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지리
아이발릭 (차낙칼레 / 트로이)

트로이 유적은 호메로스(‘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의 전승을 믿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로 그 모급이 드러난 고대 도시다.
트로이 유적은 시대순 9개로 나뉘는데 1도시(BC3000-청동기), 2도시(BC2800-최초 번영기), 3-4도시(BC2200-이민족 침입), 5도시(BC1800-미케네 교류기), 6도시(BC1280-BC1200), 7도시(BC1200-폐허 방치기), 8도시(BC700-알렉산더기), 9도시(BC85-5C말)이다.
차낙칼레 (Canakkale) 는 현재 인구 5만 5천명의 소도시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며 에게해(Aegean sea)에서 마르마라해(Marmara sea)로 들어오는 다르다넬스 해협(St.Dardanelles)의 입구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해협의 아시아쪽과 유럽쪽까지의 해협의 넓이는 고작 1,200m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작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가 갈라지는 것이다.하지만 차낙칼레시의 행정구역은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쪽과 아시아쪽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과거 헬레스폰투스(Hellespontus)라고 불리웠다. 이 그리스어의 뜻은 “그리스의 문호”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해협은 그리스와 흑해연안의 식민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 상업,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이 해협의 중요성은 근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나라들이 이 해협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였다. 그래서 이 해협은 1841년 맺은 런던조약에 의해서 모든 나라의 상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유해협이 되었다.
1451년 술탄 마호멧 2세(Sultan Mehmet II) 이후 이스탄불의 지배자들은 다르다넬리해협의 유럽쪽에 Kilitbahir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Cimenlik 요새를 지어 이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을 통제했다. 현재 Cimenlik 요새는 차낙칼레 전쟁의 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에게해와 흑해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거나 나누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지역은 과거에 2개의 중요한 전쟁을 치렀다. 첫번째는 호머(Homer)의 일리아드로 유명한 트로이(Troy/ 현재명:Truva ) 전쟁이다. 이 불멸의 이야기는 트로이가 발굴되면서 허구가 아닌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밝혀졌다. 두번째 전쟁은 차낙칼레 전쟁(Canakkale Battle)이다. 이 전쟁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의 지휘 하에 터키군이 차낙칼레를 지키기 위해서 벌였던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졌던 차낙칼레의 유럽쪽 지역인 갈리폴리(Gallipoli)는 국립공원이 되었으며 이 곳 언덕에 거대한 석조기념비가 세워져 차낙칼레 전투에서 전사한 50만명의 군인들을 기리고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쪽에서 아시아쪽으로 매일 수 차례 왕복하는 페리에는 언제나 승객들과 차들로 가득하다. 해협을 항해하는 요트는 아름다운 차낙칼레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 잠시 이 곳에 정지한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카페들 사이의 산책로를 산책하며 Kilitbahir요새에서의 경관과 차낙칼레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차낙칼레 항구 등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은 트로이에 이어 미케네도 발굴해 호메로스의 세계를 입증했다.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은 어릴적 목사였던 아버지에게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듣고 트로이가 신화속의 장소가 아니라 실재한다고 믿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여 큰 돈을 번 뒤 사업을 접고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마침내 49세 때인 1871년에 트로이 유적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1873년 수천년 동안 흙속에 묻혀있던 황금 목걸이와 항아리 잔 등의 고대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 유네스코의 트로이 유적 소개
.국가 : 터키(Turkey) / 위치 : 차낙칼레 주(Province of Çanakkale)
.좌표 : N39 57 23.184, E26 14 20.4 / 등재연도 : 1998년
4,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트로이(Troy)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유적지의 최초 발굴은 1870년 유명한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에 의해 이루어졌다. 과학적 측면에서, 이 광대한 유적은 아나톨리아(Anatolia)가 지중해 국가들과 최초로 접촉한 가장 중요한 사례들을 보여 주고 있다. 더욱이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iliad)』에 기록된 기원전 13세기 또는 기원전 12세기에 그리스에서 온 스파르타·아테네 전사들의 트로이 포위작전은, 이후 세계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창의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영문명 : Archaeological Site of Troy / 유산면적 : 158㏊ / 참고번호 : 849
트로이의 고고 유적지는 초기 유럽 문명 발달사 중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단계이다. 이 유적은 유럽 문명 발달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더욱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2,000년 이상 예술 창작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때문에 이곳은 이례적인 문화적 중요성이 있다. 트로이는 에게 해의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동양적 도시의 독특한 사례로서 중요하다. 또한 트로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 유적지이며, 현대 고고학의 출발 지점으로서 공적으로 인정받은 유적이다.
트로이 Ⅱ와 트로이 Ⅵ 구역은 특히 고대 도시의 독특한 사례들이다. 이 도시는 궁을 둘러싸고 거대하게 요새화된 성채와 같다. 행정 건물을 중심에 두고 광범위한 로어 타운(lower town)이 둘러싸고 있으며 요새화되어 있다. 트로이는 보편성을 가진 중요한 문학작품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The Aeneid)』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장소이다. 이곳의 헬레니즘 양식의 분묘들은 아킬레스(Achilles)·아약(Ajax)·헥토르(Hector)·파트로클로스(Patroclus) 등의 영웅이 묻혔다고 추측되는 곳 위에 건설되었다.

트로이(일리온)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 초, 기원전 4000년대 후반부터이다. 성채 주변에 처음 방어벽이 설치된 시기는 기원전 3000년 무렵이다. 이곳의 방어벽은 2번 확장했으며, 1시기(Phase I) 말 기원전 2500년 무렵에는 지름이 110m나 되었다. 초기 청동기 시대 끝 무렵인 다음 5세기(트로이 ⅡⅤ)에 정착 계획이 세워지고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2000년 무렵 극적인 문화 변동으로 인해 가옥과 성벽이 돌로 다시 건축되었다. 도시는 처음 성벽을 두르고 정착했던 때보다 상당이 확장되었다.
그 후 트로이 Ⅵ이 확장되어 에게 해 지역 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다른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물품들이 수입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은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350년 지진으로 트로이 Ⅵ이 파괴되어 묻혀버렸다. 방어벽과 가옥들이 붕괴되었지만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좀 더 질서 있는 배치를 갖게 되었다.
기원전 1250년 무렵 트로이 Ⅶ에 종말을 가져온,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화재와 학살의 증거는 트로이 전쟁 동안 그리스에게 포위당한 이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역사적 사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실제 원인은 트로이와 미케네 왕국이 서로 상업적 이해관계가 대립함으로써 높아진 긴장 때문이었다.
미케네는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을 요령껏 통제하면서 흑해 지역에서 수익성 높은 무역을 하고 있었다. 트로이 도시는 다시 한 번 재건되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 트로이는 상업적 주도권을 거의 상실했고 기원전 2000년 말기에 버려졌다. 이 지역은 기원전 8세기(트로이 Ⅷ)에 렘노스에서 온 그리스 주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다시 거주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06년 트로이는 트로아드(Troad)에 있는 도시 연맹의 수도가 되었고 기원전 188년 호메로스의 일리온(Ilion, 트로이)으로서 로마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일리온은 로마의 모(母)도시로 인정받으면서 ‘새로운 일리온’이라는 뜻의 일리움 노붐(Ilium Novum)이라고 불렸으며 세금을 면제받았다. 기원전 85년 미트라 해전 때에는 약탈당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방문한 기원전 20년 무렵이 될 때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267년 헤룰리(Herulian)의 침입에 의해 완전히 황폐화되었음에도 도시는 로마의 통치 하에 번성했으며 6세기 심각한 지진에서도 살아남았다. 9세기에 또 한 번 버려졌으나 비잔틴 시기 후반에 다시 주민들이 살기 시작했고 오스만 시기가 오기까지는 다시는 버려지지 않았다.
이 유적지의 당시 역사와 그 이후의 탐사와 보존은 이곳이 발견된 1793년에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이곳을 1810년에 처음으로 일리온으로 확인하였고, 1820년에 트로이라고 확인하였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1868년에 처음 이곳을 방문하여 1890년 죽을 때까지 7가지 중요한 활동을 펼쳤다. 슐리만의 활동은 조수였던 빌헬름 되르프펠트(Wilhelm Dörpfeld)가 이어받아 1893년~1894년 동안 완성하였다.
1873년 슐리만은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King Priam’s Treasure)’이라고 잘못 알려진 유명한 금 저장소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은 트로이 Ⅱ에서 유래된 것으로 트로이 ⅧA의 것은 아니다. 1세기가 넘게 진행된 발굴로 23개 구역에서 성채를 둘러싼 방어벽, 11개의 문, 돌로 포장된 경사로, 5개의 방어용 보루가 드러났다. 이러한 것들은 트로이 Ⅱ와 트로이 Ⅵ에서 유래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장 초기의 성벽(트로이 Ⅰ) 구역은 처음 방어용으로 건설된 남문 근처에 남아 있는 것이다.
트로이 Ⅱ의 가장 큰 거주 단지는 포치가 있는 5개의 평행하게 긴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megara, 메가라). 이 건물들 중 가장 큰 것은 그리스 신전의 원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적들은 궁전의 일부 양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 Ⅱ의 수많은 긴 직사각형 모양의 주택 유적은 해당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이다. 이른바 ‘슐리만 참호(Schliemann Trench)’라고 불리는 직사각형 모양의 주택 유적은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발굴자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슐리만의 연구 대상인 ‘프리아모스의 성채’이다.
트로이에 있는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들은 무엇보다 성역 복합지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도시 배치는 광장의 가장자리에 있는 2개의 주요 공공건물에 반영되어 있다. 오데이온(odeion, 음악당)은 전통적인 말발굽 형태로 설계되어 있으며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좌석 열이 있다. 근방의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 의사당)은 오데이온보다는 좀 더 작지만 설계는 비슷하다. 지평선을 빙 둘러 묘지들과 헬레니즘 양식 무덤 봉분, 그리스와 로마 주거지, 로마와 오스만 시대의 다리들 등과 같은 많은 중요한 선사 유적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펼쳐져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