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동물의 행동이론, “각인[刻印] 효과”
콘라트 로렌츠
콘라트 로렌츠[Konrad Zacharias Lorenz-1903∼1989]의 “각인[刻印] 효과”라는 동물의 행동이론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교외의 알텐베르크라는 마을에서 정형외과의사인 아돌프 로렌츠의 아들로 태어난 콘라트 로렌츠는 교외의 대저택에 살며 일상 속에서 자연과 수많은 동물들을 만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들과 교감도 할 수 있게 된다. 의학공부를 하면서 동물관찰에도 몰두해 자신이 관찰한 내용들을 모두 관찰일기로 남겼다. 그의 관찰을 바탕으로 한 첫 논문인 [갈가마귀 관찰]이 그가 24세이던 1927년에 [조류학회]지에 실리게 된다. 로렌츠는 이 논문으로 인해 평생 스승인 슈트레제만과 하인로트와의 인연을 맺게 되고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로렌츠가 1937년 회색기러기를 키우면서 전문적인 관찰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훗날 비교 행동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는 이 연구에서 “각인[刻印-imprinting]”이라 불리는 현상을 발견한다. 거위새끼가 알에서 부화했을 때 처음 본 것을 그의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 발견으로 인해 나온 저술이 동료 연구가인 콜라스 틴버켄니와 함께 집필한 [회색기러기가 알을 굴리는 행동에 나타나는 본능동작과 자극에 의한 동작]이다.
각인 [刻印-imprinting]
이런 연구업적은 동물행동 연구에 회기적인 것이었으며 1973년에 카를 폰 프리슈, 니콜라스 틴버겐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동물행동에서 본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결정적인 시기에 “각인”이라고 하는 자극과 반응은 본능이 되고 평생 동안의 동물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어미 오리가 낳은 알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다르게 부화시켰다. 한 집단의 알은 어미가 부화시키고, 다른 집단의 알은 자신이 직접 부화시켰다. 자신이 직접 부화시킨 집단의 새끼 오리들은 그를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오리와 거위 새끼들이 부화된 직후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그들을 낳아주었거나 기른 부모를 따라 배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정적인 시기에 동물들[오리나 거위 등]의 부모의 역할을 대역[代役]을 통해 “각인”시켜주면 대역이 사람이거나 다른 동물이던지 혹은 자동차나 비행기 등 각인 된 대상을 그들의 부모로 인식하고 꽁무니를 좇아다니게 되는 것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새끼 오리의 결정적인 시간대는 부화 후 36시간 정도인데, 부화 후 13~16시간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결정적 시기 이전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그 이후에는 주위 환경이 발달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새끼 오리가 어미 역할을 하는 개체를 따르는 추종 행동에 대해 그는 각인[刻印-imprinting]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각인”시키는 방법이 어미의 울음소리나 형상인데 각인된 “울음소리”의 자극을 받거나 형상을 보면 대상과 관계없이 같은 발음이나 형상을 어미라고 여기고 따라 다니게 된다.
조숙류[早熟類]와 만숙류[晩熟類]
물론 어미 역할이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으며 후속적으로 새끼들과 함께 실제 어미와 비슷하게 호수 위를 떠다니기도 하고, 숲 속 길을 헤쳐 다니며, 보이는 것들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면 대리모의 역할이 확실하게 된다. 로렌츠가 연구한 기러기나 오리, 닭은 새끼가 부화할 때 깃털이 다 난 상태이며 새끼들은 부화한 직후 걸어 다니면서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조숙류[早熟類]의 새다. 반면 까치나 박새, 비둘기와 같은 새들은 새끼가 알에서 깨어날 당시 깃털도 없고 눈도 안 뜬 상태이며, 새끼가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는 시기가 되기까지는 둥지 안에서 어미/아비가 돌봐주고 먹이를 제공해주어야 하는, 만숙류[晩熟類]의 새이다. 이 두 종류의 새들 중 어미에 대한 “각인”이 강하고 빠르게 일어나는 쪽은 조숙류의 새들이다. 왜냐하면 부화한 직후 돌아다니면서 혼자서도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조류[鳥類]는 어미를 재빨리 알아보고 어미를 따라다니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둥지 안에서 일정 기간 동안 어미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천천히 성숙하는 만숙류의 조류는 둥지 안에서 먹이를 주는 개체를 어미로 인식하면 되기 때문에 빨리 어미를 각인하는 것이 덜 중요하다. 따라서 이렇게 천천히 성숙하는 새들이나 포유동물에서는 어미와 아비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각인 만이 아닌 여러 복잡한 요인과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로렌츠에게 각인된 회색기러기들은 그를 졸졸 따라다녔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기러기에게 구애하지 않고 로렌츠에게 구애하곤 했다.
도장 찍기-Prägung
로렌츠는 이러한 현상을 독일어로 “도장 찍기-Prägung”라고도 달리 표현하기도 했다. 부화한 어린 새끼가 시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물체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뇌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외딴 섬에서 집단번식하는 것으로 유명한 괭이갈매기도 예외는 아니다. 수 천 마리씩 집단 번식하는 괭이갈매기들의 새끼들은 어떻게 제 어미를 찾을 수 있을까.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새끼들은 태어나면서 각인된 어미의 소리를 듣고 생존해나간다. 그래서 괭이갈매기 번식지는 언제나 어미가 제 자식을 부르는 소리와 엄마 찾는 새끼들의 소리로 장터처럼 소란스럽다. 만약 어떤 이유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목소리를 배우지 못하면 치열한 생존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다른 어미를 제 어미인줄 알고 다가갔다가는 금새 물려 죽기 때문이다. 이런 각인효과 때문에 파랑새는 어떤 기간 안에 어미로부터 노래하는 것을 습득하지 못하면 노래를 하지 못한다. 성장한 후에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어미의 노래를 따라 할 수 없다. 로렌츠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당시에 독일의 식민지였으며 히틀러의 군대에 입대하여 2차 대전에 참전하는 등 나치즘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나치의 우생학적 인종주의의 논거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여서 그 후에 논란이 되기도 하였었으며,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사과하였다. 말년에 그는 인간을 사회를 구성하는 동물의 하나로 생각하고 그의 생각을 인간행동에 적응시키기도 했다. ‘공격성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사람의 싸움이나 전쟁과 같은 행동은 선천적이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욕구에 대해 적절히 이해하고 준비함으로써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 – All I Ever Really Need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미국의 유니터리언교의 목사이며 작가[作家]이고 교육자인, 로버트 풀검[Robert Fulbhum. 1937-]은 1988년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Ever Really Need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박종서 역, 김영사: 1989. 2. 10]라는 책을 내서 세계적인 베스트작가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 책의 번역본을 읽었지만 너무 평범한 내용이라 다소 실망하였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책 제목과 함께 평범한 이야기 속에 진리가 있고 삶의 메시지가 있음을 되새기게 되었다. 로버트 풀검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난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대학원에 갈 필요가 없이 유치원과정으로도 충분하고 행복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유치원을 한정해서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을 배우고 알게 되는 것은 많은 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경험과 습관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네 생애에 가장 큰 단어”, “보라!”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어린이의 행동 지침은 누구나 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지식과 이해를 통해 터득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다. 동물들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눈을 뜨면서 “각인”되고 도장 찍힌 대상을 평생동안 좇아 다니게 되는 것처럼 인간의 행동도 대동소이 하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각인”이라는 학습이론의 장황[張皇]한 해설을 “세 살쩍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俗談]으로 끝내려 할 것이다. 유아교육의 중요성은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며 로렌츠의 연구가 아니라도 누구나 다 아는 지식에 속할 수 있다.
세 살쩍 버릇 여든까지 간다[5(오)세훈]
“세 살쩍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이 어린 시절의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각인”된 대상은 평생을 가며 삶을 지배한다. 견강부회[牽强附會]일 수 있으나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던 사례를 유아교육과 비교해본다. 유아기의 유치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패러디[parody] 되었던 유명인이 있다.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제33·34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오세훈(吳世勳, 1961년 1월 4일~ )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서울시장이라는 행정가로서 업적도 있고 인기가 있어서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당시 여소야대의 서울시의회와 오세훈 시장 간에 사사건건 충돌을 빚어지고 있었으며, 서울특별시의회의 무상급식정책에 대해 이를 반대하는 서울시민 81만(유효 51만)의 청구와 서울특별시장 오세훈의 발의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2011년 8월 24일에 실시되었다. 최종 투표율 25.7%를 기록하여 투표함은 개봉하지 않고 파기되었고, 개표 득표율 33.3%에 미치지 못해서 부결 처리되었다. 2011년 8월 24일 오세훈은 무상급식 투표율이 개표선에 미달할 경우 사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에 따라 투표 이틀 후인 8월 26일 서울시장직을 사퇴했다. 잘 나가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누가 봐도 설득력이 없고 무모한 일을 벌여서 본인과 그가 속한 보수진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그의 인기는 급전직하[急轉直下]하였다. “내 얘기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논의도 할 수 없다”는 특이한 논리를 구사하며 시의회를 뛰쳐나와 참으로 독특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행태를 보고 시민단체 등에서는 그의 이름을 비틀어 ‘5[오]세훈’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오세훈은 서울시장의 사임을 전하면서 무릎 꿇고 눈물까지 닦는 제스츄어도 썼지만 4년이 지난 현재, 그에 관한 동정[動靜] 기사를 보면 무상급식 반대는 미래를 예견한 행위였고 세계적인 추세라는 등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MB가 중용한 ‘똥별’
인간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영원한 과제일 것 같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에 사관생도들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반듯한 인간으로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서의 믿음직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입대해서 보니 육사출신 장교나 간부 후보생 출신이나 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하던 기억이 있다. 공공연한 부정과 부패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2015년 2월 15일], 인터넷 D신문을 검색하다 보니 “MB가 중용한 ‘똥별’”이라는 다소 자극적이 칼럼 제목이 있어 읽어보니 해군참모총장이었던 J씨가 재직 시에 뇌물수수와 공금 횡령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2심 판결을 받은 사건을 중심으로 군 장성들의 한심한 작태를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5년 전인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은 C씨가 임기를 채우고 예편한 지 1주일 만에 터진 것인데 그때 해군의 위기대응이 왜 그리 부실했고, 사후보고도 엉터리였는지 알 만하고 썩은 장수 밑에서 강한 전투력이 나올 리 없다는 논리였다. 사관학교에서 아무리 철저한 교육과 호된 훈련을 받는다고 유아기부터 “각인”되고 습관화된 기본 행동을 바꾸기는 어려운 것인가 보다. 사회의 지도자나 지식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새삼스럽게도 인간의 생물학적 나이나, 지능과 지식 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미가 아닌데도 각인된 대상의 꽁무니를 졸졸 좇아다니는 오리 새끼처럼 어떤 이념이나 신념에 맹종하기가 일수이며, 이는 갈등과 분열의 원초[原初]가 되고 있다. 최근에 전 해군참모총장, 전 국가정보원장, 전 유명 항공사 부사장 등이 교도소에 수감[收監]되었다. 그들의 형량은 1-2년으로 그리 길지 않은데 유치원에 들어갔다는 각오로 그들의 머리 속에 “각인”된 허상[虛像]을 지워버리게 된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박광하(본지 주필)
필자 박광하 선생은 1963년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여주 대신고등학교 교감과 수원 계명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은퇴,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