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 연구서 소개
묵가(墨家)의 군사사상
묵자(墨子)는 중국 고대의 위대한 인도주의자요 위대한 사상가, 과학가, 군사가였다. 그의 전쟁관은 중국 고대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다. 그는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겸애주의를 내걸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에 헌신했다. 강대국들의 군사적 도발에 대항하여 내놓은 비공(非攻)은 적극적인 무장평화론이다. 그는 정당한 무력은 반대하지 않았다. 죄없는 나라를 침략하는 불의의 전쟁은 반대하지만 극악 무도한 침략자를 주벌(誅罰)하는 정의의 전쟁은 반대하지 않는다.
묵자의 이러한 진보적 전쟁관의 기초 위에 내놓은 적극적 방어의 군사사상은 치밀하고 방대하여 당시의 실전에서 승리하지 못할 바 없이 효율적인 것이었다. 그는 방어전쟁중에 일어날 각종 유리와 불리한 요소를 깊이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 방어전략을 제정하고 효과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과학기술로 방어용 무기와 장비를 창안하고 제작하여 중국군사과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초나라가 새로이 발명한 운제(雲梯)를 가지고 송나라를 침략하려할 때 초나라의 궁중에서 모의전쟁으로 보여준 구공구거(九攻九拒)의 장면은 중국전쟁사에서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묵자』의 병서적 가치는 공격의 원리를 담은『손자병법』과 함께 중국고대군사사에 쌍벽을 이루는 빛나는 저술이기에 이 둘이 상보상생(相補相生)한다면 군사사상의 경전(經典)으로 더욱 의미를 지닐 것이다.
『손자병법』과 묵가(墨家)의 군사사상을 비교해보면 전쟁에 신중할 것과 속결전을 주장하며 변증법적 사유를 활용하고 있는 것은 둘이 상통한다. 그러나 묵가는 신무기 개발에 손자보다 더욱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묵가와 『손자병법』의 군사사상의 큰 차이는 손자가 공격적인 군사전략을 위주로 기술한데 비해 묵가는 방어성의 군사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묵가의 군사사상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의 상황에서 우리의 안보태세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_ 주제어 : 묵자, 묵가, 손자병법, 방어, 전략.
Ⅰ. 머리말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부근에서 일어난 천안함 침몰사태로 우리나라는 온통 침울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다. 정확한 침몰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4월 7일 현재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천안함 사태는 일차적으로 무엇에 의해 군함이 두 동강 났는지를 기술적으로 규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사고 원인이 북한 어뢰나 기뢰의 공격으로 밝혀진다면 그런 북한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억제하고 사태 발발시 그 공격을 무력화(無力化)시키지 못한 군의 대응에 어떤 조직적 원인이 있는지 정확히 짚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놀랄만한 사실은 세계 최고의 전자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국방과학기술은 신뢰할만한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 잠수정이 물속으로 온다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한다. 전직 해군참모총장들은 탐지 가능성이 10~50% 정도라고 한다. 북한이 작심하고 덤비면 천안함에 대한 공격 같은 것은 우리 군능력으로 사전에 탐지하고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1)
묵자는 적이 땅속 깊이 땅굴을 파고 기습해 올 경우를 상정하여 선제공격을 계획했다. 먼저 적이 어느 방향에서 얼마만한 깊이로 땅굴을 파고 들어오고 있는가를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묵자는 도공(陶工)으로 하여금 40말 들이 크기에 가운데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물장군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는 그 물장군의 입마구리 둘레를 얇은 가죽으로 밀봉한 다음 그것을 우물 속에 넣어 둔다.
귀가 밝은 사람이 이 기구의 진동을 살피면 적이 파들어 오는 땅굴의 위치를 정확히 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묵자가 발명한 앵청(罌聽)이라는 기구로 근대 해상 정찰기구인 성납(聲納)의 원리와 비슷하여 측성학(測聲學)의 선구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며 우리는 지금 2,400년 전에 살았던 묵자(墨子, 이름은 翟)를 불러내어 그와 그의 제자들이 이루어 놓은 신무기의 개발을 비롯한 묵가의 군사사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에서 봉건 제후들이 지역을 점거하고 패권을 다투면서 전쟁을 빈번히 일으켜 사회를 치열한 전란 속에 몰아 넣었던 시대였다. 이 어지러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당시 수많은 사상가들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여러 가지 주장들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도가는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창도하고, 유가는 인정(仁政)의 실시를 주장했다. 또 법가는 엄격한 형벌과 준엄한 법령으로 혼란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그 관점에 따라 다른 착안점이 있기는 했으나 모두 전쟁문제에 대해 고찰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서에는 예외 없이 군사사상이 들어 있었다.2)
유가·도가·법가와는 달리 지극히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을 내놓았으나 중국사상사에서 약 2백년간만 그 모습을 보이다 2천년 동안 지하에 묻혔던 묵가(墨家). 청말·민국초에 다시 세상에 드러난 묵가는 현재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학술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실용주의적이면서도 논리적인 묵학은 군사사상으로서도 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묵자학회에서는 2001년 7월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묵자의 군사사상을 주제로 묵학국제학술대회를 연바 있다. 필자도 참가한 이 대회에서는 5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3)
묵자는 사상가이면서도 논리학자이고 군사전문가였다. 묵자 서의 53편 가운데 ‘비성문(備城門)’편부터 ‘잡수(雜守)’편까지 11편은 그 제목부터가 성을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을 논술한 군사사상임을 알 수 있다. 묵자 서는 묵자 1인의 사상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묵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그의 제자들과 후기 묵가의 사상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의 주제 역시 ‘묵자의 군사사상’ 이 아니라 묵자를 중심으로 묵자(墨者)들의 군사사상을 고찰한 것이기에 ‘묵가(墨家)의 군사사상’으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가 개최된다. 이 국제적인 회의를 앞두고 북한이 누적된 국내적 위기를 밖으로 돌리기 위해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는 등 북한발 한반도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 중국과 일본에 부는 민족주의 바람 속에서 동북아 안보질서는 물밑에서 흔들리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포함해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까지를 생각하면 머지않아 한반도에 안보태풍이 몰아칠 수도 있다.4)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인해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의 안보태세는 나사가 풀린듯 느슨해진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묵가의 군사사상을 통해 그들의 안보의식을 재확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 상황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Ⅱ. 묵가의 전쟁관
묵가의 전쟁관은 비공(非攻)을 핵심으로 한다. 비공사상은 또 겸애(兼愛) 사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겸애는 귀천과 노소를 차별하지 않고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더불어 사랑할 것을 바란다. 남의 나라 보기를 내 나라 같이, 남의 집을 보기를 내 집 같이, 남의 몸 보기를 내 몸 같이 한다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며, 다수의 무리가 소수의 것을 강압적으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 또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귀한 사람들이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굴지 않고, 간사한 사람들은 순박한 사람들을 속이지 않게 될 것이다. 무릇 천하의 재앙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5)
겸애가 정면(正面)이라면 상공(相攻)은 반면(反面)이다. 그러므로 겸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공 해야 하는 것이다.6) 그런데 묵자의 비공은 죄가 없는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에 대한 반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정의롭지 못한 나라를 공격하는 정의의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묵자가 살았던 초기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격변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두드러진 두 가지 현상은 계급의 파괴와 제후들의 겸병 전쟁이었다. 제후들은 천자를 참월하고 경대부들은 제후를 참월하였다. 또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벌(攻伐)이 극성하여 이른바 약육 강식의 혼란의 시대였다. 춘추에 실린 242년간에 시해당한 임금이 36명, 망한 나라가 52국, 제후로서 그 사직을 보전치 못하고 도망간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전국시대에 와서는 겸병전쟁이 더욱 빈번하여 전국 중기에 이르러서는 춘추시기 147국의 제후국이 줄어들어 만승(萬乘)의 나라가 7, 천승의 나라가 5개가 되었다. 열국의 겸병과 군웅의 제패과정 중에 열강 사이에 끼어 있던 정(鄭), 노(魯), 위(衛), 채(蔡)와 같은 약소국들은 대국의 약육강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약소국의 민중들은 전쟁이 그치고 편안하게 생산에 종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층 민중들의 권익을 대표하겠다고 나선 묵자는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의 입장에서 비공을 주장한 것이다.7)
묵자는 대국이 소국을 침략하는 것은 세상에 큰 해를 가져온다고 본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침략자와 도둑은 같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노력하지 않고 결실을 얻으려 하는 것이며, 자기의 것이 아닌데도 뺏으려 하는 의롭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묵자의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은 의(義), 즉 인도적 이유와 이(利), 즉 경제적 이유의 관점으로부터 성립한다.8) 비공상편에는 주로 인도적 이유에 의한 반전론이 전개되고 있다.
침략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는 당시의 풍조에 대하여 묵자는 간명하면서도 절묘한 비유를 구사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예를 들어 남의 밭에 들어가 복숭아나 오얏 등을 훔쳤다면 남을 해쳤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 만약 개나 닭이나 돼지를 훔쳤다면 그 의롭지 못함이 앞의 예보다 더하다. 그것은 남에게 더욱 많은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남에게 끼친 해가 많을수록 불인(不仁)의 죄도 더 큰 것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일은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을 죽였다면 불의라고 하여 죽일 죄에 처할 것인데 천 명, 만 명의 목숨을 죽이는 침략 전쟁은 의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이상은 인도적 견지에서 침략전쟁을 긍정하는 이론에 반박하는 묵자의 논지이다.
묵자는 침략전쟁은 반대하지만 정의의 전쟁은 찬양하고 있다.
그는 우(禹)임금이 유묘(有苗)를 정복하고 탕왕이 걸(桀)을, 무왕이 주(紂)를 정벌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한 것은 이른바 공(攻)이 아니라 주(誅)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9) 묵자가 말하는 주(誅)는 의로움으로써 불의를 주벌하는 것이기에 불의로써 의로운 나라를 침략하는 공(攻)과는 논리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10)
다음으로 묵자는 실리적·경제적 관점에서 침략전쟁을 반대한다.
그가 침략전쟁의 불리함을 주장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침략전쟁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전쟁에 패하는 나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전쟁에 이긴다 하더라도 전쟁기간의 노동력의 상실과 물자의 낭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살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다. 또 대국이 전쟁에 승리하여 광대한 토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인력이 부족하여 땅을 개간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침략전쟁은 천하에 큰 피해를 줄 뿐이다.11)
둘째, 침략자들은 침략을 통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매미를 잡은 사마귀가 그 뒤에서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진(晉)나라의 지백(智伯)은 그 세력이 육군(六軍)의 으뜸이었고, 겸병전쟁을 일삼았는데 마침내 삼가(三家)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은 침략전쟁이 불리한 것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12)
셋째, 침략전쟁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天)과 귀신에게도 불리하다. 천이 낳은 백성을 빼앗아서 천의 나라를 침략함은 천민(天民)을 죽이고 신위(神位)를 부수고 사직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천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 또 천이 낳은 백성을 죽이는 것은 귀신의 제주(祭主)를 죽이는 것이니 선왕(先王)의 유업을 폐하는 것으로 귀신을 이롭게 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고갈시키는 침략전쟁이 사람에게 불리함은 앞에서 기술 한 바와 같다.
묵자는 침략전쟁을 반대한다. 그러나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묵자의 전쟁관은 실제상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비공이고, 다른 하나는 구수(救守)이다. 비공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고, 구수(救守)는 소국을 지키는 것이다. 즉 성을 지키기를 견고하게 하고 불의를 강하게 주벌하는 것이다. 비공과 구수의 기초위에 묵자는 방어전쟁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수립했다.
Ⅲ. 묵가의 적극적 방어 전략과 전술
적극방어는 묵가 군사사상의 핵심이다.13) 대국이 소국을 침략하고 강국이 약국을 능멸하는 형세에서 묵자는 소국과 약국을 지키는 전략적 입장에서 침략전쟁의 발동을 적극 방어할 것을 주장했다. 적군의 침략을 막아 소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위하기 위한 것이다. 묵자의 ‘선수어(善守御)’와 ‘지초공송(止楚攻宋)’이라는 말이 성공적인 예를 말해준다.14) 그러므로 역사상 ‘묵적지수(墨翟之守)’15)라는 말이 명예롭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묵자가 내놓은 적극적 방어의 군사사상이 당시에 상당히 성공적이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다음에 이러한 군사사상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적극방어의 전제 – 유비무환
묵자는 강한 폭력에 대하여 두려워 말고 약소국을 구원해야 한다고 제창한다. 그리고 침략 당하는 나라는 전쟁을 피하거나 앉아서 구원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군의 각종 준비에 방어할 작전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은 역대 병가(兵家)가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침략에 대비하는 것과 방어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논한 것은 묵자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묵자의 군사체계 중에 가장 빛나는 사상으로 보인다.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곡식이 없다면 흉년이나 기근을 견뎌낼 수 없다. 그리고 창고에 준비되어 있는 무기가 없다면 비록 의(義)로운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불의를 정벌할 수가 없다. 또 성곽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다. 마음속의 걱정스러운 일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갑자기 일어나는 일에 대처할 수 없다.”16)
그러므로 묵자는 “대비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식량은 국가의 보배이고, 병력은 국가의 발톱이며, 성곽은 스스로 지키는 수단이다. 이 세 가지는 국가가 갖추어야 할 것이다.”고 한 것이다.17)
여기서 묵자는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양식과 무기와 성곽, 이 세 요소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이 3대 요소를 중시하는 것은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생사존망에 관계되는 기본방침이기 때문이다. 묵자의 이러한 사상은 역사상 수많은 국가가 국방을 소홀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전쟁에 대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묵자는 당시 작전의 실제상황에 근거하여 전쟁에 대비하는데 불리한 7가지 환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18)
① 성곽이나 구지(溝池)를 지키지도 못하면서 궁실을 크게 세우는 것.
② 적이 국경에 이르러도 사방의 이웃 나라에서 구해주지 않는 것.
③ 먼저 백성들의 힘을 쓸 데 없는 일에 다 써버리고 능력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일, 즉 백성들의 힘은 쓸 데 없이 다 써버리고 재물은 손님들 대접하느라고 다 비워버리는 것.
④ 벼슬하는 사람들은 녹(祿)을 유지하려고만 들고, 노는 사람들은 교제로 붕당을 기르기만 하며, 임금은 법을 닦아 신하를 함부로 쳐도 신하들은 겁이 나서 감히 거스리지 않는 것.
⑤ 임금이 스스로 성인답고 지혜롭다 여기고는 일에 대하여 물어보는 일이 없고 스스로 안락하고 강하다고 여기고는 방비를 하지 않으며,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침략할 계획만을 짜고 있는데도 경계할 줄 모르는 것.
⑥ 신임하는 사람들은 충성스럽지 않고 충성스런 사람들은 신임하지 않는 것.
⑦ 생산하는 식량들은 국민이 먹기에 부족하고, 대신들은 임금 섬기기에 부족한 사람들이며, 상을 내려서 기쁘게 할 수 없고, 처벌해서도 위압을 할 수 없는 것.
묵자는 “나라에 7가지 환란이 있다면 반드시 그 나라는 멸망할 것이며, 7가지 환란을 가지고 성을 지켜보았자 적이 쳐들어오면 나라는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19) 묵자가 볼 때 한 나라의 안전과 방위는 한 때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거국적인 기본 국책 문제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특히 소국의 임금은 반드시 ‘유비무환’의 전략을 수립해야한다. 평화 시기에 양식, 무기, 성곽, 방어계획, 내정 및 외교 등의 방면에서 적에 대항할 자위의 대비가 필요하다.20)
그러면 강대한 적군에 대비하여 성을 방어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은 어떤 것인가?
묵자는 전방위적이고 입체적인 방어의 전략을 내놓았다. 묵자 의 비성문(備城門)편에서는 성을 지킬 수 있는
14가지 필요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성은 두텁고 높아야 한다.
② 해자나 못은 깊고도 넓어야 한다.
③ 성문의 망루가 견고하게 수리되어 있어야 한다.
④ 방어할 기구들이 잘 수리되어 있어야 한다.
⑤ 연료와 식량은 3개월분 이상 준비되어야 한다.
⑥ 성을 방어할 인원을 많이 선발하여 훈련시켜야 한다.
⑦ 관리와 백성들이 화합해야 한다.
⑧ 군신이 일치해야 하는데 특히 대신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⑨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야 하고 백성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한다.
⑩ 부모의 분묘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⑪ 산림과 들과 못에서 나는 산물이 풍부해야 한다.
⑫ 지형이 공격하기에는 어렵고 지키기에는 쉽게 되어야 한다.
⑬ 적에게 깊은 원한이 있거나 임금에게 큰 공이 있는 용사가 있으면 좋다.
⑭ 시상(施賞)이 분명하여 신용이 있고 형벌이 엄하여 두려워하기에 족하면 좋다.21)
묵자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등에 따라 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논술했다. 그리고는 적의 각종 침략방법에 대처하는 전략과 전술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중국 고대 병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저작이다. 손자의 병법에도 이렇게 상세하고 완비된 방어사상은 없다.22)
묵가의 방어전술은 적극적이다. 먼저 방어 중에 부딪히게 될 곤란한 점을 생각하여 사전에 충분히 준비한다. 『묵자』성수(城守) 11편 가운데 7편은 ‘비(備)’를 첫 글자로 하고 있다. 이것은 성을 방어하는 전법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방어전에서 충분한 전법이나 전술의 준비가 되어 있으면 전투의 주도권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는 무기와 인력과 용감한 정신의 대결이다. 그리고 전술, 전법과 지혜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방어전을 위해 창안한 전술, 전법, 그리고 방어를 위해 제조하고 준비한 무기, 기계는 방어전술의 범주에 속한다. 적극적인 방어전술로 효율적으로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
『묵자』‘성수’ 각 편에는 방어전술과 관련된 것이 많다. ‘비고림(備高臨)’, ‘비제(備梯)’, ‘비수(備水)’, ‘비돌(備突)’, ‘비혈(備穴)’, ‘비아부(備蛾傅)’, 각 편을 통해 묵가가 성을 지키고 적을 격퇴하는 전술을 보기로 하자.
① 비고림 : 높은 고지를 만들어 공격하는 적을 물리치는 법.
묵자의 제자인 금활리가 묻기를 “적군이 흙을 높이 쌓아 올리고 우리 성을 내려다 보면서 나무와 흙을 올려 발판을 만들어 성에 바짝 갖다 붙이고서 쇠뇌를 발사하여 공격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묵자가 말하기를 “흙을 쌓아 성을 공격하는 것은 졸렬한 전법이다. 그것으로는 병사들을 피로하게 만들기에는 족하지만 성을 해치기에는 부족하다. 수비하는 쪽에서도 성 위에다 높은 대(臺)를 쌓고 적의 발판을 내려다 보고 공격한다. 여기서 강한 쇠뇌를 쏘고 여러 기계의 힘을 빌리고 특수한 무기로 공격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② 비제 : 사다리로 공격하는 적을 막는 법.
적이 구름사다리를 타고 성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는 금활리의 질문에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름사다리는 무거운 기구이기에 그것을 이동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돌격하는 수레인 충거(衝車)를 다루는 사람 10명과 칼을 잡는 사람 5명이 한패가 되는데 모두 힘이 센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깜박거리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고 북으로 명령을 발하여 양편에서 끼고 활을 쏘는데 몇 겹으로 활을 쏘고, 여러 가지 기계로 공격을 돕는다. 성 위에서는 화살과 돌과 모래와 재를 비처럼 퍼부으며, 섶을 태우는 불과 끓는 물을 퍼부어서 그것을 돕는다. 조용히 지나가다가도 상황에 따라 급하게 움직이되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구름사다리로 하는 공격은 물리칠 수 있다.”
③ 비수 : 물로 공격하는 적을 물리치는 법.
먼저 성안에 배수구를 판다. 그리고는 정규병 3백 명을 뽑아 20대의 배를 만들고 돌격대를 조직한다. 두 척의 배를 하나로 연결시켜 이것을 일림(一臨)이라고 하고 각각의 임(臨)에는 30명의 힘세고 우수한 병사를 배치한다. 이들이 쇠뇌, 긴 창, 호미 등을 가지고 투구와 갑옷을 입고 성 위에 화살 발사대의 엄호 아래 성밖의 제방을 터뜨리면 적의 수공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④ 비돌 : 갑자기 습격하는 전법.
적이 예상하지 못할 때 돌연 습격한다. 성에는 100보마다 하나씩 비밀의 문인 돌문(突門)을 만든다. 돌문에는 각각 질그릇 굽는 가마와 같은 아궁이를 만들고 그 옆에 풀무를 놓아둔다. 아궁이에는 미리 땔나무와 쑥을 채워둔다. 적군이 처들어 오면 바퀴를 돌려 돌문을 막고, 풀무를 돌려 아궁이의 불과 연기를 뿜게 함으로써 적을 물리친다.
⑤ 비혈 : 땅굴을 파고 공격하는 적을 막는 방법.
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쳐들어와 불을 질러 성을 파괴하는 적군을 격퇴하는 방법을 묻는 금활리의 물음에 묵자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말한다. 성 안에 다섯 걸음마다 한 개의 우물을 파서 성벽 바로 밑에 까지 닿도록 한다. 그리고는 큰 돌을 얇고 부드러운 가죽 끈으로 싼 다음 우물에 넣어 둔다. 귀가 밝은 사람이 독에 들어가 듣게 하면 적이 파고 들어오는 굴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굴의 방향에 맞춰 이쪽에서 맞굴을 파나간다. 굴이 서로 만날 때가 되면 질그릇 굽는 가마처럼 만든 아궁이에 쑥을 넣고 불을 붙여 이것을 풀무질하여 적을 연기로 그슬린다.23)
⑥ 비아부 :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격퇴하는 방법.
금활리가 이렇게 묻는다. 적군들이 “성에 달라붙어 뒤늦게 오르는 자는 먼저 목을 치는 것으로 법도를 삼고서 성 밑을 파서 터전을 삼고 땅 밑을 파서 방을 만들어 놓고는 전진하며 쉴 새 없이 기어오르고 뒤에서 활을 쏘면서 엄호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미떼처럼 적군이 성벽을 기어오르며 공격하는 군대는 그 장수가 성이 났기 때문이다. 방어하는 편에서는 높은 위치를 이용하여 이들을 공격한다. 그들을 끌어들이고는 불과 끓는 물을 끼얹고 포장에 불을 붙이어 적군을 덮어씌우며 모래와 돌을 빗발처럼 내리친다. 그렇게 하면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는 공격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성벽 가까이 매달아 놓고 그 속에 사람이 타고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을 창으로 찌를 수 있게 만든 장치인 현비(縣陴)와 루(纍)라는 장비로 적을 격퇴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2. 용병술과 전민개병(全民皆兵)
방어전쟁의 비상시에 지도자는 관용의 마음으로 지혜롭게 용병술을 발휘해야 한다.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들을 단합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묵자는 강조한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헐뜯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도 있다.
또 품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사람도 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모략을 잘 하는 사람, 용감한 사람, 손재주가 있는 사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성안에 오래 산 주민이 있는가하면 외래인도 있다. 마음이 좋아 남을 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과 싸우기를 잘하는 사람도 있다.
성을 지키는 지도자는 그들이 왜 그러한 품성과 특성을 갖게 되었는 가를 반드시 살펴보고 적당한 자리에 임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 병사로서 적합함은 말할 것도 없고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뚫어지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비제(備梯)’에 있어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데 적합하며, 귀가 특별히 밝은 사람은 ‘비혈(備穴)’에 있어서 땅굴의 위치를 탐지하는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평소에 남을 헐뜯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나 품행이 방정 하지 않은 사람, 싸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전투에 참가하게 되면 반성하고 개선하여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백성들의 출신, 경력, 재능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다 같은 사람으로 보아 병사를 선발하고 직무를 부여하여 각자의 소질을 발휘하게 하면 그들은 단결된 정신으로 전투에 헌신하게 된다는 것이다.24)
패권주의는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이용하여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업신여기며, 강한 힘에 의지하여 약한 자를 모욕한다. 약소국은 패권을 반대하지만 물질적인 역량이 부족하다. 따라서 일치단결하여 인력으로 물력의 부족을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묵자는 강조한다.
묵자는 온 백성들이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것은 정의의 전쟁을 유지하기 위한 기초위에 세워졌다. 정의의 전쟁은 백성들의 이익을 대표하고 사회의 발전을 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전쟁은 백성들의 이익에 위배되고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것이기에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은 ‘전민개병(全民皆兵)’의 정치적인 기초를 갖출 수 없다. 묵자는 당시의 소생산자와 백성들의 이익을 대표하기에 정의의 방어전쟁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전민개병’의 방침을 내놓고 실행했던 것이다.
“성 안의 마을들을 모두 8부(八部)로 나누고, 부 마다 한 관리를 둔다. 관리는 각각 4명을 거느리고 길거리와 마을 가운데를 다니며 순찰한다. 마을을 수비하는 일이나 잡일에 참여하지 않는 노인들은 마을을 다시 4부로 나누고 부마다 한 우두머리를 두어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하며 불시로 다니며 순찰한다. 다니다가 다른 이상한 자가 있으면 그의 간악함을 캐낸다.
여러 성 위에서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들은 10분의 6은 쇠뇌를 갖고 10분의 4는 다른 무기를 들며 젊은 여자와 노인과 어린 사람들은 한 개씩 창을 갖는다. 갑자기 경계할 일이 생기면 중군(中軍)에서는 급히 세 번 북을 치고, 성 위의 도로와 마을 가운데의 골목길까지도 다닐 수가 없도록 한다. 다니는 사람은 목을 벤다.25)”
여기서 보듯이 노소의 남자들과 20세 안팎의 여자들도 군사적인 방어 임무를 띠고 전투에 투입 되었다. 특히 여자들도 군복무를 의무화한 것을 보면 묵자의 평등정신이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전민개병’ 제도는 비성문편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성을 수비하는 방법으로 50보 간격으로 건장한 남자 10인, 젊은 여자 20인, 노인과 어린 사람 10인, 모두 합하여 40인을 배치한다.”고 한다.
3. 엄격한 군기와 공정한 상벌
묵자는 상벌제도를 정확하게 운용하는 것이 방어전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기본요소로 보았다.
그는 성을 지킬 수 있는 14가지 조건을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그 중에 하나를 “시상(施賞)이 분명하여 신용이 있고 형벌이 엄하여 두려워하기에 족해야 한다”고 했다.26) 묵자는 14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성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 묵자는 또 “명령은 반드시 매우 두려워해야만 하고, 상은 반드시 매우 이롭게 여겨야만 한다. 명령은 반드시 바로 사람들을 명령에 따라 그들이 행할 것과 행해서는 안 될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27) 묵자의 이러한 주장을 보면 상벌로 군을 다스리는 것이 신중하고도 엄숙했음을 알 수 있다.
상을 주는 예를 ‘기치(旗幟)편에서 볼 수 있다.
성을 지키는 하급관리가 세 번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면 최고 지휘관은 친히 그를 불러 음식으로 대접하고, 큰 깃발을 수여할 뿐만 아니라 백 호의 고을을 차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호령편’에서는 적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거나 적의 포위를 분쇄해 버린 뒤의 시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적을 길목에서 물리쳐 다시 공격하지 못하게 한 병사에게는 많은 녹을 내린다. 적의 포위망을 물리치면 성의 둘레가 1리(里) 이상일 때는 그 성의 장수에게 30리 사방의 땅을 떼어 주고 높은 작위를 준다. 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한 대장들과 현령에겐 상경(上卿)의 벼슬을 내린다. 성을 지키기 위한 계책에 참여한 관리들에게도 관용 수레를 내리는가 하면 수비를 담당했던 남자들에겐 2급의 벼슬을 더해 주고 여자들에게는 5천 전(錢)의 돈을 내린다고 정해 놓고 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견고히 수비를 하여 포위망을 쳐부술 것을 권장하는 방법인 것이다.
징벌에 대해서도 묵자는 성을 지키는 전투에 불리한 각종 행위의 금지를 목적으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적을 칭찬하며 자기편을 비방하는 자는 처단한다.”고 하는 것이나 “적의 숫자가 적은 데도 숫자가 많다고 하거나 적이 혼란한데도 잘 다스려져 있다고 하거나 적의 공격이 졸렬한데도 교묘하다고 하는 자는 처단한다 … 적이 편지를 달아 활로 쏘아 보내면 그것을 주워서는 안 된다. 밖에서 적이 안의 아군에게 착한 체하더라도 거기에 응해서는 안 된다. 이런 군령(軍令)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처단한다.”고 되어 있다.28)
이 밖에도 모반(謀反)이나 아군의 지휘관을 살상하려고 획책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더욱 무거운 벌을 정해 놓고 있다.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 벌은 두려워할 만큼 엄격해야 하고 상은 만족할 만큼 이로워야 한다는 원칙으로 상벌을 명확하게 규정한 것은 전 장병들의 뜻을 하나로 하고 그들의 사기를 높여줌으로써 방어전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묵자의 군사전략의 하나이다.
4. 군사무기의 개발
묵자는 방어전에서의 무기와 장비를 중시했다. 그는 “병기는 나라의 발톱”이라고 했다.29) 무기와 장비는 마치 독수리의 발톱과 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의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우수한 무기와 장비가 필수적이다. 묵가 집단 중에는 각종 기술에 뛰어난 공장(工匠)들이 많았으며, 묵자 본인은 중국의 기성(技聖)이라 추앙받는 공수반(公輸盤)과 맞먹는 최고의 과학 기술자였다. 묵자는 당시 최선진의 대형 방어 무기 및 장비를 설계하고 제작하였다.
『묵자』서 중에 나오는 수십 종의 방어용 무기와 장비 중에서 몇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묵자가 발명한 가장 훌륭한 수성(守城)의 군사무기는 연노차(連弩車)이다. 춘추전국시대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다른 방어기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중국 병기사(兵器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연노차의 구조와 용도 및 조작요령에 대해 묵자의 제자인 금활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흙을 높이 쌓고 성을 공격하는 임(臨)에는 여러 개의 쇠뇌를 단 수레인 연노차로 대비하는데, 이 수레의 재목은 큰 각목으로 한 면이 한자의 넓이가 되며 길이는 성의 엷고 두터움에 알맞게 하고 두 개의 굴대에 네 개의 바퀴가 달려 있다. 바퀴는 수레 몸통 안에 들어가 있으며 위아래 두 겹으로 몸통이 되어있다.
몸통 좌우 옆에는 두 개의 빗장 기둥이 서 있고 좌우로 가로 댄 빗장나무가 있다. 가로 댄 빗장나무의 좌우에는 모두 둥근 빗장이 끼워져 있는데 빗장은 직경이 4치이다. 그 좌우엔 빗장 기둥에다 모두 쇠뇌가 매어져 있는데 활줄 걸이로서 줄을 걸어 당기게 되어있다. 큰 쇠뇌줄에 이르러는 쇠뇌의 활채가 앞뒤로 수레 몸통과 가지런하게 되어 있다. 수레 몸통의 높이는 모두 8자이며 쇠뇌의 굴대는 아래 수레 몸통으로부터 3자 5치 떨어져 있다. 이 여러 쇠뇌의 살통은 150근의 구리로 만든다. 줄을 잡아당길 적에는 도르래 [轆轤] 로 조인다.
수레몸통의 크기는 세 아름[圍]반의 것을 쓰며 좌우에 활줄걸이가 있는데 3치 사방의 나무로 만든다. 바퀴의 두께는 한 자 두 치이다. 활줄걸이의 채는 넓이가 한 자 네 치, 두께가 7치, 길이가 6자 이다. 옆으로 뻗은 팔은 수레 몸통과 길이가 같으며, 밖에는 발톱이 있는데 길이가 1자 5치이다.
거(距)가 있는데, 넓이 6치, 두께 3치, 길이는 수레 몸통과 같다. 가늠자가 있고 굴승(詘勝)이 있는데, 거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다. 받침대가 있는데, 무게가 1석(石)이며 굵기 5치의 목재로 만든다.
화살의 길이는 10자이고, 줄을 화살 끝에 주살처럼 매어놓고, 도르래로 말아 거둬들인다. 화살은 쇠뇌의 팔보다 3자 높이 있고, 쇠뇌로 무수히 쏘아대야 함으로, 그 화살은 1인당 60개 배당하고 작은 화살은 수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 10명이 이 쇠뇌 수레를 조작하여 적을 막는 것이다.”30)
흙을 높이 쌓아올리고 성을 공격하는 적군을 물리치는 반격무기인 연노차에 대하여 금활리는 이상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묵자가 설계하고 제조한 연노차는 대단히 크고 당시 방어전에서 사용한 병기로는 가장 무거운 것이었다. 10명이 조종하고 한번에 60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연노차는 기계의 힘으로 많은 인력을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정거리가 멀고 한 번 쏜 화살을 회수할 수 있어 당시로서는 최고급 기술의 병기라 할 수 있다.
중국인은 2세기에 크랭크 핸들을 발명했다. 따라서 그들이 3세기에 릴, 즉 작은 윈치를 발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옛날 중국인은 릴을 조차(釣車)라고 불렀다. 중국과학기술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조셉 니덤은 릴의 원형은 묵자가 제작한 연노차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31)
묵자는 성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강한 쇠뇌를 쏘고 여러 가지 기계의 힘을 빌어 공격하며 특수한 무기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그는 전사기(轉射機)라는 돌리면서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도록 만든 무기도 발명했다.
전사기는 그 길이가 6척이고 1척은 땅에 묻어둔다. 두 개의 목재를 합쳐 전사기의 뒤편을 눌러 안정시키도록 하는 온(轀)을 만든다. 온의 길이는 2척이며 받침대 중간에 구멍을 뚫어 가로나무를 통해 놓는데, 가로나무의 길이는 세로로 세운 나무에 닿게 한다. 20보(步)마다 한 대의 전사기를 놓고 활을 잘 쏘는 병사로 하여금 그 조종을 담당하도록 한다. 그리고 조수 한 사람은 옆에서 돕도록 한다.
묵자는 또 성을 수비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자차(藉車)라는 무기를 만들었다. 이 무기는 모두 쇠로 둘러씌운다. 자차의 기둥은 길이가 1장 7척이고 그것이 묻혀있는 길이는 4척이다. 그리고 받침대는 3장 5척이 된다. 자차의 밑 받침대는 수레바퀴로 만드는데 길이가 3척이고 4분의 3은 위에 나와 있다.32)
묵자는 20보마다 한 대의 자차를 두는데 땅굴로 공격해오는 경우에는 대수를 늘일 수 있다고 한다. 전사기와 자차는 칼이나 연소통이나 분화기에 해당하는 탄화통(炭火桶) 등의 무기를 발사한다.33)
자차나 전사기는 적군이 운제로 공격해 올 때나 수공(水攻), 혹은 흙을 쌓아 성으로 올라오는 토대공(土臺攻) 및 인해전술로 침략할 때 그 강대한 위력을 발휘하는 군사장비들이다.
자차나 전사기의 동력은 당시의 조건으로서는 탄력(彈力)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묵자 당시의 사람들은 가죽끈, 대나무 혹은 금속 스프링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탄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34)
미국 하버드대학의 섭산(葉山)교수는 일찍이 이러한 자차와 같은 투석기(投石機)의 정면도와 측면도를 상세하게 그리고는 이것은 지금도 복원이 가능하며 그 위력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차의 성능은 같은 시기의 서양의 석궁보다 훨씬 뛰어난 것으로 보았다.35) 자차의 구조를 보면 ‘묵경(墨經)’의 원(圓)과 구(矩) 등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고 여기에다 지렛대 원리를 사용한 것이다.36)
위에서 소개한 병기 외에도 묵자는 ‘거답(渠答)’, ‘측와(測瓦)’, ‘앵청(罌聽)’ 등 수많은 병기의 제작과 그 사용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오늘날의 병기의 제작과 사용원리와 꼭 같은 것도 있고, 서로 비슷한 것도 있다.
이러한 강력한 무기들은 어떤 것은 기존의 무기들을 개량한 것이고 어떤 것은 묵자들이 창안하여 만든 것이다. 묵가가 개발한 신무기들은 큰 효과를 발휘하였기에 후세의 방어무기로 전승되었다.
그러기에『위료자(尉繚子)』,『태백음경(太白陰經)』,『무비지(武備志)』,『호령경(虎鈴經)』,『수성록(守城錄)』,『무경총요(武經總要)』등의 병서에서 묵가가 사용한 방어용 무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묵가의 군사과학기술의 지혜는 오늘날 우리 군(軍)의 국방과학 현대화에도 시사하는 바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Ⅳ. 묵가와 손자의 군사사상 비교
우리는 묵자의 군사사상을 논하면서 손자의 병법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손자병법’은 우수한 군사이론서로 후세의 군사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저명한 군사가라 할 수 있는 오기(吳起), 손빈(孫臏), 한신(韓信), 조조(曹操), 제갈량(諸葛亮) 등은 모두 ‘손자병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의 병법은 ‘손자병법’의 발전이거나 응용이라고 볼 수 있다.37) 선진시대의 군사사상가인 손자와 묵자는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다. 임계유(任繼愈)에 의하면 묵자는 B.C. 420년경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손자』가 쓰여진 것은 B.C. 496년에서 B.C. 45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묵자와 손자는 서로 만났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상에 있어서는 영향을 주고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군사학의 바이블로 치는 ‘손자병법’과 묵자의 군사저작은 그 내용상으로 볼 때 상통하고 비슷한 점도 있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적지 않다.
묵자와 손자의 군사사상의 동이점(同異點)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손자의 군사전략은 공격적인 성격을 띠는데 비해 묵자의 군사전략은 방어의 성격을 띤다.
손자는 “적이 자기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수비를 말하는 것이요, 자기가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공격을 말하는 것이다. 수비는 적을 대비하기 때문에 병력 부족을 초래한다. 공격은 병력 집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수비에 능숙한 자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듯 전체를 파악하여 움직인다. 그러므로 패하지 않고 자신을 보전하면서 완전히 이길 수 있다.”고 했다.38)
손자는 적을 이길 수 있을 때는 공격의 전략을 세우고, 적을 이길 수 없을 때는 방어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다. 손자의 군사전략은 공격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방어는 단지 역량이 부족할 때 취하는 태세로 보는 것이다. 즉 방어는 자기보존을 위한 것일 뿐인데 비해 공격은 적군을 물리치고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자의 전략은 다소 약육강식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전쟁의 정의(正義)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손자는 이것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손자에 비해 묵자의 군사전략은 방어성의 전략이다. ‘비공지전 이약승강(非攻止戰 以弱勝强)’ 8자로 묵자의 군사사상을 요약할 수 있다. 비공은 묵자사상의 핵심명제의 하나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반대한다. 비공에서 전쟁방지의 이론이 나온다. 전쟁방지는 적군이 침략전쟁을 획책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다. 각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전쟁이 발발할 씨앗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초공송(止楚攻宋)’, ‘지제공로(止齊攻魯)’ 등이 묵자가 이루어낸 ‘지전(止戰)’의 예이다. 이것을 보면 묵자가 손자에 비해 정의감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② 손자는 적의 충실한 곳을 피해 허술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묵자는 약한 쪽을 도와 강한 쪽을 공격해야 함을 주장한다.
손자는 “무릇 군의 형(形)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원래 일정한 형태가 없어 높은 곳을 피해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군 또한 적의 병력이 충실한 곳을 피하고 허술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한다.39) 손자는 실력이 강대한 적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적과 접전하게 되었을 때는 적의 허약한 부위를 먼저 공격하라고 말한다.
묵자 비성문편에는 금활리가 묵자에게 묻기를 “지금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 대국은 소국을 공격하고 강국은 약소국을 빼앗고 있습니다. 저는 소국을 지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은 대목이 있다. 묵가가 당면했던 문제는 소국과 약국(弱國)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묵가의 전략은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이다. 대국의 침략에 대해서는 일체의 국방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등 각종 역량도 포함된다. 거기다 최신형의 방어무기도 제작해야 한다.
손자는 또 “전투를 하는 방법은 아군의 병력이 적병의 열 배이면 적을 포위하고, 다섯 배이면 적을 공격하고, 두 배이면 적을 양면에서 협공한다. 아군과 적병의 수가 비슷하면 대전할 수 있고, 아군의 병력이 적으면 적병과의 교전에서 도망하고, 병력이 훨씬 모자라면 적병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40)
여기서 손자가 주장하는 것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적군을 철저히 소탕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들의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는 도망가든지 아예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묵가의 일당십(一當十)의 작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요컨대 손자의 방침은 이강격약(以强擊弱)이고 묵자의 방침은 이약승강(以弱勝强)이다.
③ 손자가 주장하는 최상의 전술은 적의 계책을 좌절시키는 것인데 비해, 묵자는 비공지전(非攻止戰)을 실천하는 것이다.
손자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것은 최상의 방법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도 적병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적과 싸울 때 취해야 할 최상의 전술은 적의 계책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전술은 적의 외교관계, 지원부대 등을 단절하여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전술은 적병과 대등한 조건 아
래 교전하는 것이다. 가장 서툰 전술은 적에게 유리한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41) 이것은 손자의 공격전략사상의 체계이다.
묵자의 전쟁방지 사례로는 ‘지초공송(止楚攻宋)’, ‘지제벌로(止齊伐魯)’, ‘지로양문군공정(止魯陽文君攻鄭)’ 등이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모두 공격의 계책을 좌절시키는 것이다.42) 묵자의 전쟁방지는 그 계책과 용감성과 지혜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정의감과 웅변능력을 드러내고 묵가의 전쟁준비가 튼튼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묵자는 또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외교활동을 중시한다. 묵자는 폭넓은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적군을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마지막으로 적군이 만들어 놓은 전제조건을 타격하는 것이다. 요컨대 전쟁의 기미가 보일 때 손자는 그 계책을 좌절시키는 것을 중시하고 묵자는 전쟁방지에 중점을 둔다.
④ 손자와 묵자는 모두 신전(愼戰)과 속결전을 제창한다.
손자는 말하기를 “전쟁은 나라의 대사로서 생사의 마당이 되며 존망의 갈림길이 된다. 그러므로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43)
즉 전쟁은 신중히 고려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군대를 움직이려면 전차 천대와 수송차 천대가 필요하며 나라 안팎에 쓰이는 비용이 하루에 천금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을 너무 오래 끌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손자는 전쟁은 서툴더라도 신속해야 한다고 말한다.44)
묵자는 전쟁이란 이긴다 하더라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기 때문에 비공(非攻)과 지전(止戰)을 하는 동시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봄과 가을에 하게 되는데 이때는 농사철이라 농사를 망치게 된다. 또 부대가 후퇴할 때는 물론이고 진격할 때도 사상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생긴다.45) 전쟁은 막대한 피해가 있기 때문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은 신전(愼戰)을 말한다.
묵자는 또 “성을 지키는 사람은 재빨리 적을 깨치는 것이 상책이다. 수비하는 날을 늘이고 오래도록 버티어 구원부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수비에 밝은 사람의 행동이다. 반드시 이럴 수 있어야만 성은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고 한다.46) 묵자는 성을 방어하는 병사는 신속하게 적병을 물리치든가 살상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⑤ 손자와 묵가의 무기와 장비를 비교해보면 묵가의 무기 및 장비가 더 앞서 있다.
『손자』에는 전차(戰車), 전마(戰馬), 갑옷, 화살, 돌쇠뇌, 창, 방패, 큰 방패, 화물수레 등의 무기와 장비가 보인다. 또 모공편에서는 “성을 공격하려면 큰 방패와 공성용(攻城用) 전차를 수리하고 여러 가지 기구를 갖추는 데 3개월이 걸리고, 성벽과 같은 높이로 흙담을 쌓아올리는 데 또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여기서는 큰 방패와 소가죽으로 덮어씌운 4륜차를 볼 수 있고 성을 공격하기 위해 쌓아올린 토산(土山)도 보인다.
손자는 불을 이용한 공격을 주장한다. 그는 화공(火攻)편을 따로 써서 다섯 가지의 화공을 말한다. 즉, 사람을 불태우는 것, 군수품을 불 태우는 것, 수송차를 불태우는 것, 저장소를 불태우는 것, 적의 진영이나 부대를 불태우는 것을 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해야 하므로 방화용 재료와 기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47)
손자가 작전상 필요로 하는 무기와 묵가의 방어를 위한 무기와 장비를 비교해 보면 묵가가 더욱 앞서 있다. 묵가의 과학 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손자 에 나오는 무기나 장비보다 그 살상력이 우수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우리는 묵가의 군사무기와 장비에 대해 살펴 보았기에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연노차, 전사기 및 자차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한 가지 더 보기로 하자.
묵자 의 비혈편에는 땅굴을 파고 침략해 오는 적을 탐지하기 위한 기구인 앵청(罌聽)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40말들이 큰 독에 부드러운 가죽으로 싼 다음 우물 속에 넣고 귀 밝은 사람이 적이 파는 굴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다. 묵가가 발명한 성학(聲學)의 원리를 이용해 소리의 근원을 측정하는 우수한 기구이다. 묵자 의 책에 나오는 수많은 무기와 손자 의 책에 나오는 무기들을 비교해 보면 묵가가 사용한 무기들이 손자의 것에 비해 그 종류가 훨씬 풍부하고 그 위력도 더 센 것으로 볼 수 있다.
⑥ 손자와 묵가의 군사변증법사상을 보면 손자가 더 변증법 사상에 투철했던 것으로 보인다. 손자의 군사 변증법사상은 풍부하다. 손자의 군사사상은 주역 의 변증법을 계승하여 간단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쓰였다.
변증법이란 “치우침이 없이 적절하게 처사하며 동시에 사물의 정면과 후면을 헤아려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확정하는 것이다.”48)
손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투행위는 적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는데도 무능한 것처럼 보이고, 필요하면서도 필요치 않는 것처럼 보이며,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보면 손자가 이미 변증법 사상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손자는 또 “작전의 기본 원칙은 정규전과 비정규전에 불과하지만 그 변화에서 비롯한 전략 전술은 수없이 많다. 정규전과 비정규전이 반복하여 변화하는 그 형태는 끝없이 순환하여 좀 처럼 그 진수를 알기 어렵다.”고 말한다. 손자는 이미 비정규전과 정규전간의 변증관계를 군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묵자 역시 변증법적 사유를 활용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안전할 적에는 곧 적에게 위태로운 듯이 보이고, 위태로울 적에는 안전한 듯이 보이도록 하여야 한다.”49)고 말한 것이나 “땅굴의 사정이 급박할 적에는 재빨리 그 근처에 있는 자들을 가서 돕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적군의 처소를 기습하도록 한다”50)고 말한 것이 그것 이다. 이 외에도 묵자는 ‘지키는 것[守]’이나 ‘치는 것[攻]’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요컨대 손자와 묵가의 군사변증법사상은 둘 다 비교적 풍부한 편이나 그래도 손자가 더욱 투철한 것으로 보인다.51)
손자병법과 묵가의 군사사상을 비교해보면 전쟁에 신중할 것과 속결전을 주장하며 변증법적 사유를 활용하고 있는 것은 둘이 상통한다. 그러나 묵가가 신무기 개발에 더욱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묵가와 손자병법의 군사사상의 큰 차이는 손자가 공격적인 군사전략을 위주로 기술한데 비해 묵가는 방어성의 군사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Ⅴ. 맺음말
중국 고대의 군사가들은 대체로 공격을 위한 수단을 연구하는데 정력을 쏟았다.『손자(孫子)』,『오자(吳子)』,『육도(六韜)』,『위료자(尉繚子)』 등의 책을 통해 우리들은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묵가는 이와 달리 방어술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이것은 중국 고대 군사학에서 본다면 상당히 독특한 현상이다. 그는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겸애주의를 내걸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에 헌신했다. 강대국들의 군사적 도발에 대항하여 내놓은 비공(非攻)은 적극적인 무장평화론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본 출발점은 불의(不義)의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정의(正義)의 방어권을 세우기 위한 목적에 있다. 이러한 목적과 묵가의 ‘겸애’ ‘비공’의 핵심사상은 일치한다. 최고의 평화주의 이론의 창도자인 묵자는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침략전쟁의 정의롭지 못함과 그것이 가져오는 막대한 피해를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묵자는 또 극악한 침략자에게는 공허한 이론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적을 만났을 때는 주효한 사상과 물리적인 준비를 충분히 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수단을 강구하여 침략자를 물리침으로써 국가보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침략국에 대해서도 도의적인 승리와 아울러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묵자의 군사사상은 평화와 반전(反戰)을 추구하는 우리의 안보에도 중요한 계시가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 군사전쟁사에서 보면 묵가는 대다수 군사지도자들의 눈을 끌만한 것이 될 수 없었지만 그것의 영향은 없앨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 존재한다. 전국시대 중·후기에 대국이 소국을 겸병하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이러한 겸병전쟁과정에서 무수한 소국들이 강력한 침략자들의 미친듯한 폭력에 힘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묵가는 수준 높은 과학기술로 신무기를 창조하여 군사상의 기적을 이루어 내어 ‘묵수(墨守)’라는 미명(美名)을 얻었다.
또 묵가가 갱도전(坑道戰)에서 사용한 군사시설 및 무기들과 같은 모양의 것들이 후세에 이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묵가는 중국군사사(中國軍事史)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묵자』의 병서적 가치는 공격의 원리를 담은『손자병법』과 함께 중국고대군사사에 쌍벽을 이루는 빛나는 저술이기에 이 둘이 상보상생(相補相生)한다면 군사사상의 경전(經典)으로 더욱 의미를 지닐 것이다.
19세기에 나온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쟁연구에 있어 무조건 전쟁을 배척하는 인도주의 시각이나 또는 전략의 효율만을 높이는 군인들의 실용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 과거의 전통적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전쟁을 하나의 확고한 과학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52)
『전쟁론』에 대한 이와 같은 찬사를 필자는 2천 4백년 전의 『묵자』에게도 똑 같이 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군사사상에서도 우리는 훌륭한 계시를 받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묵가의 군사사상에서 또 다른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각주
1)『조선일보』, 2010. 4. 6. A39면 사설 참조.
2) 김기동, 중국 병법의 지혜, (서울: 서광사, 1993), p.77.
3) ‘제5회 墨學國際學術大會’에서 발표된 묵자의 군사사상에 관한 논문들은 王裕安·李廣星 主編, 墨子硏究論叢 第六集, (北京: 北京圖書館出版社, 2004)에 실려 있다.
4)『조선일보』, 2010. 4. 5, A35면.
5)『墨子』, 兼愛中 편. (이하『墨子』의 책은 편명만 기재함).
6) 蔡尙思, 『中國古代學術思想史論』, (廣東 : 人民出版社, 1990), pp. 170-171.
7) 李繼耐, “論墨子的軍事思想以及他對古代軍事科學的貢獻”, 張知寒 主編, 『墨子硏究論叢』(四)(齊南: 齊魯書社, 1998), p. 289.
8) 村瀨裕也, 『東洋の平和思想』(東京: 靑木書店, 2003), p. 23.
9) 非攻下편.
10) 박문현, “묵가의 겸애와 비공의 평화론”, 한국통일전략학회, 통일전략 제7권 제3호, 2007, pp. 274-276 참조 바람.
11) 非攻中편.
12) 蕭公權, 『中國政治思想史』, 崔明 역, (서울: 法文社, 1988), p. 246.
13) 방어란,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전에서의 방어적 체재라는 것은 결코 단순한 방패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교묘하게 공방(攻防) 양용에 사용되는 방패로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묵가의 적극방어는 상대적인 의미의 방어라고 할 수 있다.(“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종학 편저, 전략이론이란 무엇인가, 충남대학교 출판부, 2005, 204-205쪽 참조).
14)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묵자가 모의 전쟁으로 이를 저지한 실례를 말한다. 公輸편 참조 바람.
15) 묵자가 성을 잘 지켜 굴하지 않았다는데서 연유하는 말로 ‘墨守’라고도 한다.
16) 七患편.
17) 七患편.
18) 박문현, “묵자의 평화사상”, 현대종교문제연구소, 현대와 종교 제 13집, 1990, p. 17.
19) 七患편.
20) 묵자의 ‘유비무환’의 사상은 손자가 주장하는 다음 말과 상통함을 볼 수 있다. “용병의 원칙은 적이 오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대적할 수 있는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하고, 적이 공격해 오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것이 아니라 적이 공격할 수 없는 태세를 취하도록 기약할 일이다.”(孫子, 九變편 ; 이하 孫子書의 번역은 다음 책을 참조함. 야마모토 시치헤이, 孫子經營學, 金河中 譯, 서울: 매일경제신문사, 1988).
21) 備城門편.
22) 李殿仁, 『墨學與當代軍事』, (北京: 中國書店, 1997), p. 19.
23) 로버트 템플은 이것을 세계 최초의 독가스를 이용한 화학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동독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화학전의 역사는 적어도 기원 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 일을 책에 기록한 것은 철학자이며 사회개혁자였던 묵자를 창시자로 하는 묵가(墨家)였다. 초기의 묵가 책에는 도시를 포위한 적진에 풀무로 독가스를 뿜어 넣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용 겨자 가스보다 2300년이나 빨랐다.”(그림으로 보는 과학과 문명 , 과학세대 옮김, 서울: 까치, 1993, p. 367).
24) 雜守편.
25) 號令편.
26) 備城門편.
27) 號令편.
28) 號令편.
29) 박문현, 묵자 읽기
30) 備高臨편.
31) 연노차에 대하여 로버트 템플은 이렇게 말한다. “묵가의 병기 중에 연노(連弩 ; 연발식 석궁)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투창을 적에게 발사하는 기계로서 초기의 대포이다. 창은 값이 비싸서 그것을 함부로 버릴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창에 끈을 달아 릴 식의 감는 기계로 회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적의 몸에 꽂힌 창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이 군용 병기가 가장 평화로운 도구인 릴 발명의 실마리가 되었다.” (로버트 템플, 그림으로 보는 과학과 문명』, 과학세대 옮김, 서울 : 까치, 1993, 150-151).
32) 備城門편.
33) 備梯편.
34) 1988년 여름에 중국 하남성의 고고학자가 信陽지구 光山縣 流慶山에서 춘추초기의 분묘에서 110건의 금속 스프링 형태의 기구를 발굴했는데 나선형으로 된 이 기구들은 오늘날의 금속 스프링과 차이가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전국시기 묵자(墨者)들이 금속 스프링을 이용하여 사격하는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孫中原, 墨子及其後學, 北京: 新華出版社, pp. 101-102).
35) 秦彦士, 墨子新論, (成都: 電子科技大學出版社, 1994), p. 31.
36) 지렛대 원리의 이론적 근거를 ‘墨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經下’에서 “지렛대는 무게를 받아도 어느 한쪽으로 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負而不撓, 說在勝)”라고 한 것에 대해 ‘經說下’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두레박의 수평 통나무에 중량을 가해도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은 나무의 우듬지 끝에 묶은 무거운 물건이 중량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負, 衡木加衆言, 而不撓, 極勝重也, 右校交繩, 無加焉, 而撓, 極不勝重也)”
37) 施芝華, 孫子兵法與人生智慧, (上海 : 學林出版社, 2001) p.3.
38)『손자』, 軍形편.
39)『孫子』, 虛實편.
40)『孫子』, 謀攻편.
41)『孫子』, 謀攻편.
42) 묵자의 전쟁방지 사례에 대해서는 박문현, “묵자의 평화사상”, 현대종교문제연구소, 『현대와 종교』 제13집, 1990, 28-36쪽을 참조 바람.
43)『孫子』, 作戰편.
44)『孫子』, 作戰편.
45) 非攻中편.
46) 號令편.
47) 孫子, 火攻편.
48) 김기동, 『중국 병법의 지혜』, (서울: 서광사, 1993), p. 85.
49) 雜守편.
50) 雜守편.
51) 徐希燕이 작성한 손자와 묵자의 군사사상의 비교연구가 돋보인다. (『墨學硏究』, 北京: 商務印書館, 2001, pp. 258-274 참조).
52)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 정토웅 역, (서울: 지만지, 2008), 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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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현, “묵자의 평화사상”, 현대종교문제연구소, 『현대와 종교』 제13집, 1990.
_ 박문현 (동의대학교)
이 논문은 동의대학교 2009년도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