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홀스토메르 / 무엇 때문에
레프 톨스토이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09.27

레프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홀스토메르’와 ‘무엇 때문에?’가 실린 책이다. ‘홀스토메르’에서는 ‘남과 다름으로 인한 아픔’과 ‘늙고 병듦으로 인한 고통’이, ‘무엇 때문에?’에서는 거대한 국가적 폭력과 심리적 강압으로 인한 ‘한 인간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이 나타난다.
○ 목차
무엇 때문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 저자소개 : 레프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 Lev Nikolaevich Tolstoi)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처녀작인 자전소설 『유년시대』를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뽈랴나에 농민 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크로이체르 소나타』『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 책 속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중후하게 늙을 수도 있고, 추레하게 늙을 수도 있고, 가련하게 늙을 수도 있다. 때로는 중후한 동시에 추레하게 늙을 수도 있는데, 얼룩빼기 거세마는 바로 이 경우에 속했다. —「홀스토메르」 중에서
○ 출판사 서평
작가의 자아와 독자의 자아가 서로 뒤엉키며 울림과 반향을 낳는 중편소설 <홀스토메르>는, 탄생(삶)에서 소멸(죽음)로 향하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작품은 1861년에서 1863년 사이에 이미 주된 내용이 집필되었다. 하지만 20년가량이 지난 1885년에 다시 쓰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듬해인 1886년에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톨스토이 작품집≫(5판)에 수록되었다. ‘어느 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홀스토메르>의 창작은 1860년대의 초반 작업과 1880년대의 후반 작업으로 대별된다. 1860년대의 초반 작업에서는 담백하고 확신에 찬 강한 어조로 세르푸홉스코이와 홀스토메르의 전성기, 그들의 화려하고 행복한 시절을 강조해서 묘사한다. 1880년대의 후반 작업에서는 사실적 어조로 세르푸홉스코이와 홀스토메르의 쇠퇴기, 그들의 늙고 추레한 시절을 강조해서 묘사한다.

톨스토이는 자동화된 우리의 의식에 일격을 가하는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홀스토메르의 의식의 프리즘으로) 인간 사회의 부조리, 사회적 위법, 소유권의 문제, 사회적 강압, 심리적 강제와 폭행, 전횡, 박해 등을 표현하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 미와 추, 젊음과 늙음에 대한 성찰과 통찰을 드러낸다. 종국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해독하지도 못한 채 허둥대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편하더라도 삶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다른 시공간에 배치되고 정돈된 사물들과 주체들을, 젊음과 늙음,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장(場)에 나란히 배열시킨다. 그리고 합(合)을 선명하게 도출해 내기 위해서 젊음과 늙음,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을 대조시킨다. <홀스토메르>는 톨스토이의 여느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대조의 기법’ 위에 구축된다. ‘젊은 홀스토메르’와 ‘늙은 홀스토메르’의 대조와 더불어, ‘늙은 홀스토메르’와 ‘젊고 생기발랄하고 건강한 말 떼’의 대조도 나타난다. 이러한 대조는 도덕성의 문제, 선악의 문제, 기생충 같은 삶과 노동하는 삶의 문제를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면서 후기 톨스토이의 관념(идеа)과 이상(идеал), 나아가서는 그의 사상(идеология)까지도 표현한다.
온몸으로 굴곡진 삶을 살아내며, ‘붉은 분노’를 품은 채 역사를 밀고 나간 ‘한 인간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을 형상화한 중편소설 <무엇 때문에?>의 집필은 1906년 1월부터 4월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1906년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저서 ≪독서회≫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이 작품의 주제와 대부분의 줄거리는 막시모프(С. В. Максимов)의 ≪시베리아와 강제 노동≫에서 취했다. 막시모프의 이 작품은 톨스토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1906년 2월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한 스타호비치(С. А. Стахович)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막시모프의 유명한 작품 ≪시베리아와 강제 노동≫을 읽어보았소? 강제 노동과 유형(流刑)의 역사적 묘사가 눈에 띄오. 한번 읽어보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행동하는지, 짐승들도 정부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잔인하게 할 수는 없을 거요.”
유형을 당해 강제 노동에 처해진 폴란드인 미구르스키와 그의 아내 알비나는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 생애의 모든 비극적 이야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이야기에다 인간이 처한 상황과 결부된 심리적 묘사를 도입한다. 그래서 이들은 민감한 영혼과 성정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는 국가(기구)의 억압과 강압의 희생양인 주인공들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그려낼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출하고 있다. 저자는 ‘폴란드(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사료를 정밀하게 탐독했다. 특히 그는 1830∼1831년에 일어났던 폴란드 봉기와 관련된 문헌을 빌려서 연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품 곳곳에 산재해 있는 폴란드 봉기와 관련된 다섯 문장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책을 정독해야만 했다.”
주체와 사회 사이, 개인과 국가 사이의 틈새를 여행하게 하는 <무엇 때문에?>에 나타난 19세기 폴란드인의 아픔과 고통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한 21세기의 현실에서 자아를 웅크린 채로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으로 치환되면서 ‘새로운 확장된 의미’를 창출한다. 우리는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통해 ‘자아의 방기’로 나아가고 있는지, ‘자아의 단련’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한 번쯤 자문해 볼 일이다.
지금 이 시대의 사회적 직업이나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나 물질적 재화 획득 차원을 넘어서 자아를 표출하고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기에, 사회적 직업이나 노동이 곧 ‘바로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의 자기 창출(human self-creation) 행위를 원하는 대로, 안정적으로 할 수 없는 실존적 상황에 처한 미구르스키를 보면서 그의 아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을 실로 절감하게 된다. 아울러 ‘위험을 관리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도 ‘겹쳐서’ 읽게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