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아가서 개관 – 세상의 절반을 불신자들의 손에 맡길 것인가?
인류역사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많은 것들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경제적인 문제를 보더라도 그렇다. 세계 제1위의 부자는 우리나라 돈으로 80조원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식비를 50센트로 책정하고 살아가야 할 정도로 처절하게 가난하다. 세계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지구상의 식량을 골고루 나누면 65억 명의 전 인구가 다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구의 한 곳에서는 7초마다 한 명이 죽고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영양이 과다하게 넘치고 있다. 세계인구를 1백 명으로 축소시키면 50명은 영양부족, 20명은 영양실조, 1명은 죽기 직전인데 비해 15명은 영양초과라고 한다. 부의 분배와 소유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인간세상에서 왜곡되는 것은 부(富)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잡아서 아름답게 세울 것이 많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성(性)등을 포함한 인간관계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것 중의 하나임을 발견한다. 아가서는 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이다.
우리말 성경의 제목인 『아가雅歌』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 된다. 히브리어 제목을 해석하면 “노래중의 노래”(Song of Songs)가 된다.
<문학 범주와 저자>
아가서는 지혜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앞에서 아가서가 “노래중의 노래”라 했다면 시편과 같이 시가서에 속하는 것을 기대하는데 사실은 지혜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일까?
아가서는 잠언서와 유사하다. 잠언서에 기록된 계시는 이스라엘의 구속사적인 거대 담론과는 아무 상관없는 “신변 잡기적인 일상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였다. 만약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재물에 대한 바른 태도, 바른 직업윤리, 바른 부모자식간의 관계, 바른 언어습관 등에 대해 계시하셨듯이, 아가서를 통해 바른 이성관계에 대해 계시하셨다면 삶의 지혜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저자가 누구인가는 다른 구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단순히 1:1을 보고 솔로몬이 저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본문의 내용과 문체와 문법속에서 그것을 확신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1:1에서는 “솔로몬의 아가”라는 표현에서 “솔로몬의”는 “솔로몬에 관한”, “솔로몬에게 바쳐진”, “솔로몬 지혜 전통에 속한”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시대의 “사랑의 시들”을 솔로몬 후대의 어느 솜씨 좋은 문학전문가가 다양한 조각들을 잘 정리해서 현재의 아름다운 본문으로 다듬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사랑과 결혼을 경축하기 위한 노래모음이나 서정적 민요라고 할 수 있다.
<주제>
아가서는 일차적으로 남녀의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그런데 교회역사에 있어서 아가서가 문자적으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진 것은 19세기부터였다. 그 전에는 아가서는 하나님과 교회,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사랑에 관한 책으로만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유대인의 영향이 컸다. 아가서는 놀랍게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을 기념하는 유월절 집회에 낭송되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기억하면 아가서는 유월절의 주제 본문이라는 사실은 아가서가 이스라엘 신앙에 있어서 가지는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매주 안식을 준비하는 예배 때 아가서가 고정적으로 낭독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아가서의 사랑이야기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로 은유 했다고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신랑은 하나님이시고, 신부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한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의 중요한 신들에게는 아내신(女神)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적 이스라엘 종교에는 여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부라고 생각하는 언약신학 때문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언약신학을 노래하는 아가서는 결국 그들이 예배함에 있어 중심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대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아가서를 풍유적으로 이해하는 같은 방법을 채용했다. 그러나 해석의 내용은 달랐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 주목했다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 혹은 기독교인 개인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중세를 지나 종교개혁 이후 19세기 전까지도 이런 풍유적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에 아가서를 문자적으로 즉 남녀의 사랑의 지침서로 받아들여지고 현재의 해석방식의 주류를 이룬다.
그렇다면 왜 오랜 기간 동안 아가서가 교회 안에서 남녀의 사랑(성애를 포함)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었을까? 그 부분적인 대답이 영혼과 육체에 대한 헬라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초대와 중세의 기독교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세계에 물들어져 있었다. 그 결과 육체 및 그 활동들은 일시적이고, 죄악이고, 악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견해가 지배했다. 따라서 성적인 절제는 미덕으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사고 방식은 수도원운동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적인 토양속에서 아가서를 남녀의 사랑, 특히 성애적인 시로 읽는 것을 아마도 매우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면서 학자들은 아가서가 성을 포함한 인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선물로서 귀한 것임을 간파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아가서는 오랜 기간 동안 풍유적으로 해석되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와 교회 또는 성도와의 사랑으로만 비춰졌으나 이제는 문자적 의미의 1차적 의도를 성스럽고 규모 있는 남녀의 성과 결혼에 대해서의 교훈으로도 함께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럼으로 우리는 아가서를 읽을 때 1800년간의 전통대로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사랑이라는 면과 함께 하나님이 세우신 배우자간의 사랑에 대한 교훈임을 동시에 기억하고 읽을 것을 권면하다.
<아가서의 중요성>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땅의 많은 것들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경제적 문제도 그렇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이 가정이라면,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 가정의 중심에 부부가 있고 부부의 성실함을 나타내는 것 중의 하나가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고 보존하며 중요시하는 것이다. 가정을 신실하게 보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부가 바른 성에 대한 가치관을 갖는 것이다. 성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였고,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왜곡되어진 분야이다. 이것은 성경의 증언속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창세기 19장에서 드러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자초한 죄는 심각한 성적 타락이었다. 그곳이 심지어 동성연애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잘못되고 왜곡된 성을 질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정당한 혼인관계 안에서의 성에 관해서도 부정적 견해를 갖는 것이 아니라, 결혼 이외의 성적인 활동에 대해서 정죄하신 것이다.
왜 이런 강조들이 등장하는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주변의 환경을 보자! 고대 근동세계의 다양한 풍요종교들에서 발견되는 거룩한 창기 제도로 인해 성적 문란함이 도를 넘었고 도덕적 삶의 기준은 전반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가서가 기록되고 읽혀진 당시의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결한 부부간의 정상적 성애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시 말해 정상적 부부간의 성애는 지극히 온당하고 축복받은 길이라 하더라도, 왜곡된 성의 방향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파괴적 영역으로 몰아간다는 것을 아가서는 증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성경이 아가서를 통해 성에 대한 대담한 담론을 등장시키면서까지 성을 동굴속에 감추지 않고 공론화시키는 과정을 거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시대의 문화속에서 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들이 지극히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것에서 손을 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속으로 들어가 해결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이라는 인간사의 주요 주제를,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복음으로 정화되지 아니한 불신자들의 손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중요한 주제들을 불신자의 영역에만 맡기고 우리는 수도승처럼 그 문제로부터 도피하고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영혼과 육신을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육신의 영역을 포기하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적인 일들에 대해서 손을 떼고 오직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만이 우리의 영역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삶의 중요한 영역의 절반을 아주 손쉽게 불신자들의 손에 맡기는 격이 되는 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뒤로 물러나서 책임 없는 존재로 남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그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붙잡을 뿐 아니라 이 세상도 역시 그 방향에 서도록 적극적인 소리를 외쳐야 한다.
우리가 성에 대해 함묵하고 있는 동안에 더욱더 성의 본질이 이 세상속에서 왜곡되어지고 있다면(사실 그런 현상은 이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 역시 우리의 책임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아가서가 일시적으로 부부간의 성의 문제를 다루었음을 보게 되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들의 태도를 얼마나 심중하게 촉구하는지를 발견한다. 성이라는 주제가 바른 물줄기를 탈 때는 하나님의 축복이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신실해야 할 성에 대해 침묵할 때 이 세상은 그 성을 가지고 지극히 그릇된 방향을 몰고 나아가고 환호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방법을 막으시는 것이지 결코 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복되심을 누리는 것을 경색된 태도로 막으시지는 않으신다.
에덴동산에서의 실패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누리도록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창2:16) 사탄이 의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금하신 것으로 경색되게 받아들여서(창3:1) 결국 하나님의 복된 방식과 결별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성을 금하거나 거북한 것으로 여기게 하실 분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축복임을 상기시키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것이 이 시대속에서 타락하고 저주스러운 상황으로 간다면 과연 우리가 침묵해도 되겠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시대의 도덕적 지표중의 하나가 성적인 타락 여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사회의 깊은 문제를 외면한 채 영적인 삶에 몰입한다는 이원론에 빠져서는 안된다. 영적인 문제와 더불어 아가서에서 성으로 대변되는 육신적인 문제 역시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고 바로 세워야 할 하나님나라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삶의 영역의 절반인 육신적인 분야를 불신자들의 손에 고스란히 빼앗기고 영적인 분야라는 반쪽만 붙잡고 있겠는가? 그러고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공허한 말을 되풀이 할 것인가?
성경은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파악하는 이원론은 적극적으로 배격한다. 영혼도 하나님의 영역이고 육신도 하나님의 영역이다. 육신적인 것도 영적인 태도로 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영적인 삶과 함께 그 몸이 죽으시기까지 하는 육신적 분투를 통해 구원의 길을 걸어가셨지 않는가? 예수님의 육신적인 싦을 배제한 채 우리를 구원하셨겠는가?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 역시 영육이 균형 잡힌 삶이 요구된다. 그리고 육신적 삶의 중요성을 인지한다면 이제 우리도 아가서로 돌아가서 건전한 문화의 수호자로 서기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성의 문제를 넘어서 모든 분야에서의 우리들의 사회 참여적 분투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가서는 단순히 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붙잡았듯이 하나님의 신부 된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영역인 이 땅을 순수하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질문에 불을 지피는 책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절반인 육신적인 일들을 불신자들의 손에 맡기고 살아가는 무책임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자각시켜 주면서……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