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지리
에돔족속의 거주·출애굽의 여정지, 요르단의 페트라 (Petra)
요르단의 페트(Petra)라는 구약시대의 ‘에돔’ 족속이 살았던 곳으로, ‘에돔’은 이삭의 큰 아들인 ‘에서’의 후손을 말한다. 이 ‘에돔’ 족속들은 ‘페트라’를 통과해 약속의 땅으로 가겠다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에돔 족속은 오바댜(1:3)에서도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라고 언급된다.

지금은 요르단인 이곳은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했던 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곳 페트라에는 모세가 지나갔다고 해서 이름 붙은 ‘모세의 계곡’과 ‘모세의 샘’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막으로 불리는 ‘와디럼’에서도 성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돔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막과는 다르게 붉은 모래로 이뤄진 와디럼에서는 모래언덕과 기암괴석이 비현실적인 풍광을 빚어낸다.
이곳에서는 유목민들과 같이 천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체험도 가능한데, 이를 통해 출애굽 여정에 나선 이스라엘 민족들이 묵었을 그 장소에서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요르단 수도에서 북쪽으로 45㎞ 떨어진 ‘제라쉬’는 모세에 의해 정복된 길르앗 땅에 해당되며, 성경에선 ‘거라사인의 땅’,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쳤던 거라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 지역 일대를 광범위하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로마의 위성도시 중 하나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다양한 신들을 섬겼던 신전들과 함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기독교가 융성했던 도시였던 만큼 비잔틴 양식의 교회 건물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수도 암만 역시 구약시대 다윗의 오점이 남아있는 곳이다. 암만에는 ‘랍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스라엘 왕 다윗은 유부녀인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신하인 우리야를 치열한 전쟁터였던 이곳으로 보내 죽게 만든다. 우리야가 죽은 장소는 암몬성의 서쪽 성곽으로 추정된다.
세계인들의 휴양지인 사해 바다 주변 역시 성경의 쾌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요르단은 성경 속 이야기로 가득한 박물관과 같은 나라다.
○ 사막의 오아시스, 페트라 (Petra)
페트라 (Petra)는 나바테아인 (Nabataean)이 건설한 사막에 있는 고대 대상(隊商) 도시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홍해와 흑해 사이에 있다. 이곳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페니키아 사이의 중요한 교차점이어서 번영을 누렸다. 페트라의 건물들은 바위산을 반쯤 깎아서 만들었고, 좁은 통로와 수많은 협곡이 있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혼합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이다.

○ 유네스코의 페트라 (Petra) 소개 내용
.국가 : 요르단(Jordan)
.위치 : 마안 시(Ma’an Governorate), 좌표 : N30 19 50.016, E35 26 35.988
.등재연도 : 1985년
.영문명 : Petra
.유네스코 등재기준
기준 (ⅰ) : 나바테아적이면서 헬레니즘적인, 감동을 주는 사원과 무덤들은 천연의 꾸불꾸불한 바위 틈새길(시크)을 통해 갈 수 있다. 시크는 한때 번영했던 무역 도시로 향하는 동쪽의 주요 출구이자 독특한 예술적 업적이다. 이것은 19세기 초 이래 방문객들을 매료시켰던 사라진 도시의 걸작이다. 출입로와 거주지는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거대한 치수 및 저장 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준 (ⅲ) :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는 무덤군은 헬레니즘 기념물을 통해 받은 아시리아의 건축적 영향을 반영한다. 제벨 마드바(Jebels Madbah)와 메이스라(M’eisrah), 쿱타(Khubth), 하비스, 알 마드라스(Al Madras) 등 제의적이면서 종교적인 고지대의 종교 유적, 방대한 치수 체계의 흔적, 도시의 벽들과 독립해서 서 있는 사원들, 정원 테라스, 무덤 비석과 현판, 북쪽 통로(바리드(Barid) 또는 리틀 페트라)와 남쪽 통로(사브라(Sabra))에 있는 무덤·사원·물탱크·집수지를 포함한 외곽의 상인들의 정기 숙영지는 기원전 4세기에서 서기 1세기까지 존속한, 지금은 사라진 나바테아 문명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
기준 (ⅳ) : 전체 건축물에는 알 카즈네 신전과 우른 무덤, 궁전 무덤, 코린트식 무덤, 수도원 등 소위 페트라의 왕릉이라 불리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유적들은 동양적 전통과 헬레니즘 양식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 주며, 서기 1세기 말에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만남을 대표한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나바테아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홍해와 흑해 사이에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는 아라비아의 향료와 중국의 비단, 인도의 향신료를 거래하는 대상들의 중심지였다. 바위를 반쯤 깎아 만든 건물들은 좁은 통로와 수많은 협곡이 있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독창적인 치수(治水)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나바테아와 로마, 비잔틴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건조한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대규모로 정착할 수 있었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 경관이 지배적인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드넓은 고고학 유적지다.
페트라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대규모 고고학 유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에 있다. 공들여 만든 대규모의 무덤과 사원 건축물, 고지대의 종교 유적, 수로의 자취, 터널, 계절성 빗물을 저장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집수지와 물탱크들을 방대하게 연결한 우회 댐, 구리 광산, 사원, 교회, 기타 공공건물을 포함한 유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알카즈네 신전(Khasneh)과 우른(Urn) 무덤, 궁전 무덤, 코린트식 무덤, 수도원을 포함하여 바위를 깎아 만든 나바테아의 전통적인 신전과 무덤들은 헬레니즘 건축 양식의 파사드(facade, 정면)와 융합되어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의 건축 양식의 총체를 대표하는 독특한 예술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선사시대부터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고학 유적과 건축 기념물들은 지금은 사라진 문명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베이다(Beidha)의 신석기 시대 정착촌 유적, 움알비야라(Umm al Biyara)의 철기 시대 정착촌, 움알아마드(Umm al Amad)의 금속 병용 시대의 광산 유적, 열주가 늘어선 길과 3중 아치를 이룬 출입문과 극장과 수로의 출구와 목욕탕 등을 포함한 그리스 및 로마의 민간 건물 유적, 3중 애프스(apes, 교회당 동쪽 끝에 튀어나와 있는 부분)가 있는 바실리카 성당과 우른 무덤에 건설된 교회를 포함한 비잔틴 흔적, 하비스(Habis)와 우에이라(Wueira)의 십자군 요새의 잔해, 전통적으로 예언자 아론(Aaron)의 매장지인 제벨아룬(Jebel Haroun)의 이슬람 사원의 토대, 이상의 모든 것들이 페트라 지역의 과거 문명을 특별하게 증언하고 있다. 움알아마드의 구리 광산과 지하 갱도는 기원전 4세기 광산 건축물의 탁월한 본보기다. 우회 댐과 무트림(Muthlim) 터널, 수로, 수도, 집수지, 물탱크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의 치수 기술을 보여주는 탁월한 유적이다.
.완전성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독립적으로 서 있는 모든 주요 기념물들과 대규모 고고학 유적들은 붉은 사암 절벽과 협곡들이 즐비한 건조한 경관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유적들은 유산의 경계 안에 있는 동시에 페트라 국립공원(Petra National Park)의 경계 안에 있다. 기념물들은 바람과 비 때문에 계속 침식되고 있으며, 지표를 없애는 초식동물들 때문에 강해진 모래바람으로 이미 오래 전에 많이 파괴되었다. 20여 년 전 베두인족을 재정착시킨 것과 그들의 가축을 페트라 분지에 있는 계절 거주지에서 움사이운(Umm Sayhun)의 새 마을로 이주시킨 것도 부분적으로 이와 같은 파괴를 막기 위해서였다. 건축물들은 나바테아의 치수 체계가 지속적으로 관리·보수·유지되지 않으면 ‘시크(Siq, 바람 골짜기)’를 거쳐 와디무사(Wadi Musa)에 이르는 돌발적인 홍수에 취약 할 수 밖에 없다.
이곳은 등재유산이 된 이후 크게 증가한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시달리고 있고, 특히 도시의 동쪽 주요 출입로인 ‘시크’가 매우 붐빈다. 지역 공동체와 관광객을 위한 기반 시설도 취약하다. 새로운 하수 처리장은 인접한 세류(細流) 관개 농장 프로젝트를 위해 쓰이는 재사용한 물을 북쪽의 유산 안쪽으로 공급해 왔다. 유산 내부에 앞으로 갖춰야 할 계획된 기반 시설만 해도 전력 공급 시설, 변전소, 공동체 센터와 방문객 센터, 지역 행사를 위한 노천극장, 소풍 구역, 캠핑장, 카스르 알 빈트(Qasr al Bint) 사원 근처의 새 식당 등 아주 많다. 이 모든 것이 문화유산의 보전에 잠정적인 영향을 준다.
.진정성
사원과 무덤 기념물의 특성과 위치, 주변 경관은 명확하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 사암 건축물의 자연적인 침식은 장기적으로 유산의 진정성을 위협한다. 카스르 알 빈트 사원 을 포함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념물들과 우른 무덤의 비잔틴식 앞마당을 지지하는 아치형 천장 구조의 보강은 문화유산 등재 이전에 진행되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요르단 법에 따라 문화유적은 문화재국이 보호할 책임을 갖고 있다. 이 부처는 문화관광부 산하의 독립 조직이다. 유산은 문화관광부가 관리하는 페트라 고고학 공원 안의 보호 구역에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설계와 기반 시설의 확충에 대한 책임은 주로 페트라 지역 당국(PRA)이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페트라 지방 계획 위원회(PRPC)이 책임을 졌지만, 페트라 지역 당국은 현재 지역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발전까지 책임지고 있는 실정이다. 관리 직원이 증가하여 유적의 점검과 통제를 위한 캠페인도 가능하게 되었고, 상점의 임대와 공동체가 관리하는 상점의 디자인을 포함해서 관광객 수요와 지역 주민의 참여를 관리하기 위한 전략 또한 발달했다.
페트라 고고학 공원(Petra Archaeological Park) 관리 계획에 따른 규칙과 정책을 보면 페트라 고고학 공원의 전기화 작업, 나무 심기를 포함한 물 재활용 농장 계획 등 페트라 지역 당국이 추진하는 기반 시설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그 계획에는 공원 내부의 공공사업과 활동뿐만 아니라 공원 조명, 관광로, 안내판, 식당, 상점, 공동체 위락 지구, 수익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방문객의 증가로 발생하는 피해로부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관리 지침도 필요하다. 관광 수입의 증가는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다.
○ 교역의 교차로, 페트라 (Petra)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이 사막의 대상(隊商) 도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홍해와 흑해 사이에 있다. 이곳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이의 중요한 교차로였다.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혼합된 페트라는 사라진 문명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Amman)의 남쪽, 산이 많은 와디 아라바(Wadi Araba) 사막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도시를 둘러싼 우뚝 솟은 사암 언덕들은 침입자들을 막아주는 천연 보호막 구실을 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지중해와 근동, 아프리카, 인도를 오가며 향신료를 수송하는 낙타 상단이 이용했던 교역로들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페트라는 나바테아 인들이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건설했고, 셈족이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상업 제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서기 106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는 나바테아 왕국을 아라비아의 일부로 합병했다. 지진이 여러 차례 페트라를 강타하여 도시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대주교의 관할구로 지정되었다.
636년에는 아랍인이 도시를 정복했다. 그러나 메카로 향하는 순례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12세기에 십자군이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페트라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그 뒤 그들은 곧 철수했고, 페트라는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dt)가 이곳을 탐사했던 19세기까지 지역 주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알카즈네 신전의 북쪽에 제벨 쿱타(Jebel Khubtha)라는 단층 지괴가 있다. 이것은 ‘왕의 벽’이라 알려진 바위의 정면에 조각이 되어 있는 세 개의 거대한 구조물(왕의 무덤들)이다. 첫 번째는 우른 무덤으로, 정면에 2열의 둥근 천장이 있는 노천 테라스가 잘 보존된 기념물이다. 열주가 있는 회랑은 테라스의 북쪽으로 뻗어 있고, 공들인 파사드는 꾸미지 않은 하나의 간소한 방을 향해 있다. 또 벽들은 매끄럽고 내부의 모서리는 빈틈이 없다. 현재 확인되는 유일한 장식은 벽과 천장, 방바닥에 있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사암 소용돌이 문양이다.
알카즈네 신전의 축소판인 코린트식 무덤은 궁전 무덤(비단 무덤)의 옆에 있으며, 바위의 독특한 색채 효과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왕의 무덤에서 약간 떨어진 북쪽에 130년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의 로마 총독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Sextius Florentinus)의 무덤이 있다. ‘파라오의 보고(寶庫)’라는 뜻을 가진 카즈네 엘 파룬(Khazneh el Faroun)은 대략 40m 높이의 인상적인 파사드가 있는데, 산허리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낮은 층에는 6개의 기둥이 떠받친 현관 지붕이 있다. 그 기둥들은 꽃무늬 기둥머리를 얹고 박공을 떠받치고 있다.
3층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가운데는 원뿔 모양의 지붕이 있는 둥근 천장식 분묘이다. 이곳에 유골 단지가 놓여 있다. 나머지 양쪽에는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반(半) 박공이 있다.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건축, 조각 장식들이 건물의 각 요소들과 정면을 꾸미고 있다. 알카즈네 신전은 페트라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유일한 건물로, 어떠한 나바테아적 요소도 없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와 헬레니즘 예술 전통 간의 배타적 유대를 보여준다. 인상적인 정면 뒤에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를 깎아 만든 넓은 직사각형 방이 드러난다. 이것은 전형적인 페트라의 무덤이다. 외부만큼이나 평평한 내부는 복잡하다.
시크는 급류에 의해 만들어진 협곡으로, 나바테아인은 그곳을 막아 댐이나 수로를 만들어 도시에 식수를 공급했다. 시크의 돌 벽을 따라서 일련의 비문과 벽감, 소원을 비는 작은 제단뿐만 아니라 교역에 나선 인간과 낙타를 묘사한 돋을새김과 조각들이 있다. 시크의 폭은 5m가 안 되지만, 반면에 양쪽 벽면은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른다. 원래 포장되었던 바닥은 현재 부드러운 모래로 덮여 있다. 그렇지만 나바테아 건축양식은 여전히 몇몇 장소에서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또한 로마 시대의 주목할 만한 유산이 남아 있다. 계곡의 남쪽 끝에 바위를 파내어 만든 서기 1세기의 극장이 그것이다. 이 극장은 8,0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시크의 끝에 있는 폐허는 열주로 된 길로 연결된다. 알 데이르(al-Dayr)는 페트라 계곡을 굽어보는 서쪽 벼랑에 서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신성한 돌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알 데이르의 간소함과 단순함에서 헬레니즘의 전통적 요소들이 초기에 이 지역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에는 장례 시설이 전혀 없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