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17일,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기를 연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 ~ 1998) 별세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년 7월 12일 ~ 1998년 2월 17일)은 루터교 신학자이자 신약학 교수로 마인츠 (1946~1951), 괴팅겐 (1951~1959), 튀빙겐 (1959~1971)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어네스트 푹스와 더불어 신해석학파이다.
–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출생: 1906년 7월 12일, 독일 보훔
.사망: 1998년 2월 17일, 독일 튀빙겐
.박사 과정 지도교수: 루돌프 불트만
.학력: 마르부르크 필리프 대학교
.자녀: 엘리자베스 케제만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 ~ 1998)은 본, 마르부르크, 튀빙겐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다.
1931년 불트만 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38년에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1933년부터 겔젠키르헨-로트하우젠의 루터교 목사로 섬기다가 징집되어 군복무 중 체포되어 전쟁포로로 1945년까지 투옥되었다.
1946년 마인츠대학교, 1951년 괴팅겐대학교, 그리고 1959년부터 1971년까지 튀빙겐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였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로마서』 (알맹e), 『바울신학의 주제』 (기독교서회), 『역사적 예수 연구』 (기독교서회) 등이 있다.
○ 학업과 업적
1931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 논문은 사도 바울의 교회론에 대한 것으로, 루돌프 불트만의 지도 아래 작성되었다. 케제만은 불트만 학파의 일원이며, 정치적으로는 좌파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케제만은 1933년 고백교회 운동에 동참했다.
불트만의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1953년 마르부르크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기가 시작되는 길을 열었다. 그는 스승 불트만에 반대하여 초대 교회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내러티브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스승인 불트만과 다르게 생각하고, 그의 논문 “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 (1954)에서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1)구원 사건의 중요성, (2)시간과 공간에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그리고 (3)예수와 우리의 연속성이다.
– 두 번째 역사적 예수 탐구 도출
18세기 계몽주의 시기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성경의 기록을 교회의 신앙적 관심에 따라 재구성된 것으로 전제하였기에 기적이나,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했고, 이런 미신적 요소에 오염되지 않은 인간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재구성에 치중하였다. 그 결과로 여러 종류의 예수전 (傳)이 등장했고 (에른스트 르낭의 전기가 특히 유명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시각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작업들을 활발히 해왔다.
첫 번째 ‘역사적 예수 탐구 (the quest for historical Jesus)’는 20세기초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가 이들의 작업이 예수 당시 유대의 사회-종교적 정황, 특히 종말론적 차원 (Eschatological dimension)을 고려하지 않은 저자들의 시대적 관심 (계몽주의, 낭만주의?)에 입각한 재구성에 불과하다는 치명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침몰하고 만다.
슈바이처의 비판이후 한동안 역사적 예수 탐구는 불가능한 작업으로 인식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예수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성경자체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학자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성경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성경에서 역사성을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은 예수란 존재가 있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단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 외에는 달리 연구할 자료가 없었기에 이 시기에 성경학자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설화나 신화를 도입해서 이런 저런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 역사적 예수 탐구 (흔히 ‘New Quest’라고 불렸다)는 신약의 신빙성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는데, 불트만의 수제자였던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asemann)은 1950년대에 자신의 스승의 견해에 반해서 성경 기록이 역사적 연구를 수행할만한 내용을 담고있다는 주장으로 다시한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이 흐름은 그다지 많이 확산되지는 못하고, 신약의 한 배경사 연구 차원으로 물러앉는 듯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세 번째 탐구는 (이 명칭은 톰 라이트가 제안했고, 상당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8-90년대에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와 달리 신학 외에도 고고학, 역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관여하고 있고, 지역적으로도 북미와 유럽권 학자들이 고루 포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쿰란 (Qumran)에서 발굴된 사해사본 (Dead Sea Scrolls)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나, 일세기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여러 고고학 발굴 성과, 인류학과 사회학적 연구 등이 보태지면서 연구의 지평을 풍성히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가 파격적인 연구결과들을 내어놓으면서, 일반 언론의 주목을 한껏 받은 것도 이런 흐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데 한 몫을 했다.
– 케제만 이후의 불트만 극복 노력들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후기 불트만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폭스, 에빌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케제만 그 다음이 소위 판넨베르그의 도전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 구속사건과 역사”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불트만의 비역사적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도 불트만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1965년 “희망의 신학”으로 등단한 몰트만을 들 수 있다. 그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 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 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시킨다.
○ 저서들
– 번역서
신의와 성예전 (복음주의신학총서 제28권), 전경연 역, 대한기독교서회
역사적 예수 연구 (현대신서 123), 강한표 역, 대한기독교서회
예수의 증언 (현대신서 120), 박정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예수는 자유를 의미한다, 전경영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바울신학의 주제 (복음주의신학총서 18), 대한기독교서회
– 영문서
Essays on New Testament themes. London, SCM, 1964.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London, SCM, 1969.
Jesus means freedom: a polemical survey of the New Testament. London, SCM, 1969.
Perspectives on Paul. London, SCM, 1971.
Commentary on Romans. London, SCM, 1980.
The Wandering People of God. Minneapolis, Augsburg, 1984.
On Being a Disciple of the Crucified Nazarene. Grand Rapids, Eerdmans, 2010.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