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빌립보서 개관 – 복음의 위대함에 어울리는 삶
빌립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서신중의 하나인데 투옥과 같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기쁨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그 어떤 서신보다도 바울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향해 그의 따뜻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매력적인 러브레터이다.
<빌립보와 빌립보 교회>
빌립보서는 마게도냐 지방의 한 도시이다. 주전 356년에 알렉산더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왕 빌립이 이 도시를 자기의 지배아래 넣은 후에 확장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로 지명하였다. 빌립보는 두 개의 유명한 전투와 관련하여 세계역사에 길이 기억되는 곳이다. 주전42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시저의 살해자인 카시우스와 부루투스에게 승리를 거둔 전투가 이 빌립보에서 수행되었다. 또한 주전 30년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패배시켰다. 이 전쟁이 끝난 후에 500명이 넘는 퇴역군인들이 일정 토지를 분배 받아서 빌립보에 정착해 살게 되었으며 특히 안토니우스에게 속했던 장군들은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살도록 강제 조치되었다. 그래서 바울 시대에 빌립보 주민의 구성비율은 로마사람이 절반이었고 그리스와 마게도냐 사람이 절반이었다.
바울은 50-51년에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아시아의 한 지방으로부터(오늘날의 터키) 마게도냐 (오늘날의 북그리스)로 건너갔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을 전하여 자신의 유럽에서의 첫번째 교회를 설립하였다(행16:11-15). 사도행전 16장을 읽어보면 처음에 그 성읍의 문밖에 있는 시냇가에서 자주색 천들을 파는 상인이요 유대교에 심취해있던(“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라는 여성이 자기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울이 머물도록 집을 제공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저자, 기록장소, 기록연대>
빌립보서의 저자는 바울로서 이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은 감옥에 있었다(1:7,13,17). 바울은 가이사랴에 2년간 갇혀있었고(행23:33; 24:27) 로마에도 갇혀있었다 (행28:16). 바울 자신이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감옥에 갇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고후11:23) 사도행전에 언급된 것보다 자주 감옥에 갇혔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 전통적으로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있을 때 기록되었다고 추정된다. 만일 이 서신이 로마에 연금되었을 때 기록된 것이라면 주 후61-62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빌립보 교회의 상황>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게 된 상황은 개인적 요인과 교회적 상황에 관련된다. 개인적 상황으로는 첫째로 에바브로 디도에 관한 일이었다. 에바브로 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기 위해 파송한 인물이었다(2:25). 그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중병에 들어 죽게 되었고 빌립보 교인들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이 보낸 사람이 임무를 완수했지만 죽게 되었다가 회복되는 단계를 거쳐 귀환이 늦어짐을 알리고자 했다.
두번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에게 보낸 선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를 원했다(4:14-18).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위해 행한 이런 일들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바울이 서신을 쓴 이유의 일부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상황에 대한 염려를 표하며 그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빌립보 교회안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 부류의 그룹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첫째로 빌립보 교회에는 유오디아나 순두게 같은 사람들이 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긴밀한 관계속에서 일했던 사람들인데(4:2-3), 분열의 원인은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인간적 성품인 듯하다. 즉 자만심과 겸손의 결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빌립보 교회를 괴롭히는 외적인 대적에 대해 근심한다(1:28-29).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불만을 갖고 포박하고 쫓아내고 지방관원들에게 호소하는 일을 했다. 세번째로 악한 사역자들이 있었는데(3:2-3) 바울은 그들을 “개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고 할례등을 강조하는 행동을 통해 빌립보 교회를 혼동스럽게 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빌립보 교회를 바라보면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떤 상황속에서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한다(1:27). 다시 말해 교회 내외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속에서도 지금까지 견지한 믿음의 길을 버리지 말고 복음의 위대함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라고 권면한다. 이와 함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복음의 진보를 위해 받은 고난을 기뻐하며 복음의 메세지를 손상시키려는 거짓가르침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할 것을 부탁한다.
<특징>
본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성도들에 대한 엄정한 질책이라기 보다는 주로 감사와 우정에 대한 바울의 심정이 녹아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이 서신 전반을 지배한다. 그 표현을 다음과 같다.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1:7),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4:1)라는 표현들이다. 일종의 러브레터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또한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다. 이러한 러브레터를 쓰면서 바울은 자신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음과 그들이 기쁨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따라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기뻐하다”(1:18[2회]; 2:17,18,28; 3;1; 4:4[2회],10)와 “기쁨”(1:4,25; 2:2,29; 4:1)이라는 낱말이 이 서신 전체를 관통하면서 후렴처럼 반복해서 등장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자신이 역경가운데 있어도 구원의 기쁨, 하나님 은혜안에 있는 기쁨이라는 큰 덮개아래 놓여있음을 망각하지 않도록 힘써 권면한다.
<내용>
빌립보서는 4장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인 1-2장과 후반부인 3-4장의 전개분위기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다. 1-2장에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고 이 땅에 참된 해방을 나타낸 4명의 전기적 이야기가 전개됨을 보게 된다. 이것이 빌립보 교회에 제시한 긍정적 예들이었다면 후반부인 3-4장에서는 메세지가 부정적인 예들로 이어진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와 기도를 한 후에 바울은 1:12-2:30에서 4명의 생명을 살리는 존재들을 예시한다. 바울(1:12-26), 예수님(2:5-11), 디모데(2:19-24), 에바브로 디도(2:25-30)의 삶은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는 순기능 역할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실제 삶속에서 잠재적으로나(1:20-24; 2:27,30) 실제로 죽음에(2:8) 직면해 있으면서도 자신들보다 다른 이들의 필요를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섬김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이들의 삶이야말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그들이 대적자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한다(1:28-29). 본받으라는 요청이 3:17과 4:9에서 계속되지만 3-4장은 두가지 중요한 위협인 부정적 예에 촛점을 둔다. 그것은 거짓교사들과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불화였다. 다시 말해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의 전반부를 신앙의 터를 견고케 하는 사역을 감당한 영적 위인들의 예를 통해 격려하고 후반부에서는 교회의 건강함을 훼손하는 예를 통해서 그들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에 맺는 말을 통해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현재와 이전의 선물에 대한 감사를 한다(4:10-20).
<개요>
이상의 내용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서언 : 빌립보 교회에 문안함(1:1-2)
- 본론 : 복음안에서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동역(1:3-4:20)
1) 여는 말 : 빌립보 교인을 향한 감사와 기도(1:3-11)
2) 실제 본론 : 복음을 위한 일치 촉구(1:12-4:9)
(1) 다른 이들의 필요를 우선에 두는 긍정적인 예(1:12-2:30)
① 바울의 예(1:12-30)
② 예수님의 예(2:1-11)
③ 디모데의 예(2:19-24)
④ 에바브로 디도의 예(2:25-30)
(2) 교회를 위협하는 부정적인 예에 대한 경고(3:1-4:9)
① 거짓 교사들의 위협(3:1-21)
② 내적 분열로 인한 위협(4:1-7)
③ 마지막 격려(4:8-9)
(3) 맺음말 : 빌립보 교인들의 현재와 이전의 선물에 대한 감사(4:10-20)
<주요 메세지>
바울 사도는 빌립교 교인들에게 고난 중에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한다. 어디서 이러한 힘이 나오는가? 바로 복음 때문이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1:27의 말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로 볼 수 있다. 신자들은 복음을 통해서 하늘나라 시민이 되고(3:20) 복음에서 나오는 능력을 체험하며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살아간다. 바울의 감사는 빌립보 교인들의 복음에 대한 동역에 집중되어있고 그들의 복음을 위해 싸워갈 것(1:27)과 복음의 위협에 대한 대표로 거짓교사들(3:1-21)과 빌립보 교회안의 분열을 언급한다(4:2-3). 또한 빌립보서는 그들의 복음에 대한 동역에 감사함으로 끝맺는다(4:10-20). 그렇다면 빌립보서는 복음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는가?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숭고한 모범을 통해 제시되었다. “그리스도 찬가”(2:6-11)를 통해 소개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돌아보는 숭고한 모범을 보여주시며 하나님 되심의 높은 지위를 개인적 욕심의 추구를 위한 기회로 삼기를 거절하셨다. 오히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시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부어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셔서 우주의 대권을 주신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다른 사람이 내게 손해를 끼치고 유익을 취하거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유익을 취하는 일종의 제로섬(zero-sum) 게임에 익숙한데 복음은 그렇지 않다고 선포한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비우며 섬기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으로 완전히 패한 것 같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지만 그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업을 성취하심과 동시에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셨음을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보여준다. 이 분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이 복음적 삶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 즉 자신을 내어주고 비어주는 순전한 희생과 봉사속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길을 가면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닮을 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자신을 세속적 허영과 욕심으로 채워가려고 발버둥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신봉하다가 인간됨의 본분을 망각하고 짐승의 경지에 굴욕적으로 도달한 참담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대안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적인 삶이 있지 않는가?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광채 일 뿐아니라 그분을 따라가고자 결단하고 인생을 십자가 복음에 걸었던 빌립보서 저자인 바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태생적으로나 생의 과정에서 동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부러워할 탁월함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소지하거나 취득했던 존재였다(3:5-6),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것들을 십자가 아래 던져버리고 자신을 비웠다. 예수님을 닮고 그 예수님의 길을 가기를 결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순종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로 인해 이땅을 회복하고 이 땅의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인생을 헌신하면서 후회 없는 인생경주를 진력한다고 피력한다. 그래서 로마가 숭앙하는 힘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고상하고 품격 높은 섬김과 베품과 상호자비의 원리속에서 이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해 자신이 분투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 역시 그 길에 서서 복음을 자랑하며 복음의 위력을 확신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강권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 사도바울이 자신의 이전 생애를 뒤엎으며 따라갔던 가슴 벅찬 그일, 그리고 빌립보 지방을 복음으로 색칠하면서 로마의 힘의 숭배사상을 전복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려 했던 그 숭고한 비전이 이제 바로 우리들 앞에 전개된 것이 아니겠는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귀에 쟁쟁거리는 소리, 우리의 심장을 더 힘차게 고동치게 하는 소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대가운데서도 기쁨가운데 복음의 위대함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라는 쩌렁쩌헝한 바울 사도의 권면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 땅의 숭배자들이 취하는 사소한 힘의 경쟁속에서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상황속에서 빌립보서에 나타난 우리주의 모범과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헌신은 다시 한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남은 인생의 삶의 가치를 재고하게 하는 진정한 도전이 된다. 우리는 복음의 위대함에 어울리는 삶을 사고 있는가?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