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에베소서 개관- 세상의 희망, 교회
고대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상업 중심지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춘 전략요충지였다. 해상무역과 육지무역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장소로서 부유할 뿐 아니라 로마의 소아시아 행정도시로서 최적의 장소였다. 에베소에는 직경 150m정도가 되며 2만~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원형극장이 있었다. 그러나 에베소가 고대사회에 유명하게 된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데미신전 때문이기도 하다. 이 신전의 공간은 열 계단까지는 가로세로가 대략 70m x 125m이지만 그 위 실제 건물이 있는 열세 번째 계단의 공간은 100m x 50m이다. 에베소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는 황제숭배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여러 황제들의 신전들과 동상들이 세워졌다.
<특징>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옥중서신이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구별되게 에베소서는 특정한 논쟁거리와 상황에 대한 답신을 준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상황속에서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했다. 그리고 골로새서가 기독론에 중점을 두었다면 에베소서는 교회론에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 및 수신자>
이 서신의 서두뿐 아니라(1:1) 본론에서도(3:1) 바울이 저자라고 주장한다.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로마의 클레멘트, 헤르마스, 그리고 다른 속사도 교부들은 이 서신을 분명히 바울의 것이라고 여겼다. 골로새서와 중복되는 내용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울이 특수한 상황을 염두해 두고 골로새서를 기록하고 얼마 후에 광범위한 목적을 가지고 에베소서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수신자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것의 초기에는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부근의 교회들을 위한 일종의 회람서신이었다가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교회인 에베소의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기 때문이다.
<기록연대 및 장소>
에베소서 3:1; 4:1; 6:20에 의하면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이 편지를 기록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 감옥에 있을 때나 가이사랴 감옥에 있을 때 보다는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행28:30-31). 또는 바울이 순교하기 전인 2차 투옥시기일 수도 있으므로 기록 연대를 바울의 순교시기인 주 후64년보다 이전으로 잡는다.
<에베소의 상황 및 기록 목적>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에베소서는 에베소와 부근교회들의 삶에 나타나는 특정한 도전에 대한 반응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편지를 보낸 목적은 거짓교사의 개입이 있거나 공동체의 신앙과 행위에 바람직한 변화가 필요하거나 그 지역에 폭동 등이 있거나 하는 급격한 변화에 대처하기 보다는 그 지역의 성도들을 교훈하고 권면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미 퍼진 병을 치유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 대한 예방이자 영양보충을 위한 의도였다고 보면 되겠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서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상기시키고 공동체의 특징적 가치관과 행동을 추구하도록 권면한 일반적 서신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당시 감옥(혹은 가택연금)에 있던 바울사도가 자신의 신학을 정리하면서 에베소 중심의 교회들을 생각할 때 꼭 다루고자 할 문제가 생각났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교회뿐 아니라 그 당시 초대교회들이 직면한 보편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구원을 단지 지상과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만 간주했지 성삼위 하나님의 심원한 계획가운데 실현될 것임을 놓치는 경향이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고 싶었다. 또한 에베소서 수신자들은 교회의 의미를 너무 축소시켜 받아들였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관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건설되어지고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성령이 지배하시는 기관임을 보여줌으로 그들의 왜소한 교회관을 교정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또 하나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부담감은 유대인과 이방인들간의 갈등의 문제였다. 수신교회들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사도바울은 이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기독론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에베소서 수신자들이 세상에 대해 실패한 모습을 마음 아파한다.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가 동화되려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올바른 세상관, 즉 세상의 악한 생활에 대해 방어함과 동시에 사회 각 분야에 적극 참여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함을 주지시켜야 했다. 이렇듯 에베소서는 어떤 특정한 문제를 딱히 다루기보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과 교회의 정체성을 세워야 할 지에 대한 바울의 신학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서신이다.
<에베소서의 구조>
에베소서는 두 개의 큰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3장은 구원에 대한 진술이고, 4-6장은 삶에 대한 권면이다. 그래서 첫 번째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 직설법이 사용되고, 둘째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 명령법이 사용된다. 먼저 구원에 대한 진술을 보면(1-3장) 첫째로 도입(1:1-2)에 이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짜임새 있는 구조로 소개된다(1:3-14). 둘째로 구원에 대한 진술에서 성도들의 과거와 현재가 묘사된다(2:1-22). 여기에 성도들 구원전의 모습(“그때에”, 2:11-12)과 구원 이후의 모습(“이제는”, 2:13-22)이 대조된다. 구원후의 모습에서는 구원이 어떻게 시작되어(2:13-18), 어떻게 진행되는지(2:19-22)가 언급된다. 셋째로 구원에 대한 진술에서 사도바울은 구속을 위한 자신의 활동을 설명한다(3:1-13).
다음으로 삶에 대한 권면을 살펴보자(4-6장). 사도바울은 이 부분을 “내가 너희를 권면한다”(4:1)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네 개의 작은 단락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시작할 때마다 “그러므로”라는 단어와 함께 “행하라”라는 단어가 나온다(4:1,17; 5:1-2,15). 첫째로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권면하고(4:1-6) 여기에 이방인과 다른 삶에 대한 제시가 이어진다(4:17-32). 또한 사도바울은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의 삶이라고 알려준다(5:1-14). 더 나아가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삶을 권면한다(5:16-6:9).
<에베소서의 내용>
위에 구조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서언(1:1-2)
- 구원의 대한 진술(1:3-3:21)
1)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1:3-14)
① 성부의 활동(1:3-6)
② 성자의 활동(1:7-12)
③ 성령의 활동(1:13-14)
2) 구원을 위한 성도의 과거와 현재
① 구원전의 모습(2:1-12)
② 구원 이후의 모습(2:13-22)
3) 구원을 위한 사도바울의 활동(3:1-13)
3. 삶의 대한 권면(4:1-6:24)
1) 부르심에 합당한 삶.(4:1-16)
2) 이방인과 다른 삶(4:17-32)
3)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의 삶(5:1-14)
4) 주의해야 할 삶(5:15-6:9)
5) 치열한 영적 싸움의 삶(6:10-20)
<주요 메세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에베소서는 교회론에 대한 심오한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주의 말씀이다. 세상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교회가 과연 어떤 곳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과연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되는 곳인가? 첫째로 교회속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어진다.
수평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비밀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영적 상속자가 된 것(3:3-6)과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이 성취된 것(2:11-22)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러한 인종적, 종교적, 윤리적 장벽을 제거하시고 교회안으로 하나로 모으셨다. 수직적 영역에서도 교회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고 결합하는 비밀이 이루어진 곳이다.
둘째로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실제적으로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이라고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으로 행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에베소서에는 깊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행하라”라는 말이 본 서신서의 후반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로 등장한다(4:1,17; 5:2,8,15). 이 용어는 신자(주로 이방인)가 이전에 “행했던”길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도록” 예비하신 선한 행위를 대조시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주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행적을 따라 좇으며 행하는 그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임과 동시에 윤리적인 공동체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덧입었으면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도덕적 정체성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다. 허물어지고 피폐해진 만물을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서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도덕적 증언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는 구원론과 윤리의 상관성을 부각시키면서(특히 2:8-10) 신자들이 하나님의 작품임으로 그분의 성품을 반영해서 선행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증거한다. 결국 교회공동체가 이 일을 함께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면 당연히 전에 행하던 방종한 삶을 청산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에베소서는 교회가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음을 고지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루어야 하는 영적 전투의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의 희망이 무엇인가? 교회가 성숙해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승리해야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께서 교회를 왜 세우셨는가? 예수그리스도를 인해 성취된 하나님의 광대한 구원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통해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대항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이 땅에 스며들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능력이 이 땅을 지배함을 소망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 땅에는 온갖 영적 능력과 세상적 방식으로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을 훼파시키며 헛된 삶으로 하강하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이러한 악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는 대항세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뿐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해서 진정한 소망을 말하고 이 시대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구상하신 아름다운 주의 땅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강함과 자원에 있지 않다. 또한 세상문명이 혁명적 진보에도 있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보아왔다. 그 꿈의 실현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에만 있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비록 모든 면에서 모자람을 느끼지만 우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우리 주님의 몸인 것을 인식하고 그 참된 구원과 삶의 능력과 윤리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속에서 배어 나온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임을 자각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크고 교회는 작은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미 영광과 권세를 부여 받았다. 문제는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가 얼마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4:22) 새사람을 입음으로(4:24) 그리스도의 지체다움을 회복하느냐에 달여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교회 공동체의 지체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맡겨진 참된 특권이요. 사명이 아닐까?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