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 본기
8. 고조본기(高祖本紀)
사마천 사기-본기의 여덟 번째 기록.
고조본기(高祖本紀)는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 유방이 거병하기 전 시절부터 중국을 재통일하고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 한고조 유방
[평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항우는 포학하였으나 한왕 유방(劉邦)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으며 촉한(蜀漢) 땅에서 분발하여 관중으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항우를 죽이고 제업을 이루자 천하는 비로소 안정되었고 엄혹한 진나라의 법제를 고치고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었다. 이에 고조본기(高祖本紀) 제8을 지었다.」라고 했다. 사마천이 본 편을 저술한 기본 정신이다. 고조본기는 유방(劉邦)이 항우에게 어떻게 싸움에서 승리를 취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한나라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묘사하고 있으며, 동시에 한제국의 창건자 유방이 통일천하의 위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행한 중요한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서술했다.
사마천은 두 사람을 확실하고, 강열하게 대비시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방법은 사마천이 선명하고 강렬한 대비의 수법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항우와 유방이 군사들을 이끌고 두 대로 나뉘어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 항우군의 행동에 대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윽고 반진군의 대장 송의(宋義)를 살해한 항우(項羽)는 스스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경포(黥布) 등 여러 장수들을 부하로 삼아 진장 왕리(王離)와 그 군사들을 물리치고, 장한(章邯)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반진군의 영수가 될 수 있었다.」
사마천(司馬遷)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항우(項羽)의 경우 단순한 군사 방면의 성공인데 비해, 유방을 묘사할 때는 그의 군사적인 책략 외에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유방은 그 군대가 이르는 곳은 어디나 노략질을 금하게 했다.」「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기뻐함으로 해서 진군은 스스로 와해되어 싸움에서 크게 이길 수 있었다.」라고 대비시킴으로 해서 유방(劉邦), 항우(項羽) 및 각 제후들이 행한 책략을 예로 들었다.
항우의 경우, 휘하의 장수가 스스로 제후왕을 지칭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유방의 경우는 한신이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할 때 불같이 화를 내며 직접 출전하여 한신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장량의 깨우침을 받고 바로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가왕 대신에 정식으로 제왕(齊王)의 인수(印綬)를 주어 장량을 사자로 삼아 한신을 제왕으로 임명했다. 진나라가 무너진 틈을 타서 일어난 군웅들이 천하를 놓고 다투는 형세 하에서 다른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 연합한 것은 유방이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난 점이다. 본 고조본기는 유방이 천하를 안정시킨 후 공신들에게 말해 후에 인구에 회자(膾炙)된 그의 용인술을 특별히 기재했다.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능력은은 내가 소하(蕭何)보다 못하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인중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소.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던 능력 때문이요.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오.」
이 말도 유방과 항우의 용인술에 대해 비교한 것이다. 항우는 고집불통으로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제멋대임에 반해 유방은 마음이 겸허해서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았다. 이와 같은 수많은 대비를 통해 그 의미가 확연히 들어 나도록 함으로 해서 결국은 초한쟁패의 필연적인 귀결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다.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옳지 않은 행동을 숨기지 않는다(不虛美, 不隱惡).」라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실록’ 정신」은 바로 사기 전편을 꿰뚫고 있는 기본원칙이다. 그러나 본편은 유방의 성공에 중점을 둠으로 해서, 그의 인품과 기타 방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그의 교활하고 사기성 있는 행동, 거짓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며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한 행동 등은 사기의 다른 편에서 서로 번갈아 가며 표현했으나 본편에서는 적극적으로 많이 기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편도 상세히 읽다보면 희귀하지만 그런 기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조가 정장(亭長)의 신분이었을 때 한 노인이 고조의 모든 식구들에게 관상을 봤다. 고조의 관상을 본 노인이「당신의 관상은 너무 귀해 말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고조는 너무 기뻐 감격하며「진실로 노인의 말처럼 귀하게 된다면, 이 은덕을 잊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 말 뒤에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더 써넣었다.「이윽고 고조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때는 그 노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이 한 구절은 비록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사마천은 고조에 대해 포폄(褒貶)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고조본기(高祖本紀)>는 그 구성상에도 특색이 있다. 이경성(李景星)은 그의 저서 <사기논문(史記論文)>에서 「항우본기(項羽本紀)는 사건 하나마다 단락을 이루고 그것을 모두 합하면 훌륭한 한 편이 되나, 고조본기(高祖本紀) 안의 모든 이야기는 어수선하고 연결성이 없어 각기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정연한 것 같으면서도 어지러워 보이고, 어지러운 것 같으면서 정연하여 결코 밖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며 사마천의 절묘한 서술 방법을 극찬했다.(文白對照全譯史記)
1. 교룡(蛟龍)의 아들
한고조 유방(劉邦)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성은 유(劉)고 자는 계(季)다. 그 부친은 태공(太公)이고 그 모친은 유온(劉媼)이다. 일찍이 유온이 큰 연못가에서 쉬고 있다가 잠이 들어 꿈속에서 신(神)을 만났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여 어두워졌다. 곁에 있던 태공(太公)이 보니 교룡(蛟龍)이 유온의 배 위에 있었다. 곧이어 유온에 몸에 태기가 있어 애를 낳으니 이가 고조다.
고조라는 위인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넓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멋있는 코밑수염과 구레나룻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반점이 있었다. 사람이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뭣인가를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마음은 활달하고 호방했다. 평소에 커다란 포부를 지니고 다녔던 고조는 일반 사람들이 했던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윽고 장성하게 되자 시험을 거쳐 관리가 되어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고조는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함부로 대하며 깔보았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색을 밝혔다. 항상 왕온(王媼)과 무부(武負)의 집에 가서 외상술을 마시다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고조의 몸 위에 용의 기운이 서리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놀라곤 했다. 고조가 그 두 사람의 집을 번갈아 다니며 술을 마실 때는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게 되어 매상은 몇 배나 많이 올랐다. 두 사람이 고조의 기이한 모습을 본 이후로는 연말이 되면 항상 그의 외상장부를 찢어버리곤 했다.
고조가 일찍이 징발되어 함양(咸陽)에서 요역을 하고 있을 때, 한 번은 황제의 행차를 볼 수 있는 허락을 받고 진시황의 행차를 구경할 수 있었다. 고조가 그 행차를 보고 길게 탄식하며 말했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래야 하지 않겠나?」
2. 呂公招婿(여공초서)
– 여공의 사위가 되다.
선보(單父) 사람 여공(呂公)이 패현의 현령과 친했기 때문에 원수를 피해 와서 그의 손님이 되어 머물다가 결국 가족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패현의 호걸과 관리들은 그들의 현령이 여공을 손님으로 극진히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와서 축하를 드릴 때 하례금을 바쳤다. 그때 패현의 주리(主吏)로 있던 소하(蕭何)는 여공을 위해 들어오는 돈과 재물을 관리하고 있었다. 소하가 현의 여러 유력자들에게 말했다.
「가져온 예물이 천 전(錢) 이하인 사람은 당하(堂下)에 앉으시오.」
정장이었던 고조는 관아의 뭇 아전들을 업신여겼음으로 거짓으로 이름첩에 ‘하례금 만전’ 이라고 써넣었으나 사실은 한 푼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름첩을 받아 살펴본 여공(呂公)은 고조가 1만전의 하례금을 낸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이윽고 고조가 들어오자 자리에 황망히 일어나 문 앞에까지 나가 맞이했다. 여공이란 사람은 평소에 남의 관상을 보기를 좋아했다. 고조의 관상과 골상을 살펴본 여공은 더욱 극진히 대하며 그를 안내하여 좌석에 앉게 했다. 소하가 보고 말했다.
「유계는 원래 큰소리를 자주 치나 이루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고조가 여러 손님들을 무시하여 좌당으로 들어가더니 거리낌 없이 상좌에 앉아 결코 양보하는 기색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술자리가 끝나갈 즈음 여공은 고조에게 눈짓을 해서 뒤에 남아 있도록 했다. 여공이 고조를 향해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의 관상을 보기를 좋아했소.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관상을 봐 왔지만 공과 같은 상을 본 적이 없소. 원컨대 자중자애 하시오. 마침 저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데려가 공의 집안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아주었으면 하오.」
이윽고 술좌석이 파해 내실로 들어간 여공을 본 그의 부인이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매일 우리 딸이 뛰어난 애라고 하면서 귀인에게 시집보내겠다 하셨습니다. 더욱이 당신과 친한 패현(沛縣)의 현령이 청한 혼사도 허락하지 않았으면서, 오늘은 어찌하여 유계(劉季) 같은 자에게 주기로 허락했습니까?」
여공(呂公)이 대답했다.
「이 일은 아녀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오.」
여공은 결국은 그의 딸을 유계에게 시집보냈다. 여공의 딸이 후에 여태후(呂太后)로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효혜제(孝惠帝) 유영(劉盈)은 후에 고조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다.
3. 斬蛇起義(참사기의)
– 백사를 참하고 기의하다.
고조가 정장으로 있을 때 늘상 휴가를 청하여 집에 와 있곤 했다. 고조가 집에 와 있던 어느 날, 두 애들을 데리고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던 여후에게 길을 가던 노인 한 사람이 물 한 그릇을 청했다. 여후가 그 노인에게 마실 물을 주고 음식을 주어 요기를 시켰다. 노인이 여후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상을 말해주었다.
「부인은 참으로 천하에 귀한 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에 여후가 두 애들을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노인이 효혜제(孝惠帝)의 상을 보더니 말했다.
「부인이 귀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사내 아이 때문입니다.」
그 노인이 노원공주의 상도 역시 귀할 상이라고 했다. 노인이 간 후에 마침 행랑채에서 나온 고조에게 여후가 지나가는 손님이 자기와 애들의 관상을 보고 모두 귀하게 될 상이라고 했던 일을 상세하게 고했다. 그 노인이 어디 있냐고 고조가 묻자 여후는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고조는 바로 그 노인의 뒤를 쫓아가 불러 세우고 자기의 관상은 어떠냐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지금 막 당신의 얼굴을 보니 그 귀부인과 자녀들의 상과 비슷합니다. 당신의 관상은 간단히 말해 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조가 감사하다고 하며 말했다.
「진실로 제가 노인장의 말대로 그리 된다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후에 고조가 과연 귀하게 되어 그 노인을 찾았으나 그때는 행방이 묘연해 찾을 수가 없었다.
고조가 정장(亭長)이 되자 그 밑의 구도(寇盜)를 설(薛)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을 만들어오게 하여 항상 출타시에는 머리에 쓰고 다녔다.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도 계속 쓰고 다녔음으로 사람들은 그 관의 이름을 「유씨관(劉氏冠)」이라고 불렀다.
고조가 정장의 신분으로 패현의 형도(刑徒)들을 여산(驪山)의 진시황릉 노역장에 압송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도중에 많은 형도들이 도망치자 고조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여산에 도착할 때쯤이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들의 행렬이 풍읍(豊邑)의 서쪽에 있는 큰 연못가에 당도하여 행진을 멈추고 술을 마시다가, 밤이 되자 형도들을 풀어주며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 나 역시 도망칠 것이다.」
형도(刑徒)들 중 십여 명의 장사들이 고조의 뒤를 따르기를 원했다. 고조가 술에 취해 한 밤중에 호수가의 오솔길을 걷다가 한 사람을 앞으로 내 보내 길을 찾게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조에게 고했다.
「앞에 큰 뱀이 들어 누워 길을 막고 있습니다. 돌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술에 취한 고조가 말했다.
「장사가 길을 가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고조가 앞서더니 칼을 뽑아 그 뱀을 내리쳤다. 그 뱀은 두 동강이가 나고 길이 뚫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행이 몇 리를 더 가다가 취기가 돈 고조는 땅에 들어 누어 잠이 들었다. 고조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뱀을 죽인 장소에 이르자, 노파 한 사람이 소리 높여 슬피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우느냐고 묻자 노파가 대답했다.
「어떤 사람에게 살해된 내 아들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물었다.
「당신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살해되었단 말이오?」
노파가 대답했다.
「내 아들은 바로 백제(白帝)의 아들이오. 뱀으로 변하여 길을 가고 있는데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화를 당하고 말았소.」
노파가 자기들을 놀리는 줄로 생각한 사람들이 혼내주려고 하자 갑자기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고조가 누워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는 고조는 술에서 깨어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본 일을 모두 고조에게 이야기했다. 고조가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즐거워하며 스스로 그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고조를 따랐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고조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진시황이 일찍이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라고 하면서 동쪽으로 순수하여 그 기운을 누르려고 했다. 고조는 즉시 그 화를 스스로 느끼고 도망쳐, 망(芒)과 탕(碭)9) 두 산 사이의 연못가에 있는 석굴 사이에 몸을 숨겼다. 여후가 사람들을 데리고 고조를 찾아 나설 때마다 항상 쉽게 찾아냈다. 고조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여후가 대답했다.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이렇게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고조가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패현의 많은 자제들이 고조를 따르려고 했다.
4. 擁立沛公(옹립패공)
– 패현의 기의군 대장으로 옹립되다.
진나라 이세황제 원년 가을, 진승(陳勝) 등이 기(蘄)에서 거사를 일으키고 진성(陳城)으로 들어가 왕이 되어 나라이름을 장초(張楚)라 했다. 진성 주위의 여러 군현들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그 수령들을 죽이고 진섭의 거사에 호응하였다. 이를 두려워 한 패현의 현령은 자기 고을을 바쳐 진섭의 거사에 호응하려고 했다. 그래서 번쾌가 고조를 불러왔다. 그러나 후에 현령은 그들이 변란이 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성문을 닫아걸고 고조 일행의 입성을 막고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고 했다. 소하와 조참 두 사람은 두려워하여 성벽을 넘어 도망쳐 고조에게 몸을 의탁했다. 고조가 비단에 글을 써서 화살에 메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내며 패현의 부로(父老)들에게 말했다.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에 신음한 지가 이미 오래라! 오늘 패현의 부로 당신들이 현령을 위해 성을 지키고 있으나 이미 일제히 거사를 일으킨 제후들이 패현을 도륙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패현 사람들은 모두 힘을 합쳐 현령을 죽이고 그 자제들 중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뽑아 제후들에게 호응해야 그대들의 집안은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 패현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부자가 모두 도륙 당해 만사가 무의미하게 될 뿐이다.」
이에 패현의 부로들이 그 자제들을 이끌고 그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고조의 일행을 맞아들였다. 패현의 부로들이 고조를 패현의 현령으로 세우려고 했다. 고조가 말했다.
「바야흐로 천하대란이 일어나 제후들이 일제히 반진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그 장수로 세운다면 한 번 싸움에 모든 일이 허사가 될 것입니다. 나는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 부형들과 자제들의 목숨을 온전히 보전시키지 못할 것이 걱정되어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대사라 원컨대, 다시 서로 상의하여 다른 사람을 뽑으시기 바랍니다.」
소하와 조참 등은 모두 문관들이고, 자기 목숨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만일 일이 실패했을 경우, 후에 진나라가 그 종족들을 멸족시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모든 일을 고조에게 양보했다. 패현의 부로들이 고조에게 다시 청하며 말했다.
「평소에 우리가 듣기에 당신에게는 여러 가지 진기한 일이 많이 일어나 귀하게 될 신분이며, 더욱이 점을 친 결과 당신보다 점괘가 더 좋게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고조가 계속해서 사양했으나 감히 우두머리가 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음으로 해서 결국은 고조가 추대되어 패공(沛公)이라 칭하게 되었다. 패현의 관아 뜰에 사당을 세운 다음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희생의 피로 북과 깃발에 발랐다. 이어서 패공을 나타내는 깃발은 모두 적색으로 삼았다. 이는 예전에 고조가 죽인 뱀이 백제의 아들이고, 그 뱀을 죽인 자기는 적제의 아들임을 나타내 적색을 숭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소하(蕭何), 조참(曺參), 번쾌(樊噲)와 같은 젊고 뛰어난 젊은 지방관리들나 장사들이 패현의 자제 2-3천 명을 이끌고 호릉(胡陵)과 방여(方輿)을 공격하고 다시 돌아와 풍읍(豊邑)을 지켰다.
5. 雍齒降魏(옹치항위)
– 풍읍을 들어 위나라에 항복한 옹치로 인해 근거지를 잃은 고조
진 이세황제 2년, 즉 기원전 208년, 진섭(陳涉)의 장수 주장(周章)이 진나라 함곡관을 돌파하고 희수(戱水) 강안까지 당도했다가 장한의 반격으로 싸움에 지고 다시 돌아왔다. 당시 연(燕), 조(趙), 제(齊), 위(魏) 등의 땅으로 진격하여 평정한 진섭의 장령들은 모두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한편 남쪽의 오현(吳縣)에서는 항량(項梁)과 항우(項羽)가 일어났다. 진나라의 사수군감(泗水郡監) 평(平)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풍읍(豊邑)을 포위했다. 이틀 후에 패공이 성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진군을 무찔렀다. 이어서 옹치(雍齒)에게 명하여 풍읍을 지키도록 하고 자기는 군사를 이끌고 설(薛)을 공격하기 위해 출전했다. 사수군 태수 장(壯)이 설에서 패공과의 싸움에서 지고 척읍(戚邑)으로 달아났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수군 태수를 붙잡아 죽였다. 패공이 군사들을 이끌고 항보(亢父)를 거쳐 방여(方輿)에 이르렀으나 한 번의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승이 위(魏)나라 사람 주불(周巿)을 시켜 옛 위나라 땅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이에 주불은 사자를 풍읍의 옹치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했다.
「풍읍은 옛날 위나라가 천도한 고을이다. 지금 위나라의 수십 개의 성은 이미 평정되었다. 그대가 즉시 위나라에 항복한다면, 위(魏)나라는 그대를 후로 삼아 풍읍을 맡길 것이나, 그렇지 않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풍읍은 도륙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원래 패공의 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옹치는 위나라가 항복을 권유해 오자 즉시 패공을 배반하고 풍읍을 바쳐 항복해 버렸다.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풍읍에 돌아왔으나 결코 다시 취할 수 없었다. 패공이 병이 들어 패현(沛縣)으로 돌아갔다. 패공은 옹치와 풍읍의 자제들의 배반을 매우 원통해했다. 이윽고 동양(東陽) 사람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를 가왕(假王)으로 세우고 유(留)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귀의하고 군사를 얻어 풍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진승(陳勝)의 군대를 추격하던 진나라 장군 장한의 별장 사마이(司馬夷)가 별동대를 이끌고 북쪽의 초나라 땅으로 진격하여 상현(相縣)을 도륙하고 탕(碭)에 이르렀다. 패공(沛公)이 동양의 영군(寧君)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군과 소(蕭)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후퇴하면서 군사를 모집해 유(留)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한 다음, 다시 탕으로 진격하여 3일 간의 싸움 끝에 탕성(碭城)을 점령했다. 탕성의 장정 중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5-6천명을 얻었다. 이어서 하읍(下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계속 진군하여 풍읍 부근에 주둔했다.
6. 項梁敗死(항량패사)
– 서초군의 영수 항량이 진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다.
항량이 서초군(西楚軍)을 이끌고 설(薛)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패공은 백여 기의 기병을 대동하고 그의 진영을 방문했다. 항량은 패공에게 5천 명의 군사와 오대부(五大夫) 급에 해당하는 장수 10명을 보태주었다. 패공이 자기 진영으로 돌아와 군사들을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다.
패공이 항량의 밑으로 들어간지 한 달쯤 지나자 항우가 양성(襄城)을 함락시키고 개선했다. 항량은 각 지역의 장수들을 모두 설현으로 소집시켰다. 진왕(陳王) 진승이 확실히 죽은 것을 확인한 항량은 초나라 왕족의 후예인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왕으로 세우고 도읍을 우태(盱胎)에 정해 그곳에 머물게 했다.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 되었다. 설현에 주둔한지 수개월이 지나자 초군은 북쪽의 항보(亢父)를 공격하고 계속하여 북진하여 동아(東阿)의 제군을 구했다. 제군(齊軍)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초군은 단독으로 진군의 패잔병 뒤를 추격했다. 항량은 항우와 패공에게 별도의 군사를 내주며 성양(城陽)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성양(城陽)을 함락시켰다. 복양(濮陽)의 동쪽에 주둔하던 항량의 본대는 진군과 교전하여 크게 이겼다.
전열을 다시 정비한 진군은 복양성 주위에 물을 끌어 들여 해자를 만들어 굳게 지켰다. 항량의 초군은 복양에서 물러 나와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한편 성양을 함락시킨 패공과 항우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옹구(雍丘) 부근에서 진군과 싸워 대파하고 삼천군 태수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다시 회군하면서 외황(外黃)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항량이 계속해서 진군과의 싸움에서 이기자 얼굴에 교만한 기색을 띄우기 시작했다. 송의(宋義)가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진나라로부터 증원군을 얻게 된 장한(章邯)은 야밤에 함매(銜枚)를 입에 물리고 항량군을 기습했다. 초군은 정도에서 크게 패하고 항량은 싸움 중에 죽었다. 그때 진류(陳留)를 공격하고 있던 패공과 항우는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여신(呂臣)과 함께 동쪽으로 회군했다. 여신은 팽성(彭城)의 동쪽에, 항우는 그 서쪽에, 패공은 탕에 주둔했다.
항량의 초군을 대파한 장한은 초나라 땅의 반란군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하수를 건너 북쪽의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진군의 공격으로 크게 무너졌다. 당시의 조왕 조헐(趙歇)은 장이와 함께 거록(巨鹿)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렸다. 진장 왕리(王離)가 그 뒤를 추격하여 거록성을 포위했다. 사람들은 왕리의 군사들을 하북군(河北軍)이라 불렀다.
7. 先入定關者王之(선입정관자왕지)
– 관중을 먼저 들어가 평정한 자가 왕이 되리라!
진나라 이세황제 3년, 기원전 207년, 항량군이 진군과의 싸움에 패배한 것을 본 초회왕은 두려움에 떨며, 그 도성을 우태(盱胎)에서 팽성(彭城)으로 옮기고 여신과 항우의 군사들을 모두 합하여 자기 휘하에 두고 직접 관장했다. 이어서 패공을 탕군(碭郡)의 수장으로 하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군사들을 지휘하도록 했다. 항우는 장안후(長安侯)에 봉해 노공(魯公)이라 칭했다. 여신(呂臣)은 사도(司徒)로, 그의 부친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으로 삼았다.
거록성에서 진군에게 포위 당한 조나라가 여러 차례에 걸쳐 구원을 청하자 회왕은 즉시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 범증을 말장으로 삼아 조나라에 구원병을 일으켰다. 한편 패공에게는 서쪽의 땅을 공략하여 관중으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회왕은 여러 장수들 앞에서 ‘먼저 관중에 들어간 자를 그곳의 왕으로 삼는다.’라는 약속을 했다.
당시 진나라 군사는 강하여 승승장구하여 패배한 기의군 뒤를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음으로, 여러 장수들은 아무도 기꺼이 관중으로 진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항우만이 그의 삼촌 항량이 진군에 의해 전사했음을 원통히 생각하여 패공과 같이 진나라를 향해 서진하려고 했다. 회왕이 주위 사람들에게 묻자 노장들이 말했다.
「항우라는 위인은 날래고 용감하며, 간교하고 남을 잘 해칩니다. 항우가 옛날 양성(襄城)을 공격할 때, 성이 떨어지자 그곳의 성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습니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풀뿌리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무참히 살육을 행했습니다. 더욱이 초나라가 여러 번 진(秦)나라 땅으로 진공했으나 진승(陳勝)이나 항량(項梁)은 모두 패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차라리 덕망있고 온후한 자를 장수로 보내 정의의 깃발을 앞세우고 서쪽으로 진군하게 하여 진나라의 부형들을 회유케 하십시오. 진나라의 부형들은 오랫동안 진왕의 폭정으로 신음하고 있어 오늘 진실 된 마음으로 패공과 같은 장자(長子)를 보내 절대 포악한 행동을 금지시킨다면 틀림없이 진나라 땅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항우처럼 표독하고 용맹한 자를 진나라 땅으로 들여보낼 때가 아닙니다. 평소에 관대한 마음과 장자의 기풍을 지니고 있는 패공만이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초회왕은 결국은 항우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패공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승과 항량의 잔병들을 수습해서 관중의 땅을 공략하라고 했다. 패공이 탕군의 군사를 이끌고 성양(城陽)의 길을 취하여 전진하다가 강리(杠里)의진군과 조우하여 보루를 세우고 대치하다가 결국은 진군의 두 부대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한편 안양(安陽)에 주둔하고 있던 초군은 상장군 송의를 살해하고 대신 병권을 장악한 항우의 지휘하에 북상하여 진장 왕리를 크게 무찌르고 거록성의 조군을 구했다.
8. 高陽酒徒(고양주도)
– 고양의 술주쟁뱅이 역이기를 만나 오창의 식량을 얻다.
패공의 군대가 계속 서쪽으로 나아가 창읍(昌邑)에 이르러 팽월(彭越)의 군사들과 만나 서로 군사들을 합쳐 진군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여 강무후(剛武侯)의 군사들과 만났다. 패공은 4천여 명에 달하는 그의 군사를 빼앗아 자기 부대에 편입시켰다.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와 함께 다시 창읍(昌邑)으로 진격하여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창읍을 지나 고양(高陽)을 경유하게 되었다. 당시 고양의 수문장을 지내고 있던던 역이기(酈食其)가 지나가던 패공을 보고 혼자 말했다.
「이 문을 통과한 여러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그 중 대인이라고 칭할만한 장자(長子)는 패공뿐이라!」
역이기가 패공이 주둔하고 있던 진영으로 찾아와 접견을 청했다. 그때 패공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역이기가 패공에게 절을 올리지 않고 단지 손을 들어 읍(揖) 만을 행하며 말했다.
「당신이 무도한 진나라를 기필코 정벌하려고 한다면,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장자를 맞이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패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깃을 여미며 사죄의 말을 올리고 역이기를 이끌어 상좌에 앉혔다.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하여 그곳에 쌓여 있던 양식을 얻은 패공은 그 즉시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에 봉하고, 역상(酈商)을 장군으로 삼아 진류의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개봉(開封)을 공격했다. 그러나 개봉은 함락할 수 없었다. 이에 패공은 북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에서 진나라 장군 양웅(楊熊)의 군사들과 싸우고 다시 그 뒤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했다. 양웅은 달아나 형양(滎陽)으로 들어갔다. 이세황제가 사자를 보내 양웅을 참수하고 그 목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였다. 패공의 군사들은 다시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한나라 귀족 출신인 장량의 도움을 받은 패공은 한나라의 전략적인 요충지인 환원(轘轅)의 험도(險道)을 점령했다.
9. 高祖入關(고조입관)
– 회유작전으로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고조
당시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자 패공은 즉시 북쪽으로 나아가 평음(平陰)을 공격하여 황하의 나루터를 끊었다.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낙양의 동쪽에서 진군(秦軍)과 싸웠으나 전세가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군중의 기병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군 태수 여의(呂齮)와 싸워 물리치고 남양군(南陽郡)을 점령했다. 여의는 도망쳐 완성(宛城)으로 들어가 지켰다. 패공이 완성을 우회하여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장량이 간했다.
「공께서는 관중으로 급히 들어가려는 바쁜 마음에 완성을 우회하려고 하시지만, 눈앞에 아직 진나라 군사들의 수효가 옛날처럼 여전히 많을 뿐만 아니라 험준한 요충지의 지세에 의지하여 우리들의 진격을 방해할 것입니다. 만일 지금 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지 않고 지나친다면, 뒤에서는 완성의 적군이 공격하고 앞에서는 강력한 진군이 가로막게 되어, 우리 군사들은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에 패공은 군사를 이끌고 밤을 도와 다른 길을 이용하여 돌아가 깃발을 바꾸고 있다가, 이윽고 동이 트자 완성을 세 겹으로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남양군의 태수는 사태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의 사인(舍人) 진회(陳恢)가 말리며 말했다.
「패공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진희가 성벽을 넘어 패공을 찾아 접견하기를 청해 말했다.
「내가 듣기에 공과 제후들이 약속하기를 먼저 함양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관중의 왕 자리를 양보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완성을 공격하기 위해 머무르고 있습니다. 완성은 바로 대군(大郡)인 남양군의 치소가 있는 고을로 수십 개의 성들은 많은 백성들과 풍족한 식량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항복하게 되면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공께서 관중으로의 진격을 멈추고 머무르면서 하루 종일 완성에 대한 공격을 퍼붓는다면,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완성을 지나치신다면, 완성의 군민들은 필시 공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앞의 경우는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공을 다른 장군에게 그 선수를 뺏겨 관중의 왕 자리를 잃을 것이며, 뒤의 경우는 강한 진군과 완성의 추격군 사이에 끼어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공을 위해 계책을 하나 드린다면, 남양태수를 옛날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그로 하여금 남양을 지키게 한다는 약조를 해 주는 대신 그의 항복을 받아들십시오. 그런 다음 공께서는 완성의 군사들과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신다면 관중의 왕 자리를 얻을 수 있고더욱이 대성인 완성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아직 항복하지 않은 여러 성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성문을 열고 항복할 것입니다. 이로써 공께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관중으로 진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희의 청을 허락한 패공은 그 즉시 남양태수를 은후(殷侯)에 봉하고 완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진회는 천호(千戶)에 임명했다. 패공이 완성의 군사들을 더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자 주위의 성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항복했다. 이윽고 패공의 행렬이 단수(丹水)에 이르자 고무후(高武侯) 새(鰓)와 양후(襄侯) 왕릉(王陵)이 서릉(西陵)에서 투항해 왔다. 이어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호양(胡陽)을 공격하던 중 파군(番君)의 별장 매현(梅鋗)을 만나 그와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위나라 사람 영창(寧昌)을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장한은 이미 조나라 땅에서 그 군사들과 함께 항우에게 항복한 후였다.
그 전에 항우와 송의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하여 북쪽으로 나갔다가,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그이 상장군의 직을 대신하자 경포(黥布)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은 모두 항우의 부하가 되었다. 항우가 계속해서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의 군사들을 격파하고 장한(章邯)의 항복을 받아내자 제후들은 모두 항우에게 귀의했다. 그때 이미 진나라 이세황제를 살해한 조고가 사자를 패공에게 보내 관중을 쪼개어 서로 왕이 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조고가 자기를 속이려고 한다고 생각한 패공은 장량의 계책을 이용하여 역이기(酈食其)와 육가(陸賈)를 시켜 무관(武關)을 지키고 있던 진나라의 장수들을 설득함과 동시에 돈으로 매수한 다음 갑자기 기습하여 진군을 크게 무찌르고 무관을 통과했다. 패공의 군사가 함양을 향해 북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남전(藍田)의 남쪽에 이르자 진나라의 대군과 만나 대치했다. 패공의 군사들이 의병(疑兵)과 깃발을 설치하여 군사들을 대군으로 보이게 하고, 그 군사들이 통과하면서 아무도 노략질을 하지 못하다록 금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자 진군의 마음은 해이해지고 이어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패공의 군사들은 승세를 몰아 계속된 전투에서 진군을 섬멸시켰다.
10. 約法三章(약법삼장)
– 진나라의 가혹한 모든 법들을 폐기하고 세 조문만을 선포하다.
한나라 원년, 기원전 206년10월 패공의 군사들은 다른 제후군에 앞서 관중에 진격하여 패상(覇上)에 주둔했다. 진왕 자영(子嬰)이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봉해 가지고 나와 지도정(軹道亭)으로 나와 항복의 의식을 행했다. 패공의 여러 장수들 중에는 진왕을 죽여야만 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패공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처음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이유는 원래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또한 앞일이 상서롭지 않을 것이오.」
패공은 진왕을 관리에게 넘기고 즉시 서쪽으로 나아가 함양성에 입성했다. 이윽고 패공이 함양성 내의 궁궐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려고 하자 번쾌와 장량이 간해 부고에 있던 진나라의 귀중한 보물과 재물들을 봉하고 군대를 물리쳐 패상(霸上)에 주둔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현의 부노들과 호걸들을 불러 말했다.
「여기 계시는 부로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그 안 왕실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멸족을 당해왔고 서로 모여 말을 나눈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여 거리에 내던져졌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후들은 나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된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마땅히 이곳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과 ‘살인자는 죽인다, 남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합니다.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로들을 위해 나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내가 휘하의 군사들을 패상으로 물리쳐 주둔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규약을 제정하기 위함에서입니다.」
이어서 패공은 사람들을 진나라 관리들과 같이 각 현(縣), 진(鎭), 향(鄕), 촌(村) 등의 고을에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리며 순시토록 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앞을 다퉈가며 소와 양을 잡고, 술과 음식을 가져와 패공의 군사들을 대접했다. 그러나 패공은 사양하며 허락하지 않고 말했다.
「창고에 양식이 많아 부족하지 않으니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더욱 기뻐하며, 단지 패공이 진나라 왕이 되지 않을 경우만을 걱정했다.
11. 鴻門之宴(홍문지연)
– 홍문의 연회에서 구사일생하다.
어떤 사람이 패공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의 부(富)는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10배나 많습니다. 또한 지형은 견고하여 능히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들으니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 장수 장한을 옹왕(雍王)에 임명하고 관중을 다스리게 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그들이 오면 공께서는 이 땅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급히 함곡관에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여 제후군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이에 점차적으로 관중의 장정들을 징집하여 군사를 보강한다면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패공이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따랐다.
11월, 항우가 과연 제후군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곡관을 통과하려고 했으나 관문은 잠겨있었다. 그때 패공이 이미 관중을 이미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항우가 대노하여 경포 등을 시켜 함곡관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했다. 12월 함곡관을 통과한 항우의 군대는 희(戱)에 당도했다.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曹無傷)은 항우가 대노하여 패공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항우에게 전하게 했다.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기 위해 항복한 진왕 자영(子嬰)을 상국으로 삼고, 진기한 보물들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조무상은 항우에게 봉작을 받으려고 했다. 아부(亞父)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권하여 패공을 공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다음날 새벽 패공의 군사들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항우의 군사는 40만으로 100만을 호칭했고, 패공의 군사는 10만으로 20만을 호칭하여 패공은 도저히 항우의 군사에 대적할 수 없었다. 그때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이 그 친구인 장량을 살리기 위해 한 밤에 달려와 알렸다. 이에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온 항백(項伯)은 좋은 말로 설득하여, 항우가 패공을 공격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패공은 백여 기의 기병만을 데리고 홍문(鴻門)으로 달려와 항우을 접견하고 사죄의 말을 했다. 항우가 패공에게 말했다.
「이 일은 공의 좌사마 조무상(曹無傷)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항우가 어찌 이런 일을 일으키겠습니까?」
패공은 장량과 번쾌의 활약으로 홍문(鴻門)의 항우 진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패공이 돌아와 조무상을 죽였다.
항우가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함양의 진나라 궁궐을 모두 불사름으로 해서 그가 지나간 곳은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진나라 백성들은 크게 실망했으나 오히려 마음속으로 크게 두려워하며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 項羽負約 沛公王汉(항우부약 패공왕한)
– 제후들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패공을 한왕에 봉하는 항우
항우가 사람을 시켜 회왕에게 진나라를 멸했다고 고했다. 이에 회왕은 약속대로 진왕(秦王)은 먼저 관중에 들어간 사람을 시키라고 했다. 항우는 회왕이 옛날 자기가 패공과 함께 진나라 정벌군에 합류시켜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북쪽의 조나라 구원군으로 보내면서, 천하의 제후들에게 먼저 관중에 들어간 사람을 진왕에 봉하겠다는 약속을 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 말했다.
「회왕은 나의 숙부인 항량이 세운 왕이다. 지금까지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한 그가 어찌 천하의 제후들과 약속을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안정시킨 공은 여기 있는 여러 장수들과 내가 세웠지 않은가?」
이에 항우는 겉으로는 회왕을 높여 의제(義帝)로 세웠으나, 실제로는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월에 항우는 동쪽으로 돌아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양(梁)과 위(魏)의 아홉 개의 군(郡)을 영지로 하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삼았다. 항우는 회왕이 제후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세워 파(巴), 촉(蜀), 한중(漢中) 등의 3개 군을 다스리게 하고 그 도읍을 남정(南鄭)에 두게 하였다. 관중은 삼분하여 진나라의 항복한 세 장수를 왕으로 세웠다. 장한은 옹왕(雍王)에 그 도읍은 폐구(廢丘)로, 사마흔(司馬欣)은 색왕(塞王)에 그 도읍은 역양(櫟陽)으로, 동예(董翳)는 책왕(翟王)에 그 도읍은 고노(高奴)로 정하게 했다. 초장(楚將) 하구(瑕丘)의 신양(申陽)은 하남왕(河南王)에 봉하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조장(趙將) 사마앙(司馬卬)은 은왕(殷王)에 봉하고 조가(朝歌)를 도읍으로 했다. 조왕 헐(歇)은 대왕(代王)으로 옮기게 하고 조나라 상국 장이(張耳)는 상산왕(常山王)에 봉하고 양국(襄國)을 그 도읍으로 정하게 했다. 당양군(當陽郡) 경포(黥布)는 구강왕(九江王)에 봉하고 육(六)에 그 도읍으로 정하게 하고, 초회왕의 주국(柱國) 공오(共敖)는 임강왕(臨江王)에 봉하고 강릉(江陵)에 그 도읍을, 파군(番君) 오예(吳芮)는 형산왕(衡山王)에 봉하고 그 도읍은 주(邾)에 두도록 했다. 연나라 장수 장도(臧荼)는 연왕(燕王)에 그 도읍을 계(薊)에 정하고 원래의 연왕 한광(韓廣)은 요동왕(遼東王)으로 옮겼다. 한광이 그 명을 듣기를 거부하자 장도가 한광을 무종(無終)에서 죽였다. 성안군 진여(陳餘)는 하간(河間)의 세 현에 봉하고 남피(南皮)에 머물도록 했다. 매현(梅鋗)은 10만 호의 후에 봉했다.
4월 항우는 제후들의 군사들을 희수(戱水) 강안에서 해산한 다음 각기 자기들의 봉지로 돌아가게 했다. 한왕 역시 한중의 자기 봉지로 들어갈 때 항우는 한왕이 거느린 10만여 명의 군사들 중 3만여 명의 군사들을 주어 그를 따라가게 했다. 또한 초와 제후국 사람들 중 한왕을 경모하여 그 뒤를 따르는 자도 수만 명이나 되었다. 한왕과 그 일행은 두현(杜縣)에서 출발해서 남쪽으로 나와 식중(蝕中)의 계곡길로 들어갔다. 한왕의 군사들은 길을 지나간 후에 절벽 위에 가설한 잔도(棧道)를 전부 불태움으로 해서 제후들의 추격군이나 도적들의 기습을 막고 또한 그들이 동쪽으로 되돌아갈 의향이 없음을 보이고자 했다.
13.還定三秦(환정삼진)
–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다시 점령하다.
이윽고 한왕이 그 도읍지인 남정(南鄭)에 이르는 동안 행군 중에 수많은 장수들과 군사들이 도망친 사실을 알았다. 사졸들은 모두 동쪽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신(韓信)이 한왕에게 말했다.
「항우가 공을 세운 장수들을 모두 왕으로 책봉했으나, 유독 대왕만은 남정(南鄭)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대왕의 군리들과 사졸들은 모두 산동 출신이라 밤낮으로 발꿈치를 들어 고향을 쳐다보며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이곳을 나간다면 대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를 놓침으로 해서 천하가 이미 안정되어 백성들의 삶이 모두 편안하게 된다면 두 번 다시는 그들의 예기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 동쪽으로 진군하신 다음 항우와 천하를 놓고 겨루어 보시기 바랍니다.」
항우가 관중에서 나온 후에 사람을 보내 의제(義帝)의 거처를 옮기게 하면서 말했다.
「옛날 제왕들의 거주지는 모두 사방 천리에 달하고 하천의 상류에 있었습니다.」
항우가 사자를 다시 보내 의제에게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행차할 것을 재촉했다. 그러자 회왕의 군신들이 하나 둘씩 배반하고 의제의 곁을 떠났다. 항우가 다시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와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에게 비밀리에 명을 전하여 도중에 의제를 공격하여 죽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의제를 강남(江南)에서 살해했다.
한편 전영(田榮)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항우가 제나라 장수 전도(田都)를 대신 제왕으로 세웠다. 전영이 노하여 스스로 제왕이 되어 전도를 공격하여 죽이고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다. 전영은 다시 팽월에게 장군의 인장을 주어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를 어지럽히라고 했다. 초나라가 소공(蕭公) 각(角)에게 영을 내려 팽월을 토벌하라고 했다. 그리나 각은 오히려 팽월에게 크게 패했다. 항우가 자기를 왕에 책봉하지 않았다고 해서 원한을 갖고 있던 진여(陳餘) 역시 그의 부하 하열(夏說)을 전영에게 보내 군사를 청하여 상산왕 장이를 공격하려고 했다. 제나라로부터 군사를 빌린 진여는 장이를 격파했다. 장이는 도망쳐 한나라에 귀의했다. 진여는 조헐(趙歇)을 대(代)에서 불러와 조왕(趙王)으로 세우고 조왕은 다시 진여를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항우가 대노하여 북쪽으로 출동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고도(故道)의 길로 우회하여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기습했다. 장한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진창(陳倉)에서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다 호치(好畤)6ㅣ에서 멈추어 다시 싸웠으나 패하고 폐구(廢丘)로 들어갔다. 한왕은 드디어 옹(雍)의 땅을 평정하고 계속해서 함양을 향해 동진하다가 폐구에서 옹왕 장한을 포위했다. 다른 한편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주어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 등의 땅으로 진격하여 점령하도록 했다. 또한 설구(薛歐), 왕흡(王吸) 등에게는 무관(武關)으로 나가 남양(南陽)에 주둔하고 있던 왕릉(王陵)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패현(沛縣)에 있는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맞이해 오도록 했다. 초나라가 알고 군사를 내어 양하(陽夏)에서 저지하자 한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다른 한편 옛날 오현의 현령이었던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군(漢軍)을 막도록 했다.
한왕 2년 기원전 205년, 한왕이 동쪽으로 나와 관중의 땅을 공략했다.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등이 모두 한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한왕(韓王) 정창(鄭昌)만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거하자 한신을 시켜 그 군사를 격파했다. 이윽고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 위남(渭南), 하상(河上), 중지(中地) 등의 군을 설치했고 관외(關外)에는 하남군(河南郡)을 두었다. 다시 한나라의 태위(太尉)였던 신(信)을 한왕으로 다시 세워 옛날 한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각 제후의 장수들 중 만 명의 군사나 혹은 한 개의 군을 들어 항복한 자가 있으면 만호(萬戶)에 봉했다. 하상군(河上郡)의 요새를 수축했다. 원래 옛날 진나라 때 제왕들이 사냥을 하며 놀이를 하기 위해 조성된 원유(苑囿)와 원지(園池)를 개방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했다.
정월, 옹왕의 동생 장평(章平)을 사로잡았다. 나라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한왕이 함곡관을 나와 섬현(陝縣)에 이르러 관외에 사는 부로들을 위무했다. 관중으로 다시 돌아와 조나라에서 망명해 온 장이(張耳)를 접견하고 정중하게 대접했다.
2월 진나라의 사직단(社稷壇)을 허물고 한나라의 사직단을 세웠다.
14. 覆滅靈壁 睢水堵塞(복멸영벽 수수도색)
– 영벽에서 전멸한 한군의 시체로 수수의 강물이 막히다.
3월 한왕이 임진(臨晉)에서 하수(河水)를 건너자 위왕(魏王) 표(豹)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수행했다. 이어서 하내(河內)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을 사로잡은 후에 그 땅에 하내군을 설치했다.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 하수의 북쪽남쪽으로 나아가 평음진(平陰津)에서 하수(河水)를 건너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다. 신성(新城)의 삼로(三老)인 동공(董公)이 한왕의 행렬 앞을 막아서며 의제(義帝)가 피살된 일을 말했다. 한왕이 듣더니 왼쪽 어깨를 밖으로 들어내고 큰소리를 내어 통곡했다. 한왕은 의제(義帝)를 위해 정식으로 상을 발하고 3일장을 치뤘다. 이어서 한왕은 사자를 제후들에게 보내 고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의견을 모아 의제를 세워 북면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항우가 의제를 쫓아낸 다음 강남에서 기어이 죽였으니 참으로 대역무도한 자다. 과인이 의제를 위해 친히 상을 발하니 제후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라. 과인은 관중의 모든 군사들과 하상(河上), 하남(河南), 하내(河內) 삼군(三郡)의 사졸들을 일으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물결을 타고 남하하여 제후왕들과 함께 의제를 죽인 초나라의 항우를 토벌하고자 한다.」
그때 항우는 북쪽으로 출전하여 제나라의 전영(田榮)과 성양(城陽)에서 싸우고 있었다. 전영은 싸움에서 패하고 평원(平原)으로 달아났다가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제나라의 모든 성들은 항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항우의 초군은 제나라의 성곽을 모두 불사르고 그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은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우자 제왕은 성양에서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항우는 한왕이 한중에서 나와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제나라와 싸움 중이라, 먼저 제나라를 물리치고 후에 한왕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 사이 한왕은 다섯 제후들을 위협하여 그들 군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여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입성했다. 팽성이 함락됬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제나라와의 싸움을 중지하고 그 군사들을 물리쳐 노현(魯縣)을 출발하여 호릉(胡陵)과 소현(蕭縣)을 거쳐 달려와 팽성(彭城)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서 한군과 크게 싸웠다. 초군이 한군을 대파했다. 그 싸움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시체로 수수의 강물이 막혀 흐르지 못했다. 이어서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그 처자들을 패현에서 붙잡아와 자기 군중에 두고 인질로 삼았다. 팽성의 싸움에서 한군이 대패한 것을 본 제후들은 초나라가 강하고 한나라는 약하다는 것을 알고 모두 한나라를 버리고 초나라에 붙었다. 새왕(塞王) 사마흔이 한나라에서 도망쳐 초나라로 들어왔다.
그때 마침 여후의 오빠 주여후(周呂侯)가 한나라의 장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하읍(下邑)에 머물고 있었다. 팽성의 싸움에서 패배한 한왕이 항우에게 쫓겨 그에게로 가서 몸을 피해 있으면서 점차로 군사들을 수습한 다음 탕(碭)에 주둔했다.
15. 成皐久拒(성고구거)
– 성고에 의지해서 항우의 공격을 저지하다.
이윽고 한왕은 군사를 서쪽으로 움직여 대량을 통과하여 우(虞)에 이르렀다. 한왕이 알자(謁者) 수하(隨何)를 경포(黥布)가 있는 곳으로 사자로 보내면서 말했다.
「공이 경포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에 반기를 들게 할 수 있다면 항우는 필시 그곳에 머무르며 공격할 것이오. 그렇게 함으로써 몇 개월의 시간만 얻을 수 있다면 천하는 틀림없이 나의 차지가 될 것이오.」
수하가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에게 가서 유세하니, 경포가 과연 초나라를 배반하였다. 항우가 용저(龍且)를 보내 경포를 토벌하도록 했다.
한왕이 팽성의 싸움에서 패하고 서쪽으로 들어가면서 사람을 시켜 그 가족들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모두들 어디론가 난을 피해 도망쳐 만날 수 없었다 다만 도망 중에 효혜제만을 찾아 관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해 6월에 태자로 세우고 죄인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다시 태자에게 역양(櫟陽)을 지키라 하고 관중에 있던 제후들의 자제들을 모두 역양에 불러 태자를 호위케 하였다. 이윽고 한군이 강물을 끌어 들여 폐구성을 잠기게 하자, 폐구성의 군민들은 항복하고 장한(章邯)은 자살했다. 한왕은 폐구의 이름을 괴리(槐里)러 바꾸었다. 고조가 제사를 관장하는 사관(祠官)에게 명령하여 천지, 사방, 상제, 산천을 향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이후로는 때가 되면 제사를 계속 지내도록 명했다. 또한 관중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이때 구강왕 경포는 용저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수하와 함께 한나라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한왕은 팽성의 싸움에서 지고 흩어진 군사들을 서서히 수습하여 관중에서 보내 준 병사들과 함께 출전하니 한군의 사기는 형양(滎陽) 일대의 땅을 진동시키고 초군을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물리쳤다.
한왕 3년 기원전 204년 위왕 표(豹)가 자기 부모의 병문안을 위해 봉지로 들어가 하진(河津)의 강구를 끊고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붙었다. 한왕이 역이기(酈食其)를 사자로 보내 위표를 설득하게 했지만 위표는 듣지 않았다. 이에 한왕이 한신에게 군사를 주어 정벌하게 했다. 한신은 위군을 크게 무찌르고 위표를 포로로 잡았다. 한왕은 다시 위나라의 땅을 평정하고 그 땅에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 등의 3개 군을 설치했다. 한왕은 장이와 한신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한신은 진여와 조왕 헐(歇)의 목을 베었다. 다음 해 한왕은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한왕의 군사들은 형양의 남쪽에 주둔하면서 용도(甬道)를 건설하여 하수와 연결시킴으로써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했다. 한왕은 그 양식에 의지하여 항우의 공격을 1년 넘게 버텨낼 수 있었다. 항우가 빈번히 한군의 용도를 공격하여 식량을 약탈해 감으로 해서 한군의 진영에는 군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곧이어 항우는 여세를 몰아 형양성을 포위했다. 한왕이 항우에게 강화를 청하며 형양 이서의 땅을 한나라의 영토로 인정해 달라고 했다. 항우가 거절하자 이를 근심한 한왕은 진평(陳平)에게 황금 4만 근을 주며 초나라의 군신간을 이간시켜 그 사이를 멀어지게 하라고 했다. 그 결과 항우는 범증(范曾)를 의심했다. 범증은 그때 항우에게 형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라고 권하고 있었다. 항우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범증은 마음속으로 분노를 삭히며 노환을 이유로 자기의 해골을 고향으로 가져가 일반 백성들 틈에 살다가 죽게 해달라고 청했다.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나 팽성으로 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식량이 떨어진 한군은 밤이 되자 형양성의 부녀자들 2천여 명을 모아 갑옷을 입혀 동문을 이용하여 성밖으로 내보내 사방에서 초군의 공격을 받게 했다. 그리고 장군 기신(紀信)이 한왕으로 분장하여 어가를 타고 나와 항복한다고 초군을 속였다.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두손을 들어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초군의 시선이 모두 동문으로 모여 있을 때 한왕은 수십 기의 기병만을 대동하고 서문을 통하여 형양성을 빠져 달아났다. 그 전에 한왕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 위왕 위표(魏豹), 장군 종공(樅公) 등에게 형양성을 지키라고 명했다. 한왕을 따라나서지 못한 많은 장수들이 형양성 안에 남아 있었다. 주가와 종공이 서로 상의했다.
「나라를 한 번 배반한 자와 함께는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
두 사람은 즉시 위표를 죽였다.
간신히 형양성을 빠져 나온 한왕은 관중으로 들어가 군사를 모은 후에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진군했다. 원생(袁生)이라는 사람이 한왕에게 말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왕이 그 계책을 받아들여 무관으로 나가 완성(宛城)과 섭(葉) 사이에 주둔하며 경포와 함께 군사들을 모았다.
한왕이 완성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과연 형양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한왕은 방벽에 굳게 의지하여 지키기만 할뿐 초군의 도전에 응하지 않았다. 그때 일대의 군사를 데리고 수수(睢水)를 건넌 팽월은 초장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과 하비(下邳)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항우가 다시 동쪽으로 달려가 팽월의 군대를 공격했다. 한왕은 그 틈을 타서 북쪽으로 나아가 성고(成皐)로 들어갔다. 팽월을 격파한 항우는 한왕이 성고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그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주가(周苛)와 종공은 죽이고, 한왕 신은 사로잡은 후에 성고를 포위했다. 이에 한왕은 등공(縢公) 하후영(夏侯嬰)과 단 둘이서 한 수레에 타고 성고(成皐)의 옥문(玉門)을 나와 북쪽으로 달려 황하를 건넜다. 한왕의 일행은 말을 힘껏 달려 수무(修武)에 이르러 숙영했다. 다음날 새벽 한왕은 자기 스스로를 한왕의 사자라고 칭한 다음 새벽이 장이와 한신의 군영으로 들어가 그들의 군권을 빼앗았다. 이어서 장이로 하여금 북쪽으로 가게 해서 조나라 지역의 병사들을 더 모집하도록 했으며 한신에게는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한왕이 한신 휘하의 군사들 얻자 사기가 다시 오르게 되었다. 곧이어 그 군사를 이끌고 나와 하수의 강안을 끼고 남하하여 소수무(小修武)의 양식으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다음 항우와 다시 싸우려고 했다. 그러자 낭중(郎中) 정충(鄭忠)이 한왕에게 간하여, 보루를 높이하고, 참호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만 하고 결코 항우와는 싸우면 안 된다고 했다. 한왕이 그 계책을 받아들여 노관(盧綰)과 유가(劉賈)에게 군사 2만과 수백의 기병을 주고 백마진(白馬津)에서 황하를 도하하여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도록 명했다. 두 장수는 그곳의 팽월과 함께 합동작전을 펼쳐 연현(燕縣)8 서쪽 성곽에 주둔하고 있던 초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남하하여 양나라 땅의 성 십여 개를 함락시켰다.
16. 韓信王齊(한신왕제)
– 한신을 제왕으로 봉하다.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한왕의 명을 받고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다가 미처 평원(平原)에 이르지 못했을 때, 한왕은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제왕 전광(田廣)에게 유세하여 항복을 받도록 했다. 이에 전광은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 편에 서서 항우를 같이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한신은 괴통(蒯通)의 계책을 써서 제군을 기습하여 대파했다. 제왕이 노하여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자신은 고밀(高密)로 달아났다. 한신은 조 땅의 하북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제(齊)와 조(趙) 두 나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을 보내 한신군의 진격을 막도록 했다. 한신이 초나라 군사들과 혼전을 벌일 때 관영의 기병이 초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초군은 크게 무너지고 용저는 전사했다. 제왕 전광이 와서 팽월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 당시 팽월은 군사들을 이끌고 양나라 땅에 머물며 유격전을 벌려 초군의 후방을 괴롭히고 그 양도를 끊고 있었다.
한왕 4년 기원전 203년 항우가 해춘후(海春侯)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장군은 조심해서 이 성고(成皐)를 지키기만 하시오. 만일 한군이 도발을 해 올지라도 절대로 응하지 말고 단지 그들이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기만 하시오. 내가 보름 안에 반드시 팽월을 죽이고 양나라 땅을 안정시킨 후에 장군에게 돌아오겠소.」
항우가 즉시 성고에서 동쪽으로 나와 진류(陳留), 외황(外黃), 수양(睢陽) 등의 성을 차례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성고의 한군은 과연 초군 진영에 항우가 없다는 것을 알고 도전해 왔다. 초군이 응하지 않자 한군의 진영에서 군사를 시켜 조구의 욕을 5-6일 간 계속 하게 했다. 조구가 참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성고에서 나와 사수(汜水)를 건너 한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초군이 강을 반쯤 건너고 있을 때 한군이 공격하자 초군은 크게 무너지고 초군 진영의 금은보화를 모두 탈취해 갔다. 대사마 조구와 장사 사마흔(司馬欣)은 모두 사수(汜水) 강안에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해춘후 조구가 한나라 군사들과 싸움에서 지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양(睢陽)의 항우는 동쪽으로 진격하다 말고 군사를 물리쳐 성고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형양의 동쪽에서 초장 종리매(鍾離眛)를 포위하고 있던 한군은 항우가 달려오자 모두 험한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한신이 제군을 파하고 그 땅을 평정한 후에 한왕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제 땅은 초와 접하고 있으나 저의 권위는 너무 적어 만일에 저를 제왕 대리로 세우시지 않으신다면 아마도 제나라 땅을 안정시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한왕이 듣고 노하여 한신을 공격하려고 하자 유후(留侯) 장량(張良)이 말했다.
「차라리 그를 가왕 대신 진짜 제왕으로 세우시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제나라 땅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에 한왕은 장량에게 제왕의 인장과 인끈을 주어 한신을 제왕으로 세우도록 보냈다.
용저의 군사들이 한신에게 패하고 용저 자신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두려워하며 우태(盱胎)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여 한왕을 배반하게 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17. 分我杯羹(분아배갱)
– 내 아버지를 죽여 국을 끓이거든 나에게도 한 사발 보내주라
한군과 초군이 형양(滎陽)에서 몇 해 동안 대치했으나 승패가 나지 않아 젊은 군사들은 오랫동안 행군과 군사작전에 동원되어 싸움이라는 진저리를 치고 있었고, 늙고 허약한 자들은 군사들의 양식을 운반하느라 피로가 극도에 달해 쓰러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왕과 항우가 광무(廣武)의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항우가 먼저 한왕에게 단 둘이서 승부를 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항우의 도전을 거절한 한왕이 그의 죄를 나열하며 비난했다.
「 처음에 나는 항우 너와 함께 회왕(懷王)으로부터 관중에 먼저 들어가 그곳을 평정한 사람이 진왕(秦王)이 된다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항우 네가 그 약속을 배반하고 나를 험악한 산골인 촉(蜀)과 한중(漢中)의 왕으로 보냈으니 그 죄가 하나다. 항우 너는 왕의 거짓 명을 빙자하여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죽이고 그의 상장군 직을 임의로 대신했으니 그 죄가 둘이다. 항우 너는 조나라를 구원하는 임무를 행했으면 당연히 팽성으로 돌아가 회왕에게 보고했어야 함에도 네 마음대로 제후들을 협박하여 그 군사들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갔으니 그 죄가 셋이다. 관중에 들어가게 되면 절대 폭력과 노략질을 금하라는 회왕의 명을 어기고, 진나라의 궁궐들을 불사르고, 진시황의 무덤을 파헤쳐 사사로이 그 재물을 취했으니 그 죄가 넷이다. 아무 까닭 없이 항복한 진왕 자영(子嬰)을 죽였으니 그 죄가 다섯이다.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에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 장수들을 왕으로 봉했으니 그 죄가 여섯이다. 항우 너와 친한 제후들과 장군들은 모두 좋은 땅에 봉하고, 원래의 제후와 왕들인 조헐(趙歇), 한광(韓廣), 전불(田巿) 등은 그 봉지를 다른 지방으로 옮김으로써 그들 신하들이 왕권을 다투느라 모반을 일으키게 했으니 그 죄가 일곱이다. 항우 너는 의제(義帝)를 팽성에서 쫓아내고 자기의 도읍으로 삼고, 이어서 한왕(韓王)의 봉지를 빼앗아, 양(梁)과 초(楚)의 땅을 병합하여 자기의 봉지를 넓혔으니 그 죄가 여덟이다. 항우 너는 사람을 비밀리에 보내어 의제를 강남에서 시해했으니 그 죄가 아홉이다. 항우 너는 남의 신하된 자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사람을 살해했으며, 그 정령은 불공평했고, 신의를 저버림으로 해서 약속을 어겨, 천하가 너를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한 자라, 그것이 너의 열 번째 죄다. 내가 이에 의로운 군사들을 이끌고 제후들과 함께 너 같은 간악한 도적을 토벌하는데는 단지 형을 받은 죄인들을 시키면 될 것이거늘, 어찌 내가 수고롭게 너와 싸울 일이 있겠느냐?」
항우가 듣고 대노하여 품속에 감춰 둔 쇠뇌를 꺼내 한왕을 향해 쐈다. 한왕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서도, 자기의 발을 문지르며 외쳤다.
「저 도적놈이 내 발가락을 맞췄구나!」
한왕이 화살에 맞은 상처로 인해 몸져누우니, 장량 등은 다시 한왕을 억지로 일으켜 한군의 진영을 순시하며 군사들을 위로하여 그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써, 초군이 그 틈을 타서 쳐들어오는 것을 방지했다. 한왕이 진영 밖으로 나가 한군을 순시하다가 상처가 악화되자 성고의 성안으로 급히 돌아갔다.
이윽고 한왕의 상처가 아물자, 서쪽으로 나가 관중으로 들어가 역양(櫟陽)에 이르러 그곳의 부로들을 위문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옛날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을 감옥에서 꺼내 목을 벤 다음 그 목을 장대에 달아 역양성 저잣거리에 효수했다. 역양에서 4일 머무른 후에 다시 성고의 군중으로 돌아와 광무(廣武)의 군중에 머물렀다. 이때 한나라 진영에는 관중에서 보낸 증원군의 수효가 더욱 늘어났다.
이때 팽월은 양(梁)나라 땅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초군을 괴롭히며 그 양도(糧道)를 끊고 있었다. 이윽고 한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도망치던 제나라의 전횡(田橫)이 팽월을 찾아와 몸을 의탁했다.
18. 鴻溝爲界 兩分天下(홍구위계 양분천하)
–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다.
항우가 여러 번 팽월을 공격했으나 전열을 정비하여 초나라로 진격하려는 제왕 한신을 매우 두려워했다. 이에 항우는 한왕과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한나라에 보내주었다. 한나라 진영의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항우의 군사들은 초나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항우가 군사를 물리쳐 동쪽으로 돌아가자, 한왕도 역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이 간하자 즉시 군사를 동쪽으로 진격시켜 항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한군의 행렬이 하양(夏陽)의 남쪽에 이르렀을 때 한왕은 제왕 한신과 건성후(建成侯) 팽월(彭越)에게 사자를 보내 기일을 정하여 출동할 것을 명해 초군을 협공하려고 했다. 이윽고 한군이 고릉(固陵)에 이르렀으나 한신과 팽월의 군사들은 오지 않았다. 초군의 반격을 받은 한군은 크게 패했다. 한왕은 자기 진영으로 달아나 보루를 높이고 참호를 깊이 파 굳게 지켰다. 다시 장량의 계책을 쫓아 사자를 보내 한신과 팽월의 봉지를 넓혀줌으로 해서 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도록 유인했다. 그러자 한신과 팽월이 모두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한왕과 회합했다. 그때 경포(黥布)와 유가(劉賈)는 초나라 땅에 들어가 수춘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고릉에서 항우에게 패배한 한왕은 사자를 시켜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불러 회유했다. 주은은 항우를 배반하고 구강(九江)의 군사들을 이끌고 무왕(武王) 경포(黥布)의 군대와 힘을 합하여 북상하면서 성보(城父)를 도륙한 다음 유가(劉賈), 한신(韓信), 팽월 등이 이끄는 제후군과 해하(垓下)에서 대거 회합했다. 한왕은 경포를 회남왕에 봉했다.
19. 垓河之戰(해하지전)
– 해하에서 항우의 초군을 섬멸하다.
한왕 5년 기원전 202년, 한왕과 제후들은 일제히 초군을 향해 진격하여 해하에서 항우와 결전을 벌렸다. 제왕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대진했고, 그의 부장 공장군(孔將軍)은 좌익을, 비장군(費將軍) 우익을 맡았다. 한왕은 한신의 후위를, 강후 주발(周勃), 시장군(柴將軍)은 한왕의 배후에 주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한신의 본대가 먼저 초군과 회전에 들어갔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뒤로 후퇴했다. 그 틈을 타서 공장군과 비장군의 좌익과 우익이 초군의 양 측면을 공격했다. 이에 초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틈을 타서 후퇴를 하던 한신의 본대가 반격을 가함으로 해서 초군은 대패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부르는 초가가 들려오자 항우는 초나라의 모든 땅은 이미 한나라가 점령한 것으로 알았다. 이윽고 항우가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 초나라의 전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한왕의 명을 받은 기병대장 관영은 항우의 뒤를 쫓아가 동성(東城)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한군은 이 싸움으로 항우의 군사 8만의 목을 베고 초나라의 땅을 모두 공략했다. 그러나 노현(魯縣)만이 그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을 하지 않았다. 한왕이 제후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노나라의 부로들에게 항우의 목을 보여주자 그때서야 노현은 항복을 했다. 이어서 항우를 노공(魯公)이라 칭하고 곡성(穀城)에 그의 장례를 지냈다. 한왕이 서쪽으로 돌아가다가 정도(定陶)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제왕(齊王)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그의 병권을 빼앗았다.
20. 卽位皇帝於氾陽(즉위황제어범양)
– 범수(氾水)의 북안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정월 제후들과 장상들이 함께 상의하여 한왕을 황제로 높이자고 청하자 한왕이 말했다.
「나는 황제란 현능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고 들었소. 현능하지 도 않은 사람이 실속 없이 황제가 되는 일은 내가 구하는 바가 아니니 나는 감히 제호를 감당할 수 없소.」
여러 신하들이 다시 말했다.
「대왕께서는 미천한 평민의 신분에서 일어나 포학무도한 역도를 토벌하고 사해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그 땅을 찢어 왕후에 책봉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제호를 사용하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은 이를 의심하여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말씀드립니다.」
한왕이 세 번이나 사양한 끝에 할 수 없이 그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반드시 그리해야 좋다고 경들이 생각한다면, 이는 또한 나라에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2월 갑오(甲午) 일에 한왕은 범수(氾水)의 북쪽으로 나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고조황제가 의제(義帝)는 후사가 없다고 말하면서, 초나라의 풍습에 익숙한 제왕 한신을 초왕에 책봉하고 그 봉지를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도록 했다. 다시 건성후 팽월을 양왕(梁王)으로 봉하고 정도(定陶)를 도읍으로 삼게 하고, 한왕 신(信)은 한왕(韓王)에 양책(陽翟)을 도읍으로,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는 장사왕(長沙王)으로 옮기고 임상(臨湘)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장수였던 매현(梅鋗)이 고조를 따라 무관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음으로 이에 감격한 고조는 그를 파군(番君)에 봉했다. 회남왕 경포(黥布), 연왕 장도(臧荼), 조왕 장오(張敖) 등은 옛날 후왕(侯王)의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천하가 이미 크게 안정되자, 고조는 그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했다. 이에 제후들이 모두 달려와 신하를 칭하여 복종했다. 옛날 항우의 충실한 부하였던 임강왕(臨江王) 환(驩)이 반란을 일으키자 노관(盧綰)과 유가(劉賈)에게 명해 토벌하라고 했다. 두 사람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포위하자 환은 몇 개월을 버티다가 항복했다. 환은 낙양(雒陽)으로 압송되어 주살되었다.
5월 군사들을 모두 파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관중에 머물고 있던 제후들의 자제들 중 그대로 남아있겠다는 사람들에게는 12년간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고,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에게는 6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1년 동안 국가에서 그들을 부양해 주었다.
21. 用人杰而取天下(용인걸이취천하)
– 나는 인걸을 부릴줄 알았음으로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고조가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어 군신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 제후와 장군들은 나를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기 바라오. 내가 무엇 때문에 천하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항우는 어찌하여 천하를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시나 항우는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페하께서는 휘하의 장수를 부리시어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점령한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봉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이에 고조가 말했다.
「경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도다!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 보다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호걸 중의 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고조가 그 도읍을 낙양으로 계속 삼으려고 하자, 제나라 사람 유경(劉敬)이 유세하고, 이어서 유후(留侯) 장량도 도읍을 장안으로 옮기라고 권하자 고조는 그날로 어가를 움직여 관중으로 들어가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다. 6월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10월 연왕 장도(臧荼)가 모반하여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대(代)의 성들을 함락시켰다. 고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연왕의 자리에는 태위(太尉) 노관(盧綰)을 임명했다. 이어서 승상 번쾌(樊噲)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대(代) 땅을 평정하라고 했다.
그해 가을, 이기(利幾)가 모반하자 고조가 친정하여 토벌했다. 이기는 싸움에 지고 달아났다. 원래 이기는 항우의 수하 장수로 진성을 지키던 태수였다가 항우가 불리하게 되자 그를 따르지 않고 고조에게 항복했었다. 고조는 이기를 영천후에 봉했었다. 그후 항우를 해하의 싸움에서 죽이고 낙양에 도읍을 정한 고조가 명부에 실린 천하의 열후들을 소집하자, 이를 두려워한 이기가 모반한 것이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고조가 5일에 한 번씩 태공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며 일반 가정에서 행하는 부자지간의 예를 취했다. 이를 본 태공의 집사장이 말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없으며, 땅위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황제께서는 비록 태공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임금이십니다. 또한 태공께서는 비록 황제폐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또한 그 신하도 됩니다. 어찌 그 임금되는 사람이 그 신하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한다면 황제의 위엄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후에 고조가 태공에게 문안인사를 드리자, 태공이 빗자루를 부여잡고 대문 앞에 나와 뒷걸음치며 맞이했다. 고조가 크게 놀라며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했다. 태공이 고조에게 말했다.
「황제는 천하 만백성의 임금되시는 분이라! 내가 어찌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조는 태공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렸다. 또한 마음속으로는 집사장의 마음이 기특하다고 해서 황금 500금을 상으로 하사했다.
22. 計擒韓信(계금한신)
– 계략으로 한신을 사로잡다.
12월 어떤 사람이 초왕 한신(韓信)이 모반하려 한다고 고변하자 고조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신하들이 한신을 토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거짓으로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이에 고조는 영접하러 나온 한신을 사로잡고 그날로 즉시 천하의 죄인들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도 같이 방면했다. 전긍(田肯)이 하례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한신을 사로잡으시고, 또한 진나라의 관중에 도읍을 정하셨습니다. 진의 관중 땅은 형승(形勝)의 땅으로 주위는 큰 강을 끼고 높고 험한 산으로 둘려 싸여 있으며 관동의 제후국들과는 천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후들의 군사가 100만이라면 관중은 그 백분지 2인 2만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리한 지형의 진나라 땅에서 제후들을 향해 용병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높은 지붕에서 기와에 물을 쏟는 것과 같아, 높은 곳에 앉아 밑을 쳐다보고 군림하는 자세라, 아무도 그 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제나라 땅은 동쪽에는 물산이 풍부한 랑야(琅邪)와 즉묵(卽墨)이 있고 남쪽으로는 험준한 태산이, 서쪽으로는 천혜의 황하가, 북쪽으로는 발해(渤海)의 이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 땅은, 제후국들의 군사가 백만이라면 그 2할인 20만의 군사만 있으면 지켜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관중은 서진(西秦), 제나라 땅은 동진(東秦)이라 할 수 있으니, 제나라 땅에는 폐하의 친 자제가 아닌 사람으로 제후왕으로 봉하면 안 될 것입니다.」
고조가 옳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전긍에게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그리고 10여 일 후에 한신을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원래 그의 봉지였던 초나라 땅은 두 개로 나누어 장군 유가(劉賈)가 공이 많다고 하면서 형왕(荊王)에 봉하여 회수 동쪽을 다스리게 하고, 그의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에 봉하고 회수 이서의 땅을 다스리게 했다. 아들 유비(劉肥)91)는 제왕(齊王)으로 삼아 제나라의 70여 개 성을 다스리게 하고, 제나라 말을 하는 부근의 모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다. 이어서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행하여 여러 열후들에게 부절을 쪼개어 책봉을 행했다. 옛날 한나라 땅에 봉하여 양책(陽翟)에 도읍을 정하도록 한 한왕 신(信)을 태원(太原)으로 옮기게 했다.
23. 誅滅異姓諸侯王(주멸이성제후왕)
– 이성 제후왕을 주멸하고 유씨로 대신 세우다.
한고조 7년 기원전 200년 흉노가 마읍(馬邑)의 한왕 신(信)에서 공격하자, 고조의 문책을 두려워한 신(信)은 태원에서 흉노와 내통하여 모반했다. 이에 백토(白土)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은 조나라의 장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고조가 군사를 일으켜 친히 토벌에 나섰다. 이때 마침 혹한이 들어 손가락이 얼어 떨어진 사졸이 10중 2-3에 달했음으로 할 수 없이 평성(平城)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흉노가 고조를 평성에서 포위했다가 7일 만에 물러갔다. 고조가 번쾌에게 명하여 대(代) 땅에 머물며 평정하라 하고 그의 형 유중(劉仲)을 대왕에 봉했다.
2월 고조가 평성을 떠나 조나라와 낙양을 지나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때 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어 승상 이하 모든 한나라의 관원들이 장안으로 옮겨와 정사에 임했다.
한고조 8년 기원전 199년, 고조가 동쪽으로 출병하여 동원(東垣) 일대의 한왕 신의 잔병들을 토벌했다.
승상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과 함께, 그 주위에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 등을 축조했다. 고조가 동원에서 돌아와 미앙궁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노하여 소하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가 흉노족의 침략과 제후들의 모반으로 동요되어 몇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성패를 알 수가 없소! 이렇게 긴박한 와중에 어찌하여 궁실을 과도하게 축조한 것이오?」
소하가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궁실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릇 천자가 사해를 자기 집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궁궐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고, 또한 이후로는 이 보다 더 장엄한 궁궐을 축조하지 말도록 령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고조가 소하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고조가 동원(東垣)에 있을 때 백인(柏人)을 지나가자, 조나라 상국 관고(貫高) 등이 모의하여 고조를 시해하려고 했다. 이윽고 그 현장에 당도하자 고조의 심장이 뜀으로 해서 그곳에서 머물어 숙박을 하지 않았다. 대왕 유중(劉仲)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쳐 낙양으로 돌아오자, 제후왕에서 폐하고 합양후(合陽侯)로 낮추어 봉했다.
한고조 9년 기원전 198년, 조나라 상국 관고(貫高) 등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관련된 자들의 삼족을 멸했다. 조왕 장오(張敖)를 폐하고 선평후(宣平侯)로 했다. 이 해에 초나라의 귀족들인 소(昭), 굴(屈), 경(景), 회(懷) 씨 등과, 제나라의 귀족인 전씨(田氏)들을 모두 관중으로 옮겨 살게 했다.
미앙궁이 완성되었다. 고조가 대거 군신들을 궁궐에 모이게 하여 미앙궁의 전전(前殿)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고조가 옥잔에 술을 따라 받들어 태상황에게 바치며 말했다.
「옛날 아버님께서는 늘상 저를 보고 쓸모없는 놈이라 믿을 구석이 없어 자기 생업도 꾸려나가지 못해 둘째 형 유중처럼 애써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꾸중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이룬 공업이 둘째 형님의 것과 비교해서 누가 더 큽니까?」
전당의 군산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한고조 10년 기원전 198년 10월,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 양왕(梁王) 팽월(彭越), 연왕(燕王) 노관(盧綰), 형왕(荊王) 유가(劉賈), 초왕(楚王) 유교(劉交), 제왕(齊王) 유비(劉肥),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 등이 모두 장안에 들어와 장락궁에서 고조에게 조현을 드렸다. 봄과 여름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7월 태상황이 역양궁(櫟陽宮)에서 죽었다. 초왕 유교(劉交)와 양왕 팽월(彭越)이 와서 장례를 치렀다. 역양의 죄수들을 사면했다. 역읍(酈邑)을 신풍(新豊)으로 개명했다.
8월 조나라 상국 진희(秦豨)가 대(代) 땅에서 모반했다. 고조가 말했다.
「진희(秦豨)가 옛날 내 밑에서 사신의 직무를 행할 때는 무척이나 믿음직했었소. 대(代) 땅은 또한 북방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요. 그래서 나는 그를 열후에 봉하고 조나라의 상국의 인을 맡겨 대(代) 땅을 지키라고 한 것이오. 그러나 오늘 진희는 왕황(王黃) 등과 모의하여 대 땅을 노략하며 범하고 있소. 이것은 대 땅의 관리들과 백성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라, 그들의 죄를 사면하는 바이오.」
9월 고조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진희의 반군을 공격했다. 이윽고 군사들을 이끌고 한단에 들어간 고조는 기뻐하며 말했다.
「진희가 남하하여 한단을 거점으로 삼고, 장수(漳水)에 의지해서 우리 군사들을 막지 않으니, 나는 그가 무능한 자라는 사실을 알겠노라!」
이어서 고조가 진희의 수하 장수들 중 대부분이 장사꾼 출신임을 알고 말했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겠다.」
고조는 즉시 많은 황금으로 매수하자, 많은 진희의 부하 장수들이 항복해 왔다.
고조 11년 기원전 197년, 고조가 한단에서 미처 진희의 반군을 진압하기도 전에, 진희의 부하 장수 후창(侯敞)이 만여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왕황(王黃)은 곡역(曲逆)에 주둔했으며, 진희의 부장 장춘(張春)은 하수를 건너 요성(聊城)을 공격했다. 고조가 장군 곽몽(郭蒙)과 제나라 장수들을 시켜 요격하라고 했다. 곽몽과 제나라 장수들은 진희의 반군을 크게 무찔렀다. 태위 주발(周勃)이 태원의 길로 진공하여 대 땅을 평정했다. 이어서 주발이 마읍으로 진공했으나 그곳의 반군이 순순히 항복을 하지 않았다. 주발은 총공격을 감행하여 마읍을 함락시키고 그곳의 성민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한편 고조는 진희의 부장 조리(趙利)가 굳게 지키고 있던 동원을 공격했으나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윽고 한 달이 넘게 공격하던 중 동원의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고조에게 욕설을 퍼붓자 고조는 크게 노했다. 마침내 동원이 함락되자 부하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자기에게 욕을 한 군사들을 색출해서 참수하고 욕을 하지 않은 군사들은 사면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조나라에서 상산 이북을 떼어 내 대군(代郡)에 붙이고 그의 아들 유항(劉恒)을 대왕으로 삼아 진양(晉陽)에 도읍하도록 했다.
봄에 회음후 한신이 관중에서 모반을 하자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여름, 양왕 팽월(彭越)이 모반하자 그를 제후왕에서 폐하고 촉(蜀)으로 옮겨 살게 했으나, 그가 다시 모반하자 죽이고 역시 삼족을 멸했다. 고조가 그의 아들 유회(劉恢)를 양왕(梁王)에 봉했다.
가을 7월, 회남왕 경포가 반하여 동성인 형왕(荊王) 유가(劉賈)의 땅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북쪽으로 나와 회수를 건너자 초왕 유교(劉交)는 설(薛)로 달아났다. 고조가 친히 경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전했다. 그의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에 봉했다.
고조 12년 기원전 196년 10월, 고조가 경포의 반군을 견(甄)에서 공격했다. 싸움에서 패하고 달아난 경포를 별장을 시켜 추격하게 했다.
24. 대풍가(大風歌)
– 고조가 금의환향하여 대풍가를 지어 불렀다.
고조가 장안으로 돌아갈 때 패현에 들려 머물렀다. 패궁(沛宮)에 잔치를 벌리고 태공의 친구들인 부로들과 자제들을 불러 마음껏 술을 마시도록 했다. 이어서 패현의 아이들 120명을 선발하여 노래를 가르치고 술이 거나해지자 축(筑)을 타며 직접 노래를 지어 불렀다.
大風起兮雲飛揚(대풍기혜운비양)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구름을 날렸도다.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해내(海內)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으로 왔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이에 맹사(猛士)를 얻어서 사방(四方)을 지키리라!
고조는 아이들에게 모두 따라 부르게 하더니 이윽고 흥에 겨워 자리에 일어 춤을 추며 강개한 마음에 마음이 움직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더니 패현의 부형들에게 말했다.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항상 그 고향을 그리워하는 법입니다. 네가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해 머물고 있지만 언젠가 죽게 되면 내 혼백은 내 고향 패현을 그리워하며 찾아들 것이오. 또한 나는 패공의 신분으로 출발하여 포학한 역도들을 주살함으로 해서 천하를 얻게 되었으니, 내 고향 패현을 나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아 이곳의 백성들에게 부세와 노역을 대대로 면제하도록 하겠소! 」
이에 패현의 부형들과 그 부인들은 매일 즐겁게 술을 마시며 즐겼다. 또한 고조의 옛날 친구들은 과거의 일을 담소하며 즐거워하였다. 이윽고 10여 일이 지나 고조가 길을 떠나려 하자, 패현의 부형들이 고조가 더 머물고 가기를 완강하게 청했다. 고조가 말했다.
「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르신네들이 그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는 패현을 떠났다. 패현 사람들은 마을을 비어두고 고조를 환송하기 위해 서쪽으로 모두 나가서 예물을 바쳤다. 고조가 다시 가던 길을 멈추고 장막을 쳐 머물며 3일 간을 계속 술을 마셨다. 패현의 부로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우리 패현은 다행히 부역을 면했으나, 풍읍(豊邑)은 아직 면하지 못했습니다. 바라옵건대, 패하께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고조가 듣고 말했다.
「패현은 내가 자란 곳이라! 어찌 내가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단지 옛날 풍읍 사람들이 옹치(雍齒)를 따라 나를 배반해 위나라에 붙은 적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오.」
패현의 부형들이 계속해서 청함으로 고조를 결국은 풍읍도 패현과 같이 부역을 면제 주었다. 그리고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吳王)에 책봉했다.
한나라 장수들이 경포와 그 군사들을 조수(洮水)의 남과 북에서 협공하여 대파했다. 계속해서 도망가는 경포의 뒤를 추격하여 파양(鄱陽)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번쾌가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대(代) 당을 평정하고 진희의 목을 당성(當城)에서 베었다.
11월 고조가 경포를 토벌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12월 고조가 말했다.
「진시황(秦始皇), 초은왕(楚隱王) 진섭(陳涉), 위안리왕(魏安釐王), 제민왕(齊湣王), 조도양왕(趙悼襄王) 등은 모두 그 후사가 끊겨 제사도 못 받고 있다. 각각 10호의 민가를 주어 그 무덤을 지키며 제사를 올리게 하되, 진시황은 20호를 위공자 무기(無忌)는 5호를 주도록 하라!」
진희를 따랐던 대 땅의 관리들과 백성들 및 조리(趙利)의 협박에 못 이겨 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사면시켰다. 진희의 부하였다가 항복한 사람이 옛날 진희가 반란을 일으킬 때 연왕 노관이 내통했다고 고했다. 이에 고조가 벽양후(辟陽侯)를 노관에게 사자로 보내 맞이해 오라고 하자 노관이 칭병하고 그 명을 받들지 않았다. 벽양후가 돌아와 노관이 반란에 가담한 것 같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2월 번쾌와 주발에게 군사를 주어 연왕 노관을 공격하도록 했다. 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연 땅의 관리와 백성들, 그리고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사면했다. 황자 건(建)을 연왕으로 삼았다.
25. 高祖論相(고조논상)
– 고조가 소하의 후임을 논하다.
고조가 경포와 전투를 벌릴 때 유시를 맞은 상처가 덧나 귀환 중에 병세가 심해졌다. 여후가 명의를 불러 고조의 병세를 살피도록 했다. 고조가 그 의원을 보고 자기의 병세에 물었다. 의원이 고조에게 말했다.
「폐하의 병은 치료할 수 있습니다.」
고조가 의원에게 심한 욕을 하며 말했다.
「나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삼척의 칼을 들고 천하를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편작(扁鵲)이 온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고조가 50근의 황금을 의원에게 하사한 다음 물러가게 하여 치료를 받지 않았다. 얼마 후에 여후가 들어와 고조에게 물었다.
「폐하가 돌아가신 후에 다시 소상국(蕭相國)이 죽게 된다면 누구를 대신하면 되겠습니까?」
「조참으로 대신하시오.」
「조참 다음에는 누구를 세우면 되겠습니까?」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함으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여후가 다시 그 다음 일을 물어보자 고조가 대답했다.
「그 다음 일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4월 갑진(甲辰) 일에 고조가 장락궁(長樂宮)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조의 죽음은 4일 동안이나 외부에 알리지 않고 상을 발하지 않았다. 여후가 심이기(審食其)를 불러 모의하며 말했다. .
「여러 제장들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평민의 신분이었다가 지금은 북면하여 그 신하가 되어, 늘상 그들은 마음속으로 불복하며 지내고 있소. 그런데 지금은 나이 어린 황제를 섬겨야 하니 그들을 멸족하지 않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없을 것 같소.」
그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역장군(酈將軍)에게 말했다. 역장군이 찾아가 심이기에게 말했다.
「황제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4일 동안이나 상을 발하지 않고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을 모두 주살하려 하고 있다고 나는 들었소. 진실로 그와 같은 일을 행한다면 천하는 참으로 위태롭게 될 것이오. 진평(陳平)과 관영(灌嬰)은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형양(滎陽)을 지키고 있으며,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 연(燕)과 대(代) 두 지방을 평정하고 있는 중이오. 그들이 황제께서는 이미 돌아가시고 또한 제장들을 모두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필시 서로 연계하여 힘을 합해 관중을 공격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안에서는 대신들이, 밖에서는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한나라 사직은 발꿈치를 들고서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삽시간에 무너질 것이오.」
심이기(審食其)가 듣고 궁궐로 들어가 여후에게 그 말을 전하자, 여후는 정미(丁未) 일에 곧바로 상을 발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고조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노관은 그 즉시 흉노로 달아났다.
병인(丙寅) 일에 고조의 장례를 끝내고, 기사(己巳) 일에 태묘(太廟)에서 황제의 자리를 이었다. 군신들이 모두 말했다.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으시어 천하를 평정하셨으니 우리 한나라의 창건하시는데 가장 높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 말을 쫓아 고조의 칭호를 높이어 고황제(高皇帝)라 하고 태자는 그 황제의 존호를 이어받도록 해서 효혜제(孝惠帝)라 했다. 군국의 제후들에게 명하여 각기 고조를 모시는 사당을 짓게 하여 매년마다 기일에 맞춰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효혜제 5년에, 옛날 고조가 패현에 들렸다가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사실이 생각해 내고, 패궁을 원묘(原廟)로 개조하여 고조의 신위를 모시는 별도의 사당으로 만들었다. 그때 고조가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했던 120명의 동자들에게는 원묘에 거주하면서 악기를 불고 노래하도록 시키고, 그 후 숫자에서 결원이 생기면 즉시 결원을 보충하도록 했다.
고조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제도혜왕(齊悼惠王)으로 여후와 정식 결혼 전에 조씨(曹氏)와 정을 통해 낳은 서자 유비(劉肥)다, 차남은 효혜제(孝惠帝)로 여후(呂后)의 아들 유영(劉盈)이다. 삼남은 조은왕(趙隱王)으로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유여의(劉如意)다, 사남은 대왕(代王)으로 있다가 후에 효혜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효문제(孝文帝)로 박태후(薄太后)가 낳은 유항(劉恒)이다. 오남은 양왕(梁王)으로 있다가 여태후가 집정하자 조공왕(趙共王)으로 옮긴 유회(劉恢)다. 육남은 회양왕(淮陽王)으로 있다가 여태후가 집정하자 조유왕(趙幽王)으로 옮긴 유우(劉友)다. 칠남은 회남려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이고 막내 팔남은 연왕(燕王) 유건(劉建)이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하(夏)나라의 정치는 충(忠)을 따랐다. 후에 충이 무너지니 하나라의 백성들은 무례하게 되었다. 이에 은나라가 하나라의 뒤를 이어 경(敬)을 높였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경(敬)이 무너지자 백성들은 귀신을 숭상하게 되었다. 다시 그 뒤를 이은 주나라는 예(禮)를 숭상했다. 이윽고 예가 쇠하자 백성들은 가식적이고 불성실하게 되었다. 이에 그러한 폐단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충(忠)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하, 은, 주 삼대의 치국의 도는 순환하고, 끝났다 싶으면 다시 시작하곤 했던 것이다. 주(周)와 진(秦)나라 사이의 기간에는 가히 예가 허물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그 정령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겠는가? 그런 연고로 한나라가 일어나 허물어진 예를 승계하여 그 잘못된 것을 고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즐겨 따르게 하여 하늘로부터 법통을 부여받은 것이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제후들에게 매년 10월에 도성으로 와서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도록 했다. 또한 황제는 그때부터 노란색의 비단의 지붕에, 그 왼쪽에는 소꼬리로 만든 기를 꽂은 어가(御駕)를 타기 시작했다. 고조는 장릉(長陵)에 장사 지내졌다.
○ 관련 사자성어
1. 운주유악(運籌帷幄)
.운주유악은 《한서》 및 《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紀)」에 전하여 나중에는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도 실려 있는 고사성어이다. 운주(運籌)는 산가지를 놀린다는 의미이고 장악(帷幄)은 장막속을 가리키는 말이니 장막속에 들어서도 모든 계획을 꾸민다는 뜻이다.
한고조인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낙양의 남궁에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서 술이 몇 순배 돌고나자 군신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경들은 내가 천하를 얻은 이유와 항우가 천하를 얻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숨김없이 말해주시오.”
그러자 여러 신하 중에서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라는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성을 치고 공략을 한 후에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과 그 땅을 주어 천하 사람들과 함께 이익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그렇지 않아 공이 있는 자는 해를 입었고 현자는 이를 의혹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항우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은 이를 다 듣고 나서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경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대체로 나라는 사람은, 계획을 세워 장막 안에서 움직여 천 리 밖의 승리를 얻게 하는 데는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어루만져주면서, 배불리 먹이고, 군대에 보급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는 내가 소하만 못하며,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치면 반드시 빼앗는 것에서는 한신보다 못하다. 그러나 내가 장량과 한신, 소하와 같은 참모와 용장을 잘 통솔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한 이유이다. 반면 항우 밑에는 범증 한 사람의 인재뿐이었는데 그마저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것이 나에게 패한 이유이다.”
《资治通鉴》汉纪三 汉高帝五年(己亥 公元前202年)
帝置酒洛阳南宫,上曰:“彻侯、诸将毋敢隐朕,皆言其情:吾所以有天下者何?项氏之所以失天下者何?”高起、王陵对曰:“陛下使人攻城略地,因以与之,与天下同其利;项羽不然,有功者害之,贤者疑之,此其所以失天下也。”上曰:“公知其一,未知其二。夫运筹帷幄之中,决胜千里之外,吾不如子房;镇国家,抚百姓,给饷馈,不绝粮道,吾不如萧何;连百万之众,战必胜,攻必取,吾不如韩信。三者皆人杰,吾能用之,此吾所以取天下者也。项羽有一范增而不能用,此所以为我擒也。”群臣说服。
夫运筹策帷幄之中,决胜于千里之外,吾不如子房。 西汉·司马迁《史记·高祖本纪》
.運 : 운전할 운, 籌 : 꾀 주, 帷 : 휘장 유, 幄 : 장막 악
西汉时期,刘邦当皇帝后在都城洛阳南宫摆酒宴,招待文武百官。他问百官他与项羽的区别,百官纷纷夸赞他大仁大义。刘邦说运筹帷幄不如张良,安抚百姓不如萧何,率军打仗不如韩信,但他能合理地使用他们三位俊杰,所以能得天下。[2-3]
4成语举例编辑名将盖非徒以勇敢著也。胸罗武库,学具韬铃,运筹帷幄之中,决胜千里之外。 清·百一居士《壶天录》上卷(4)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조선의 성웅 이순신장군이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둘 때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쟁을 논의하였던 한산도의 건물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장군은 그곳에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사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가리지 않고 들어서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였다. 장군은 항상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묻고 전략이 결정된 뒤에야 싸운 까닭에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던 것도 이를 잘 활용하였기 때문에 전승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일패도지(一敗塗地)
.한 일/패할 패/진흙 도/땅 지
.싸움에 한 번 패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진다는 뜻으로,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함을 이르는 말.
진나라 2대 황제 원년에
진승이 봉기한 적이 있었다.
이때 패현의 현령이 진승에게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현령의 부하였던 소하와 조참이 말하길 반란군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망산에서 산적질을 하는 유방의 힘을 빌리자고 했다.
현령은 곧바로 유방의 무리를 성으로 불렀으나 유방의 무리를 보자 덜컥 겁에 질려버렸다.
호랑이를 성 안으로 들이는 거라 생각한 현령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유방의 진입을 막았고
그러자 유방은 성 안 사람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써서 화살에 매어 쏘았다.
이에 백성들은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맞이했고 장로들은 유방을 새로운 현령으로 추대하려했다.
그러나 유방은 천하가 한창 시끄러워 제후들이
사방에서 함께 일어나고 있어 지금 장수를 한 번 잘못 두게 되면 일패도지하고 만다며 거절한다. 이 일화에서 유래된 말이 ‘일패도지’다.
3. 공구공인(功狗功人)
漢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논공행상에 착수했다.
소하(蕭何)를 1등공신에 봉했다.
전쟁터에서 분골쇄신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여타 장수들이 황제께 몰려가 항의했다.
“신들이 갑옷을 입고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 때 소하는 단지 붓을 잡고 의론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그 공이 우리보다 높은 것입니까?”
“그대들은 수렵을 아는가? 무릇 수렵할 때 짐승을 쫓아가 물어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고,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으로 내달리게 하는 것은 사냥꾼이다.
그대들은 달려가 짐승을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사냥개의 공(功狗)’이라 한다.
그런데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으로 내달리게 했다. 그것을 ‘사냥꾼의 공(功人)’이라 한다.
공구공인(功狗功人)
과인은 사냥개와 사냥꾼을 구별했을 뿐이다.”
장수들은 할 말을 잃고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동양 최초의 역성혁명은 탕(湯)이 夏나라 걸왕(桀王)을 폐하고 商나라를 세운 것이다.
신하(제후)가 반란을 일으켜 새 왕조를 연 최초의 사건이다.
일개 평민(하급관리)이 천자의 자리까지 오른 최초의 사건은 유방의 漢제국 건설이다.
중국 역사상 한 고조 유방과 明 태조 주원장 둘 뿐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