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99년 11월 9일, 프랑스 혁명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 발생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귀족으로 시작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며 유럽의 모든 열강들을 굴복시키고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인물이다.
샤를마뉴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출생: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공화국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51세),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가문: 보나파르트 가
.부모: 카를로 보나파르트 / 레티차 보나파르트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자녀: 나폴레옹 2세
.종교: 로마 가톨릭
*지위: 프랑스인의 황제
.재위: 1804년 5월 18일-1814년 4월 6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 본인 (제1공화국 제1통령)
.후임: 루이 18세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혁명기 혁명 정부 (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이때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 당하고 두척만 생존한다. 이로 말미암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
나폴레옹은 본국과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고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정국을 지켜보고서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가 장악한 군대와 30여 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하지만 스페인의 무장시민들의 끈질긴 쿠데타와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육군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실패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재건된 프랑스 군대는 규모는 여전히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나 내실에서는 결코 전성기 때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섬으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만신재)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