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CAPA 로버트 카파 사진가
플로랑 실로레 / 포토넷 / 2017.8.1
“만약 당신이 찍은 사진이 별로 좋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토저널리즘의 전설,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의 창립자, 위대한 종군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삶과 사랑이 그림책 작가 플로랑 실로레의 3년 반을 쏟은 역작을 통해 우리 앞에 되살아난다.

– 그래픽노블로 되살아난 사진가 로버트 카파
어느 분야에나 그 분야의 전범을 만드는 선구자가 있다. 사진가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1913-1954)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진이 본격적으로 인쇄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포토저널리즘의 시대는 스페인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전쟁과 함께 동이 튼다. 라이카와 콘탁스로 대표되는 35mm 영화 필름을 사용하는 소형 카메라의 발명으로, 우리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기괴한 정적 靜寂이 감도는 정적 靜的인 전쟁 사진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는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낸 살아있는 전쟁 사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에 등장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의 마구 흔들리는 긴박한 화면 구사는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자 포토저널리즘의 전설인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사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파가 찍은 사진들은 일찌감치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그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 다큐멘터리 등도 여럿이다. 『로버트 카파, 사진가』 (원제: Capa, l’Eoile Filante, 2016)의 그림책 작가 플로랑 실로레는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이자 훗날 전사한 최초의 여성 사진가로 기억될 게르다 타로의 열정적인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 『카파를 기다리며 Waiting for Capa』 (Susana Fortes, 2009)를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뛰어난 사진가이자 매력 넘치는 사내였던 그가 왜 그토록 술과 도박, 여자에 탐닉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신의 예명 ‘카파’를 만들어준 사랑하는 연인 타로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결국 전장에서 취재 도중 지뢰를 밟아 그녀의 뒤를 따르기까지, 카파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실로레는 3년 반에 걸친 노력으로 이 훌륭한 그래픽노블에 담아냈다.
○ 저자소개 : 플로랑 실로레 (Florent Silloray)
어린이책 삽화가로 낭트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1990년대 말에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의 작은 섬 리푸로 떠나 그곳의 원주민인 카낙 족과 함께 살며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일에 힘썼다. 2004년에 『리푸Lifou』라는 아름다운 그림책을 출판했다. 현재는 라로셸에 거주하며 그림 그리기 작업에 전념하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한 자신의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각색한 어른을 위한 만화 『로제의 수첩 Le Carnet de Roger』을 비롯해 『용감한 양퀵 Yancuic le Valeureux』, 『푸알뤼스의 말 Paroles de Poilus』, 『아프리카 음악: 텡벨렐레와 륀 여왕 La musique Africaine: Timbelele et la Reine Lune』 등 다양한 작품 속 삽화 작업을 했다.
– 역자 : 임희근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3대학교에서 불문학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여러 출판사에서 기획 및 해외 저작권 부문을 맡아 일했고, 출판 기획 번역 네트워크 ‘사이에’를 만들어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쇼팽 노트』, 『쇼팽, 그 삶과 음악』, 『소소한 사건들』,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 『분노하라』, 『고리오 영감』, 『D에게 보낸 편지』,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외 다수가 있다.
○ 출판사 서평
“만약 당신이 찍은 사진이 별로 좋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토저널리즘의 전설,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의 창립자, 위대한 종군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삶과 사랑이 그림책 작가 플로랑 실로레의 3년 반을 쏟은 역작을 통해 우리 앞에 되살아난다.
– 그래픽노블로 되살아난 사진가 로버트 카파
어느 분야에나 그 분야의 전범을 만드는 선구자가 있다.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진이 본격적으로 인쇄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포토저널리즘의 시대는 스페인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전쟁과 함께 동이 튼다. 라이카와 콘탁스로 대표되는 35mm 영화 필름을 사용하는 소형 카메라의 발명으로, 우리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기괴한 정적 靜寂이 감도는 정적 靜的인 전쟁 사진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는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낸 살아있는 전쟁 사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 등장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의 마구 흔들리는 긴박한 화면 구사는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자 포토저널리즘의 전설인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사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파가 찍은 사진들은 일찌감치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그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 다큐멘터리 등도 여럿이다. 『로버트 카파, 사진가』 (원제: Capa, l’Eoile Filante, 2016)의 그림책 작가 플로랑 실로레는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이자 훗날 전사한 최초의 여성 사진가로 기억될 게르다 타로의 열정적인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 『카파를 기다리며 Waiting for Capa』 (Susana Fortes, 2009)를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뛰어난 사진가이자 매력 넘치는 사내였던 그가 왜 그토록 술과 도박, 여자에 탐닉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신의 예명 ‘카파’를 만들어준 사랑하는 연인 타로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결국 전장에서 취재 도중 지뢰를 밟아 그녀의 뒤를 따르기까지, 카파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실로레는 3년 반에 걸친 노력으로 이 훌륭한 그래픽노블에 담아냈다.

– 전설로 남은 ‘카파’라는 이름을 선사한 연인 게르다 타로와의 사랑과 죽음
길지 않은 분량 속에 카파가 종군 사진가로서 가장 왕성히 활동했던 시절의 모습들이 압축적으로 녹아 있다. 작업의 실마리가 되었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그래픽노블 전기 역시 카파와 게르다 타로의 이야기로 문을 연다. 잘 알려진 것처럼 ‘로버트 카파’는 애초에 게르다 타로에 의해 탄생한 허구적 인물이었다 (카파와 타로의 실제 이름은 각각 엔드레 프리드만, 게르타 포호릴레이다).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했던 동유럽 헝가리 출신의 사진가로서 삶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는 부르기 쉬운 미국식 이름의 잘나가는 사진가라는 가면이 필요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정체가 탄로 나고 말지만, 역량을 인정받은 카파와 타로는 본격적으로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카파의 삶 전체에 걸쳐 그 어떤 전쟁의 상흔보다 깊은 트라우마로 남을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지식인들이 이상을 불태우던 전장인 스페인 내전에서 타로가 공화군의 탱크에 깔려 사망한 것이다(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도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당시 드물었던 재능 넘치는 여성 종군 사진가 타로의 갑작스런 죽음은 유럽의 여러 매체는 물론 미국의 라이프 Life에까지 ‘최초로 전사한 여성 종군 사진가’로서 보도된다. 이후 이어지는 전쟁의 현장에서, 그들이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꿈을 키웠던 파리에서, 카파는 시시때때로 연인 타로를 떠올린다.
그는 대표적인 화보잡지 라이프등 다양한 매체의 의뢰를 받아 여러 주제의 사진을 찍고 취재했지만 (전장을 떠나 있을 때는 잡지 홀리데이 Holiday 등에 ‘상류층이 잘 가는 해수욕장’ 같은 기사를 싣기도 했으며 스튜디오 촬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온몸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곳은 역시 전쟁터였다. 스페인 내전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20세기 세계사를 굵직하게 수놓은 현장에는 로버트 카파가 빠지지 않았다. 지금과 같이 편리한 줌 렌즈와 초망원 렌즈가 없던 시절, 분초를 다투는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카파가 남긴 사진과 ‘카파이즘’ (“만약 당신이 찍은 사진이 별로 좋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진 철학은 이 인물이 왜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전설적 사진에이전시 매그넘 창립,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사랑, 어니스트 헤밍웨이와의 우정
카파는 단순히 훌륭한 사진을 찍는 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비롯한 사진가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도 힘썼다. 평소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촬영한 사진들의 저작권을 언론사에 넘겨야 했던 현실에 분노하던 그는 또 다른 사진의 전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심 시모어, 조지 로저와 뜻을 모아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재능 있는 젊은 사진가들로 구성된 협동조합 방식의 단체를 결성한다. 지금까지도 건재한 전설적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의 시작이다.
그는 전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용맹한 영웅이었지만, 카메라 뒤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뇌하고 유혹에 무너지는 약한 모습을 지닌 한 인간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과 타로를 잃은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은 그를 도박과 술, 여자에 빠지게 만들었다. 행운의 별은 전장에서와 달리 도박에서는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지 않았고 그는 늘 원고료 선금을 어이없이 날리고 말았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헝가리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닥쳐오는 위기들을 늘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주변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매력 넘치는 사내였다.
한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답게 그는 당대의 얼굴들을 만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가깝게 지냈고,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을 취재했으며, 피카소, 마티스 등 미술계와도 폭넓게 교류한다. 1945년 6월, 해방된 파리에서 그는 잉그리드 버그먼을 만난다. 화려하지만 가식적인 세계인 할리우드의 명배우는 거칠지만 생생한 야생동물의 체취를 풍기는 종군 사진가와 사랑에 빠진다. 전쟁은 끝나고, 카파는 버그먼을 따라 할리우드의 사진가 생활을 시작한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둘의 사랑을 응원했지만, 카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할리우드를 떠난다. 그는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고, 매그넘 에이전시를 통해 젊고 재능 있는 사진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애쓴다.
1954년 5월 25일,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취재 도중, 카파는 지뢰를 밟아 짧지만 불꽃같았던 생을 마친다. 그의 손에는 흑백 필름이 든 콘탁스 카메라가, 곁에는 컬러 필름이 든 니콘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 그림으로 만나는 카파의 걸작들
『로버트 카파, 사진가』에서 작가 실로레는 카파를 대표하는 사진들을 세밀한 터치로 공들여 되살려냈다. 그는 사진 원본을 그래픽노블로 재구성할 때 레이아웃 등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고심했다고 한다. 그림의 주조는 흡사 오래된 사진을 연상시키는 세피아 톤이다. 마치 카파의 삶이 긴 한 롤의 필름에 담겨 우리 눈앞에 순서대로 펼쳐지는 듯하다.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물감을 가급적 엷게 쓰며 펜으로 윤곽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흰색 아크릴 물감을 더하여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스탈린의 자객에게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마지막 대중 연설 장면, 스페인 내전에서의 ‘쓰러지는 병사’,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서의 연합군 상륙, 그가 가장 비통함을 느꼈다고 고백한 종전 직전 총에 맞아 쓰러진 발코니의 미군 병사, 지뢰를 밟기 전 찍은 최후의 사진 등, 그림에서 생생한 현장감이 전해온다.
카파의 동생인 코넬 카파 (Cornell Capa, 1918-2008. 흥미롭게도 그 역시 형의 이름을 따라 본명을 버리고 ‘카파’로 개명한다)가 설립한 사진교육기관 ICP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의 도움을 받아, 카파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책에 충실히 반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전쟁의 와중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카파의 필름 상자가 1995년 멕시코에서 극적으로 발견되는데, 카파의 팬과 사진사 연구자들은 ‘포토저널리즘의 성배聖杯가 발견되었다’며 흥분한다. ICP가 이를 인수, 2010년 멕시칸 수트케이스라는 전시를 열었다. 책의 41쪽 그림 1-3에 이 필름 상자가 등장한다.
책의 제목인 ‘로버트 카파, 사진가’는 전사한 뒤 미국으로 운구되던 그의 관에 새겨진 문구이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그의 삶을 요약해주는 말이 또 있을까. 포토저널리즘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혔던 한 천재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이 책을 통해 강렬하게, 압축적으로 만난다.
헝가리계 유태인 · 미국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1913 ~ 1954) 개관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1913년 10월 22일 ~ 1954년 5월 25일)는 헝가리계 유태인이자 미국인으로,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의 설립자인 동시에, 20세기에서 유명한 전쟁 보도 사진작가로, 에스파냐 내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유럽전선, 제1차 중동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했다.

–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출생: 1913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1954년 5월 25일 (40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타이빈 성
.직업: 사진가, 기자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 → 프랑스 → 미국
.주요 작품: 에스파냐 내전 사진 고발 보도
.영향: 뤼미에르 형제 등에게 영향을 받음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유명한 미국 영화감독 프랭크 카프라 (Frank Capra)의 이름을 본따 지었으며 ‘카파’라는 말은 헝가리어 ‘차퍼 (Cápa)’에서 유래한 말로, 상어를 의미한다. 동생 코넬 카파도 사진작가이다.

– 생애 및 활동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 (헝: Friedmann Endre Ernő)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31년, 그는 좌익학생운동을 하였고, 당시 헝가리 왕국의 섭정이던 호르티 미클로시의 정치를 피해 독일의 베를린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을 촬영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첫 사진이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 (NSDAP)이 집권하자 (그는 유태인이었다.), 프랑스 파리로 다시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리에서 프리랜서 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그는 이름을 이때부터 로버트 카파라 하였다.
– 에스파냐 내전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에스파냐 내전을 취재하러 에스파냐로 갔다. 1936년에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Loyalist Militiaman at the Moment of Death)을 촬영하여 유명해졌고, 이 사진은 에스파냐 내전을 대표하는 사진이 되었으며 이 사진을 통하여 카파는 종군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이 사진은 카파가 죽을 때까지 사진의 연출 유무를 둘러싸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카파는 끝까지 연출을 인정하지 않았고, 카파를 지지하는 측에 의하여 사진의 주인공이 공화파의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레코 보렐 가르시아 (Federico Borrell García)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다. 이 사진의 연출 여부에 대한 논란은 2007년 “”Mexican Suitcase”가 발견됨으로 일단락 된다. 카파가 남긴 이 가방에서는 논란의 사진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찍힌 7점의 사진들이 발견된다. 이 사진들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의 주인공을 비록한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전쟁 장면과 전사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명백하게 연출된 사진들이다. 또한 사진들의 배경 풍경의 확인을 통하여 사진을 찍은 장소가 당초 카파의 주장이었던 무리아노 (Muriano)가 아니라 전선과는 50km 이상 떨어져 있었던 에스페호 (Espejo) 지역임이 확인되었다.
카파는 1938년 잠시 중국에서 국민정부측의 선전영화 ‘4억의 민중’ 촬영을 위하여 중국 한커우로 가 ‘4억의 민중’ 촬영과 중일전쟁을 취재하였고, 다시 에스파냐에서 취재를 계속하였다.

–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재빨리 가족이 있던 (그의 가족은 1938년에 미국으로 이민갔었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멕시코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기도 하였으나 (1940년),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미국 잡지 ‘콜리어스’의 요청을 받고 영국으로 갔으나, 중간에 소속사를 ‘라이프 (Life)’지로 옮겼다 (영국으로 가는 도중에도 대서양 선단을 취재하였다).
그는 먼저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북아프리카 전역을 취재하였다.
또, 연합군이 이탈리아로 전선을 확대하자, 이탈리아에서도 취재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취재는 바로 19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의 오마하 해변에서의 취재인데, 카파는 두 대의 콘탁스 카메라를 들고 106여장의 사진을 촬영하였으나, 필름을 받은 라이프 (Life)지의 암실 담당자가 흥분한 나머지 건조도중 필름의 감광유제가 녹아버려 11장의 사진 (The Magnificent Eleven)만이 남았다고 주장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쓰러지는 병사”와 더불어 카파의 명성을 대표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사진들 (The Magnificent Eleven) 역시 논란에 사로잡힌다.
카파는 당초 D-Day에 오전 6시 30분에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여 90분간 촬영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가 탑승하였던 상륙정은 오전 8시15분에 해변에 도착하였으며 카파는 오전 9시에 떠나는 배를 타고 돌아온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카파가 실제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여 머무른 시간은 15분에서 30분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카파가 도착한 해변은 당시 노르망디 해변에 주둔한 독일군 중 방어력이 가장 약한 부대로 치열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이미 카파가 도착하기 전에 전투는 종료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카파의 필름 건조에 사용되던 기계 역시 카파가 주장하듯이 필름을 녹아내릴 정도로 뜨겁게 가열되지 않는 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카파의 노르망디의 사진이 왜 11점 뿐이며, 사진들에 포탄, 총탄이나 물위에 떠다니는 시체 등과 같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없는 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준다.
《라이프》(Life)지는 이 사진을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Slightly out of Focus)’ 라는 캡션을 달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에는 샤르트르 시에서의 부역자에 대한 프랑스 군중의 조롱, 파리의 해방, 미군의 독일 낙하산 투하작전등을 취재하였다.
이 중 샤르트르 시와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한 미군 병사의 사진은 지금도 많이 알려진 사진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전
1946년, 그는 당시의 애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제의로 할리우드에서 영화에 손을 대봤지만, 얼마 안 가 포기하고, 터키에서 냉전의 긴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또한 이때 정식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1948년, 그는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키예프,트빌리시,바투미,스탈린그라드의 폐허를 취재하고 ‘러시아 저널(A Russian Journal)’을 존 스타인백 이름으로 냈고, 제1차 중동 전쟁을 취재하였다.
또한 1947년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침 시모어, 조지 로저와 함께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하였고, 1951년, 회장에 취임하였다.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사망
1952년, 당시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여권의 효력이 일시 중지되었고, 1953년에는 미국 FBI의 감시를 받았다. 1954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취재했다.
또한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고 베트남으로 건너가, ‘쓰디쓴 쌀’이라는 제목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기를 쓰려 했으나, 5월 25일 오후 2시 55분, 프랑스 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하였고, 그의 사망을 확인한 프랑스 군 베트남인 장교는 “사진기자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 사생활
파리에서 ‘앙드레 프리드만 (André Friedman)’으로 지내던 1934년, 독일계 유태인인 게르다 포호릴레스 (Gerda Pohorylle)와 첫 교제를 하였다. 그는 게르다 포호릴레스에게 사진을 가르쳤고, 에스파냐 내전당시에는 함께 취재를 하기도 하였다. 카파가 잠시 파리로 가 있는 동안 게르다는 브루네테 전투에서 공화파 군대의 전차에 깔려 죽었다. 카파는 원래 게르다 포호릴레스와 결혼하려 했으나, 그녀가 죽고 난 뒤 이성과는 교제는 하더라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도 게르다와 함께 일할때 가공의 고용인의 이름이었으나, 실제로는 앙드레(즉 지금의 카파)가 카파의 노릇을 하였고,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게르다 타로 (Gerda Taro)로 바꿨다.
1943년에는 전선 후방이었던 영국에서 일레인 저스틴 (Elaine Justin)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의 책 《Slightly out of Focus》에서 자신은 일레인을 “핑키 (Pinky)”라 불렀고, 그녀의 불그스름한 금발때문이었다고 적었다. 카파와 일레인 관계는 일레인이 그녀의 친구 척 로마인 (Chuck Romine)과 결혼하면서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이 끝날 무렵, 그는 연합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 스웨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의 제의로 할리우드에서 잠시 일했다. 잉그리드도 카파와의 결혼을 생각하였으나, 카파는 잉그리드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잉그리드와 카파의 관계는 1946년 여름에 끝났다.
– 유산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후세의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1966년, 관심있는 사진을 위한 국제 기금 (International Fund for Concerned Photography)’을 설립하였고, 1974년에는 카파가 촬영했던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을 설립하였다.
미국의 전쟁기자 집단인 해외 취재클럽 (Overseas Press Club)은 ‘로버트 카파상’을 제정하여 “대담한 용기와 진취적 정신이 이뤄내는 최고의 외신 사진”을 촬영한 사진기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 어록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진실이야말로 최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 (선전선동)이다. (The truth is the best picture, the best propaganda.)”
“전쟁은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 같다. 사진은 점점 잘 안 받으면서, 점점 더 위험해진다. (This war is like an actress who is getting old. It is less and less photogenic and more and more dangerous.)”
“재능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헝가리인이 되기도 해야한다. (It’s not enough to have talent, you also have to be Hungarian.)”
“스페인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기교가 필요 없다. 카메라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페인 자체가 사진이고, 당신은 그저 찍기만 하면 된다.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뉴욕 월드 텔레그램과의 인터뷰 중.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어떤 입장에든 있지 않으면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 기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에서 오마하 해변 장면 일부가 흐리게 나온것은 카파의 사진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가수 Falco의 1986년의 앨범 중 ‘가미가제 카파 (Kamikaze Cappa)’는 카파를 기리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도박 (특히 포커)을 즐겼으며 사교적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존 휴스턴, 험프리 보가트, 존 스타인벡 등과 매우 친했다.
영국의 알터네이티브 락 밴드 alt-J의 곡 ‘Taro’는 로버트 카파와 게르다 타로를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에서의 전시회는 2007년 3월 29일부터 5월 26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2013년 8월 2일부터 10월 28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