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에스더서 개관 : 적시의 반전속의 하나님의 손길과 인간의 책임
에스더 서는 성경해석사에 있어서 찬반 양론이 가장 드센 유별난 책이다. 이 책은 유대주의 자들에게는 인기가 드높다. 다른 구약성경들 보다 모세오경과 함께 최고의 책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해석사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신약에서 언급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언급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이란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방인 페르시아 왕의 이름이 무려 190번이나 언급된다. 또한 종교적 요소가 적게 보인다. 에스더서에는 율법이나 언약, 성전에 대한 주제도 없고 포로기 후기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안식일 준수 규례도 없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에스더서에 대한 자신의 심각한 염려를 이렇게 표현했다. “ 나는 제 2 마카베오서와 에스더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이 차라리 존재 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 왜냐하면 이 책들이 지나치게 유대교화된 것들이면서 동시에 매우 이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 배경과 기록연대>
에스더서 사건은 아하수에로로 알려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B.C.486-464) 치하에서 일어 났다.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근동전지역에 뻗어있었다. 그리스의 고대역사가인 헤로도투스(B.C.484-424)에 따르면 그는 광활한 제국을 다스리는 매우 야심적이고 무자비하고 거친 통치자로서 뛰어난 용사였다. 헤로도투스의 저서인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의 1/3 가량은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1세)가 그리스 제국을 침공한 B.C.481-479년의 상황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몇 번의 인상적인 승리이후 크게 참패를 당하고 쫓겨나서 다시는 소아시아를 넘보지 못했다. 그의 통치는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따라서 이 책을 기록한 시기는 빨라도 아하수에로 왕이 죽은 B.C.464년 이후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통치에 대한 요약을 기록하고 있는 10:2의 내용이 그의 죽음을 암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들은 스룹바벨의 지도하의 1차귀환(B.C.538)과 에스라의 지도하의 2차 귀환(B.C.458년)사이에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에스더서는 에스라서의 중간시기에 발생한다.
<에스더 서의 구조 >
1장 : 왕비의 폐위
2장 : 에스더가 왕비가 되고 모르드개는 영웅이 되다
3장 : 하만의 음모, 모르드개의 딜레마
4장 : 에스더의 딜레마
5장 : 왕과 하만을 위한 에스더의 주연
6장 : 모르드개가 상을 받다
7장 : 하만이 벌을 받다
8장 : 전환된 칙령
9장 : 부림절
10장 : 영예를 받는 모르드개
<줄거리>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페르시아의 왕비(와스디)가 남편의 잔치자리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거부함으로써 왕비 자리를 박탈당한다. 그로인해 유대인 에스더의 출현이 가능하게 된다. 에스더는 왕비로 간택되었지만 자신의 유대인 신분을 감춘다. 그녀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우연히 왕의 목숨을 취하려는 자들의 음모를 듣고 에스더가 왕에게 전함으로 반역음모를 제거하는 공을 세운다. 그런데 하만이란 사람이 아하수에로의 2인자이다. 모르드개가 엎드려 자신을 존중하는 일을 거부하자 유대인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아하수에로 왕의 조서를 접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그녀의 지위를 이용하여 남편인 왕에게 나아가 중재할 것을 간청한다. 이런 와중에서 페르시아 왕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음모를 발견한 사람에게 보상하지 않았음을 알고 늦게나마 모르드개를 높인다. 두번째 잔치에서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면서 원흉 하만이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 모두를 살해하려 하고 있다고 알리며 상황을 역전시킨다. 하만은 자신이 준비한 교수대에서 죽고 유대인들은 저항권을 부여 받는다.
<중심 교훈들>
첫째로 우리는 에스더서 속에서 그의 백성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심을 바라본다. 사실 이처럼 역동적인 이야기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일으킨다. 그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임재는 확실한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분의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입술에 담지 않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건한 삶을 산다고 볼 수 있는가? 에스더서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삶속에 깊이 개입해 오신다.
그것은 에스더서의 내용전개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도 절묘한 상황들이 나타난다. “만일” 이라는 상황들이 나타나는데 이 때 여러가지 무언의 일치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의 부산물일 뿐임을 나타낸다. 사실 에스더서의 이야기 속에는 다행스러운 일들의 연속이 나타난다.
따져보자. 와스디(왕비)가 왕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나, 에스더가 왕비로 선택된 것이나, 모르드개가 암살음모를 보고한 것에 대한 기록이 왕의 연대기속에 기록된 것이나, 왕이 에스더를 부르지 않았어도 그녀를 만나준 것이나, 왕이 그날 밤 잠에 들 수 없었던 것이나, 그가 연대기를 낭독할 것을 부탁한 것이나, 왕이 모르드개에게 보상 했는 지에 대한 것을 물어볼 정도로 정신이 깨어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었는가? 이것은 비록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신적인 섭리가 그들의 삶을 이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관한 침묵”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발견하게 만든다. 비록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도 어느정도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책이 어스더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고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히 발생하는 듯한 사건들 역시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게한다. 이렇듯 에스더서는 그 속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한 마디 언급도 없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철저히 자기백성들을 위해 움직이고 계심을 논증하고 있다.
두 번째로,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살하려는 악의 세력이 항존하고 그 곳에는 언제나 거룩한 전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하만이 왜 모르드개를 공개처형하고 더 나아가서 유대인 전체를 말살하려고 시도하는가? 단지 모르드개가 제2인자인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자 자존심이 상해서 인가? 그렇지 않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에스더서는 모르드개를 유대인의 초대왕인 사울의 아비인 기스의 후손이라고 소개한다.(2:5). 반면에 하만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그는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의 후손이다(3:1) 아말렉 족속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대항한 첫번째 민족이다.(출17,민24:20).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한다.(출17:16) 사울이 첫번째 왕이 되었을때 하나님은 아말렉을 치라고 하신다.(심상15장 ). 그때 아말렉의 왕이 아각이다. 따라서 유대인 기스의 후손인 모르드개가 아말렉 아각의 후손인 아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임을 알자 전 유대인의 진멸계획을 세운다.(3:5-6) 다시 말해 아말렉의 자손인 하만은 그 당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는 세상의 전체 세력을 대표해서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스더서는 그 중심에 하나님의 길을 따르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는 세력과의 치열한 영적싸움을 묘사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에스더서는 인간의 책임있는 행동을 강조한다. 명백하게 에스더서가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멸절의 위기로 부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강조 하고 있지만, 에스더서는 또한 그 유대인들의 용기와 명철함 및 지혜들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그 때에 그의 백성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지혜로운 전략을 짠다. 잔치를 열고 왕과 하만을 초대하기도 하고, 아하수에로 왕앞에 나아가기로 스스로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들은 에스더 자신의 결단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부림절을 국가의 항구적인 축제로 만들것을 요청한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벗어난 이방땅에서 살아감을 한탄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맛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사모하고 체험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뿌리내리도록 스스로 책임있는 행동을 감당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귀향만이 만병통치의 처방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맛보고 그곳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는 곳으로 변모시키기를 사모했다. 그리고 그런것 들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으며 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통치의 실체화를 위해 매 순간 마다 믿음의 결단을 하며 책임있는 행동을 동반하였다. 다시말해 그들은 성지예루삼렘이 아닌 페르시아의 깊숙한 곳에 살았지만 그곳을 불결한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했다. 그리고 단순히 기대하고 누릴 뿐 아니라 책임있는 사명감을 가지고 구체화시킬 계획속에서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 바로 에스더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 시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스더서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주권을 마주치면서 숨이 막힐 듯한 감탄을 하게 되지만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속에서 책임을 다해 분투하는 영적 군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적시(적절한 시기)에 주권적 섭리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 지평선 너머에서 분투하는 하나님의 파트너인 성도들의 힘찬 맥박소리 역시 강렬하지 않은가? 적시의 반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이에 반응해서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에스더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지금 이시대를 믿음으로 섬기며 세워갈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는가?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