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84) 중에서 _ 11월 6일자
외로움과 고독

비슷한 것은 비슷할 뿐이지 사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아주 쉽게 ‘비슷한 것은 똑같은 것’이라고 판단하곤 합니다. ‘어쩜 저렇게 비슷하지? 정말 똑같아! 똑같애!’라고 말할 때가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고, 내가 보기에 똑같은 것처럼 보일 뿐이지, 내가 보고있는 대상 그 자체는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린 ‘똑같다. 비슷하다’고 주관적으로 판단합니다. 언어적으로도 ‘비슷하다’는 것은 사실 ‘똑같은 게 아니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저는 쌍둥이 딸도 있고, 쌍둥이 손녀도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늘 ‘비슷하게 생겼다’ ‘똑같이 생겼다’ ‘일란성인가 보다’라고 말을 하지만, 저와 저희 식구들이 보기엔 비슷한 것 보다는 다른 것이 더 많고, 똑같은 것 보다는 판이한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슷한 것이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아이들 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비슷한 것은 다른 것이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그렇습니다. 우린 아주 쉽게 외로운 것과 고독한 것은 비슷한 것이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둘은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영어로 ‘외로움’은 loneliness라고 쓰고 ‘고독’은 solitude, solicitude라고 씁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다같이 ‘혼자있는 상태’이며 ‘쓸쓸하게 보이는 모습’이지만 시인들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 둘을 다른 것으로 보고 달리 해석합니다.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거부당하거나 왕따를 당하여 단절되어 ‘혼자있다’는 느낌인데 반하여 ‘고독’이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외롭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을 타인으로 부터 떼어놓고 단절시켜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 사귀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외로움은 타인과 공동체로 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심리적 상처인데 반하여, 고독은 스스로 자기가 홀로 있음으로 자아를 성찰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자발적 외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설리반은 ‘외로움이란 관계가 끊어짐으로 혼자되는 부정적인 것’이고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여 나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외로움이란 너도 잃고 나도 잃어버리는 것’이고 ‘고독이란 너는 멀리 두지만 나는 가까이 두어 나를 만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사회성’은 잃어버리고 ‘개인적 동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Socialize가 아니라 Individualize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1인 가족, 혼밥, 혼술만이 아니라 혼자 여행하고, 혼자 낚시하고, 혼자 등산하고, 혼자 살다가 아무도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 우리 시대는 외로움만 남고 고독은 잃어버린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 중 제일 많이 하는 것이 각종 SNS, Tweeter, Face time, Katok들과 smartphone입니다. 특히 스마튼폰은 현대인들을 외로움에서 구출해 주는 구세주 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24시간 끼고 살다싶이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을 먼저 받는 것은 보통이고 일하고 먹고 놀고 화장실에 갈 때,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릿맡에 두고 잡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스마트폰을 들고 텍스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가오는 자동차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외로와서, 그거 하나라도 친구삼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 입니다.
어제는 온 종일 늦은 봄비가 내렸습니다. ‘금년 봄엔 비가 자주 내리는 걸 보니 bush fire는 적게 일어나겠군!’ 아침에 혼자서 중얼거리며 늘 하던대로 ABC FM을 틀었습니다.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이내 음악 CD로 바꾸었습니다.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굳세어라 금순아, 황성옛터로 부터 시작하여 모닥불, 꽃반지 끼고, 긴머리 소녀, 하얀 손수건, J에게를 지나 내님의 사랑은, 한 사람, 네 꿈을 펼쳐라, 세노야 세노야를 거쳐 조개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 마리아, 축제의 밤, 목장길 따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로 이어졌습니다. 좋았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 거룩함과 속됨이 내 마음 속에서 조화를 빗어내는 듯 했습니다. 외로와서 좋았고 고독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곤 지난 10월 전현구 시인이 우리 카톡방에 올린 시, “인생”을 천천히 다시 읽었습니다.
– 인생

외로움은
나를 묶어놓는 구속
고독은
나를 풀어놓는 자유
반복되는 구속과 자유는
그림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
밀려오는 파도 처럼
하나의 파도로 낮아지면
낮아진 위에 또 다른 높은 파도로
밀려오다
산산히 부서지는
포말이 되기도 한다
외로움이라는 날실과
고독이라는 씨줄로
곱게 엮어 문양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화사한 길동무가 된다
그 어떤 인문학적 설명 보다 훨씬 더 진솔하고 아름답게 외로움과 고독을 풀어주었습니다.
아! 시인은 외로움과 고독을 이렇게 나누면서, 또 이렇게 하나로 엮어 내는구나! 마음을 따뜻하게 만져 주었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 ~ 2017)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 ~ 2017)은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 후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가르쳤다. 1971년 리즈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고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과 바르샤바 대학 명예교수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2017년 1월 9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현대 세계에서 보내는 44통의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저 / 오윤성 역 / 동녘 / 2019.4.12)
2017년 1월 9일, 91세 일기로 별세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들은 수년간, 한국내에도 바우만의 인기를 입증하듯이 경쟁적으로 번역되었다. 그 책들에는 『액체 근대』, 『유동하는 공포』, 『리퀴드 러브』처럼 그의 이른바 ‘액체 근대’ 연작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바우만이 쓴 특유의 개념인 ‘liquid’를 ‘액체’, ‘유동하는’ 등으로 달리 번역해왔고, 번역하기가 어려웠는지 그냥 ‘리퀴드’로 쓴 책들도 있다. 바우만은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인 ‘solid’의 상대 개념으로 ‘liquid’를 썼는데, 전자를 ‘고체’로 후자를 ‘액체’로 번역하기도 해, 바우만의 대표작 중 하나인 『Liquid Modernity』 (2000)는 『액체 근대』라는 제목을 달고 2009년 한국내에 번역되었다. 바우만은 오늘날의 문화를 ‘liquid modern world’라고 칭하며 그 중요한 특징으로 그려낸 학자로 유명하다.
이렇게 바우만의 중요 개념인 ‘liquid modern’에서 ‘liquid’를 ‘액체’ 혹은 ‘유동하는’으로 번역하는 것도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modern’을 근대로 옮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2013년 바우만의 책 『유행의 시대 (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를 출간한 오월의봄 출판사는 책의 보도자료에서 “바우만의 ‘모던’이 근대를 가리키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바우만은 ‘modernity’의 두 국면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그 올바른 역어가 ‘현대성’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근대’라는 역어는 그 단어가 ‘현대성’의 첫 번째 국면을 가리킬 때만 올바른 단어다. 그리고 그 현대성의 첫 번째 국면에서는 세상이 유동적 (liquid)이지 않고 견고 (solid)했다. 따라서 ‘유동하는’ 또는 ‘액체’라는 표현은 절대로 ‘근대’라는 단어를 꾸미는 말이 될 수 없다. ‘근대 (近代)’라는 말이 바우만의 의도대로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시민사회가 성립한 17~18세기 이후 시대’를 지칭하는 표현인 한”이라고 밝히며 기존에 잘못된 번역어를 바로잡는다고 밝혔다.
동녘출판사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는 이렇게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바우만의 중요개념을 바우만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들과 논의를 거쳐 일관성 있게 통일했다. 논란이 되어온 ‘liquid modern’을 이 시리즈에서도 ‘유동하는 현대’로 번역했다. 또한 오역을 바로잡고 용어를 통일했다. 이 시리즈는 앞으로 바우만의 중요 저작이지만 국내에 절판된 바우만의 책들을 새롭게 복간 및 번역하거나 보완해서 재출간할 계획이다.
– 목차

1 편지에 관한 편지: 유동하는 현대 세계에서 보내다
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3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대화라는 것
4 가상 세계의 안과 밖
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6 인터넷 시대의 섹스
7 프라이버시의 기묘한 모험 (1)
8 프라이버시의 기묘한 모험 (2)
9 프라이버시의 기묘한 모험 (3)
10 부모의 자식
11 청소년의 씀씀이에 관하여
12 Y세대를 스토킹하다
13 이것은 자유의 여명이 아니다
14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아이들
15 속눈썹의 습격
16 유행, 또는 끝없는 움직임
17 소비주의는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18 문화 엘리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19 약 주고 병 주기
20 돼지 독감 등 이런저런 무서운 것들
21 건강과 불평등
22 경고를 들으시오
23 교육을 푸대접하는 세상? (1)
24 교육을 푸대접하는 세상? (2)
25 교육을 푸대접하는 세상? (3)
26 묵은해 유령과 새해 유령
27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한다는 것
28 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한다는 것
29 공포증의 일그러진 궤도
30 빈 왕좌
31 초인은 왜, 어디에서 오는가?
32 집으로 돌아오는 남자들
33 위기를 벗어나는 몇 가지 방법
34 불황의 끝을 찾아서
35 누가 이런 삶을 강요하는가?
36 버락 오바마라는 현상
37 세계화된 도시의 문화
38 로나의 침묵에서 듣다
39 이방인은 정말 위험한가?
40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
41 경계를 긋는다는 것
42 선인은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
43 운명과 인격
44 알베르 카뮈, 또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가 존재한다.”
주
– 책 속으로
일단, 이제 더는, 두 번 다시는 혼자일 필요가 없다. 하루 스물네 시간, 일주일 중 어느 때라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외톨이 집단 중 한 사람을 곁으로 소환할 수 있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결코 멀리 있지 않고, 그 누구든 언제든 재까닥 불러낼 수 있다. 혹시 상대가 잠들어 있더라도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차고 넘치며, 아니면 잠깐 트위터라도 하면서 그 시간을 때우면 된다. 둘째, 굳이 어디로 향할지 장담할 수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가 내키지 않는 상황을 이어가면서까지 다른 사람과 ‘접촉’할 필요가 없다. 대화가 탐탁지 않은 방향으로 틀어질 징후가 하나라도 보이면 그대로 ‘접촉’을 끊으면 된다. 그러니 위험할 것도, 변명하거나 사과하거나 거짓말할 필요도 없다. 필요한 거라곤 고통이나 위험이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거미집처럼 가벼운 손가락 터치뿐. 이제는 혼자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요구에 노출될 위험도, 희생이나 타협을 요구받을 위험도, 다른 사람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위험도 없다. — p.19~20
결국 에랑베르가 선택한 날은 1980년대의 어느 가을 수요일 저녁, 비비안이라는 사람이 텔레비전의 한 인기 프로그램에 나와 수백만 구경꾼 앞에서 남편 미셸이 조루인 탓에 결혼 생활에서 결코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다고 밝힌 날이다. 비비안의 발언은 어떤 점에서 그토록 혁명적이었을까? 두 가지다. 첫째, 당시까지만 해도 본질적으로 프라이버시에 속할 뿐 아니라 프라이버시의 본질로까지 여겨지던 종류의 정보가 공개되었다는 것. 둘째, 철저하게 사적인 걱정거리를 토로하고 해결하는 데 공적인 무대가 쓰였다는 것. — p.45~46
과거의 교육은 여러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환경이 달라질 때는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전략을 설계하면서 적응해나갔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작금의 변화는 과거의 변화와 전혀 다르다. 교육자들은 인간 역사의 어떤 전환점에서도 이번만큼 어려운 고비와 도전에 직면한 적이 없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런 상황을 처음 겪고 있다. 우리는 정보로 과포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기술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하물며 그보다 더더욱 어렵고 역부족인 기술, 즉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인간을 가르치는 기술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 p.162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린 채 희생자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외면하는 대신 자기가 희생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도왔을까? 이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그들과 똑같은 사회계층에 속하고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종교적·정치적 신념을 가진 다른 수많은 사람과 달리 그들은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몸이 안전하고 안녕한 것으로는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데서 오는, 그리고 양심의 쓰라린 상처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로를 보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저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며 자신이 구할 수 있었을 이들을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외면했다면 스스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사람들이었다. — p.278~279
– 출판사 서평
.불안한 현대인에 띄우는 지혜의 편지 44통
‘유동하는 현대 세계(Liquid Modern World)’라는 독창적 개념을 창안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 책은 불안한 우리 시대에 보내는 지혜의 편지 44편을 담고 있다. 바우만의 책은 특유의 현학적 언어로 어렵다는 평을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성 주간지 《라 레푸블리카 델레 돈네(La Repubblica delle Donne)》에 2년 동안 연재했던 글을 엮은 이 책에서 바우만은 대중적인 언어로, 현대인들이 겪어야 할 불안과 공포를 이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유동하는 현대’로 비유하는 이 불확정성의 시대에 넘치는 지식과 정보, 인간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인터넷, 테크놀로지, 청년 세대, 교육, 불평등, 소비문화, 실업, 인종, 유행, 도시, 이주 등 현대 사회 문제의 거의 모든 쟁점들을 다룬다. 그 폭넓은 쟁점들을 해석하는 일관된 문제의식은 유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곤경이다. 공동체에서 뿌리 뽑혀 네트워크 사회에 내던져진 개인이 직면하는 불확실성,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임시적 해결책들이 야기하는 부작용을 바우만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집요하고 일관되게 파고든다.
.페이스북에 빠진 그대, 당신의 외로움과 마주하라
오늘날,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어제의 새로움은 이미 낡고 진부해졌고, 그 진부함을 안고 가다가는 경쟁만능 세상에서 낙오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오의 대열에 끼지 않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온갖 접속을 시도한다. 스마트폰에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앱을 하루 종일 띄워놓는 것이다. 학교 수업을 듣거나, 직장에서 회의를 하거나, 가족끼리의 단란한 식사 중에도 접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우만의 말처럼 사람들은 이제 “가상의 관계가 현실의 관계를 가볍게 압도하는” 세계에 의존해 살아간다. 바우만은 이것은 분명 위기에 봉착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이 기회라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SNS질’에 여념이 없다. 누군가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SNS 타임라인을 한사코 사수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수시로 글과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달며 ‘나’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바우만의 표현대로 “클릭 한 번이면 친구들이 나타나는데 누가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외로울 겨를이 없다.
심보선 시인은 이 책의 서평에서 “살아갈수록 정작 속내를 털어 놓을 만한 친구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트위터의 팔로워와 페이스북의 친구가 늘어가는 것에 우리는 흐뭇해한다. 하지만 이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리트윗’과 ‘좋아요’ 버튼을 클릭할 때, 우리는 수백, 수천 명과 소통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때의 소통이란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의 연쇄에 하나의 고리를 덧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소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유튜브, 아프리카TV 등 수많은 개인방송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자신을 중계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바우만은 비밀이 사라진 세상, 은밀한 사적 영역까지 드러내며 접속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세태를 향해 “사적 영역을 수호하기 위해 바짝 경계하고 무장”하는 일, 곧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인간 사이의 유대” 곧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강력한 도구임을 역설한다.
.정치, 사회, 문화에 침투한 경쟁 만능 세태를 비판하다
이 책에서 바우만은 모든 것이 유동하며 불확실한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편지 마흔네 편에 등장하는 주제들은 삶의 근본 철학에서부터 공포증, 해고되는 노동자들, 부모와 자식 간 세대 차이, 신용카드의 덫, 돼지독감, 건강과 불평등, 오프라인과 온라인, 트위터로 대표되는 SNS, 인터넷 시대의 섹스, 10대들의 소비문화, 쇼핑 중독과 유행, 개인의 내밀한 프라이버시, 미래에 대한 불안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을 아우른다. 바우만은 특히 우리 시대 교육에 관해 목소리를 높인다.
“교육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라는 편지 세 통에서는 오늘날 교육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자본은 그 영토를 교육의 영역까지 확대했는데, 교육 현장까지 침투한 경쟁 만능이 불러온 폐해를 지금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산더미처럼 축적된 정보들이 교육 환경을 무질서와 혼돈으로 내몰았다면서 “우리는 정보로 과포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기술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라고 걱정한다. 유동하는 현대 세계에서는 교육마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바우만은 “이제는 고용된 사람 또는 고용되고자 하는 사람이 알아서 저 자신을 감시·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업무 능력을 구매자에게 증명하고 인정받아야 하며, 나아가 구매자의 욕망과 기호와 취향이 바뀌는 와중에도 계속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쟁만능과 시장에 내몰린, “다른 모두와 같음”의 획일화된 교육이 아닌 “나다움”의 회복이 교육에서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편 바우만은 “초인은 왜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정치와 종교의 편협함을 질타하고, 수요 창출을 위해 다양한 질병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제약회사의 횡포를 지적하는가 하면, “이방인은 정말 위험한가?”에서는 낯선 사람과 공존할 더 좋은 방식을 찾는 노력을 아예 그만두는 ‘혼종 혐오증’을 이야기한다. “건강과 불평등”에서는 소득에 따른 사망 확률, 즉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이 죽는다는 건강 불평등 문제도 다룬다. 부모와 자식의 소통 문제, 10대들의 소비문화, 해고자 문제 등 유동하는 현대 세계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바우만의 사회적 관심은 끝이 없다. 바우만의 진단과 성찰은 우리와 역사·문화·사회적 현실이 다른 유럽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여기’ 우리의 문제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사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불안과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바우만은 마지막 편지 “알베르 카뮈,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가 존재한다’ ”에서 카뮈가 남긴 유산을 언급하며 이 물음의 실마리를 푼다. 카뮈는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그 전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우만은 때로는 잔혹하고 때로는 불안한 유동하는 현대 세계를 뛰어넘으려면 시시포스의 삶이 아닌 프로메테우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유동하는 현대의 부조리를 개인이 아닌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고 대처하자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불행에 짓눌리고 사로잡혀” 날마다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 타인의 불행에 저항하는 삶을 선택”하는 프로메테우스가 되자는 것이기도 하다.
바우만은 결국 카뮈를 통해 ‘나’만이 아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시시포스의 형벌과 노역의 세계로 들어가 시시포스를 변화시키듯, 힘을 합쳐 이 자본주의와 유동하는 현대 세계에 저항하면 원자화된 개인들의 가짜 보호막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타인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도 카뮈이 생각을 빌려 제시한다. “그렇지만 어떠한 희망도 전망도 없는 듯한 시시포스의 곤경 속에도, 그가 제 존재의 더없는 부조리함을 마주하고 있는 그곳에도, 여지가 존재한다. 물론 고약할 정도로 작지만 어쨌든 프로메테우스가 들어서기엔 충분한 여지다”라고 말이다. 바우만은 우리들 자신이 각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 그리고 공동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함께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처한 불안한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