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50여년 만에 창경궁 관람
50여년 전 창경원 관람
아이들이 6-8세이던 아득한 50여년전 창경원의 동물원 관람을 한일이 있었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창경원의 코기리 등 동물과 벗 꽃을 구경시키기 위한 나들이었다. 고속버스로 상경을 해서 창경원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탑승 하려는데 삼남매 아이들과 우리 내외까지 합치니 택시정원을 초과해서 택시기사의 짜증섞인 꾸지람을 들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와 함께 인구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라 택시기사의 짜증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아이들에게 창경원 구경을 시켰다. 그 당시 창경원이 일제 (日帝)의 의도적인 정책으로 한국의 얼이 담긴 궁궐을 허물고 동물들이 설치고 일본의 국화 (國花)인 벗꽃으로 백성들을 현혹 시키려 했던 일제의 음모로 조성된 공원인줄도 모르고 놀아난 꼴이었다. 한심한 일이 지만 이제서야 일제의 꼼수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번 한국 방문중에 50여년 전 창경원이 오늘날에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궁금했다. 창경궁입구에 도착하니 궁궐의 축제기간이라 입장료도 받지 않고 입장을 허용하였다. 창경궁의 정문 (正門)을 들어서라고 하니 안내하는 여자직원이 몇 가지 절차를 설명하며 극진히 친절한 안내를 하였다. 밀려오는 입장객을 일일히 맨투맨으로 접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연노한 입장객에 배려인 것 같았다.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전경 (全景)은 생후 처음 대하는 광경 (光景)이었다. 50여년전에 경내에 꽉 차 있던 벗꽃나무나 코끼리 등은 흔적도 없고 노송 (老松)과 궁궐의 건축물이 시야를 압도한다. 창경궁의 정전 (正殿)인 명정전 (明政殿)으로 접근하니 통로 (通路)좌우로 품계석 (品階石)이 노여 있다. 좌측에는 정1품-정9품, 우측에는 1품에서-종9품의 표지석이 놓여 있는 중앙 통로를 통해 명정전 (明政殿)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품계석 (品階石)의 정 (正)과 정 (從)은 문관 (文官)과 무관 (武官)차이라고 보면 되는 것 같다. 창경궁은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궁인 경복궁과는 품격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창경궁은 엄연한 궁궐이고, 또한 단순한 지방의 행궁이 아닌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서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왕조와 왕가에 있어서 궁궐이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일제가 궁궐이 왕가에게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유원지로 개조한 것은 아니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창경궁의 개조는 일제시 식민지였던 조선을 총괄하던 총독 (總督), 이도히로부미 (이등박문 – 伊藤博文)의 작품이다. 이도히로부미는 궁중의 숙청을 단행함과 함께 왕실의 은혜를 백성들이 우러러보게 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교활하고 궁색한 명분을 내세우며 궁정의 개축과 궁 안에다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의 신설을 단행하였다.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에 의하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도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하여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 시키고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간파한 것이다. 속셈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 지만 대외적으로도 일본이 대한제국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과 위와 같은 실제 의도로 인해 창경궁의 개조를 단행한 것이다. 근대 건축도면집에 실린 1907년 창경궁 도면을 보면, 일본은 건물 몇 개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창경궁 전부를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이었고, 왕실의 개인 정원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1909년 11월 창경궁에 박물관까지 완공을 하자 마자 창경궁을 일반 대중에 공개하였고,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전각(前脚)들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개조하며 ‘궁궐의 유원지화’를 심화시킨 것이다.
창경궁 치욕의 역사 총정리
1909년 11월 1일은 일본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에 공개 한 치욕의 날이다.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 (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안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일본은 황실의 위안시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사를 감행했다. 하지만 숨겨진 의도는 황실 권위의 상징인 궁궐을 훼손해 국권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공사는 친일 매국 내각이었던 이완용과 일제 통감부 이토의 지휘하에 1908년 4월에 시작돼 1년 6개월 가량 진행됐다. 일본은 창경궁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지형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지형을 바꾼 자리에는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가 마구 심겼다.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일이었다.
공사가 감행되는 동안 귀중한 문화재는 훼손되고 버려졌다. 창경궁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前脚)은 허물어졌고, 전각의 문이나 기와 등은 해체돼 경매에 부쳐졌다. 황제였던 순종은 보다 못해 공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사변) 내정 간섭의 수위를 높여가던 일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은 일본의 각본에 따라 진행되었다. 전각이 헐리고 건물의 초석과 댓돌까지 무참히 파내어진 터에는 대신 동·식물원과 박물관이 들어섰다. 공사를 끝낸 창경궁 동·식물원은 1909년 여름 순종황제와 이토통감이 우선 관람하는 이벤트도 진행되었다고 한다.
창경궁의 복원
창경궁은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위락시설로 남았다가 1983년 7월 1일부터 일반인 관람을 중단하고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마침내 그해 12월 30일에는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필자가 관람한, 2023년 10월 22일 (일)의 창경궁은 50여년 전 창경원이었을 당시보다 관람객은 붐비지 않았고 외국인들이 태반이었으며 일본학생들도 수학여행 겸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이등박문류의 정치지도자들의 얄팍한 우월의식이 한국의 혼을 박살내려 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김구선생과 안중군은 이등박문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0월 26일
안중군은 1909년 10월 26일 (향년 68세) 이토 히로보미를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암살하였고 아이러닉 (Ironic) 하게도 70년 후 한국의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향년 61세)에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함으로서 대한민국 정치사의 일대 변혁을 초래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토인비의 명언
토인비 (1889 ~ 1975)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데 있다.” 창경궁의 역사에서 한국인들은 얻어야 할 교훈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된다.
박광하 (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3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민주화 실천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 (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