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0월 26일,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종교철학가 · 사회운동가 윌리엄 템플 (Wiliam Temple, 1881 ~ 1944) 별세
윌리엄 템플 (Wiliam Temple, 1881년 10월 15일 ~ 1944년 10월 26일)은 영국 성공회 주교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로 사목하였다.
또한 그는 종교 철학가로 저서 ‘자연, 인간 및 신’에서 최고 가치이자 궁극적 실재인 신을 제시하였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사상은 만년에 스콜라주의로 기울어졌다.
웨스트민스터교회의 평의원 (1919~1921), 맨체스터의 주교 (1921~1929)에 이어, 요크 대주교 (1929~1942) 등을 역임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재직 중 (1942∼1944)에 죽었다. 저서 ‘자연, 인간 및 신:Nature, Man and God’ (1934)은 가치의 모든 계열에 따르는 우주의 사상, 즉 최고 가치를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을 가리키는 ‘계시’란 사상 (事象)과 이해가 신적으로 지도되어서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사상의 기조는 플라톤의 영향에서 온 것이었으나 만년에는 스콜라주의로 기울어졌다. 그 밖에 ‘신앙과 근대사상’ (1910), ‘시민과 교회인’ (1941) 등의 저서가 있다.
– 윌리엄 템플 (Wiliam Temple)
.출생: 1881년 10월 15일, 영국 엑서터
.사망: 1944년 10월 26일, 영국 웨스트게이트-온-시
.학력: Colet Court, 발리올 대학, 럭비 스쿨
.설립 조직: Archbishop Temple School
.주요저서: Readings in St. John’s gospel 외 다수
1881년 부친이 주교로 재직 중이던 영국 Exter에서 출생했다. 그 후에 본인도 런던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며 영국상공회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모교의 퀸스 칼리지에서 철학을 강의했고, 렙턴대학에서 학장과 피카딜리 교구의 st. Jame’s 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1918년 1월 교회의 일선 업무에서 물러난 후 근 18개월 동안을 ‘생명과 자유운동’ 을 위해서 전력한 바 있다. 그 후 맨체스터 교구의 주교로 봉직하다가 York 교구의 추기경이 되었다. 1927년 에딘버러에서 개최 되었던 World Confer-ence of Faith and Order 의 회장직도 맡았다. 1908년 노동자 성인교육위원회의 초대회장이 되어 16년 동안 봉직하였으며 World Council of Church 상임위원회 회장직도 맡은 바 있다.
명저서로는 Mens Creatrix:Christus Verifas: Nature, Man and God, Cristian Faith and life가 있다.
○ 생애 및 활동
윌리엄 템플은 1881년 캔터베리 대주교인 프레더릭 템플 (Frederick Temple, 1821년~1902년) 주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럭비고등학교 (Rugby School), 발리올 컬리지 (Balliol College),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고전과목에서 두 차례 수석을 하였다. 옥스퍼드 퀸스칼리지 (Queen’s College)에서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철학분야 연구원과 강사를 지냈으며, 190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렙톤 스쿨 (Repton School) 교장을 지냈으며, 1921년 교구의회에서 맨체스터 교구 주교로 선출되었다. 1929년에 요크 (york) 대교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인문학 강연인 기포드 강연을 하였다.
에큐메니컬 운동과 교육 및 노동 개혁의 지도자였다. 템플은 젊었을 때 옥스퍼드대학교의 퀸스 칼리지에서 철학을 강의했으며(1904~10), 1909년에 사제직에 임명되었다. 렙턴 스쿨의 교장(1910~14)과 런던 피커딜리에 있는 세인트제임스 칼리지의 학장(1914~17)을 지내면서 템플은 영국성공회의 정치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세워진 비공식 단체인 ‘생명과 자유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템플은 웨스트민스터의 참사회원(1919~21), 맨체스터의 주교(1921~29), 요크의 대주교(1929~42)를 차례로 역임한 뒤 캔터베리의 대주교(1942~44)가 되었다.
템플은 상당히 정열적이며 지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끊임없이 저술활동을 했다. 철학서로 대작에 속하는 ‘창조적 심성 : Mens Creatrix’ (1917)을 결혼식 전날까지 써서 완성시킬 정도였다. 다른 저작으로는 기포드 강의서 중의 하나인 ‘자연·인간·신 : Nature, Man and God’ (1934), ‘그리스도교와 사회 질서 : 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 ‘교회는 앞을 바라본다 : The Church Looks Forward’ (1944) 등이 있다. 노동운동에 공감했기 때문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1918~25) 노동자 교육협회의 회장을 지냈다 (1908~24). 1924년에는 ‘그리스도교적 정치·경제·시민권’이라는 주제로 열린 초교파적 국제회의의 의장을 맡았다.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신앙과 의식 회의에 영국성공회 대표로 참석했고, 1937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신앙과 의식 회의의 의장을 역임했다. 템플은 영국교회협의회 (BCC), 세계교회협의회 (WCC)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의회 안팎에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영국의 여러 교회가 1944년의 교육법을 지지하게 했다. 템플의 신학적 입장은 교회와 국가 간의 유대를 주장하여 사회 문제와 경제 정책을 그리스도교적 견해에 따라 해결하자는 헤겔적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
○ 업적
윌리엄 템플은 1942년에는 수석 랍비였던 조셉 허츠 (Joseph Hertz)와 함께 기독교와 유대교 위원회 (the Council for Christians and Jews)를 설립하여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에 맞섰다. 템플은 1928년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자본가의 노동쟁의가 일어나자 중재하려고 애쓰는 등 노동계급의 운동을 보호하였고, 부유층들의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고 사회경제적 취약계층들을 배려하는 경제와 사회개혁을 지지하였다. 노동자 교육 협의회 (Workers’ Educational Asso-ciation)의 초대 대표 (1908~1924)로서 그는 영국 노동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 일치 운동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1927년 로잔회의 (the Lausanne Conference of 1927)에 참석하였고, 1937년 에딘버러 (Edinburgh)에 있었던 세계 교회 협의회 (the World Conference of Churches)를 추진하는 데 일조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4년 여름 그의 노르망디 방문은 그로 하여금 중세 이후 처음으로 전쟁지역을 방문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게 하였다. 그는 켄트주의 ‘웨스트게이트-온-시 (Westgate-on-Sea)’에서 1944년 10월 26일에 별세하였다. 그의 시신은 켄트주에 있는 체어링 화장터 (Charing Crematorium)에서 화장 (火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는 전 영국 교회사에 걸쳐 화장된 첫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한 재는 캔터베리 대성당 코로나 남쪽에 묻혔다. 템플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에 활약한 신학자 성 안셀름 이후 가장 훌륭한 캔터베리 대주교로 간주되기도 한다.
○ 저서들
명망있는 교사이며 설교자인 윌리엄 템플 대주교의 대표적인 저서는 ‘기독교인의 시민사회적 책임’ (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년)이다. 그 책은 성공회의 사회선교 즉,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사회참여와 전쟁후 사회를 재건하는 데 대한 영감을 주는 책으로 즉 복지국가를 설계한 책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그외 저서로는 ‘교회와 국가’ (Church and Nation, 1915년), ‘인격적인 종교와 제자로서의 삶’ (Personal Religions and the Life of Fellowship, 1926년), ‘기독교와 국가’ (Christianity and the State, 1928년), ‘자연, 인간 그리고 하느님’ (Nature, Men and God, 1934년), ‘노동없는 인간’ (Men without Work, 1938년), ‘교회의 전망’ (The Church Looks Forward, 1944년)가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역작은 최근에 출판된 성서 주석인 ‘요한 복음서 읽기’ (1945년, 1952년, 1985년)이다. 안내서와 주석서로서 그것은 그 스스로 사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설교와 예수전승 (복음서 저자들이 집필자료로 사용한 예수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내려져온 구전형태나 기록된 문서형태로 전승되었기 때문에 ‘예수전승’이라고 부른다)를 깊이있게 조사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기독교인의 시민사회적 책임 (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년)
교회와 국가 (Church and Nation, 1915년)
인격적인 종교와 제자로서의 삶 (Personal Religions and the Life of Fellowship, 1926년)
기독교와 국가 (Christianity and the State, 1928년)
자연, 인간 그리고 하느님 (Nature, Men and God, 1934년)
노동없는 인간 (Men without Work, 1938년)
교회의 전망 (The Church Looks Forward, 1944년)
요한 복음서 읽기 (1945년, 1952년, 1985년)
The Faith and Modern Thought (1910)
The Nature of Personality (1911)
The Kingdom of God (1914)
Studies In The Spirit And Truth Of Christianity: Being University And School Sermons (1914)
Church and Nation (1915)
Mens Creatrix (1917)
Fellowship with God (1920)
Life of Bishop Percival (1921)
Plato and Christianity, three lectures (1916)
Personal Religion and the Life of Fellowship (1926)
Christus Veritas (1924)
Christianity and the State (1928)
Christian Faith and life (1931)
Nature, Man and God Gifford Lectures (1934)
Men Without Work (1938)
Readings in St John’s Gospel (1939/1940, Complete edition 1945)
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
The Church Looks Forward (1944)
○ 어록
“전례는 우리 모든 자연의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에 의해 일깨워지는 양심이며, 그분의 진리에 의한 마음의 양분이며, 그분의 아름다움에 의한 상상의 정화이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마음의 열림이며, 그분의 목적에 대한 의지의 순종이다. 그리고 경탄속에서 모이는 이러한 모든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인간의 표현이다.”
“Worship is the submission of all of our nature to God. It is the quickening of conscience by His holiness, nourishment of mind by His truth, purifying of imagination by His beauty, opening of the heart to His love, and submission of will to His purpose. And all this gathered up in adoration is the greatest of human expressions of which we are capable.”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보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낫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