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 (太平天国, 1851 ~ 1864)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어 태평천국 멸망
태평천국 (太平天国, 1851 ~ 1864)은 중국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 (洪秀全)이 세운 기독교적인 이념의 신정 (神政) 국가였다.

‘천경사변’은 1856년 9월 2일,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 (남경)에서 발생한 태평천국 지도부의 내분이다. 천왕 홍수전의 친위 쿠데타로 동왕 양수청, 북왕 위창휘, 연왕 태일강이 목숨을 잃었고 그 외 2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태평천국 초기의 집단지도체제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태평천국이 쇠망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851년, 홍수전은 천왕을 칭하면서 배상제회의 간부 5명에게 왕작을 분봉했다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그러나 남왕 풍운산과 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일찍이부터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동왕 양수청이 야훼가 자신의 몸에 신내림을 한다는 “천부하범”의 신탁을 시전하며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양수청이 정군사 (正軍師)로서 군권까지 손에 쥐자 국가원수인 천왕 홍수전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양수청이 천부하범을 시전하면 홍수전은 양수청에게 엎드려 절하며 신탁에 따라야 했다.
남경을 천경으로 개칭한 뒤, 북왕 위창휘와 연왕 태일강, 익왕 석달개의 장인 황옥곤, 그리고 천왕 홍수전까지 양수청의 동왕부에 태형을 당하는 일이 있으면서 양수청과 다른 왕들의 갈등이 깊어졌다.
1856년 6월 20일, 태평군은 청군의 강남대영을 격파하여 3년에 걸친 포위를 풀었다 (제1차 강남대영 공략전). 정세가 호전되자 양수청은 “천부하범”을 시전, 홍수전을 동왕부로 호출했다. 양수청은 야훼의 목소리를 빙자해 “너와 양은 모두 나의 아이이며, 양은 공적이 큰데 어째서 구천세에 머무르냐?”라고 물었다. 당시 중국에서 만세는 천자에게만 허용되었기에 태평천국 역시 천왕 홍수전에게만 만세를 부르고 동왕 양수청은 구천세, 이하 제왕들은 서열에 따라 팔천세, 칠천세를 부르고 있었다. 신탁을 받든 홍수전은 양수청도 자신과 같이 만세를 칭하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양수청의 부하이며 양수청에게 원한을 품은 진승용이라는 자가 홍수전에게 “양수청이 찬탈의 뜻을 품고 있다”고 상소했다. 홍수전은 이에 전선에 나가있던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 연왕 태일강에게 양수청을 토벌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9월 1일, 위창휘는 3천 군사를 이끌고 천경으로 귀환했고, 성 밖에서 태일강과 회담했다. 진승용이 성문을 열자 북왕군이 단번에 동왕부를 들이닥쳐 양수청을 살해하고 양수청의 일족, 동왕부 부하 2만 명을 살해했다. 홍수전은 양수청이 하늘로 올라갔다면서 양수청의 제삿날을 “동왕승천절”로 지정했다.
9월 26일, 천경에 귀환한 석달개가 위창휘의 잔혹함을 비난하자 위창휘는 익왕부에도 들이닥쳐 석달개를 죽이려 했다. 그 결과 석달개의 일족과 당여들이 살해되었지만 석달개는 탈출했다. 석달개는 안경에서 거병하여 홍수전에게 위창휘의 처벌을 요구했다. 천경성 밖의 병사들은 대부분 석달개를 지지했고, 11월 2일 위창휘도 살해되었다. 뒤이어 태일강과 진승용도 주살되어 천경사변은 일단락되었다.
위창휘가 죽은 뒤 석달개가 집정을 시작했지만, 홍수전은 자기 일족을 중용하여 석달개의 집정을 훼방했다. 견디다 못한 석달개는 1857년 천경을 이탈, 사천성으로 가 버렸다. 군사적 재능이 있는 석달개가 대군을 이끌고 이탈하자 태평천국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 태평천국 (太平天国 / 太平天國, 1851년~1864년) 개요
– 태평천국 (太平天國, 1851년 ~ 1864년)
.표어: 위대한 평화의 천국
.수도: 난징
.정부 형태: 사실상 신정정치군주제
.천왕: 홍수전 (洪秀全, 1851~1864), 홍천귀복 (洪天貴福1864)
– 발생 : 배상제회 (拜上帝會) 등장
홍수전은 광둥 성 화현(花縣)의 객가(客家) 출신으로 여러 번 원시 (元試; 과거의 초기단계)에 실패했기 때문에 약 40일간 병석에 누워있게 되었는데, 이때 불가사의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내용은 상제(上帝) 야훼라 생각되는 금색 머리에 검은 도포를 입은 기품이 넘치는 노인에게서 “이 검으로 사악함을 물리치라”는 계시와 함께 파사검 (破邪劍, 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을 선물 받고, 또 중년 남자로부터 요사스러움을 없애는 도끼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홍수전은 병이 완치되자 광저우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방문했을 때, 침례교 선교사로부터 권세양언 (勸世良言)이라는 전도지를 받고 이전에 본 불가사의한 꿈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노인은 야훼이고, 중년 남자는 예수이며,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신이 꾼 꿈을 기독교적인 논리로 이해한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꿈과 기독교의 접합은 로버트 모리슨이 성서를 해석할 때 하느님(God)을 음대로 갓이라 표기하지 않고, ‘상제’란 말로 번역한 것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된다.
홍수전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특히 야훼, 즉 천부상주황상제 (天父上主皇上帝)만이 유일신이라는 교리를 강하게 의식하여 우상파괴를 열심히 진행했다. 원래 다신교적인 전통을 갖고 있던 중국에서는 유교, 도교, 불교를 기리는 묘 (廟)가 많았으나, 흥수전은 이것을 파괴하고 다만 상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고향인 광둥 성에서의 선교활동은 일족과 몇 사람의 찬동자를 얻는 데 그쳤다. 홍수전은 효과적인 포교방법을 모색한 끝에 ‘원도구세가’ (原道救世歌), ‘원도성세훈’ (原道醒世訓)이란 포교 문서를 집필했다.
1847년 태평천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조직인 배상제회 (拜上帝會)를 광둥 성 계평현 (桂平縣) 금전촌 (金田村)에서 창설했다. 이 땅에서 처음 소수에 불과했던 찬동자 중 한 명인 풍운산 (馮雲山)이 포교활동을 벌여 약 3,000명의 신도를 얻고, 홍수전을 맞이하여 그를 지도자로 삼았다. 배상제회의 참가자는 가난한 농민, 광산노동자, 객가 등의 가난한 민중들이 중심이었다. 고향 화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계평현에서 성공한 커다란 이유 중 1가지는 병조복등의 현세 이익중시의 포교였다. 단순히 종교적 열의 및 윤리를 설명하지 않고, 지금 현재의 생활에서의 이득을 강조한 풍운산은 다수의 신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확대는 공권력 및 그 지역 토지의 유력자와의 마찰을 생기게 하였다. 풍운산을 시작으로 배상제회의 구성원의 체포가 차례로 이루어지자, 홍수전은 이때까지의 종교 활동에서 정치혁명으로 옮겨갈 것을 결정했다.
1850년 배상제회는 금전촌에 집결해 단영 (團營)이란 군사조직을 결성했다. 여기서는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고, 각각 남영, 여영에 입영시켰다. 그 이전부터 새소리를 내어 위장하고, 총포 및 대포 등의 무기를 비밀리 제조하여 혁명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 나갔으나, 금전촌에 집결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조정의 군대 및 자경단과 몇 차례 충돌이 발생했다. 금전촌에 집결한 사람들은 1만에서 2만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중에서 성년남자는 약 3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보다 몇 배 많은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면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게 되었다.

– 태평천국의 건국
1851년 1월 11일 금전촌에서 배상제회는 국호를 태평천국 (太平天國)으로 하고, 홍수전을 천왕(天王)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때부터 태평천국을 칭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명확하지 않다. 정식으로 정해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인 3월 23일이었고, 이날을 등극절이라 불렀다. 국호를 지정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에 대해 공공연한 반기를 들었던 태평천국이었으나, 남경에 머무르는 것은 잠시뿐 각지를 전전하며 이동했기에 그 의미로는 유적적이었다. 태평천국군의 진로는 다음과 같다. 즉 금전촌에서 등현 (藤縣)을 거쳐 영안 (永安; 현재의 광서 장족자치구, 廣西壯族自治區) 몽산현 (蒙山縣)을 함락 시켰다. 등현에서는 뒤에 이야기할 후기 태평천국을 맡게 된 명장들이 참가하게 된다. 영안에서 반년동안 주둔한 태평천국은 이곳에서 관직제도 및 관작 등을 설치하고, 나라의 체계를 정비했다.
이때 천왕 아래의 다섯 간부는 익왕 (翼王) 석달개 (石達開), 동왕 (東王) 양수청 (楊秀淸), 서왕 (西王) 소조귀 (蕭朝貴), 남왕 (南王) 풍운산 (馮雲山), 북왕 (北王) 위창휘 (韋昌輝)로 결정되었다. 이 안에서 양수청은 천부하범, 소조귀는 천형하범이라 칭하면서 각자 야훼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이것을 빌미로 스스로 명령을 내렸기에 서서히 홍수전의 발언력은 약해져 갔다.
– 태평천국의 확장
.남경 공략
청나라는 이전 제1차 아편 전쟁에서 국력을 소모하고, 또한 정규군은 광대한 국내에 분산 배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공격하는 일도 불가능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대중을 흡수하여 거대해진 태평천국군은 청나라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그러나 식료품 및 화약이 바닥났기 때문에 태평천국군은 영안을 뒤로하고, 양수청의 의견을 따라 북상하여 후난 성, 후베이 성을 목표로 삼았다. 청나라군과 충돌을 되풀이하면서 북상을 계속했으나, 1852년 6월 호강 (湖江)에 도착할 때 남왕 풍운산이, 9월 장사 (長沙) 공략 때에는 서왕 소조귀가 전사했다. 2왕의 전사는 태평천국 수뇌부 사이의 역학 관계를 미묘하게 변화시켜 후에 천경사변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사 직후는 청나라군과의 교전이 복수전의 색채를 뗬기에 매우 높은 사기를 얻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구이린, 장사는 결과적으로 공략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12월 하순에는 한양 (漢陽), 한커우 (漢口)를 함락하고, 기어코 1853년 1월에는 우창 (武昌)을 함락하였다. 무창은 태평천국군이 처음으로 함락시킨 성도 (省都)였고, 이곳의 점령으로 막대한 금은재화를 얻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양수청의 의견에 따라 남경방면을 목표로 나가기로 해 수륙양면군을 편성하여 3월 19일에 태평천국군은 장닝 (江寧; 난징 [南京])을 함락시키고, 이곳을 천경 (天京)이라 개명시키고, 태평천국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태평천국군의 팽창 이유
구이린을 공격할 때는 격전 끝에 5,000명까지 감소할 정도였으나, 그 후 난징을 함락시킬 때는 태평천국군은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갖추게 되어, 수륙양면군을 편성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급격한 팽창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배경으로써 청나라 조정의 증세였다. 잇단 전쟁에 쓰이는 전비조달 및 패전 후의 피해배상을 지불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은 법에서 정한 것보다 몇 배에 달하는 세금을 특히 동남해안부의 지방에서 징수했다. 거기에 ‘은귀전천’ (銀貴銭賤)의 현상도 실질적 증세를 민중에게 강요했다. 당시 토지세는 은으로 납부하여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전을 은으로 교환하여 납부했다. 그러나 여러 나라와의 교역으로 인해 은이 국외로 유출하는 등 은과 동전의 교환통로가 변동하여 그때까지 은 1량 = 동전 1,000문 이었던 것이 동전 2,000문 이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금의 불공평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서민이 대거 태평천국군에 참가한 것이 급격히 팽창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편 전쟁의 여파로 인해 전후 많은 비적이 횡행했는데, 이들을 태평천국이 흡수한 것도 팽창의 요인이었다. 난징조약으로 인해 교역이 광동 1개 항구로 한정된 결과, 국내의 물류통로가 극변하게 되어, 이때까지 화물수송에 관련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어 비적화되었다. 또 ‘향용’ (郷勇)이라 불린 임시모집병이 아편전쟁 후 해산되어 이들 중에도 비적화가 되기도 했다.
– 교리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은 꿈 이야기를 근거로, 자기가 여호와 (야훼)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백발의 노인이 도끼를 주면서 오랑캐를 물리치라고 했으며, 그 옆에는 청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꿈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홍수전의 주장은 당시 청나라에 반대하는 이들의 신념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통해서 발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태평천국의 토지 균분 제도는 즉, 토지를 지주들에게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준다는 제도는 농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 서양의 태평천국 인식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졌다는 정보를 전해들은 유럽인은 처음에 태평천국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은 유럽 열강세력들과 청나라간 맺어진 난징조약에 의해 배상금을 강제로 더 징수하게 되어 그것이 농민들에게 더욱더 짐이 되고 불만으로 퍼져나아가 태평천국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는데, 이때 반봉건 반외세적 운동을 외쳤던 것과 홍수전이 ‘자신을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고 하는 교리적인 ‘이단성’ 등으로 인해, 유럽 열강세력들은 태평천국 진압에 가담하게 된다. 더구나 태평천국은 당시 미국 유타주에 뿌리박은 브리검 영의 몰몬교 운동과 시기를 같이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대한 문제였다.
○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 (洪秀全)과 홍천귀복 (洪天貴福)
‘태평천국의 난’ (혹은 장모의 난, 長毛의 亂)과 ‘장발의 난’ (長髮의 亂)은 서기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교전 상대는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기독교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의 주요 무대는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호북성이었으나, 1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북서쪽 끝의 감숙성을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을 최소 한번 이상 태평천국군이 지나갔다. 태평천국의 난은 명청전쟁 이래로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 전쟁이었으며, 인류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유혈낭자한 내전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세기 최대의 군사분쟁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2천만 ~ 7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1851년 1월 1일, 청나라의 정규군인 녹영군이 광서성 금전현 (오늘날의 계평시)의 기독교계 신흥종교인 배상제회를 타격했다. 배상제회 교주 홍수전은 자신이 야훼의 둘째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녹영군의 배상제회 공격은 금전 봉기로 이어졌다. 홍수전은 자신을 “태평천국의 천왕”이라고 선포했다. 청군이 광서성으로 출동하자 태평천국군은 1851년 9월 북쪽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1853년 3월 19일 태평천국군은 강녕을 점령, 강녕을 천국의 수도인 “천경”이라고 명명했다.
십여 년에 걸쳐 태평천국은 양쯔 강 유역 중류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으며, 이곳은 청나라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비옥한 땅이었기에 태평천국은 급격히 불어났다. 태평천국군은 1853년 6월 북진하여 청나라 수도 북경을 거의 점령할 뻔 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서쪽으로도 진군하여 안휘, 강소, 호북의 여러 군현을 손에 넣었다. 청나라 정규군은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대신 교착상태에 빠진 남경 공성에 집중했다. 그리고 호남성에서 증국번이 이끄는 민병대 상군이 궐기하여 청나라 조정측에 가담해 태평천국과 싸웠다. 증국번의 상군은 태평천국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했고, 내전의 서부전선에서 태평천국의 팽창은 중단된다.
1856년, 태평천국의 동왕 (東王) 양수청이 쿠데타를 시도 (천경 사변)하여 태평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태평천국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동안 상군은 호북성과 강소성의 대부분을 재회복했다. 1860년 5월, 태평천국군은 1853년부터 남경을 공격하고 있던 청군을 무찔렀고 (제2차 강남대영 공략), 이때 청나라 정규군이 거의 전멸함으로써 태평천국군은 청나라에서 가장 부강한 지역이었던 남쪽의 강소성과 절강성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 태평천국군이 강소성을 재탈환하는 동안 증국번의 민병대는 양쯔 강을 따라 내려가며 진군, 1861년 9월 5일 안경을 점령했다.
1862년 5월, 친정부 민병대는 이제 남경을 직접 포위하고 공성하기 시작했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태평천국군이 수 차례에 걸쳐 포위망을 뚫으려 했음에도 전선을 유지했다. 반란수괴 홍수전은 1864년 6월 1일 사망하고, 그 직후인 7월 19일 남경은 함락되었다(천경 공방전). 남경이 무너진 뒤 증국번과 그 제자들, 이홍장 및 좌종당 등은 제국의 구원자로 추앙되었고 19세기 말 중국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절강성 북부에서 태평천국의 잔당이 홍수전의 어린 아들 홍천귀복을 앞세워 항전했으나 홍천귀복은 1864년 10월 25일 사로잡히고, 그 이후 태평천국 잔당은 강소, 절강, 복건의 산악지대로 밀려났고, 중국 대륙 최남단인 광동성까지 쫓겨났다. 그리고 광동에서 최후의 태평천국 잔당 지도자인 왕해양이 1866년 1월 29일 토벌되어 태평천국의 난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 홍수전 (洪秀全)
홍수전 (洪秀全, 1814년 1월 1일 ~ 1864년 6월 1일)은 청대 종교가, 혁명가로 태평천국 (太平天國)을 건국한 사람이다. 광둥 성 태생이고 하카계 출신이다. 청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 국가인 태평천국을 세워 청조에 반기를 들어 투쟁했다.
1814년 광동성 화구 복원수촌에서 태어난 홍수전은 과거에 응시하면서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믿은 이후 기독교 신자가 되어 양수청과 함께 상제회를 만들어 포교하였다.
종교 형식을 취한 상제회는 점점 세력을 넓혔고 교주 홍수전은 지방 유력자에 맞먹는 권력을 행사하여 1851년에 ‘태평천국’을 마침내 건국하고 천왕 (天王)이 되었다. 자신을 따르던 주요 간부들을 왕으로 세우고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정식 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초창기에는 청군에 쫓겨다니던 홍수전은 1853년에 난징을 마침내 점령하고 장강 이남에 자신의 세력을 떨친다. 홍수전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청조에 대항하였으므로 태평천국은 당시 중국 민중에게 열렬히 지지받았다. 태평천국은 실패했지만, 장강 이남으로 북벌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잦은 내부 권력투쟁 끝에 홍수전의 실질적인 세력은 크게 감소한 데다가 양수천은 ‘천부 하범’ (여호와의 혼이 육신에 내림), 소조귀는 ‘천형 하범’ (예수의 혼이 육신에 내림)이라 하여, 홍수전을 능멸하였다. 석달개를 제외한 왕 4인은 서로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려고 싸웠고 이런 상황은 홍수전이 석달개를 불러들여 왕 4인 중 마지막으로 권력을 휘두른 북왕 위창휘의 잔당을 제거한 (186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홍수전은 친형제인 홍인발과 홍인달을 왕으로 세워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였다. 석달개는 홍수전 측근들과 벌인 권력투쟁에 실망하여 난징에서 물러나 쓰촨 성 지방에 근거를 잡았다.
1862년 청은 증국번을 필두로 하는 태평천국 토벌군을 파견하고 영국계 외인 부대도 이에 호응하였다. 태평천국의 서방을 방어하던 석달개는 1863년 청군에게 공격당해 청두에서 책형으로 죽었고 1864년 6월 1일 홍수전도 토벌군에게 패하리라 예감하고 난징에서 자결했다. 이후 7월 19일 난징이 완벽한 함락당하여 태평천국은 멸망하고 만다.
홍수전의 최후와 서거를 놓고서 불확실하나 여러 일설이 있다. 천경 (난징)이 함락된 후 증국번은 ‘수만 명이 최후까지 저항하였고 홍수전은 힘이 다하여 자살했다’고 공술하지만, 체포되어 처형당한 부하들이 한 공술이나 당시 목격담에 의거하면, 부족한 식량을 구하고자 천로 (하늘의 이슬, 성서의 만나)가 내린 풀을 떡으로 먹던 홍수전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도 한다.더하여 난징성에 있던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식량과 식수가 고갈되어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정부군에게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증국번은 홍수전이 자살 (혹은 병사)한 무덤을 파헤쳐 홍수전의 시체를 검시하고 현장에서 소각했다고 한다.
– 홍천귀복 (洪天貴福)
홍천귀복 (洪天貴福, 1849년 11월23일 ~ 1864년 11월18일)은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의 아들이자 태평천국의 2대 천왕 (天王)이다.
1851년,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세우고 홍천귀복을 왕세자 (王世子)로 세웠다. 홍천귀복의 존칭 (尊稱)은 유주만세 (幼主萬歲)이다.
1864년, 홍수전이 죽자 그해 6월 6일에 즉위하여 유천왕 (幼天王)이 되었다. 7월, 천경이 청군에게 함락당하자 홍천귀복은 도주하여 절강 (浙江) 호주 (湖州)에 이르렀다. 8월 말에 홍천귀복과 해당 지역의 태평천국군은 호주에서 탈출하여 강서 (江西)의 태평천국군과 합세하여 중원으로 북상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대가 행군 중에 청군에게 긴급한 추격을 당했고, 10월 9일에 부대가 강서에서 격파당하고 궤산하니 홍천귀복은 부근 지역에서 여러 날 동안 유랑하였다. 10월 25일에 강서의 석성 (石城) 황산 (荒山) 속에서 청군에게 사로잡혔고, 11월 18일에 남창 (南昌)에서 심보정의 명령으로 능지처사되었다.

○ 태평천국과 양무운동 (洋務運動)
청조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양의 군사적 위력을 알게 되었고, 더욱이 내부에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안팎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부국’과 ‘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의 근대 산업을 일으켜 난국을 타개하려는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양무운동 (洋務運動)은 ‘중체서용’ (中體西用)을 내걸고 목종 (청나라 황제 동치제의 시호)의 ‘동치연간'(同治年間)(1861년~1874년)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한다. 이 운동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소급된다. 즉, 아편전쟁에 참패하였을 때 이미 위원은 ‘해국도지’를 저술하고 그 서문에서 서양의 장기 (長技)를 배워 서양을 제압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이 청조의 고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시기는 1861년의 신유정변으로 서태후와 공친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면서 청일전쟁 (1894년)으로 일본에 패할 때까지의 약 30년 동안을 말한다. 이 시기 청은 서구 열강에 대적할만한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낡은 제도와 전통,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개혁하지 않아 청·프 전쟁과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860년의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으로 함풍제는 열하(熱河)로 도망쳤으며, 연합군은 청조의 위신을 짓밟기 위해 원명원을 불태워 버렸다. 아편전쟁이후 청조의 위기는 그 절정에 이르고 황제의 명을 받아 사태수습에 나선 공친왕은 연합군의 요구를 거의 받아들여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한편 함풍제는 열하에서 병사하고 6살에 동치제가 즉위했다. 이 무렵 궁정내부에 ‘신유정변’이 발생하여 서태후가 섭정을 하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의정왕 (議政王)과 군기대신 (軍機大臣)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1861년 청조는 구미열강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할 총리아문을 설치하였다. 총리아문은 단순한 외교문제만을 취급하지 않고 통상 (通商)을 포함하여 무기의 구입까지 서양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군기처와의 관계는 명문규정은 없으나 군기대신이 총리아문의 장관인 총서대신을 겸하여 군기처의 분국 (分國)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신정권의 권력핵심에 해당하였다. 유럽 열강은 이 같은 타협적인 서태후와 공친왕 정권에 대하여 협조정책을 취하고 청조와 태평천국군에 대해 취하던 중립적 자세를 버리고 청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제공하면서 근대적 산업기술과 자본협력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대외관계를 수습한 청조의 관료들은 서구의 근대적 무기를 이용하여 태평천국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영국으로부터 군함의 도입과 영국식 군사훈련을 계획하였고, 군기대신 문상은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은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신기영’ (神機營)을 창설하였다.
특히 양무운동은 상군 (湘軍)과 회군 (淮軍)을 이끌고 태평천국을 진압한 증국번과 이홍장 그리고 좌종당등 지방에 있는 한인 (漢人)관료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권력의 핵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의 추진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양무운동시기의 권력의 중심은 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친왕은 신설된 총리아문의 장관으로 구미외교를 전담하여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이었다. 그는 군기처내에서 문상 등 일부 관료의 지지를 얻었으나 반대파의 견제를 받았으며 청·불전쟁의 발발 (1884년)과 함께 탄핵을 받아 사임하게 되었다.
중앙정부내에서 양무운동의 추진세력은 보수적 관료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치군사적 실력을 인정받아 적극적인 양무운동을 추진세력으로 발탁되었다. 증국번은 호남 성출신의 학자로 상군을 조직하여 엄격한 훈련과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여 태평천국 진압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는 양광총독과 흠차대신에 1860년 임명된 후 1872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정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초기 양무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좌종당도 호남 성 출신으로 태평천국의 진압에 공을 세웠고 1881년, 1884년 두 차례 군기대신으로 발탁되어 군수공장을 건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양무운동의 대표자 이홍장은 증국번의 막우 (幕友)로 발탁된 후 회군을 조직하고 상하이 지방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는 증국번의 뒤를 이어 1870년 직례총독에 임명되어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사임할 때까지 직례총독과 북양통산대신에 재직하면서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청나라 말기 외교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큰 활동을 하기도 했다.
– 양무 운동 (洋務運動)
양무운동 (중: 洋务运动)은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에 관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군사중심의 근대화운동을 말한다. 유럽 근대기술의 도입으로 봉건체제를 유지, 보강하려 했던 청조의 자강운동이다. 자강 운동 (自強運動)이라고도 불린다. 양무 (洋務)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청나라는 열강의 침략적인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등으로 여지없이 약체를 드러냈으며,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漢人) 출신 관료들이 근대적인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한편, 장지동, 성선회 등은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자강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했을 뿐, 사회, 정치 체제의 근대화는 무시한 결과, 때마침 일어난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어 그 약체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구체제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운동’의 지도자에게 물려주었다.
.양무운동의 내용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이 의미하듯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군수시설을 받아들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는 부국강병 운동으로 그 내용은 무기와 장비, 군사시설에 집중되어 있다.
이홍장은 1863년 상하이에 ‘강남제조총국’을 세워 총포, 탄약, 기선 등을 만들고, 난징에는 ‘금릉기기국’을 세워 대포, 화약을 생산하였다. 좌종당은 푸저우 (복주)에 1866년 ‘선정국’ (船政局)을 세워 윤선 (輪船)을 제작하였고, 1867년 심보정이 복건선정대신에 임명된다. 그리고 만주족 귀족출신으로 ‘북양삼국통상대신’으로 있던 숭후는 ‘톈진기기국’을 설치하여 화약과 포탄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4대공장이 설립된 이후 각 지방에 총 24개의 군수공장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서 생산된 무기는 총포, 탄약류가 대부분이었고 품질도 우수하지 못하였다. 이들 공장은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서양인 기사에 의하여 공장이 운영되었으며 중국인 관료에 대한 막대한 인건비 지출로 경영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 공장이 필요로 하는 석탄과 철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채광 시설을 갖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또 공장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번역관과 교육 기관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이 번역 보급되면서, 기술 인력이 양성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1874년 일본의 모란사 사건을 계기로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심보정은 남양 해군을 창설하여 근대적 해군을 육성하고자 계획하였으며, 이홍장 등은 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1884년 북양 함대, 남양 함대, 복건 함대의 3대 함대를 창설했다. 함대는 중국에서 건조한 배도 있었으나 주력함은 주로 영국,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이들 해군은 회군파와 상군파로 나뉘어 통일적인 지휘계통이 이루어 지지 못했으므로 1884년에 터진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궤멸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밖에 유능한 지휘관 양성을 위해 톈진에 ‘수사학당’ (水師學堂, 1880년)과 무비학당 (武備學堂, 1885년)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서양식 군사학을 교육하였다.
또 외교관 양성을 위해 장지동은 총리아문에 동문관 (同文館)을 1867년 설치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증국번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시켰고, 이홍장은 독일, 영국, 미국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어 군사와 무기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동문관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활동은 마건충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재들이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
외국자본주의의 중국진출에 대항하여 양무파는 민족자본과 민간기업의 양성에 힘을 쏟아 ‘반관반민’ (半官半民)의 ‘관독상판’ (官督商辦)의 새로운 기업을 육성해 나갔다. 또한 이홍장은 중국의 해운업을 독점하고 있던 외국기선회사와 경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기선 회사인 ‘윤선초상국’을 1872년 창립하였다. 또 1890년대 초까지 타이완에 기융 (基隆) 탄광, 즈리 성에 개평 (開平) 탄광, 헤이룽장 성에 막하 (幕河) 금광, 후베이 성에 대야 (大冶) 철광을 열었고 방직공장도 각지에 건설하였다. 1881년에는 중국최초의 철도가 당산 (唐山)과 서각장 (胥各莊)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 (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거액의 국가 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매판자본가, 대상 (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 (官物), 관용 (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뒷날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양무운동의 한계성을 드러내게 된다.
.양무운동의 역사적 성격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들은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인식하고 기존의 중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체서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양무운동의 추진 주체는 봉건관료 또는 매판관료세력이지만 그들은 청조의 전통적 관료와는 달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지방관료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조의 통치조직을 재건하여 봉건왕조의 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주된 개혁목표를 두었고 이것은 양무운동의 최대 한계점으로 작용된다.
그런데, 양무파 관리들은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정부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진보적 관료를 제외하면 여전히 보수적,수구적 관료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서태후의 섭정은 양무운동의 성패보다는 이 운동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어떤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서 정책추진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졌다. 이는 결국 양무운동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이 지방에 뿌리를 두고 지역적 차원에서 이 운동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바뀔 때마다 중단되기도 하고 지방관이 임지를 옮길 때 시설을 새로운 임지로 이전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특히 양무기업 자체가 중요한 자금원이기 때문에 기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양무운동은 이렇게 정책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중앙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지도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한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크게 패함으로써 양무운동의 한계성과 관료들의 부패함이 드러나버리게 된다.
○ 태평천국의 멸망과 평가
– 멸망
천경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 태평천국은 점차 많은 내부 문제에 직면하였다.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이 태평천국의 재정립을 위한 개혁정치를 하려던 중에, 1860년대에 본격화된 청나라와 서구열강의 협공으로 1864년 6월 1일에 질 것을 예감한 천왕 홍수전은 자살하고 7월 천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하였다.
– 평가
재산을 공유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성격과 미국의 대통령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한 민주주의적 성격을 갖춘 기독교적 색채를 표현한 사회 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