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작곡가이면서 음악극의 모든 대본을 스스로 써내려간 극작가이기도 했고 동시에 철학가이며 혁명가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과 철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고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가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자신의 이념 안에 흡수하고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글이나 음악은 많은 반발을 사기도 하고 때론 호응도 얻었지만 바그너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이뤄냈다.
그의 삶 전반에 걸쳐 바그너는 끝없는 좌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누군가 손 내미는 사람이 있었고 그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조차도 끝없이 바그너를 후원했다.
바그너가 사랑한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남편들이 그러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내게는 하나의 운명이었으며 ; 이후에 무언가를 다시 기꺼워하게 된 것은 하나의 승리였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짓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강력하게 그것에 저항하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 내가 도덕주의자라면, 어떤 명칭을 부여하게 될지 알겠는가! 아마도 자기극복이라는 명칭일 것이다.” ― 『바그너의 경우』, 1888년
바그너는 니체에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첬다. 니체와 바그너의 만남에서 바그너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은 없지만 니체는 그의 사상을 형성해가는 데에 바그너의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니체의 작품에 고스란히 등장하며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바그너는 니체 사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니체와 바그너가 교류하면서 가졌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 문화와 고대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니체의 관심은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극에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를 소재로 사용했다. 음악과 비극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공통적인 해석과 관심은 둘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니체가 고전학 교수에 오를 정도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바그너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니체는 음악의 대가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을 것이다.
니체와 바그너의 이러한 교류를 통해 탄생한 니체의 작품이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이다. 이 작품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작품으로는 ‘그리스적 음악극 (Das griechische Musikdrama, 1870)’, ‘소크라테스와 비극 (Sokrates und die Tragödie, 1870)’ 두 개의 강연문과 ‘비극적 사유의 탄생 (Die Geburt des tragischen Gehanken, 1870)’ 등이 있다. 그리스 비극과 음악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았다면 둘의 관계가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그너는 고대적인 것, 정통 그리스적인 요소를 지닌 극작품을 원했다. 즉 이상적 상황으로서의 신화성이 필요했던 것인데, 바그너에게 그것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이었다. 바그너는 아이스킬로스를 음악정신으로부터의 탄생이라고 명명하고 에우리피데스를 데카당스라고 정의내린다. 바그너의 이러한 해석은 음악적인 근원이 절정을 이루는 아이스킬로스에서 비극이 탄생하고, 음악적인 요소가 퇴화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종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니체는 바그너와 의견을 같이 하며 에우리피데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이 바로 비극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니체는 근대인이 예술을 수용하는 감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내세운다. 근대의 예술은 사람들을 더욱 둔감하게 하고 탐욕스럽게 되도록 할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근대 예술의 부적절한 감성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잘못된 길로 이끌고 사람들은 의지조차 갖지 못한 부적절한 감성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또한 바그너의 영향으로 인해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적 철학 풍토에 반기를 들게 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반시대적 고찰’과 아울러 삶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리는 계기를 구성한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하여 전통적인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적인 대립을 해소시키며 한층 더 나아가서 근본적인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니체 철학에서 후기에 절정을 이루는 초인개념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적 요소를 가장 비가치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니체는 현대문명이 품고 있는 이성 중심의 일차원적인 사고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비극의 본질, 곧 디오니소스적인 내용과 아폴론적인 형식의 조화를 통해서만 삶의 가치가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바그너를 가까이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이었다. 나이로 보아 니체에게 그는 아버지뻘이었는데, 마침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던 자신의 여동생 오틸리에 브로크하우스를 방문하고 있었다. 리츨 교수 부인을 통해 그 여동생을 알게 된 니체는 어렵지 않게 바그너를 만날 수 있었다.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고전 문헌학을 전공한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과 그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의 무한한 환희와 긍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말 그대로 강인한 족속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예술로서, 그 정수리에 아이스킬로스가 바로 바그너였다. 바그너 또한 열렬한 쇼펜하우어 추종자였다. 공통의 대부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바그너는 니체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 니체는 바그너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니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화답했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니체의 능력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에게 헌정된 니체의 첫 번째 저작 ‘비극의 탄생’은 이 시기에 쓴 것이다. 그것은 바그너와의 대화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저작이기도 했다. 이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니체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서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감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바그너는 기뻐했다. 1872년 니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당신은 내 아내를 제외하고는 내 삶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소득입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관계도 순탄치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계는 애증 관계로 바뀌었고 걷잡을 수 없는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10년을 가지 못하고 1876년 이후 서로 앙숙이 되면서 결국 파국을 맞고 말았다. 열광이 컸던 만큼 환멸도 컸다. 그러면 왜 이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는가? 니체는 그가 말년에 낸 ‘바그너의 경우’에서 그 전말을 자세하게 밝혔다. 바그너가 퇴화의 화신으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즉 작품 ‘파르지필’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아이스킬로스, 바그너가 찬연했던 고대 그리스 문화에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교 신에 귀의하면서 새삼 신의 어린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니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프랑스 사람들과 유대인을 증오했다. 그에게는 독일 밖에 없었다. 프랑스 등 라틴 문화를 높게 평가하는 한편 독일 문화의 추진성을 꼬집고 반유대주의를 경멸하고 있던 니체는 이를 유치한 민족주의로 받아들였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니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니체도 변한 것이다. 그는 반계몽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서 벗어나 계몽철학자 볼테르에게 기울어 있었고, 세계 시민주의적 안목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쇼펜하우어의 충직한 사도이자 국수주의자 바그너가 발끈했다. 지극히 사적인 알력까지 끼어들었다.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니체의 주치의가 환자에 대한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본연의 의무를 버리고 니체로서의 수치스런 성적인 문제를 바그너에게 귀띔했고, 바그너가 나서서 니체에게 나름대로 충고를 했던 것이 그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 루트비히 2세
바그너를 얘기할 때에 루트비히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도와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다만, 루트비히는 바그너보다 서른 몇 살이나 젊기 때문에 세대의 차이는 있었다. 아무튼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대단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보통 열렬 팬이 아니라 아주 광적일 정도로 바그너를 숭상했고 바그너의 음악을 애호한 사람이었다. 루트비히 2세는 평소에 바그너를 많이 도와주었다. 빚도 갚아주고 오페라 공연도 후원했으며 나중에는 바이로이트 극장을 짓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까지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다. 바그너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루트비히가 바그너에 대하여 처음 얘기를 들은 것은 왕세자 시절인 13세 때였다. 루트비히의 가정교사였던 사람이 루트비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았는데 이러이러하여 참으로 감동을 받았다고 쓴 것을 읽은 것이 바그너를 알게된 시작이었다. 루트비히는 소년시절부터 예술을 애호하였다. 루트비히 가문의 전통이었다. 화가와 조각가와 건축가와 시인, 그리고 배우와 과학자들을 위하는 전통이었다. 소년 루트비히는 ‘로엔그린’과 관련하여 성배의 기사 이야기, 백조의 기사 이야기, 사악한 오르트루트의 이야기, 순결한 엘자의 이야기 등을 듣고 ‘로엔그린’에 정신을 온통 빼앗겼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로엔그린’과 같은 훌륭한 오페라를 작곡했는가라며 대단히 궁금해 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더 잘 알기 위해 바그너가 쓴 글을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감탄하였다. 루트비히가 16세가 되던 해에 뮌헨에서 ‘로엔그린’이 공연되었다. 루트비히는 만사를 제쳐놓고 ‘로엔그린’을 보러 갔다. 이때 루트비히는 처음으로 바그너를 만났다. 루트비히는 나중에 왕이 되면 바그너를 후원해야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바그너는 루트비히를 보고 앞으로 자기의 활동에 필요한 좋은 후원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함께 바그너는 그가 생각하는 독일 예술의 순수성이 루트비히를 통해 존속되고 발전될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바그너는 물려 받은 재산도 없고 버는 것도 신통치 않은데 빚만 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다보니 빚쟁이들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한 때에 루트비히가 바그너를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인 뮌헨으로 불렀다. 루트비히는 왕이 되자 평소에 숭배하는 바그너를 곁에 두고 그의 아이디어와 사상을 자기의 정치철학에 융합하여 독일인에 의한, 독일만을 위한, 독일의 음악예술을 꽃피우고자 했다. 아무튼 바그너라는 존재는 루트비히의 생활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다. 오죽하면 루트비히에게 바그너가 없다는 것은 마치 지구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루트비히와 바그너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서로 떼어질수 없는 관계였다. 돌이켜보면, 바그너의 생애에 있어서 루트비히는 가장 막강한 후원자였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뛰어난 두뇌에서 나온 산물들을 구현할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바이로이트 극장의 완성을 위해서 거의 1백만 마르크의 재정지원을 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가 빚에 쪼들려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처럼 바그너를 곤경에서 구원해 주었다.
루트비히는 점차 권세를 잃어갔을때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마지막 두 편의 오페라를 완성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바그너는 바이에른 북쪽 끝에 있는 바이로이트에 정착하였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를 그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특별 극장의 적지라고 생각했다. 루트비히는 바이로이트 프로젝트에 상당한 재정적 기여를 했다. 그리고 1876년에 바이로이트에서 공연된 링 사이클 전편을 두번이나 감상하였다. 링 사이클을 보고 난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와 루트비히의 관계는 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러다가 1880년대 후반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파르지팔’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문제로 의견에 차이가 있었다. 그 이후로 바그너와 루트비히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루트비히는 자기의 모든 궁전에 있는 피아노에 검은 휘장을 덮도록 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루트비히는 그의 에너지를 건축으로 돌렸다. 루트비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바그너의 신화적인 오페라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생각하며 짓도록 했다. 노이슈봔슈타인 성은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올 마법의 낙원을 의미했다. 루트비히가 1886년에 세상을 떠날 때 노이슈봔슈타인은 절반 밖에 완성되지 않았다.

○ 요하네스 브람스
일반적으로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는 그들의 관계는 본인들의 의식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 양상이다. 실제로 브람스는 바그너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오페라를 잘 보러 다녔다. 다만 창작 기법 상 서로 다른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바그너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고전주의가 사그러들면서 무대가 독일로 옮겨져 낭만주의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의 이슈는 “포스트 베토벤” 이었다. 누가 과연 베토벤의 뒤를 이을 음악가인가? 였다. 이 때 등장한 음악가들이 베버와 멘델스존, 슈만 등이었으나 이들은 포스트 베토벤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나타난 이들이 바로 브람스와 바그너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주장하는 노선마저 극명하게 달랐다. 바그너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를 연 베버의 뒤를 이어 독일 국민 오페라를 창출해낸 ‘개혁파’ 작곡가였다면, 브람스는 앞 세대의 작곡가인 바흐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선배 음악인들의 노선을 철저히 뒤따라간 ‘보수파’였다.
작품 양식에 있어서도 브람스는 악곡을 형식 또는 소재 별로 구분하여 각각 독립된 가운데 완벽성을 기했으나, 바그너는 음악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다만 종합 예술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데 비해, 브람스는 한 편의 오페라도 남기지 않았고, 브람스가 작곡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천부적인 작곡가형이었다면, 바그너는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팔방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토록 멀리 갈라진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바그너가 1863년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무렵의 일이다. 브람스는 이때 바그너의 조수처럼 사보를 돕고 있었다. 그럴 즈음 브람스에게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바그너 앞에서 본인이 작곡한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 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브람스는 “역시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앞으로 없을 것”이라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브람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바그너 앞에서 두 번째의 연주를 가지게 되면서 그만 깨지게 된다. 예상과 달리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 속에 갇힌 인물”이라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후에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브람스를 “바흐나 작곡해야 할 인물”로 혹평하고 있다.
이 사건은 브람스로 하여금 바그너의 환상을 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후 죽을 때까지 바그너를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바그너가 왜 그처럼 표변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당시 브람스는 빈의 최대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자문제를 폭로해버렸고, 이 때문에 바그너는 한슬릭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슬릭으로부터 수세에 몰린 바그너는 이 때문에 빈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연습을 거듭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바그너가 공격을 받았던 여자 문제란, 그에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여인에게 연정의 뜻이 담긴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각서가 그만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브람스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등의 자필 서한을 비롯한 음악인들의 악보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의 연서가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각서를 브람스가 자신의 후견인처럼 활약하고 있는 한슬릭에게 공개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고, 더구나 그 시기가 바그너가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던 리스트의 둘째 달 코지마에게 아이를 갖게 한 때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폭로 사건은 하필이면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으로 떠들썩한 유럽 음악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졸지에 허를 찔린 바그너는 이에 질세라 브람스의 음악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에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한 것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끈질기게 헐뜯으면서, 그의 음악을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깽깽이로 쏘다닐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브람스의 험담을 해대는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침묵으로 고민만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독설과 공방은 마침내 유럽의 음악계가 양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람스 지지파와 바그너 지지파로 나뉜 것이다.
브람스 지지파는 슈만 부부를 비롯해, 아내를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폰 뷜로, 당대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등이었고, 바그너 쪽으로는 리스트, 니체, 쇼펜하워, 마이어베어 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브람스의 지지파인 한스 폰 뷜로가 그의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기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숭배자였다는 사실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여자 문제에서도 격돌하게 되는데, 베젠동크 부인과의 사랑이 그것이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을 가까이했던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여인들을 사랑은 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이런 브람스를 두고 바그너는 ‘내시’니 ‘고자’니 하는 독설을 퍼부었는데, 하필 이 두 사람이 모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그너가 브람스의 명예박사학위 수여까지도 고깝게 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한슬릭의 탓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바그너의 진보성을 띤 음악을 고깝게 보던 한슬릭은 바그너를 대상으로 한 대항마로 브람스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언론과 평론가 그룹이 별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서 싸움을 붙이는 현상이 이와 유사하다.
어쨌거나 그간 우리나라에는 브람스가 이렇게 바그너에게 당했던 사실만 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브람스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바그너가 죽은 이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브람스파가 바그너파를 박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브람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던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을 가혹하게 비판하여 그에게 많은 시련과 좌절을 안겼다. 또 브람스는 브루크너의 수제자였던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 한스 로트가 베토벤상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그의 교향곡 1번의 초연을 좌절시켰다. 고아로 여동생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했던 불운한 청년 한스 로트는 이 충격으로 브람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소리치고 다니다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요절했다.
또한 브람스파는 젊은 구스타프 말러가 “탄식의 노래”로 베토벤상을 받는 것도 가로막았다. 말러는 베토벤상에서 떨어지면서 전업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고 지휘자를 생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말러는 평생에 걸쳐 브람스의 음악을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말러는 자신의 선배였던 한스 로트가 브람스에 의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목격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브람스와 한슬릭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었다. 말러는 속으로는 브람스를 고깝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브람스를 비위를 잘 맞춰주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함부르크 지휘자 시절 말러는 최만년의 브람스의 말동무가 되어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브람스의 얘기를 들어주는 말동무가 되었다. 비록 말러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브람스의 뒤담화를 깠지만… 여하튼 덕분에 브람스는 젊은 지휘자 말러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고 한슬릭 등에게 말러의 지휘를 자주 칭찬했다. 이렇게 브람스파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된 말러는 승승장구하여 1897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당시 빈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거론되던 인물들은 펠릭스 모틀, 헤르만 레비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바그너의 제자들이었다. 빈 음악계의 거물 한슬릭은 이들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당시 브람스파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장파 지휘자 말러를 밀어 그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랬다고 브람스가 바그너의 음악적 영향력까지 인정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브람스의 음악적 동지이기도 했던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역시 한 때는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그것은 드보르자크의 대부분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었고, 그런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을 브람스가 밀어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던 게 아마도 당시 음악계의 상황이 바그너라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권을 브람스조차도 벗어나기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브람스가 눈감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 주세페 베르디
바그너에게 있어 동갑내기 베르디는 일생의 라이벌이었다. 다만 이들은 인생에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서로 피했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말도 아꼈다. 단지 베르디는 바그너를 겨냥해 “엉뚱하게 다른 방향에서 헤매고 있다”며 그의 작품을 에둘러 비판했다. 바그너도 “아무 대사를 하지 않는 게 가장 낫다”며 대사 위주의 베르디 작품을 은근히 비꼬았다. 하지만 베르디는 바그너가 먼저 사망하자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악가가 죽었다고 비통해했다고 한다.
바그너와 베르디는 ‘민족주의 오페라’를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다. ‘민족주의의 시대’라 불리던 19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것은 ‘민족’ 키워드와 맞닿아 있었다. 특히 바그너와 베르디가 태어난 독일과 이탈리아는 통일조차 이루지 못해 통일에 대한 열망과 겹쳐 민족주의가 가장 활발한 국가였다. 이에 베르디는 또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각 국가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베르디는 ‘아틸라’, ‘나부코’ 등 이탈리아 역사의 위대한 승리 장면을 담은 오페라를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자부심과 리소르지멘토 (이탈리아 독립운동)를 부추겼다.이 같은 민족주의적 요소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했지만, 베르디의 음악은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지 않았다. 이경분 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교수는 “집단 코러스, 신화적 줄거리 등 나치의 선전 사상에 적합했던 바그너 오페라에 비해 베르디의 그것은 파쇼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바그너와 베르디의 음악적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독일은 오페라의 줄거리와 드라마로써의 오페라를 강조한다. 반면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노래와 가수를 중심으로 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작품의 줄거리보다는 음악적 탁월함이 강조된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은 “바그너는 ‘음악극’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일생동안 추구해왔지만, 베르디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등장인물의 등장, 행위, 퇴장 등을 짜임새있게 연결하기 위해 선율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바그너 오페라는 대체로 긴 호흡을 가지며 막 사이에 관객들이 박수를 잘 치지 않는다. 반면 베르디는 ‘바그너에 비해’ 뚜렷한 음악적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음악적 형식이나 선율의 짜임이 아닌 ‘휴머니즘’이다. 때문에 비범한 인간이나 신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바그너 오페라와 달리 베르디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예 (‘아이다’) 등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두 작곡가 중 더 폭넓게 사랑을 받은 쪽은 베르디이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의 베르디 오페라는 세계 어느 나라의 오페라극장에서도 핵심 레퍼토리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베르디는 푸치니와 더불어 오페라 공연의 대부분을 차지해왔다. 반면, 독일어로 연주되는 바그너의 악극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국내에서 전막 공연된 적이 없었다. 무대 장치와 연기 없이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전막 연주한 것도 서울시향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처음이었다.
바그너가 국내에서 베르디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 않는 이유는 연주상의 어려움이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격음이 많은 독일어는 모음이 많은 이탈리아어에 비해 노래하기가 어렵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아리아를 반주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바그너 악극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두텁게 쓰여 균형을 맞추려면 목에 무리가 갈 수 있다. 바그너의 대표작인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의 경우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지는 4부작을 모두 연주하는 데에 휴식시간을 제외한 공연시간만 약 16시간이나 소요된다. 후기낭만주의적 불협화성, 극의 철학적 함의를 이해하기 까다롭다는 점도 연주와 감상을 제한하는 요인이 됐다. 보통 바그너의 작품에는 전문적인 ‘바그너 가수’가 출연하는데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유학해 독일어 발성을 잘하는 ‘바그너 가수’가 드물다. 바그너 작품에서는 금관악기의 역할이 중요한데, 국내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금관 파트가 취약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 마틸데 베젠동크
마틸데 베젠동크는 독일의 시인 겸 작가이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친구로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정부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다섯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것을 ‘베젠동크 가곡’ (Wesendonck Lieder)이라고 부른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작품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던져준 주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베젠동크와의 관계가 영감을 주어 완성한 오페라다. 한편, 바그너의 사생활과 관련하여서는 첫번째 부인인 민나 플라너과 바그너가 이혼하게된 원인을 제공해 준 여인이었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예쁘게도 생겼지만 대단히 지성적이며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 조예가 깊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마틸데 베젠동크의 원래 이름은 아네스 마틸데 루케마이어 (Agnes Mathilde Luckemeyer)이다. 독일 라인란트의 엘버펠트 (Elberfeld)라는 곳에서 1828년 12월 23일에 태어났다. 엘버펠트는 오늘날 독일 라인지방에 있는 부퍼탈 (Wuppertal)의 한 파트이다. 아네스 마틸데 루케마이어는 오토 베벤동크라는 스위스의 부유한 비단상인과 결혼하여 마틸데 베젠동크가 되었다. 오토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를 1852년에 취리히에서 만났다.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가 편안하게 오페라를 작곡할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이들의 저택에 있는 작은 별채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로부터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별채에서 기거하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57년부터는 예쁘고 지성적인 베젠동크 부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사랑하게 되었다. 아무튼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는 통상적인 친구, 또는 청년 작곡가를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의 부인이라는 것을 뛰어 넘어 애틋하고 애절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바그너는 그때 ‘니벨룽의 반지’의 작곡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과의 열애로 인하여 ‘니벨룽의 반지’는 잠시 넣어 두고 대신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하여 그리고 싶었던지 저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1858년에 민나는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보내는 로맨틱한 편지를 발견하고 바그너의 부정함을 따지고 들었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는 마치 시베리아처럼 냉랭해졌다. 결국 바그너는 여행이나 가자고 생각하여 혼자서 취리히를 거쳐 베니스로 갔고 민나는 딸과 부모가 살고 있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갔다. 딸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민나의 딸은 민나가 바그너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작소니 왕국 근위대의 어떤 장교와 좋아 지내다가 낳은 아이이다. 그러므로 바그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딸이다. 마틸데는 자서전적인 글에서 바그너가 취리히에 와서 머물렀던 일에 대하여 자세히 적어 놓았으나 바그너와 섬싱이 있었다는 얘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이와 함께 민나와는 서로 직접 다투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그런 얘기도 자서전에 하나도 쓰지 않았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1902년 8월 31일에 오스트리아의 알트뮌스터 (Altmunster)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였다. 마틸데는 독일 본 (Bonn)의 알텐 프리드호프 (Alten Friedhof)에 있는 베젠동크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