청과 남하하는 러시아의 중간에서 두 세력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강희제, 옹정제 시기 네르친스크 조약 (만주 및 내몽골 동부)과 캬흐타 조약 (외몽골) 등으로 국경선이 정해지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세계 열강의 각축이 본격화한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하자 몽골에서는 유력자들이 회의를 열어 복드 칸을 휴브트 요스 칸 (청나라 선통제)을 잇는 대칸으로 추대하고 독립했다.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겪던 혼란을 틈타 외몽골에 침투한 러시아의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에 의해 1921년 몽골이 강제 점령되었고, 마지막 칸인 복드 칸은 1924년 죽었다. 이로서 이름뿐이라도 칭기즈 칸부터 계속 이어져온 몽골의 대칸위의 계보는 끊기게 된다. 한편 내몽골은 운게른의 사이비 교주급 통치가 비켜가고 중화민국의 일부 영토로 남아 차하르, 열하, 흥안성의 3성이 주어졌으나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 육군이 만주국을 세우면서 동몽골 (내몽골 동부) 흥안성은 만주국이 되 버리고 남몽골 (내몽골 중부 및 서부)은 몽강자치연합정부라는 또 다른 일본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이 몽강국은 “몽골판 만주국”으로 사실상 몽골을 일본이 식민지배했으며 국가 주석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꼭두각시였다. 동몽골의 몽골인은 “만주인”으로 한족 및 조선인과 같이 분류되어 2등 국민으로 차별받았다.
한편 원나라 이외의 ‘칸국’은 4칸국 이후에도 많은 국가들이 그 이름을 따와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에 난립하였으나 점차 소형화되어 다른 국가들에 병합되거나 흡수되었다. 칭기즈 칸 다음 대에 형성된 4칸국만 들자면 킵차크 칸국은 1502년 타타르족에게 멸망하였으며, 우구데이 칸국은 14세기 초 내부 분열 이후 원과 차가타이 칸국에게 그 세력을 흡수당했고,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은 14세기 중후반 소국으로 분열하였고 후에 티무르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에게 병합당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이나 무굴 제국도 방계 혈통을 들어 이들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어떻게 본다면 모계 쪽으로 후손이라 볼 수는 있지만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몽골과는 별 유사성은 없었다. 몽골 제국은 당시 여러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어서 몽골 제국의 인척이 되는 왕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므로 당시에 몽골 황실의 후손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지만 몽골 제국은 내전을 치르면서 각 지역별로 분열하게 되었고, 피 지배 민족을 동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문화적 역량도 없었기 때문에, 원이나 여타 다른 나라에서 피 지배 민족에 동화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쇠락하였다.
흔히 몽골이 쇠퇴한 것은 원과 4칸국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집중적 권력의 약화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정도 규모의 거대 제국이 일원적 통치 하에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분할 통치도 일리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종주권의 계승을 놓고 4칸국이 서로 물어뜯은 것은 몽골 제국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쿠빌라이 즉위 시의 아리크부카 (아릭 부케)와 같은 반란 세력이 나타났으며, 쿠빌라이 칸의 재위기에 쿠빌라이의 제위 계승에 반발한 우구데이 칸국의 카이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원과 4칸국이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쿠빌라이의 대에서는 이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대에서야 카이두의 영역이었던 우구데이 칸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원의 종주권을 확인하기보다는 원과 다른 칸국이 완전히 별도의 노선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선사절이 오갈 경우 동양사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종번 관계보다는 훨씬 밀착된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일 칸국의 칸들이 원나라 대칸의 정식 책봉을 받기도 하고 킵차크 칸국의 왕족 일부가 원나라의 대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후 원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혜종 토곤 테무르의 시대에 그 하락세가 정점에 달했다. 당시 원의 화폐 정책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초의 유통량이 폭증해 경제 구조가 뒤흔들렸고,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초의 남발이 가속화되면서 민중에게서 직접적인 반발을 부르게 된다.
이미 몽골인들은 지배층의 특권과 중국식 문화에 상당히 젖어 있어 정복기의 활력을 잃은 뒤였다. 게다가 유목민 출신이던 몽골인들은 정착기에 익숙하지 않은 화폐 문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빚더미에 올라서 심지어는 자기 자식들을 노예로 판 사람도 꽤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몽골 귀족들은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보물로 잘 살고 있어 빈부격차가 심했다.
결국 홍건적과 같은 반원 한족 세력이 크게 대두되는 중 주원장이 득세하였고, 원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1368년 만리장성 북쪽인 내몽골의 후룬부이르 (응창)로 도망가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대에 잔존했다. 그러나 1388년 이마저도 멸망당했으며, 이후 한동안은 아리크부카 계가 대칸을 이었으나 오이라트 계열의 에센 타이시가 즉위하면서 칭기즈 칸계 왕통은 15세기 후반 다얀 칸 시대까지 끊겼다.
한편 3개의 잔존 칸국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은 14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국가를 유지했으나 이후 분열의 시대를 맞았고, 이 사이 티무르가 득세해 두 칸국을 병합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이후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부활했으나 이전과 같은 활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킵차크 칸국은 이에 비해 장기간 존속했으나, 14세기 중반 일련의 정권 다툼과 흑사병의 발병으로 삐끗되기 시작하더니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인에게 최초의 패배를 당했다. 그 2년 후 토크타미쉬 칸이 러시아 세력을 다시 한번 억누르는 데 성공하였으나, 15세기 후반이 되면 결국 러시아의 독립을 인정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어 3개의 칸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었다. 이 세 나라는 다시 러시아와 격전을 벌여, 16세기 후반이 되면 오스만 투르크의 부용국이 된 크림 칸국을 제외한 두 개 나라는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다얀 칸이 등장해 오이라트를 몰아내고 몽골 제국의 부흥을 선언한다 (그의 왕호인 ‘다얀’도, ‘대원’을 뜻하는 것이다). 이후 16세기 중엽 알탄 칸의 시대에 베이징을 포위하는 등 (경술의 변) 한동안 몽골 제국은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오히려 대칸이 아니었던 알탄 칸의 명성과 세력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서 실질적으로 차하르부에만 미치게 되고 몽골은 6부족으로 분열되고 만다.결국 1634년에는 릭단 칸이 청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나면서, 칸의 직위를 청에게 빼앗기고 몽골은 한동안 청의 아래에 복속된다. 하지만 숭덕제가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고 칸의 직위를 받은 이후에 칭제한 것을 생각하면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대우인 셈이었다.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 후 만주-몽골 연합 제국으로서 청 제국을 선언했으며 이후 정통 동몽골 황족인 보르지긴 씨족은 청의 외척이 된다. 청나라 황제의 절반은 징기스칸 일족인 셈이다.
사실 몽골 제국이 잠시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급속도로 와해돼 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몽골 제국의 분열의 이유 중 가장 크게 꼽는 것이 바로 몽골의 상속 풍습이다. 몽골은 장자 상속제가 아닌 분할 상속제를 시행했는데 장자 상속제였다면 분배를 크게 받지 못한 자도 물론 불만이야 있겠지만 몽골은 모두 정확히 분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내부 갈등이 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15세기에 상속법을 고치기는 하였으나 풍습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몽골 제국의 부흥에 큰 지장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이 위대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급성장할 수 있지만 그 지도자 사후 급속도로 분열과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어 버린 큰 이유이다.

○ 부록 : 몽골 제국의 침입을 물리친 국가들
.베트남 쩐 왕조: 1차 침공 시에는 정송가도를 내세워 3만의 군사로 침공, 수도인 탕롱까지 점령했지만 전염병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쿠빌라이 시기인 2차 침공 시에는 참파, 운남, 광둥 세 방향으로 공격, 하지만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의 저항, 전염병과 게릴라전으로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며 패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3차 침공까지 가하지만 바익당 강에서 또 패배했다. 그런데도 포기 못한 쿠빌라이 칸이 4차 침공을 계획했는데 그만 죽어버려서 백지화되었다.
.인도네시아 싱하사리 왕국: 몽골군은 자바 섬도 침략했었는데, 당시 자바에는 싱하사리 (Singhasari) 왕국이 있었다. 침공 이유는 당시 싱하사리 왕국의 왕 크르타나가라 (Kertanagara)가 1289년에 원나라에서 보낸 사절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사신의 코를 잘라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92년에 자바로 원정을 왔더니 크르타나가라는 크디리 (Kediri) 지역 유력자의 반란으로 이미 살해당한 뒤였고, 원제국 군대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 때 크르타나가라의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라덴 위자야 (Raden Wijaya)가 접근해서 원제국 군대와 협력하여 크디리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했는데, 위자야가 현 수마트라 지역으로 원정가 있던 군대가 다시 돌아오자 바로 원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패퇴시켰다. 위자야는 훗날 인도네시아를 최초로 통합한 왕조로 여겨지는 마자파힛 제국의 시조가 된다.
.인도: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도 분열제국인 차가타이 칸국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견뎌냈다. 이 중 차가타이 칸국에 맞서 가장 격렬하게 싸운 국가는 할지 왕조이며 특히 2대 명군 알라웃딘 칼리지는 5번의 침입을 막고 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공격하는 등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중동으로 발을 뻗치던 몽골 제국을 격퇴했다. 바이바르스는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몽골군을 1277년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 사령관인 키트부가를 사살하는 성과를 거둔다. 몽골제국의 훌라구가 이집트를 정복할 총사령관으로 내정됐으나 이집트 침공 직전에 몽케 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본국으로부터 날아왔다. 훌라구는 심복이자 베테랑 장수인 키트부카에게 병력을 남겨두고 맘루크 정복을 완수하고 돌아오라고 명령하고 가버린다. 그 후에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카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훌라구는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이집트를 쓸어버릴 계획을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훌라구의 후예들은 수차례 맘루크를 공격해왔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격퇴당했다.
.헝가리 왕국: 1241년 몽골의 1차 침공 당시 헝가리군은 모히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40여 년 후, 1285년 노가이의 11만 대군이 2차 침공을 거행하였으나,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이를 대비해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목재 성채를 버리고 서유럽식 석조 성채를 도입과 동시에 중장기병의 비중을 대폭 높였다. 덕분에 불과 3만 명으로 몽골군로부터 수성을 성공한 것을 넘어 몽골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라디슬라우스 4세가 이끄는 중장기병 부대는 탈리부가의 몽골기병대와 서부 트란실바니아 언덕에서 정면대결하였고 이때 헝가리군은 중장기병의 돌격을 통하여 몽골군의 궁기병을 물리쳤다. 이 당시 몽골군의 전과는 마을 몇 개, 작은 요새 몇 개를 약탈한 것 뿐 제대로 된 공성전은 전부 실패하였고 야전에서도 벨라크, 보이스키블리스의 헝가리군에게 거듭 패퇴하였고 잔존병마저 현지 주민들에게 무너지게 된다.
.폴란드 일대의 공국들: 1241년, 1259년 두 차례 침공에서 몽골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1241년의 레그니차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도 유럽 대 몽골 이미지를 크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1287년에 있었던 3차 침공 시에는 이미 폴란드 역시 헝가리군 처럼 석조성채와 중장기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역으로 몽골군을 궤멸시켰다. 특히 와고프 (Łagów)와 스타리송치 (Stary Sącz)에서의 패전 이후 몽골군은 폴란드 침공을 포기하게 된다.
.체코 보헤미아 왕국: 올로모츠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키며 국체를 온존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오스만에게 나라가 멸망, 정복당한 것과 달리 몽골 제국의 경우 몽골군을 역으로 포위하여 궤멸 직전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조지아 : 100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지만 다비트 나린의 등장으로 1259년부터 3년 간의 항쟁 끝에 결국 몽골군을 격퇴시켰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