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단톡방에서
부용산
전라도 보성 벌교에 100미터 남짓 되는 나지막한 산 하나가 있다. 부용산이다. 부용 (芙蓉)은 산에서 사는 연꽃이다. 같은 이름의 산이 전국에 열 개나 되는 걸로 보아, 부용은 이름 없는 무명의 씨알들처럼 이 땅에 흔하디 흔한 야생초다.
나는 오는 8월 31일 공장의사 김현주 선생 (종합예술단 봄날의 소프라노)의 작은 음악회에 우정출연하여 ‘부용산’을 부른다. 요즈음 지하철에서든 다방에 앉아서든 중얼거린다. 완벽하게 외웠다고 자신할 때,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랫말은 슬픈 서정시다. 눈물겹다. 노래 부르다가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다. 특별한 시 ‘부용산’이 오늘날 묵직한 명곡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 궁금하여 여기저기 드나들며 공부 좀 했다.
시인 박기동은 1917년 여수 출생으로, 열두 살 때 벌교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이름있는 한의사였다. 그 덕택으로 열네 살에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을 갔으며, 관서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해방 전에 귀국하여 1944년 벌교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교가도 지었다.
그는 해방 후, 광주로 전근가서 가르치다가 벌교중학으로 돌아왔다. 여기서도 교가를 지었다. 그 후 1947년 순천사범으로 옮겨서 교사가 될 청년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남조선 교육자협의회’에 가입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붙들려갔다. 혹심한 고초를 겪었다. 정직도 당했다.
그 해, 18세에 결혼하여 집을 떠난 여동생 영애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겨우 스물 넷이었다. 사랑하는 누이를 묻고 내려와 울면서 지은 추모시가 ‘부용산’이었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1948년 신학기에 목포 항도여중 (목포여고 전신)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 학교에서 두 사람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로 만든 음악선생 안성현과 천재로 호가 났던 제자 김정희였다.
오호애재라! 이 때 안의 열다섯 살 누이 순자와 열여섯 살 제자 정희가 폐결핵으로 연이어 죽었다.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급하게 세상을 하직한 세 꽃봉우리들! 두 사람은 자주 깊고 짙은 아픔과 슬픔을 삭이며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곤 하였다.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그 어느 날, 안성현이 박기동의 시에 곡을 붙였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 협동인가. 영락없이, 8세기 신라의 승려 월명사가 지은 향가 ‘제망매가’ (祭亡妹歌)의 20세기 버전이었다.
박기동은 목포사범학교를 끝으로 1957년 교직을 떠났다. 당국이 ‘사상불량’ 타령하며 끊임없이 호출하고 소환하며 괴롭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성현과의 아름다운 우정이 연좌제로 작용했다. 그 때 받은 모욕과 폭력의 기억은 평생의 상처가 되었다.
시인은 해운회사에 다니다가 서울의 출판사로 이직, ‘빙점’ 등 일본 문학작품 번역가로 일했다. 1982년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군부독재의 억압을 피하여 혈혈단신 호주로 이민을 갔다. 그때 나이 일흔 여섯이었다. 거기서 정부가 주는 최저생계비 (월 4~50만원)를 받고 시를 쓰며 살았다.
어느 날 시드니에 방문한 연극인 김성옥 (목포출신. 손숙의 남편)이 시인을 만나 부용산 2절을 쓰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2000년, 마침내 ‘목포 부용산 음악제’에서 처음으로 2절이 공개되었다. 53년만이었다. 그 전까지 ‘부용산’은 빨치산 출신 장기수들이 박정희 전두환 때 감옥에 들어온 운동권 학생들에게 전파하여 그들이 석방되면 환영하는 술자리에서 불리며 지하에 널리 퍼졌다.
가수 안치환이 1997년에 낸 음반 ‘노스탤지어’에도 ‘부용산’은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되어 있다. 노시인은 2절가사를 손수 들고 안치환을 찾아와서 건네주며 “꼭 자네가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문민정부 들어서고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우리는 이 특별한 노래의 작사-작곡자들 이름은 찾았지만, 팔순 노인이 된 친구들은 살아서 평양이든 광주든 그 어디에서든 만나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안성현은 나주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에서 유학했다. 그 때부터 알고 지낸 무용가 최승희가 어느 날 ‘북쪽은 예술가들에게 천국’이라고 말했다. 오래 전 북쪽에서 자리잡은 아버지 안기옥을 만날 겸 동행했다. 1남1녀의 어린 자식들을 둔 젊은 가장이었다. 그는 6.25 내전이 터지는 바람에 처자식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월북자 신세가 되었다.
부친은 가야금 명인으로 그 시절 이미 광주 서울 평양 함흥에서 공연하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국제 음악회에도 초청받는 저명한 음악인이었다. 훗날 父子가 함께 조선에서 최고 등급인 인민예술가로 대우 받으며 활동했다. 안기옥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숙청되어 끝이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안성현 선생이 작고했을 때, 북한정부는 비중있게 부고를 냈다. 2006년, 86세였다.
보라!
1절이든 2절이든 어느 한 대목 좌익 이데올로기를 직설하거나 은유한 곳이 있는가. 여순사태 이후, 빨치산들이 불렀다는 그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리고 훗날 안성현이 북쪽으로 가서 그곳에 자리잡고 최고등급의 음악가로 활동한다는 이유로, 저 동생의 죽음을 추모하는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온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 노래가 장장 80년 동안 이렇게 나쁜 역사의 육중한 무게를 감당해야만 할 줄을 그 누가 알았을까.
쉬쉬하며 숨어부르던 그 노래는 이제 ‘부용산 노래 부르기 대회’가 생길 정도로 국민가요가 되었다. 비정상의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기뻐해야 하는가.
시인과 음악가는 오늘도 누이들과 제자를 만나서 저 푸른 초원으로 소풍을 갈 것이다. 거기서 ‘부용산’도 부르고,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도 부를 것이다. 우리는 이들처럼 죽어서야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숙명이다. 벗이여! 이승에서 해탈과 초월을 꿈꾸지 말라.
*1982 호주로 온 76세 박기동선생 부용산 작시
*경기신문 2024년 8월 8일자 칼럼, ‘오세훈의 온고지신’입니다. 작은 음악회에 우정출연하여 부르기로 한 김에 ‘부용산’을 써봤습니다.
8월 31일에 불렀습니다. 프로 가객들 못지 않은 분들 많은데, 부끄럼 무릅쓰고 올립니다. 좀 부족해도 그저 한번 해보는 겁니다.
*추석 명절, 보내세요. 오세훈
*2024.9.17. 시드니인문학교실 단톡방에서 최진 대표 발췌
======= 답 글 ======
‘부용산’의 광복
시드니에서 저와 몇분과 가깝게 지내시다가 한국에 가셔서 돌아가신 박기동 시인에 대한 글을 뜻밖에 접하게 되어 몇자 회고를 짧게 씁니다.
몇년을 블루마운틴 부시 워킹 그룹의 일원으로 함께 지냈는데 원래 생식과 요가도 하시고 아주 오래 사실 줄 믿었으나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지셔 허스트빌간호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파라마타의 한 요양원에 옮겨 지내는 동안 서울의 치과의사인 자제가 모셔갔습니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력이 좋은셔 부시워킹 중 제가 뒤로 처지면 뒤로 오셔 밀어주시고 할 정도였어요. 여러가지 개인 신상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나 여기에 쓰는 건 적절하지 않아 생략합니다.
1999년 6월 25-7일자 한국신문에 그분 이야기를 쓴 칼럼이 있어 아래에 옮깁니다. 모발폰 기술이 서툴어 잘 읽게 뜰 지 모르겠습니다.
*2024.9.17. 시드니인문학교실 단톡방에서 김삼오 박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