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3. 고후기(高后記)
반고의 한서-본기 세 번째 기록.
한서에서조차 여후는 본기에 들어있다. 여후 본인의 기록과 두명의 소제에 관한 기록은 고후기(高后紀)라 하여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전한 고조(고제)인 유방(劉邦)의 아내이자, 황후. 명문 여씨(呂氏)의 후손이다. 시호는 남편인 유방의 시호 고황제(高皇帝)에서 따와 고황후(高皇后). 그리고 기록에 남은 중국 최초의 황후이자 황후-황태후-최초의 태황태후를 지낸 여인이다.
○ 고후기(高后記)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는 혜제를 낳았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도와, 부형(父兄)이 고조에 이르러 제후가 된 이가 3명이었다. 혜제가 즉위함에 여후(呂后)를 높여 태후(太后)로 삼았다. 태후가 황제의 누이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딸을 세워 황후로 삼았으나 자식이 없자, 후궁인 미인(美人)의 자식을 취해 부르길 태자라 하였다.
혜제가 붕어하니 태자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태후가 조정에 임하여 칭제(稱制)하며,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이 때 황위에 오른 황제를 일부사서에서는 소제(少帝)라 부른다. 후에 이 황제는 폐위되고 또 다른 혜제의 아들이 황위에 올랐는데 역시 소제라 부른다. 그래서 다른 정사에서는 고황후를 빼고 폐(廢)소제를 1,2로 나눠 정식으로 올려놓기도 한다.)
이에 오빠의 아들인 여태(呂台),여산(呂産),여록(呂祿), 여태의 아들 여통(呂通) 4명을 세워 왕으로 삼고, 여러 여씨 6명을 제후에 봉하였다. 이 말이 <외척전(外戚傳)>에 있다.
원년(BC 187) 봄 정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전일 효혜황제가 삼족죄(三族辜)와 요언령(妖言令)을 없애고 싶다고 말해, 그 일을 의논하다 결정치 못하고 붕어하였으니, 이제 그 법을 없애라”고 하였다.
2월, 백성들에게 작을 호당 1급씩 하사했다.
처음으로 효제역전(孝弟力田)관 (질) 2천석 1명을 두었다.
(한 대의 관리등급은 순전히 그들이 받는 녹질의 수량으로 표현된다. 나중에 나오는문산계처럼 1,2품이 아니라 4백석관, 600백석관 등 관리가 일년에 받는 녹봉으로 표시한다. 2천석관은 비2천석, 2천석, 만(중)2천석의 구분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군태수, 장관급 고위관리다.)
여름 5월 병신일, 조왕(趙王)의 궁인 총대(叢臺)에 불이 났다.
혜제 후궁의 아들 강(强)을 세워 회양왕(淮陽王)으로 삼고, 불의(不疑)를 항산왕(恒山王)으로, 홍(弘)을 양성후(襄城侯)로, 조(朝)를 지후(지侯)로, 무(武)를 호관후(壺關侯)로 삼았다.
가을, 복숭아와 오얏에 꽃이 피었다.
2년(BC 186) 봄, 조칙을 내려 가로되 “고황제께서 천하를 바로 잡으시고, 공이 있는 여러 사람들은 땅를 분봉(分封)받아 열후(列侯)가 되었으며, 만백성은 크게 편안해져, 이 아름다운 덕을 입지 않은 자가 없다. 짐은 오래토록 그 공명(功名)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대의(大誼)를 존숭함이 없다고 후세에 알려질까 염려해왔다. 이제 열후의 공에 차이를 두어 조위(朝位)를 정하여, 고묘(高廟)에 묻어 세세토록 끊어지지 않고 후사가 각자 그 공위(功位)를 잇게 하고자 한다. 열후들과 더불어 이를 의논하고 정하여 주청하라”고 했다.
승상 진평(陳平)이 가로되 “삼가 강후(絳侯) 주발(周勃), 곡주후(曲周侯) 역상(역商), 영음후(穎陰侯) 관영(灌영), 안국후(安國侯) 왕릉(王陵) 등과 의논했는데, 열후들은 다행히 찬전(餐錢)과 식읍(食邑)을 하사받았는데, 폐하께서 은혜를 더하시어, 이제 공의 순서대로 조위를 정하였으니, 신은 이를 고묘에 묻어두길 청하옵니다”라고 주청하니 가납하였다.
봄 정월 을묘일, 지진이 일어나, 강도(羌道),무도도(武都道)의 산이 무너졌다.
(여기의 道란 郡과 같은 행정구역인데, 이민족을 통치하는 변방지역의 행정구명 명칭이다)
여름 6월 병술일 어두워지매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항산왕 불의가 훙했다.
팔수전(八銖錢)을 발행했다.
3년(BC 185) 여름,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범람하니, 유민(流民)이 4천여가나 되었다.
가을, 별이 낮에 보였다.
4년(BC 184) 여름, 소제(少帝)가 스스로 황후의 자식이 아님을 알고, 원망하는 말을 내뱉었더니, 황태후가 그를 궁궐 깊은 곳에 유폐시켰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릇 천하에 만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기개가 하늘과 같고, 아량은 땅과 같다. 상(上)이 기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은 흔연히 그 상을 섬기며, 그 기뻐함이 서로 통하면 천하가 다스려진다. 지금 황제는 병을 앓아 오래토록 그치지 않아, 이에 정신을 잃고 혼미해져, 능히 후사를 이어 종묘를 받들고 제사를 지킬 수 없으니, (그에게) 천하를 맡길수 다. 그를 대신할 자를 의논하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길, “황태후께서 천하를 위해 계책을 내시니, 이것이 종묘사직이 매우 깊이 편안한 까닭입니다.
머릴 조아리며 조칙을 받드옵니다”라 했다.
5월 병신일, 항산왕 홍(弘)을 세워 황제로 삼았다.
5년(BC 183) 봄, 남월왕(南越王) 위타(尉타)가 스스로 남무제(南武帝)라 칭했다.
가을 8월, 회양왕 강(彊)이 훙했다.
9월, 하동(河東)과 상당(上黨)의 기병을 내어 북지(北地)에 주둔시켰다.
6년(BC 182) 봄, 별이 낮에 보였다.
여름 4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장릉령(長陵令)의 질을 2천석으로 높였다.
6월, 장릉에 성을 쌓았다.
흉노가 적도(狄道)를 노략질하고, 아양(阿陽)을 공격했다.
오분전(五分錢)을 발행했다.
7년(BC 181) 겨울 12월, 흉노가 적도를 노략질하고 2천여명을 약취(略取)해갔다.
봄 정월 정축일, 조왕(趙王) 우(友)가 집에 유폐되었다 죽었다(幽死).
기축일, 날이 어두워지매 개기일식이 있었다.
양왕(梁王) 여산(呂産)을 상국으로, 조왕(趙王) 여록(呂祿)을 상장군으로 삼았다.
영릉후(營陵侯) 유택(劉澤)을 세워 낭야왕(琅邪王)으로 삼았다.
여름 5월 신미일, 조칙을 내려 가로되 “소령부인(昭靈夫人)은 태상황비(太上皇妃)요, 무애후(武哀侯)와 선부인(宣夫人)은 고황제의 형과 누이이다. (그들의) 시호를 칭하지 않고 있으니, 존호를 의논하라”고 했다. 승상 진평 등이 소령부인을 추존해 소령후로, 무애후를 추존해 무애왕으로, 선부인을 소애후(昭哀后)로 할 것을 청하였다.
6월, 조왕 회(恢)가 자살했다.
가을 9월, 연왕(燕王) 건(建)이 훙했다.
남월이 장사(長沙)를 침략해 도적질하자, 융려후(隆慮侯) 조(조)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8년(BC 180) 봄, 중알자(中謁者) 장석경(張釋卿)을 열후에 봉했다. 여러 중관(中官) 및 환자서(宦者署) 영(令)·승(丞)에게 모두 관내후(關內侯)의 작과 식읍을 하사했다.
여름 강수와 한수가 범람해, 만여가의 유민이 생겼다.
가을 7월 신사일, 황태후가 미앙궁(未央宮)에서 붕어했다. 유조(遺詔)에 제후·왕에게 각각 천금을 하사하고, 장상·열후부터 아래로 낭·리(郎·吏)에 이르기까지 각각 차등있게 하사했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상장군 여록과 상국 여산은 병권을 천단하고 정사를 겸병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고황제와 약속을 어겼음을 알고 대신이나 제후왕에게 주살될까 두려워,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이 때, 제(濟)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 주허후(周虛侯) 장(章)이 경사(京師=서울)에 있었는데, 여록의 딸을 아내로 삼고 있어서 그 모의를 알게 되자, 사람을 시켜 형인 제왕(濟王)에게 알려 군대를 내어 서쪽으로 향하게 했다. 장은 태위 주발, 승상 진평과 내응하여 여러 여씨들을 주살하고자 했다. 제왕이 마침내 병사를 내고, 낭야왕(琅邪王) 택(澤)을 속여 그 나라의 병사를 내니, 모두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여산과 여록 등이 대장군 관영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그를 치게 했다. 관영이 형양(滎陽)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제왕과 함께 연합해 여씨가 변란을 일으킬 것을 기다려 함께 그들을 주살하자고 알렸다.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이 모의하였는데, 곡주후(曲周侯) 역상(역商)의 아들 기(寄)가 여록과 친하니,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해 역기에게 여록을 속여 말하게 하길 “고제와 여후가 함께 천하를 평정하였는데, 유씨가 9명의 왕을 세운 것과 여씨가 3명의 왕을 세운 것은 모두 대신들이 의논해서입니다. 이 일을 이제 제후·왕들에게 포고한다면, 제후·왕들은 이를 옳다고 여길 것입니다. 지금 태후께선 붕어하시고 황제는 어린데, 족하가 급히 봉국으로 가서 변방을 지키지 않고, 이에 상장군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여기에 머무르니, 이는 대신과 제후들이 의심하는 바입니다. 어찌 속히 장군의 인을 돌려주어, 병사는 태위에게 속하게 하며, 양왕에게 또한 상국의 인을 돌려주고는 대신들과 맹약하여 봉국으로 가지 않습니까? 제나라 병사는 반드시 파할 것이고, 대신들은 편안해지며,족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천리 땅의 왕노릇을 하시니, 이것이 만세의 이익입니다”라 하였다. 여록은 그 계책을 그럴듯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여산 및 여러 여씨 노인들에게 알렸다. 혹자가 이를 불편하게 여겨, 그 계책을 유예하고 결정한 바가 없었다.
여록은 역기를 신임하여 함께 나가 놀다 고모인 여수(呂수)의 집을 지나게되었다. 여수가 노하여 가로되 “너는 장군이면서 군대를 버렸으니, 이제 여씨는 몸둘 곳이 없구나!”라 했다. 이에 주옥이나 보물을 모두 다 내어 집어 내던지며 이르되 “남이 지켜줄 바는 없다!”고 했다.
8월 경신일, 평양후(平陽侯) 줄(줄)이 어사대부의 일을 하면서, 상국 여산을 뵙고 일을 도모했다. 낭중령(郎中令) 가수(賈壽)의 사인(使人)이 제나라로부터 와서 여산을 꾸짖으며 말하길 “왕이 빨리 봉국으로 가지 않아서, 지금 오히려 가고자 한들 어찌 갈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관영과 제(濟)·초(楚)나라가 합종하는 상황을 갖추어 여산에게 고하였다. 평양후 줄이 그 말을 듣고 말타고 달려가,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에게 고하였다.
주발이 북군(北軍)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들어 갈 수 없었다. 양평후(襄平侯) 기통(紀通)은 상부절(尙符節)이었는데, 이에 부절을 지니고 속여서 주발을 북군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주발이 다시 역기와 전객(典客)인 유양(劉揚)에게 영을 내려 여록을 설득하게 하는 말이 “황제께서는 태위가 북군을 지키도록 했고, 족하는 봉국으로 가시고자 하시니, 급히 장군의 인수를 돌려두고 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라 했다. 여록이 마침내 인수를 끌러 전객에게 맡기고 병권을 태위 주발에게 주었다.
태위 주발이 군문(軍門)으로 들어가,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이르길 “여씨를 위하는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右袒), 유씨를 위하는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고 했다. 군이 모두 왼쪽 어깨를 벗었다. 주발이 마침내 북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찍이 남군(南軍)도 있었는데, 승상 진평이 주허후 유장을 불러 주발을 돕게 했다. 주발은 유장(劉章)에게 영을 내려 군문을 감독하게 하고, 평양후 줄에게는 위위(衛尉)에게 고해 상국 여산이 전문(殿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여산은 여록이 이미 북군에서 떠났음을 모르고, 미앙궁에 들어가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전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배회하며 서성거렸다. 평양후가 달려가 (이를) 태위 주발에게 말하였으나, 주발은 오히려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해 감히 그들을 주살하라고 공언하지 못하고, 이에 주허후 유장에게 이르길 “급히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호위하라”고 하였다. 유장이 주발에게 병졸 천여명을 청하여, 미앙궁의 곁 문으로 들어가다 여산이 뜰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해가 저물 쯤, 마침내 여산을 쳤다. 여산이 달아나는데, 하늘에서는 큰 바람이 일어 따르던 관리들이 어지러워져 감히 싸우는 자가 없었다. 여산을 추격하여 낭중부의 서리 숙소 화장실에서 그를 죽였다.
유장이 이미 여산을 죽이니, 황제가 알자에게 영을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 유장을 위문하게 하였다. 유장이 부절을 빼앗고자 하였으나, 알자가 이에 수긍치 않으니, 유장이 이때부터 (알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 다니며, 이 부절로 믿게하며 달려가 장락궁의 위위 여경시(呂更始)를 참수했다. 돌아와 북군에 들어가 다시 태위 주발에게 보고하였다.
주발이 일어나 절하며 유장에게 하례하였다. 말하길 “걱정되는 바는 오직 여산뿐이었는데, 이제 주살되었으니, 천하가 안정될 것이다”라 하였다.
신유일, 여록을 참수하고,여수(呂수)를 때려 죽였다. 부(部)로 나눠 모두 여러 여씨들을 잡아들이고,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 참수했다.
대신들이 서로 은밀히 모의하길 소제(少帝) 및 그 세 아우는 모두 효혜제의 아들이 아니다 하여, 다시 함께 그들을 주살하고 문제(文帝)를 높이어 세웠다. 이에 관한 말은<주발전>·<고오왕(高五王)전>에 있다.
찬(贊)하여 이르길…. “효혜제와 고후의 시대에는 해내(海內)가 전국(戰國)의 고통에서 벗어나, 군신(君臣)이 같이 무위(無爲)하고자 하여서, 혜제는 팔짱만 끼고 있었고, 고후는 여자 임금으로 정사를 보면서 궁궐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천하는 편안하고 형벌은 드물게 쓰일 뿐이요, 백성은 심고 거두는데 힘쓰니, 의식이 더욱 풍족해졌다.”
* 참고할 내용
○ 고황후 여씨
폐후 여씨(廢后 呂氏, 기원전 241년 ~ 기원전 180년)는 전한 고조의 황후이며 전한 혜제의 어머니로, 휘는 치(雉)이며 자는 아후(娥姁)이다. 시호는 고황후(高皇后)였지만, 나중에 광무제가 박탈하였다. 남편인 고조 사후,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어, 여후·여태후 등으로 불린다. ‘중국 삼대 악녀’로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동급으로 취급한다. 중국사상 최초 정식 황후이며, 중국 최초 황태후이자 태황태후이다.
– 폐후 여씨(廢后 呂氏, 皇后 呂氏)
.전한황후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후임자: 효혜황후 장씨
.전한 황태후재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후임자: 효문태후 박씨
.전한 태황태후재위: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80년
.후임자: 효문태후 박씨
.이름: 휘-여치(呂雉)
.시호: 고황후(高皇后, 그러나 광무제가 시호를 박탈)
.출생: 기원전 241년(중국)
.사망: 기원전 180년 8월 18일(장안)
.부친: 여선왕 여공
.배우자: 전한 태조 고제
.자녀: 노원공주, 전한 혜제
여태후의 이름은 여치(呂雉).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인 아버지 여공의 뜻에 따라 진(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 유방 劉邦과 결혼한다.(정장(亭長)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으며, 사마천이 여태후본기에 ‘미천한 신분’이라고 유방을 서술했던 걸 보면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부자였던 여태후가 이 혼인에 불만을 가질 법도 하지만, 그녀는 유방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후에 유방이 패(沛)지역에서 반진(反秦)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에서만 유방을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도 유방을 보필하며, 많은 수모를 겪었다. 우선 유방(劉邦)이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 도망쳐 숨어있을 때는 몰래 그곳을 찾아가 유방을 돕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초(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한(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
○ 생애
– 황후가 될 때까지
현 산둥 성인 단부의 유력자인 여공의 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된 후에 당시 패현 사수의 정장이던 유방에게 시집 가고 여동생인 여수(呂須)는 번쾌(樊噲)에게 시집 갔다. 1남1녀(혜제·노원공주)를 얻었다.
진(秦) 말의 혼란기에 초한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패현에서 시아버지인 유태공이나 아이들과 같이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시아버지와 농사를 도와 아이들을 키웠지만, 팽성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패퇴당했을 때에 유태공과 같이 초 진영에 인질로 잡혔다. 유영(혜제)과 노원공주는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도망하던 중에 유방이 항우 군대의 추격에서 안전히 벗어나고자 혜제와 노원공주를 버리려고 했으나 하후영의 만류로 유방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다.
초한전은 유방의 지배하에 있던 한신의 주도로 초의 진영에 모인 각국을 대상으로 한 와해 공작과 평정이 이루어졌고, 유태공과 여치의 신병 해방이 초점화하였다. 전세는 항우에게 유리하였으나, 기원전 203년에 들어서서는 와해 공작이 성공하여 형세는 역전되었다. 궁지에 빠진 항우는 유방과 강화하였고 여치는 태공과 함께 유방 곁으로 복귀하였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2년에 유방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조를 열어 황제(고조)가 되고 여치는 황후(여후)가 된다. 하지만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였다. 밖으로는 유방이 나서서 반란을 토벌해야했고, 궁중은 후계자를 놓고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유방이 원정으로 부재한 중에 여후는 한신이 반란을 시도하였다고 모함하여 살해하고 자신의 친정인 여씨 일족과 중신 장량의 도움을 받아 황태자가 된 유영의 지위를 안정화하려고 진력했다.
– 인간 돼지, 인체(人彘) 사건
‘인간 돼지’ 사건은 여태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의 여태후본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태후는 혜제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된 이후 다시 정도에서 척부인을 얻어 매우 총애했다. 척부인은 후에 여의를 낳았다. (중략) 고조의 총애를 받은 척부인은 고조의 면전에서 밤낮으로 울며 자기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애원했다. (중략) 척부인의 아들 여의는 조왕이 된 이후 일찍이 몇 번에 걸쳐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대신들의 간언과 유후 장량의 계책으로 태자는 가까스로 폐위되는 운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한 고조 유방이 죽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척부인의 위협으로 척부인에게 원한이 있던 여태후는 조왕 여의를 주살한다. 그러고 나서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음약을 먹인 뒤 그녀를 변소에 내다 버려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 여태후는 그녀를 인체(人彘), 즉 사람 돼지라고 불렀다. 며칠 후 여후는 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구경시킨다. 한참 후에야 혜제는 그것이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 놓아 울었다. 그 후로 혜제는 온종일 술과 여자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결과 병을 얻게 되었다.’
– 여태후의 섭정
고조 유방이 죽은 후 여태후의 아들이자 영(盈)이 즉위하였다. 고조에게는 영(盈)을 제외하고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고조가 죽은 후 여태후에 의해 그 중 4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혜제가 재위한지 7년 만에 병사하자 여태후는 혜제의 어린 아들 유공과 유홍을 차례로 황제로 내세웠다. 이로써 여태후는 고조 사후 15년에 걸쳐 섭정을 시작하였다.
여태후는 자신의 일족들을 관료로 대거 등용하였다. 자신의 형제들을 열후(列侯)에 봉하고 수도와 황궁을 책임지는 북군과 남군을 자신의 일족들이 통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呂國을 세워 자신의 친족을 분봉하였다. 여씨일족의 권세가 다른 제후와 공신들의 권력을 압도하였다.
하지만 BC180년 여태후는 돌연히 병사하였다. 이에 여태후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여러 제후왕들이 연합하여 여씨일족을 몰아내고 소제 유홍을 폐하였다. 그 후 고조의 서자인 代王 恒(문제)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 여치의 전횡
고조가 죽고 혜제 유영이 즉위하면서 여치는 황태후로 후견을 맡았지만,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치는 조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유여의의 모비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었으며 약을 이용하여 귀를 멀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여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고 『史記』에 적혀 있다.
이 일에 충격받은 혜제가 정무를 방치했고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여치는 혜제의 아들인 소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태황태후가 되었다. 친정인 여씨 일족과 진평, 주발을 위시한 한나라 건국공신에게 협력을 받아서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꾀했지만, 이 때부터 각지에서 제후로 봉해져 있던 유방의 서자들을 겁박하고 암살해 여씨 일족의 세력을 키웠다. 먼저 고조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를 짐주로 독살하려 했다. 암살 자체는 이를 눈치챈 혜제가 독이 든 잔을 빼앗아 실패했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낀 제도혜왕은 태후에게 굴복하여 성양군을 노원공주의 화장료로 바쳤다. 태후는 제나라 영토에서 제남군과 낭야군도 빼앗아, 제남군을 여나라로 고치고 자기 조카인 여태를 왕으로 삼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여씨를 제후왕으로 세운 일이다. 그리고 유씨 일족을 위로한답시고 고조의 종제뻘인 유택을 낭야왕으로 삼았다. 고황후 7년(기원전 181년), 자신에게 반발하는 뜻을 품은 고조의 7남 조유왕 유우를 장안으로 소환하고, 감금해 굶겨죽였다. 그리고는 고조의 6남 조공왕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기고, 양나라를 조카 여산에게 주어 여씨의 나라로 만들었다. 조나라로 옮겨간 조공왕에게도 여씨 일족의 감시로 핍박해 자살하게 했고, 조나라를 또 다른 조카 여록에게 주었다. 한편 고조의 8남 연영왕 유건이 죽자, 유건의 서자를 죽이고 또 다른 조카 여통을 연나라 왕으로 삼았다. 그나마 대왕 유항은 어머니 박씨가 고조의 총애를 거의 받지 못했고, 회남여왕 유장은 어머니가 회남여왕을 낳고 바로 죽어 태황태후가 직접 길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반항하는 소제를 살해하고 항산왕 유홍(소제)을 옹립한 탓에 공신들이 반발하였고, 자신들도 살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여치 자신도 이 일을 깨달았으므로, 조카인 여산에게 공신들의 동향을 보고하도록 하고 여씨 일족이 중앙의 병권을 잡는 중직에 기용하고서 죽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과 주발을 위시한 공신들이 황족인 제도혜왕의 아들들 유양, 유장, 유흥거와 남은 유씨 왕들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서, 여씨 일족을 대상으로 죄를 물어 모두 죽이고 유방의 오남인 대왕 유항(문제)을 새로운 황제로 책립하였다. 유홍(소제)도 혜제의 친자가 아니고 여치가 어딘가에서 데리고 온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문제의 책립 전후에 살해당했고 여동생이자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채찍형으로 살해되었다.
여수의 아들인 번항도 살해당한 이 숙청에서 여씨의 피를 이은 사람 중 여치의 딸인 노원공주와 장이의 아들 장오 사이에 태어난 장언만 작위가 왕에서 후로 격하되어 생존하였다.
○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
실로 무섭고도 추진력 있는 여장부였는데, 말년에는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푸른 개가 겨드랑이를 툭 치고 간 후로 병을 앓더니 죽었다. 조왕 여의의 귀신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잔혹한 숙청으로 인한 업보’라는입장과 맞아 떨어져서 후대의 창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기 여태후 본기에 나오는 실제 기록이다.
제후들의 땅을 찢어서 여씨들에게 주거나 황제 교체 과정에서의 잇달은 전횡 등을 저질렀던 여후였기에 공신들은 속으로 여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고, 본인 또한 이걸 알았던 그녀는 자기가 없어지면 다른 유씨나 기타 추종세력이 달려들테니 병권을 반드시 사수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여후의 후계자들은 이런 유지를 이어가면서 권력을 보전할 능력이 없었다.
자신의 장례조차 미루고 일단 움직이라는 당부를 했음에도 여씨들이 관영과 주발에게 겁을 먹어서 일을 벌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여록의 사위인 주허후 유장이 사태를 파악하더니 자기까지 여씨들한테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형인 제애왕에게 정보를 누설했다. 제애왕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여씨는 관영에게 토벌군을 맡겼지만 관영은 오히려 조금 가다가 멈춘 뒤 뒤에서 은밀히 다른 제후들과 연락하여 함께 여씨를 치기로 밀약을 맺는다. 다만, 자기들이 먼저 관중을 공격하자니 반란혐의가 두려웠던 듯 여씨가 난을 일으킨 뒤에 행동하기로 했는데, 정작 여씨도 관영이 배신할까봐 눈치가 보여서 우물쭈물거린다.
이에 양측은 신경전만 벌어지다가 결국 궁 안에서 숙청을 피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주발-진평 등의 유방 직속 공신과 다른 유씨들이 들고 일어나 여씨 일족을 몰살했다. 이때 같은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후의 여동생 여수도 구타당해 죽고 말았다.
이때 주발이 그를 따르던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서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 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 갑옷을 벗어라.” 라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왼쪽 어깨 갑옷을 벗었다고 한다.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좌단(左袒)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참고로, 주발과 진평은 유방이 여후에게 재상감으로 마지막 지명한 인물이며, 그 다음을 물어보는 여후에게 알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여후는 그 이후 재상을 보지 못한 것은 물론, 저 둘에게 세력이 끝났다. 그리고 진짜 저 둘이 재상을 한다. 유방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후일 전한이 멸망한 후 혼란기에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할 때 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는데 이때 시신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 대외 관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간 여걸이었으나, 당시 한나라의 대외적인 국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변방에서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이 득세하며 계속 세력을 불려나갔다. 매일같이 식량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납치당했으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유방과 여후가 2번에 걸쳐 한나라판 대숙청을 한 탓에 인재가 바닥나기도 했고, 일단 초한대전의 타격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수가 타고다닐 말이 없어서 소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아예 한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비참할 정도로 패배한 이후로는 매년 굴욕적이지만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무명, 비단, 술, 곡식 등을 보내주는 등 한나라측에서 처절할 정도로 흉노 측에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굴욕적인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유방이 죽은 뒤 여후가 집권한 시기에도 그 구도가 지속될 정도였다.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흉노의 선우 묵특이 여후에게 보낸 편지)
심지어는 흉노의 선우 묵특으로부터 위와 같은 “우리 둘 다 짝이 없고, 즐길 것도 없는데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면 어떨까”와 같은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편지를 받고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하려고 했고 이때 번쾌가 자신에게 10만의 군대만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며 조정을 선동했는데 다른 신하들도 여후의 눈치를 살피느라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계포만이 혼자 나서서 “번쾌를 참하십시오. 선황제조차 40만이 넘는 병력과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다 죽다가 겨우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번쾌는 고작 태후께 아첨하기 위해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고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나라가 진승에게 반란의 빌미를 준 것이 흉노에게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그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는 발언으로 기를 죽여버렸다. 모두들 여태후의 총애를 받던 번쾌에게 일갈을 한 계포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태후도 내심 지금 흉노를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했으며 계포의 발언에 대해선 불문에 부쳤다.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ㄷ 할까요 3ㅏㅓ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2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여후가 흉노 선우 묵특에게 보낸 답신)
결국 흉노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현실 탓에 꾹꾹 눌러 참으며 위와 같이 “이 몸은 늙어서 모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치욕적인 회신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시켰다. 이후에도 여후는 다시는 흉노 정벌을 입에 담지 않고 그전과 같이 계속 흉노의 비위를 맞춰주는 굴욕적인 외교정책을 지속하게 된다.
한편, 기존에는 한나라의 제후왕국 위치에 있던 남월을 철기 교역 금지로 자극해, 남월이 황제를 자칭하고 한나라의 남쪽 변경을 맡은 장사국이 공격을 받는 단초를 제공했다. 일단 여후도 남월에 반격을 하긴 했지만 되려 습기와 전염병에 피해를 보고 물러나서 조타만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결국 2년 후에 한문제가 즉위하고 육가가 파견된 후에야 화해했다.
○ 평가
여치가 전횡하던 시대에는 황족이나 공신들이 살해당하는 등 정계에서는 피를 부르는 사건이 계속되었던 시대였지만, 여치가 대외 원정을 위시한 대사업을 극력 줄여 국민생활안정에 진력했므로, 시정은 매우 평화롭고 안정되었다. 특히 원정하느라고 고조가 부재한 사이에 건국공신이자 고조의 충복인 한신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허리를 끊어 살해한 일은, 천하가 재분열되어 전쟁하는 일을 막게 되어 그 공적은 크다.
문제와 경제에 의한 문경의 치와 무제 시대의 대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의 정치상·경제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한 동란 때에 적미의 군대는 전한 황제들의 묘를 도굴하여 안치되었던 여치의 사체를 훼손하였다. 광무제는 여치에게서 황후 지위와 시호인 고황후 칭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인 박 씨를 유방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하여서 시호 고황후를 추증하였다.
세간의 평가는 서태후, 가남풍과 함께 (때론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 광무제는 여후의 시호를 박탈하고, 한문제의 어머니 박태후에게 원래 여후의 시호였던 ‘고황후’를 올렸다.
한국사에서 여후에 대한 비판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다름아닌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선덕여왕)편에서 여후와 측천무후가 국정을 장악한 일을 빗대며 선덕여왕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 옹호론
사마천은 여후의 치세에 천하가 평안했다고 평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전쟁에 시달리던 전국시대 ~ 초한전의 난세보다는 황실이 집안싸움하는 것이 더 나았고, 둘째로 한나라초기는 진나라의 억압 통치에 대한 반동으로 되는대로 놔두는 정치, 즉 ‘무위지치’를 추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직무를 방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는 황로(黃老)[29]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이다. 게다가 사마천은 여태후를 제왕들의 행적을 다룬 본기에 편입하는 파격적인 행동까지 보여주었다. 참고로 한서에서도 혜제기가 별도로 빠져있을 뿐, 소제시대는 한서에서마저 고후기(高后紀)라 해서 여후를 본기로 삼았다.
사마천은 “여태후 시절에는 형벌을 시행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라고 여태후의 공로를 칭송했다. 게다가 “권력층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여태후가 통치를 잘한 덕분인지 백성들의 삶은 평안했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마천 개인의 경험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가 다름아닌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한무제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사마천 본인이 흉노와의 전쟁에 열을 올리던 한무제 때문에 성불구자가 되었으니, 여후의 국정 운영과 한무제의 국정 운영이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즉, 사마천이 내린 결론은 ‘황실은 비록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 휩싸였지만, 백성들에 대한 통치는 훌륭했다’이다.
– 비판론
중국 3대 악녀 중 하나.
여후의 치세가 평화롭다곤 하지만 이는 여후가 잘났다기보단 유방과 그 공신들의 영향이 큰 덕이다.
첫째로 전쟁이 없었던 것은 이미 항우가 패망하고 한신 팽월 같은 잠재 반란군이 와해됐기 때문인데 이는 생전 유방의 업적이다.
둘째로 무위지치를 추구한 건 여후가 아니라 소하의 공이 크다. 소하가 법을 제정하고 조참이 이를 따르니 이 또한 그 둘을 재상으로 중용하라 유언한 유방의 혜안이 빛을 발했다고 봐야 한다.
더불어 정치에 능하고 통치를 잘했다는데 실상 여후의 방식이란 게 군권 통제에 의한 공포정치였고, 통치를 잘했다지만 여씨들을 우대하기 위해서라면 숱하게 규칙을 어지럽히고 전횡을 저질렀다. 단지 남겨진 공신들이 유방에 대한 전우애와 스스로 세운 전한에 대한 애착 때문에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여후가 죽을 때까지 참아줬을 뿐이었다. 게다가 여후의 명예는 아들인 혜제의 정통성 문제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건드릴 부분이 아니었다.
갖은 살육을 혜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유비 살해 미수를 보면 이것 또한 의문이 있다. 황제가 마련한 자리에서 대놓고 그 손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혜제를 무시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유여의 일까지는 참았던 혜제도 이 이후로는 여후에게 학을 떼버렸다.
유방에 비해 사적 제재도 빈번해서 진평이 고작 여수의 모함에 떨며 지내는 등 혜제 때까지만 해도 직언에 자유로웠던 한 조정의 분위기는 여후의 대에선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그 번쾌가 여후에게 아첨하기 위해 흉노를 토벌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선동에 앞장서고, 계포가 나설 때까지 모두 눈치를 보느라 호응하기 바빴을 정도. 여후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분명히 성격이 좋아서 선택됐을 한문제를 상대로도 공신들이 지레 겁을 먹어서 말썽이 일어나기도 한다. 유씨와 중신들과 의견을 일치하고 손을 잡고 부국강병에 힘쓰지는 못하고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숙청만 해대는 잔혹함으로 유방 생전에는 포로 생활을 했던 여후를 동정하고 보호했던 공신들이 합심해서 여씨를 몰살시키고, 혹여 외척이 또 기승을 부릴까봐 1등공신이었던 유장 형제와의 밀약까지 뒤집으며 한문제를 옹립할 만큼 그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었다. 여후의 집권은 엄연히 공신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여후는 그들의 권위가 불쾌하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에게 준 도움에 대해 보상해야할 부분에서까지 무시했으니 공신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가차없이 이성왕들을 잡아 죽였으면서 사위 장오가 유방 암살사건에 연루됐을 땐 오히려 장오를 당장 처형하겠다고 벼르는 유방을 밤낮으로 울면서 뜯어말리기도 했다니 영 종잡을 수 없는 인물. 하지만 이는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장오는 여후의 사위였다. 장오가 죽으면 외로워질 딸이 걱정된 것. 실제로 제왕 유비도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를 넘기자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도 했다. 그냥 자기 자식은 귀하고 유방이 다른 여자와 낳은 자식은 없애버린 것이다.
잔혹한 형벌, 보복정치, 종친 편애 등 원래 그랬던 건지, 보고 지내다가 영향이라도 받은 것인지 여후를 포로로 잡았던 항우와 단점이 매우 비슷하다. 여후는 남자 못지 않게 독했지만 그녀 자신이 능력이 있었다기보단 남편인 유방의 공이 컸고 멋모르고 왕위를 찬탈하다가 여씨들을 죽음에 몬 암군이라 할 수 있다.
– 후대의 인식
전 세계의 인터넷에서 ‘중국의 3대 악녀’를 검색하면 여태후가 그곳에 항상 있을 정도로 많은 대중들이 여태후를 악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여자라고 생각한다.(이는 여태후의 인체사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는 반고에 의해 쓰인 중국 고대의 기록인 『한서』에서 잘 드러난다.
“자고이래로 국가가 문란했던 까닭은 황제가 어리고 그 어머니가 장성해서다. 태후가 교만 방자하고 음란하기 이를 데 없으면 이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들은 여태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_ 반고, 『한서』中무제의 말.
“여태후를 만나 지극한 덕이 훼손되었다.” _ 반고, 『한서』
반고는 첫 번째 예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태후 생존 당시의 인물이 아닌 그 이후인 무제의 언급까지 제시하면서 여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두 번째 예시는 반고의 ‘여후 부정’의 사고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반고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 당대의 이데올로기도 여후를 악녀로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본인의 의견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많은 학자들 또한 사마천이 여후를 부정한다는 점을 들어 여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여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 중점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보기에 사마천이라는 학자가 여후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한 무제가 제위에 있을 때 한나라 초기의 이러한 역사를 써서 여후의 졸렬하고 악독한 행동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로하였다. 이는 대단한 담력과 식견이다. 사마천은 조리 있게 여러 사태를 묘사함으로써 여태후라는 반동적인 인물의 형상을 만들어 냈으며 (중략) <여태후 본기>는 한편의 뛰어난 폭로문학이다. _ 양중석, 「사마천이 서술한 여태후 이야기 : 《한서·고후기》와의 비교를 통한 《사기·여태후본기》 읽기」, 『中國文學』, 韓國中國語文學會, 2013, p38.
사마천은 대단한 남성편력을 자랑하던 하희와 같이 부정적인 여성들을 사기에서 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열녀전>에 나올 만한 절부의 이야기들을 거의 수록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진 후 인생관에 변화가 와서 여성에 대한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_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대중적인 논의가 아니긴 하지만, 여태후라는 인물이 잔혹했어도 그녀의 업적이 있어 어느 정도 긍정하는 학자 혹은 대중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왕소군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문학작품 <한궁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궁추에서> 원제가 ‘”명비가 연약하고 착하다 하여 업신여기는 모양인데, 만약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라는 대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 왕소군에 대한 리텔링에서 알 수 있듯이 여태후 생전 당시에 흉노는 한나라에 큰 위협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리텔링’이라는 배경 하에서 여태후의 권위 혹은 능력을 증폭시킨 것이지만, 여기서 주의깊게 볼 점은 여태후가 한을 통치(섭정)했을 때 한의 백성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태후는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