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41년 12월 7일, 제2차 세계대전 : 일본의 전투기가 하와이주 진주만 공군기지 공습
진주만 공격 (Attack on Pearl Harbor)은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 섬의 미국 해군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주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 되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유류 보관소와 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격은 진주만 폭격, 진주만 전투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주만 공격 또는 단순히 진주만이라고 더 자주 불린다.

– 진주만 공격 개요
.내용: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 1941년 12월 7일
.장소: 하와이주 진주만
.결과: 일본 제국의 기습 공격 성공,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와 전함 전력 상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태평양 전쟁 발발
.교전국: 미국 / 일본
.지휘관: 허스밴드 킴멜 (미국 해군), 월터 쇼트 (미국 육군) /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해군), 나구모 주이치 (일본 제국 해군), 이와사 나오지
.병력: 전함 8척,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잠수함 9척, 항공기 약 390대 /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항공기 441대, 소형 잠수함 5척
.피해 규모: 군인 2,334명 사망 · 1,143명 부상, 민간인 103명 사상, 전함 4척 침몰 · 1척 좌초 · 3척 손상, 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기타 함선 2척 침몰 · 1척 좌초 · 2척 손상, 항공기 188대 상실 · 159대 손상 / 항공기 29대 상실 · 74기 손상, 소형 잠수함 4척 침몰 · 1척 좌초, 군인 64명 사망 · 포로 1명

○ 진주만 공격 이후
– 미국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 진주만 공습 전날에 진주만에 입항할 예정이었다가 열대폭풍으로 하루가 늦어져서 공습이 끝나고 나서 도착한 후 진주만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 홀시 제독의 말.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 (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함.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 (Day of Infamy)로 선포했고, 그로부터 3일 뒤 미국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으며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인들은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에게 반감을 사게된 미국의 생각을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줄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휴스 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으며 이에 나이가 18세부터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 되었다. 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 일본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수용소를 만들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다.
– 애리조나호 기념관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호 기념관 (USS Arizona Memorial)은 진주만 공격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애리조나호는 그 당시 공격을 받은 지 불과 9분만에 침몰하였고, 총 인명피해 2,403명중 1,177명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선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그 위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 기념관을 설계한 사람은 알프레드 프레이스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1958년에 기념관 창설을 허용해서 그로부터 3년 후에 완공되었다.

○ 평가
일본의 미 진주만 공습은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 즉 제 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확전된 사건이기도 하다. 미 해군의 주요 해군기지였던 진주만을 일본 항공모함이 기습하여 정박해 있던 미해군 함대를 궤멸시킨 전투로, 해전에 있어서 항공모함 시대를 개막한 이정표로 본다. 또 전술적으로는 완벽한 일본의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패망의 길을 연 계기가 된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된다. 이는 후대인들뿐 아니라 야마모토 이소로쿠와도 같은 당대의 일본 식자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바였다. 결국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선제 공격은 미국인들을 분격하게 만들었으며, 초강대국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결과, 일본은 압도적인 미국의 힘에 결국 밀려 처참하게 패하여 몰락하기에 이른다.
○ 관련 어록들
もしかすると、私たちは、眠れる獅子を触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른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독백
우리는 진주만을 향해 진격했고, 나는 암호를 크게 외쳤다. 도라, 도라, 도라 – 야마모토 이소로쿠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 나구모 주이치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돼버리겠지.” –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반응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 진주만 공습을 부관으로부터 보고 받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반응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진주만 공습 이후 선전 포고 연설문 서문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우리는 3000년 동안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국가를 동맹국으로 두게 되었다. – 진주만 기습 공격의 소식을 듣고 아돌프 히틀러가 한 말
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