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 동문선 / 2003.6.10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 p.90

○ 목차
바슐라르와 상징론사
일러두기
머리말
1. 집
2. 집과 세계
3. 서럽과 상자와 장롱
4. 새집
5. 조개껍질
6. 구석
7. 세미화
8. 내밀의 무한
9. 안과 밖의 변증법
10. 원의 현상학
역자 후기

○ 저자소개 :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문학 비평가, 시인으로 프랑스 현대 사상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된다. 샹파뉴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이과대학 과정을 독학으로 마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신이 다닌 바르쉬르오브 중학교의 물리, 화학 교사로 일하던 중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일반상대성이론의 영향 아래 철학에 깊이 경도된 바슐라르는 철학 석사에 이어 학사원상을 수상한 논문 ‘물리학의 한 문제의 진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디종대학의 철학 교수를 거쳐 소르본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하였으며, 1960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고, 1961년에는 국가문학대상을 수상했다.
과학철학에 관한 그의 저작들 (『새로운 과학 정신』, 『과학 정신의 형성』, 『부정의 철학』 등)은 영미권 과학인식론과는 다른 프랑스 과학인식론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특히 그의 ‘인식론적 단절’ 개념은 조르주 캉길렘,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피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후대 철학자들이 사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힌 시학에 관한 일련의 저술, 시적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일련의 연구(『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대지와 휴식의 몽상』)는 ‘테마비평’이라는 문학 비평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자적인 삶은 전설적이다. 시골 우체국 직원에서 출발하여 독학으로 소르본대학 교수까지 되었으며, 현대 프랑스의 인식론잦들은 대부분 과학사 및 과학철학이 주전공인 그의 영향권 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또 주목을 끈 것은, 과학철학과는 전혀 별개인 것 같은 시적 상상력에 관한 여러 저서들을 내놓음응로써 문학 연구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프랑스 신비평에서 테마 비평이라는 비평 유파의 이론적 토대가 바로 바슐라르 인 것이다. 『공간의 시학』은 시적 상상력에 관한 그의 저서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저서의 하나이다.
– 역자 : 곽광수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과 대학원 불어불문과에서 수학했으며,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서울대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책 속으로
아마도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전까지의 관점을 바꾸어 이젠 이미지의 현상학적인 규명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물을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상상력에 관한 우리의 앞선 저작들에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여러 직관적인 우주발생론들의 네 원리 – 물질의 사원소에 관한 이미지들을 연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과학철학자로서의 우리의 습관에 충실하게 우리는 이미지들을 일체의 개인적인 해석의 기도를 떠나서 고찰하려고 했던 것이다. 과학적인 조심성을 이점으로 가지고 있는 이 방법은 그러나 차츰차츰 내게 상상력의 형이상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이미 이미지의 직접적인 역동성을 따름을 거부하는 게 아니겠는가? 실상 우리는 그 ‘조심성’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늠할 수 있기도 했다. 지적인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쉽게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이성주의자에게는 한 조그만 일상의 드라마, 일종의 사고의 이중화, – 그것의 대상이 단순한 한 이미지라는 부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커다란 정신적인 울림을 불러오는 사고의 이중화인 것이다. — p.44~45
상상력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새로운 이미지들로써 스스로를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상되는 존재의 풍요로움인 것이다. (70쪽)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 p.90
“정신분석은 자체의 해석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총체적인 상징체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몽상과 추억의 뒤섞임의 복잡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데 반하여, 몽상의 현상학은 기억과 상상의 복합체를 풀어서 분간할 수 있다.” (106쪽)
진정한 이미지들은 판화들이다. 상상력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 이미지들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실제로 경험한 추억들을 더욱 깊게 한다. (114쪽)
메타포와는 반대로 이미지에는 우리들은 독자로서의 우리들의 존재를 바칠 수 있다. 이미지는 존재의 증여자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상상력의 순수한 소산인 이미지는 하나의, 존재의 현상, 말하는 존재의 특유한 현상의 하나이다. (170쪽)
철학자가 시인들에게, 밀로슈 같은 위대한 시인에게 세계의 개성화에 대한 교훈을 얻으러 갈 때, 그는 곧, 세계는 명사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형용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264쪽)
일반적으로 사실은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시적 상상력의 작품들에 있어서 가치는 너무나 뚜렷한 새로움의 징후를 나타내기에, 그런 작품들에 관한한 과거에 속하는 일체의 것은 무기력한 것이다. 일체의 기억은 되상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억력 속에 미세한 필름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은 상상력의 강렬한 빛을 받음으로써만 판독될 수 있다. (306~307쪽)

○ 독자의 평 1
2008년 2차 광우병파동으로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 촛불의 의미를 새겨본 적이 있습니다. 촛불은 바람에 취약하기 때문에 거리로 가져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재료입니다. 그리고 촛불은 고요함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침묵한 가운데 홀로 밝혀져야 촛불의 존재가 더 커지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촛불은 그 미학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촛불을 거리로 끌고나가 들불로 만들어보려는 의도가 담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 듯합니다.
2008년 광우병파동 때 촛불집회는 수입이 재개된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인간광우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비과학적 주장을 근거로 열린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진원지였던 유럽에서도 광우병은 소멸된 질환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8년 당시 촛불집회를 이끌던 사람들도 이미 광우병 혹은 인간광우병이 과학적으로 통제된 질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실을 호도하였고, 국민들의 불안감을 부풀려 촛불을 들불로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민의를 보여주는 정도에 머물고 나머지는 정해진 절차에 맡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을 담으려다 보니 서두가 장황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소개하려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2008년에 촛불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읽었던 ‘촛불의 미학’을 쓴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이며 시인입니다. 그는 특히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는 과학사연구를 통하여 데카르트적 인식론과 비뉴턴적 역학 개념 등을 도출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객관적 과학 이론의 인식론적 방해물로 개입하는 인간의 꿈과 상상력의 존재, 그 무한 깊이의 힘과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것들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문학 작품을 두루 읽어가면서 그것들에 관하여 정신분석학적으로 음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물·불·공기·흙의 4원소에 대한 독자적인 ‘물질 상상력’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신비평 분야의 대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라고 출판사에서는 소개합니다.
바슐라르가 만년에 쓴 ‘공간의 시학’을 번역한 곽광수교수는 김현교수와 함께 ‘바슐라르 연구’를 저술할 만큼 바슐라르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앞에는 ‘바슐라르와 상징론사’라는 제목으로 바슐라르에 대한 옮긴이의 글을 실었습니다. 19세기말 프랑스의 평단은 그때까지 주류를 이루던 전기적 비평사조가 물러나면서 정신분석적 비평, 마르크스주의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실존주의적 비평, 테마비평 등 다양한 경향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은 테마비평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전기적 비평과 테마비평의 차이점을 곽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자가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입장인 반면, 후자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비결정론적 입장이라고 하겠다.(7쪽)” 따라서 바슐라르의 입장은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한 정신분석적 비평과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과 대립적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공간의 시학’은 ‘공기와 꿈’과 함께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데, ‘공간의 시학’에서는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공간의 시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은 자체의 해석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총체적인 상징체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몽상과 추억의 뒤섞임의 복잡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데 반하여, 몽상의 현상학은 기억과 상상의 복합체를 풀어서 분간할 수 있다(106쪽)’라는 부분입니다.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시적 이미지를 시인이 삶에서 경험한 특정 요소를 이끌어다 설명하게 됩니다. 인과성 (因果性)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으로, “작가의 생에의 한 요소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작품의 요소, 이 경우 시적 이미지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9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얻는 과정을 보면 작가의 생애에 대한 앎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결정론의 이론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시적 이미지를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과 그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얻어낸 독자의 상상력은 반드시 일치할 이유가 없는 독자적(獨自的)인 것이라고 바슐라르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시적 이미지에 대한 바슐라르의 관념론적 상상력 이론은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어떻게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가를 밝히는 사원소론(四元素論)이고, 둘째는 상상력의 그 독자적인 작용 자체를 밝히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며, 셋째는 상상력의 궁극성을 밝히는 원형론입니다.(10쪽)” 물론 이 셋은 전체로서의 상상 현상을 각각의 측면에서 조망하여 전체를 구성토록 하는 것입니다.
‘공간의 시학’의 머리말에서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의 근본적 과제를 천착하던 자신이 시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취해야 할 기본입장을 설명합니다. 즉 지금까지의 지식은 물론 지금까지의 철학적 연구습관까지도 버렸다고 말입니다. ‘오직 시적 이미지를 읽는 순간에 이미지에 현전(現前), 현전해야 할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현전(現前)은 1.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다 2. 아주 가까운 장래 또는 지금, 3.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 4. 앞에 나타나 있음 등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보이는 바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의 철학이 있다면,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법열(法悅) 그 자체 가운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야하는 것(41쪽)’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적 이미지는 인과관계와는 반대로 민코프스키가 말한 ‘울림’이라는 것 가운데서 올바르게 가늠된다고 하였습니다. 울림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소리를 가지는 것이며, 이미지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하여 민코프스키의 현상학적 방식으로 그것의 울림을 체험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공간의 시학’은 모두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지막 장 ‘원의 형상학’이라는 제목에서 닫힌 공간에서 안과 밖의 의미를 수렴하고 있습니다. 집은 닫힌 공간의 안이며, 세계는 닫힌 공간의 밖이 될 것입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친근하면서도 내밀하고도 사적인 공간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방들과 그 방에 들어있는 서랍, 상자, 장롱 등의 사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북소리]에서 이미 소개한 조너선 D. 스펜서의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에서는 기억술 훈련으로 ‘궁전짓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틀에 해당하는 궁전을 짓고, 그 궁전 안의 방마다 특정사물과 연관시켜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 말입니다. 기억의 궁전에 들어서 사물을 만나는 순간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도록 훈련을 하면 많은 사실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슐라르는 집의 이미지에서 기술심리학, 심층심리학, 정신분석 그리고 현상학 등을 통합한 심리적 통합의 원리를 도출해냅니다. 집은 내부공간의 내밀함의 가치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하기에 알맞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집안에는 우리들의 추억들뿐 아니라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들도 ‘숙박되어’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무의식이 ‘숙박되어’있는 것은 우리들의 영혼의 거소(居所)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집들’을, ‘방들’을 회상하면서 자신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억의 궁전을 짓고 그 안에 머물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바슐라르의 내밀한 공간은 척추동물의 상징인 새들의 거소인 ‘새집’과 무척추동물의 상징인 조개의 거소의 ‘조개껍질’로 확장되면서 상상력의 활동범위에 대한 제한을 허물어버립니다.
내밀한 공간에 대한 설명을 마친 바슐라르는 닫힌 공간의 밖, 외부 공간에서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살펴봅니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시학에서의 큼과 작음의 변증법을 ‘세미(細微)’와 ‘무한’을 주제로 묘사합니다. 사실 닫힌 공간 밖의 외부공간의 영역은 무한할 수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의 영역의 세미함 역시 무한하다는 역설이 성립되므로 두 공간의 크고 작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편가름에 익숙해진 우리네 생각으로는 큼과 작음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그저 이미지 투사의 두 극으로 다루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집으로부터 시작된 이미지의 현상학을 닫힌 공간의 밖으로 확대시켰던 저자는 안과 밖의 변증법에서 수렴하여 이를 원의 현상학으로 정리합니다. 안과 밖의 변증법을 통하여 열린 상태와 닫힌 상태라는 개념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즉 마지막 장, ‘원의 현상학’에서 저자는 기하학적 원리에서 벗어나 둥긂의 내밀함이나 둥긂의 이미지를 발견해낸 것입니다. 즉 ‘원의 현상학’을 통하여 바슐라르는 “메타포의 주지성(主知性)을 폭로하고 따라서 다시 한 번 순수한 상상력의 고유한 활동을 드러낼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슐라르가 개별 주제에 맞는 시적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다양한 시의 일부분이나 소설의 내용들이 많은 부분 우리에게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바슐라르의 설명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시작품의 경우는 전체 시를 읽고 음미해도 그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한 느낌이 남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평범해 보이는 이미지에 담긴 의미를 전하기 위하여 길게 부연설명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미지라는 것이 정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릴케의 ‘서한선’에 나오는 ‘오 잠든 집의 불빛이여!’라는 시구(詩句)로부터 바슐라르는 밤 가운데 먼 지평선에 서 있는 오두막이 밝힌 등불의 이미지를 통하여 은신처의 응축된 내밀성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구만으로는 이런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선한선’의 ‘내면일기초 (內面日記抄)’에 나오는 릴케의 묘사를 인용합니다. 릴케와 두 동행인은 깊은 밤 가운데 ‘저 멀리 한 오두막집, 마지막의 오두막집, 들판과 늪들을 앞에 두고 지평선에 홀로 있는 오두막집의 불 밝혀진 창문을 발견한다.’ 외로워 보이는 불빛을 본 릴케는 ‘우리들은 고렇게 아무리 가까이 있었어도 소용없었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밤을 보는 고절된 세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120쪽)’ 이쯤 되어서야 책읽는 이는 ‘우리들은 고독에, 외로운 집의 시선에 최면당하는 것이다.’라는 바슐라르의 설명에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슐라르를 전공하신 옮긴이가 10여년 매달려 번역을 마치고는 머리를 내흔들었다고 한 것을 보면 번역도 어려운 만큼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의 의미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 독자의 평 2
읽으라고 강권하던 시 비평 수업의 선생님 말을 졸업 후에야 기억해내곤 사두었지만,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아 내버려두길 몇 년. 별안간 학구열이 솟아 읽긴 읽었는데, 왜 추천했었는지 이해도 가고 왜 저명한 예술인들이 이 책을 추천도서로 꼽곤 했는지 알 것 같다. 시인이라면 그의 애장품에 이 책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시인의 역할을 드높여주는 책 같다. 다만, 누구 하나 어렵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읽는 내내 허덕였다. 이 책을 읽던 중 어느 출판사 웹사이트에서 이 책을 권했던 그 시인 선생님이 김춘수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당선 소감문을 읽었다가 새삼스럽게 레벨의 차이를 느꼈다. 그가 권하던 책이 내겐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렵긴 했어도, 쏟아지는 추천사를 이해했던 만큼, 부분적으로 이해한 곳곳에서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문학비평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으로 거론되곤 한다는데, 19세기 말 사람인 그의 견해가 지금의 내게도 꽤 충격적이다. 그는 작가의 생애를 고려하여 작품을 해석하는 전기적 비평에 반박하면서, 시어가 일으키는 시적 이미지의 원형을 강조한다. 우리는 보통 경험하지 않은 것도 작품을 읽으며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례가 사물화된 언어가 주는 상상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내재적 의미를 중시하는 바슐라르의 관점은 특히 시에서 두드러진다.
내 경우에는 작가 고유의 스타일과 경험을 배경에 두고 작품을 보는 경향이 짙어서 바슐라르가 비판하는 전기적 비평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곤 한다. 그런 연유로 시를 읽을 때 잊어버리려 해도 자꾸 시인의 삶을 생각하고, 시인에 대해 궁금해지곤 한다. 결국 시인의 삶이 이러이러해서 요러요러한 시를 썼겠구나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책을 권했던 시인 선생님에게 잠깐 배우던 시절이 가장 시를 많이 읽던 때인데, 그때도 줄곧 놀라곤 했던 것도 시가 자신의 표출이 아니라 빚어진 예술이라는 점이었다. 시를 짓는 시인은 그로부터 독자적인 시를 만들어내고 똑 떨어져나와, 시가 시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바슐라르는 경험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내재된 이미지가 기관에 내재된 몽상의 습관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언급이 진화생물학의 설명과 맞닿아 있어 지금에 와서는 그의 말에 수긍이 꽤 간다. 여전히 그렇게 시를 읽는 게 쉽진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의 원형을 주장하는 건, 다른 사람이 같은 상상을 하게 될 거라는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건 위험한 일처럼 보이는데, 바슐라르의 길고 긴 책에서 시어들의 분석을 읽다 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일치하거나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에 반박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위대한 시, 불멸의 작품으로 꼽히는 문학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더 나아가 이런 감성의 보편, 몽상의 보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바슐라르의 견해대로 독자적인 이미지의 원형이 있다고 상정하는 편이 예술의 가능성과 지평을 넓혀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바슐라르가 쓴 책의 내용보다, 번역을 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몇 회를 거듭하며 감수한 곽광수 선생님의 글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다른 학문서적에서도 머릿말이나 역자 후기 같은 것을 숱하게 읽었지만, 이만큼 인간미가 넘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학과 교수로 지냈고 국내 불문학자 중 손꼽히는 분이라는데, 겸손함에 끝이 없다. 본인이 밝히듯 결벽이 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완역이란 없기 때문에 이런 저런 노력을 했다는 점을 꼼꼼히 적어두기도 하셨다. 몇 차례를 거듭하며 책의 앞뒤에서 분명을 기하고자 애쓰시더니, 2002년에 마지막으로 남긴 짤막한 본판의 역자 후기에서는 이제 더 이상의 검토는 없을 듯하여 홀가분하게 내놓는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 한 권의 책에 수 차례에 걸쳐 남겨둔 편지 같은 글들이, 학자의 열정적인 생을 반영하는 것 같아 뭉클했다. 아직도 학계 활동과 번역 및 저술에 힘을 쏟고 계시는 것 같던데, 이런 분을 보면 비록 바슐라르의 현관 문턱도 넘지 못하는 수준이기는 해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진다.
상상력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새로운 이미지들로써 스스로를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상되는 존재의 풍요로움인 것이다. (70쪽)
진정한 이미지들은 판화들이다. 상상력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 이미지들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실제로 경험한 추억들을 더욱 깊게 한다. (114쪽)
메타포와는 반대로 이미지에는 우리들은 독자로서의 우리들의 존재를 바칠 수 있다. 이미지는 존재의 증여자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상상력의 순수한 소산인 이미지는 하나의, 존재의 현상, 말하는 존재의 특유한 현상의 하나이다. (170쪽)
철학자가 시인들에게, 밀로슈 같은 위대한 시인에게 세계의 개성화에 대한 교훈을 얻으러 갈 때, 그는 곧, 세계는 명사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형용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264쪽)
일반적으로 사실은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시적 상상력의 작품들에 있어서 가치는 너무나 뚜렷한 새로움의 징후를 나타내기에, 그런 작품들에 관한한 과거에 속하는 일체의 것은 무기력한 것이다. 일체의 기억은 되상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억력 속에 미세한 필름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은 상상력의 강렬한 빛을 받음으로써만 판독될 수 있다. (306~307쪽)

○ 독자의 평 3
많은 책들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어렵다. 나의 한 책의 독서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보아도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나의 행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예전에 읽었던 낡은 책들은 전혀 처음으로 읽는 것처럼 새롭게 읽을때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보느냐인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는 넓게 펼쳐 놓았던 공부의 범위를 좁히면서 깊이 파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이 바슐라르의 책이다. 현상학을 더듬어 가며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책들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섣불리 단정하고 규정지었던 많은 일들과 문자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사실 문제는 좀 더 복잡해졌다. 단순함에서 복잡함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철학적 현상학을 원하지 않았던 나는 내가 결국 추구하고 있는것이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현상학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고, 그것은 자칫하면 철학으로부터도, 문학으로부터도 외면받을 일임을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서기로 했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더듬다가 마주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미 그 전에 바슐라르의 대략적인 사상을 거쳐 온 후라 책을 읽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다. 바슐라르까지 더듬어 온 사람이라면 별로 부담없이 읽을 수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워낙에 난해한 철학서들에 진저리를 낸터라 오히려 이 책은 재미있고 즐겁게 읽을수 있기조차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깨달았던 것은 우리시대의 많은 시론서들이 바슐라르의 이론을 차용하고 있거나 거기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인양 하는 사람들이 이 바슐라르의 책에 나오는 몇가지 주장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마치 자신의 이론인양 써먹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공간의 시학’은 그런 바슐라르의 책 가운데서 공간, 즉 우리 삶에서 항상 마주치게 되는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펼쳐 놓고 있다. 가령 여기서 인용되는 집이나 상자, 새집, 조개껍질 따위, 도는 구석이라는 공간이나 세미화 속의 공간, 더 넓게 말하자면 안과 밖, 원등이 저자의 현상학적인 시각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런 공간들을 명상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행복한 공간의 이미지”를 검토하려고 했다고 실토한다. 집이라는 공간, 상자나 서랍, 옷장등의 공간, 새끼를 낳기 위해 짓는 새집등은 모두 행복을 창조하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상상력에 의해 파악된 공간은 기하학자의 측정과 숙고에 내맡겨지는 무관한 공간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공간을 우리들이 사는 것이다. 그 공간의 실제성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바슐라르의 현상학이 상상의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어진다는 것을 알면 이런 주장들은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 문학의 숱한 모티프가 되는 이런 공간에 대한 바슐라르의 명상은 물론 우리들이 느끼는 동양적인 공간과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일치한다. 우리가 굳이 공간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거친 세상과 단절되어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힘들여 집을 짓고, 기분이 우울하면 공간 속으로 숨어 드는 것은 그곳에서 우리 삶의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들을 이해하고 나면 문학작품들을 해석해 내기가 한결 쉬워진다. 작품 해석에 어떤 규범이 있어야 한다는데는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순전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에도 동의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바슐라르의 논의는 의미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바슐라르의 대부분의 책을 구입했다. 내 공부의 목표점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아서 여기서 어떤 과제를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역사를 더듬어 몽상의 시학과 물과 꿈을 더듬어 읽으면서 나는 시를 쓸때처럼 행복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리고 약간의 몽환적인 기분에도 빠져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