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세계사 / 1995.4.30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그의 문제는 특정 시대가 아닌 모든 시대를 사는 인간에게 부여된 문제들인 것이다.

제문명을 안팎에서 노리는 멸망의 요인들을 직시하는 문제, 행복과 (위대한 기강) 사이에, 지성과 의지 사이에 조화로운 합의를 도출해내는 문제이다. 이것의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 목차
1. 방황하는 어린 영혼
2. 변화 변모 변신
3. 평정된 세상
4. 황금시대
5. 위대한 기강
6. 인대
○ 저자소개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Marguerite Yourcenar)
1903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어머니를 잃었고, 정규 교육 대신 개인 교습을 받았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아버지가 직접 가르쳤으며 아버지와 함께 고전 작가들과 19세기 유럽 문학을 읽고 여행을 다녔다.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독학으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열여섯 살에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에 대한 장시를 썼으며, 아버지가 이를 자비로 출간해 주었다. 이때부터 본명 ‘크레얭쿠르 (Crayencour)’의 철자를 뒤바꾸어 만든 ‘유르스나르’를 필명으로 사용했다.
1929년 『알렉시, 또는 부질없는 투쟁에 대하여』를 잡지에 게재한 후 소설을 쓰며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마운트데저트 섬에 정착했다. 1951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출간하여 페미나 바카레스코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에세이집 『확인 조건부』(1962)로 콩바 상과, 『암흑 작업』(1968)으로 페미나 상을 받았고, 그 후에도 모나코 문학상, 프랑스 국가 문화 대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받았다. 번역에도 관심이 많아 헨리 제임스와 버지니아 울프,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했다.
하버드 대학교를 비롯한 미국의 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외국인 자격으로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마침내 198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최초의 여성 회원이 되었다. 1987년 마운트데저트 섬에서 일기를 마쳤다.
– 역자 : 남수인
프랑스 보르도III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 (현대소설 전공)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상명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프랑스의 20세기 작가들과 프랑스어문학의 교수법에 대해 연구했다.
번역서로 가에탕 피콩의 ≪프루스트 읽기≫,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과 ≪알렉시≫, ≪세 사람≫, 나탈리 사로트의 ≪황금열매≫, 롤랑 바르트의 ≪라신에 관하여≫, 자크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 ≪환대에 대하여≫,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미셸 옹프레의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와 ≪사회적 행복주의≫, 앙리 퀴에코의 ≪몽당연필 모으는 남자≫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아드이엥의 회상록”을 1974년 갈리마르사에서 폴리오 총서로 다시 낸 판본을 같은 출판사의 플레이아드 판과 대조하여 번역한 것이다. 아드리엥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고대 로마제국 오현제로 기록되는 황제들 중의 세번째로, 트라야누스으 정복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로마 제국에, 그러니 세계에 평화를 도래시킨 황제이다. 로마 제국에 그 어느때보다 번창한 전성기를 이룬 역사상 오래 기억될 뛰어난 정치가 인 것이다. 그는 정치가이자 군사 전술에 뛰어난 장군이었고, 고대 학문과 에술을 깊이 연구한 문인이자 예술가였다.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와 같은 훌륭한 군주가 비록 한반도에서는 아니나, 역사상 존재했었음을 감사함과 함께 일종의 향수를 느끼게 될 것이다. — 머리글 중에서
○ 5출판사 서평
–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장편소설
고대 로마제국의 오현제로 기록되는 황제들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이 작품은, 그가 마치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일생을 말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노왕의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궁극적으로 인간세상의 행복을 꿈꾸는 이상향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 독자의 평

모처럼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읽었다. 도처에 꾸며진 흔적이 있으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진실을 위해서 봉사하는 소설이기에, 이 회상록은 단순히 있을 법한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유르스나르는 이 소설이 단순한 사서(史書)가 되지 않도록, 딱딱한 사실의 나열만으로 채워지지 않도록 소설의 구석구석에 공들여 손질한 허구를 장식해놓았다. 바로, 하드리아누스의 고백이라는 이 총체적인 진실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말이다.
유르스나르가 지은 것은, 실제 존재했던 한 시대의 내면에 응당 있을 수밖에 없는 목소리다. 플로베르의 말 대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떠났고, 그리스도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던 시대를 그토록 평온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응당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정신이자, 목소리였다. 하드리아누스의 평화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에, 그러한 시대를 가능케 했던 어떠한 근원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으리라. 그러한 시대는 하드리아누스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으니까. 이를테면 우리는 주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선율을 어떻게 변주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셈이다. 평화시대라는 근본적인 사실(史實) 자체는 알고 있었으나, 그 시대를 이루었던 인간의 내면의 흐름은 재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유르스나르가 나에게 들려준 것은 그저 평화시대를 다스렸던 황제라면 말할 법한, 그저 개연적인 요설(饒舌)이 아니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 그녀가 전해주는 하드리아누스의 육성(肉聲)은 필연적이고 유일한 고백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드리아누스와 다르게 말하는 실제의 혹은 허구의 다른 하드리아누스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외의 다른 하드리아누스가 가능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평화시대는 존재하거나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며, 혹은 그 하드리아누스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살았던 순수한 허구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은 역사를 다룬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의 형식을 빌린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역사와 관련된 소설들을 읽어오면서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이 있었던가? 아마 한 권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특별한(혹은 특이한) 소설은 종종 얻게 되는 기쁨임에도, 이 책은 그 특별함 속에서도 유일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실재했던 인물을 다루면서 그 사람의 행동, 생각, 느낌을, 그 자신의 목소리로 이렇듯 오롯이 재현해낸 작품을 나는 보지 못했다. 분명, 수많은 인물들이 말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며, 나 역시 그들 중 몇몇은 읽어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가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외양(外樣)을 빌린 후대 작가(作家)의 첨언(添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시대에 있었던 것이 아닌, 단지 그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에 작가가 자신의 생각이며 있을 법 했던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덧붙여서 전해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그러한 발상의 신선함과 자유로움, 그 자체의 완성도에 의한 즐거움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소설이 이 소설에서 하드리아누스가 그러했듯이, 자신이 살고 있는 외부의 세계와 자신이 느낀 내부의 심경을 가로질러서, 오직 말해야 하는 것만을 말한 소설이 있었나?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역사 자체가 뒤바뀔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적인 이야기를 누가 들려주었던가? 그저 들으면 즐겁고, 듣지 못하면 서운하지만, 실상 해도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잡담 말고 말이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히 뒷시대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현재에 태어나고서 과거를 살 수 있어야만, 현재의 필연을 지탱하는 과거의 우연을, 지금 ‘이 시대’가 아닌 옛날 ‘그 시대’의 시선에서 읽고 말할 수 있다.

분명 하드리아누스가 유르스나르의 손을 빌려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가 살았던 우연의 삶이다. 그는 처음부터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고, 그를 양자로 삼은 트라야누스 역시 황제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황제로 지명된 트라야누스의 혈족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그가 트라야누스의 곁에서 지속적인 정복과 확장 정책의 한계를 깨닫고, 로마의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인 트라야누스를 이해하고 또 그에게 이해받으려 애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였기에 가능한 필연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생각한 대로 살아온 결과 그 자리에 이르렀으며, 그 생각을 바꾸지 않고 실행에 옮겨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지속 가능한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가진 자가 모두 황제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황제가 된다 한들 모두 그러한 생각대로 통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어떤 섭리에 의해 준비된 극적인 사건이 아닌, 그가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온 결과일 뿐이다. 그 우연은 로마라는 제국의 번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그가 그렇듯이 살았던 이상에는 제국의 미래 역시 정해져있었던 셈이다. 이미 하드리아누스 그 자신을 제외하면 밝은 미래를 위한 제(諸) 요소가 준비되어있었으니.
한 국가의 영속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한 인간의 우연한 삶. 그의 삶은 제국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지만, 이 책 속의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공적인 책무를 사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하드리아누스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고백은 가장 사적일 때조차도 황제로서의 관점이 담겨있으며, 황제로서 말할 때에도 인간적인 감정이 묻어난다. 이는 단순히 이 소설이 그의 개인적인 고백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라는 인간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이리라. 사랑했던 안티노우스의 죽음을 애달파하며, 그를 기리는 방법이 이집트의 교역 요충지에 도시를 세우고 안티노우스에 바치는 신전과 종교 의식을 정할 때, 그는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행동을 했다. 반면 제국의 통합을 위해서 유대의 반란을 진압할 때조차,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 감정과 이 공적인 상황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이라는 존재, 그 존재의 욕구를 방기하지도 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시간에 무엇보다도 ‘보편타당하게 통치되는, 균형잡힌 제국’이라는 공적 세계를 원했으며, 황제로서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는 ‘황제의 지위와 한시도 분리될 수 없는, 하드리아누스라는 한 인간’을 어떻게든 타인에게 이해받으려는 갈망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어디에서나, 언제나, 무엇을 하거나, 어느 것 하나도 놓아두지 않고 하나하나 생각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건 쉽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듯이 살았던 삶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로마 제국이 왜 이런 인간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원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제국을 다스린다는 것은 체제를 조직하는 것도, 정부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인간을 다스리는 일이다. 제국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피가 흐르고 살이 꿈틀대는 구체적인 인간을 알아야만 가능하다. 그 인간은 이성과 감성, 어느 하나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 잡힌 추상적인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바로 그 인간이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이성과 감성이 혼재하는 구체적인 인간. 제국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만큼이나, 가장 이성적일 때도 감성을 억누르지 않고, 오롯이 감성에 사로잡혀도 이성을 놓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도 어렵다. 이 소설 속의 그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실상은 신의 영역에 가장 근접했음을 말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