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콜롬바(St, Columba)의 생애와 영성(6)
성 콜롬바 영성의 특징(3) – 선교의 영성
AD 432년경 패트릭에 의해서 당시 아일랜드에는 700여 개의 교회에 소속된 1000여 명의 사제들이 150여 개의 부족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그 외의 서구 유럽으로 기독교를 증거하는 일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콜롬바가 스코틀랜드로 가게 되는 정신적 기초를 이루게 된다. 켈틱 선교회의 특징은 야만인 부족들의 문화를 파괴하는 대신 그들의 문화를 창의적인 방법으로 기독교 이미지로 바꾸어가는 특이한 선교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켈틱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매듭 문화를 삼위일체의 신학적 표현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화해, 사랑, 평화를 표현하였다. 십자가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켈틱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태양신에 대한 이미지를 요한복음 1장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원의 개념을 십자가에 첨부시켰다. 켈틱 십자가는 지금도 기독교가 애용하여 사용하는 십자가의 형상이다. 켈틱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 기독교와는 달리 상하 계급적 권위 중심이 아니라 지역 지역의 수도원들에게 자유적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를 통해서 창의적으로 수도원을 운영하게 하는 자립적 교회정책을 수용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정책은 후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교정책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켈틱 교회가 로마 교회에 접수될 때 사라지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개체 수도원에서 자발적 소그룹 공동체 생활을 인정함으로 그 공동체가 다이나믹(Dynamic) 해질 수 있도록 운영했다는 것이다.
콜롬바 영성은 선교하는 영성이다. 켈트영성이 계속 영국남부로 확장된 로마선교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켈트선교와 로마선교의 분리 순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노섬브리아(Northumbria) 오스위(Oswy) 왕은 켈트 선교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아내인 여왕 은플리다(Eanfleda)는 로마의 선교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왕과 왕비가 부활절을 다른 날로 지킴으로 인하여 생겨난 노섬브리 궁정에서의 내부적 위기는 긴장감이 점차로 커져 간다는 것이다.
이상택 박사에 의하면 콜롬바가 켈틱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콜롬바는 그들의 문화를 수용했다고 했다. 켈트 십자가의 원은 옛 켈트 예배의 자취인 태양을 상징하고 혹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징표이다. 또한 원은 세상을 상징하며, 켈트 십자가 중앙에 있는 원의 의미는 기독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선교적 뜻이 있다. 필립뉴엘은 “켈트 십자가는 태양신과 그리스도교 십자가의 융합이며 켈트문화가 그리스도교화된 토착화의 산물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선교에 세 잎 크로바를 사용 했는데, 세 잎은 삼위일체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켈트세계에서 중요한 사람 중의 한사람은 니니안(Ninian, 360-432)이었다. 그는 칸디다 카사(Candida Casa)의 수도원에 토대를 두고 선교를 시작했다. 니니안은 로마 도시와 교구 조직의 모형을 따르지 않고 동방의 수도원 유형에 기초하여 본질적으로 켈트지역의 전원적이고 종족적인 자연적 특성에 더욱 적합토록 선교활동을 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픽트와 브리튼족에 대한 켈트선교가 이로써 시작된 것이다. 당시 니니안의 교회에 속해있던 성 패트릭도 430년경 아일랜드에서 선교를 시작하고, 후에 성콜롬바가 아일랜드에서 훈련받은 후, 스코틀랜드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픽트와 브리튼대한 켈트선교가 이로써 시작된 것이다. 성 패트릭은 기원전 57년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가 갈리아인의 대부분이 자기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한 후, 또한 켈트인의 주 근거지인 알레시아가 정예로마 군단에 함락된 이후, 켈트 족은 더 이상 유럽본토에서 사회적 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 그리고 기독교 선교에 대해 많은 영감을 주는 이러한 변화는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된 패트릭(Patrick, 385-462)에 의해 주도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무려 200개의 교회를 세우고 10만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은 로마전통에 의한, 춘분 다음의 만월(full moon)후, 다음 주를 부활주일로 지키고 있다. 마침내 휘트비의 힐다 수녀원장의 혼성 수도원에서 664년 총회(Synod of Whitby)가 열리게 되었다. 로마도 켄터베리도 그 회의를 소집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종교회의(Synod)는 아니었다. 그것은 위탄(Whitan) 왕이 소집한 회의였는데 기본적으로 귀족과 고문들의 정치적 모임이었고, 왕은 이모임 에서 칙령에 의해 판결을 내리곤 했다.
켈트족을 위한 대변인은 주교콜맨(Colman)이었다. 커트버트(Cutbert)뿐 아니라 여자 수도원장 힐다의 지지를 받았다. 로마의 주장은 리폰(Ripon)의 윌프리드 (Wilfrid) 의 지지를 받았다.
비드(Bede)는 ‘교회론의 역사’에서 린디스판의 코올만 주교가 성 요한의 권위에 따른 주장을 하였고, 요한은 최후의 만찬시에 예수에게 기대어 주님의 심장 박동을 듣던 제자였기 때문에 요한의 영성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수도원장 윌프리드 성 베드로 권위에 기초한 켄터베리로부터 온 로마선교의 유형을 소개했다. 이것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에 기초하였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 16:18)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은 후에 오스위 왕은 로마선교의 방법을 선호하면서 “나는 베드로를 부정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켈트선교의 쇠락은 물론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오나에서는 휘트비의 칙령에 복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수 세기가 걸렸다. 그리고 켈트 영성의 조류는 결단코 전적으로 중단된 적이 없었다. 아이오나 수도원장 애담넌은 휘트비 총회가 끝난 지 거의 25년 후에 외형상 오스위왕의 지배를 따라서 로마의 사제머리 모양을 하고 아이오나로 돌아왔을 때 그의 수사들에게 거부를 당하였다. 아이오나 켈트 수도원은 거의 200년 동안 로마선교에 저항하는 중심지였다. 아이오나 섬의 마지막 독립 수도원장은 주후 860년 사망하였다.
아이오나 수도사가 ‘Book of Kells’에 관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 이때였는데, 창조의 사랑과 성서의 사랑이 켈트적 조화가 기막히게 채색이 되었고, 하늘과 땅,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잘 조화되어 꾸며진 성서본을 말한다. 이렇게 채색되고 꾸며진 복음서 사본과 켈트영성의 지속적인 주제들은 켈트교회의 굉장히 높은 십자가로 이어져 전승 되었다. 십자가 중앙의 원형은 세상의 빛을 상징하여 성서의 자연적 이미지가 십자가의 수직선과 수평선 방향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자연안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이 십자가들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9세기의 철학자 존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n Scotus Eriugena)는 켈트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교사이다. 그의 이름은 ‘아일랜드에서 온 아일랜드 사람 존’이란 뜻을 지닌다. 브리지드의 킬데처럼 그리스도교 이전의 성스러운 장소가 그리스도교 선교의 중심부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와 유럽대륙의 교회들이 더욱 물질적으로 되어갈 때 켈트교회는 더욱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장윤재는 켈트 성인들 가운데 ‘거룩한 삼위일체’라 불리웠던 성 패트릭, 성 콜롬바 그리고 성 브리키드는 피를 흘리는 ‘적색선교’ 대신 금욕과 고행을 특징을 하는 ‘녹색순교’ 나아가 자기를 비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랑의 정신을 특징으로 하는 ‘백색 순교’정신을 강조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한 생명을 포기하는 ‘붉은 선교(Red martyrdom)’ 혹은 모진 회개의식에 참가하는 ‘녹색 선교(Green martyrdom)’와 대조되는, 복음을 위해 가정과 건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몇 년을 사는 ‘흰색 순교(White martyrdom)’를 하였다. 켈트 선교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현대선교의 특징인 자비량선교, 자치선교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켈트예술의 특징은 V자형(the chevron)과 나선형(the spiral)이다. 이 두 가지 형태가 합한 것이 켈트의 대표적인 매듭의 문화를 탄생 시켰다. 매듭의 문화가 미로(maze)의 형태에서 출발하여 십자가, 무기, 성례전의 기물 등에 무늬로 장식되었으며 켈트교회의 전도나 선교 영역에서 큰 역활을 담당하게 되었다.
노정언 장로
한남·촬스슈터트대학 신학석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