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5강의)

허영의 시장과 순례자의 정체성
1. 허영의 시장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의 순례 여정 속에서 기독도 (Christian)와 신도 (Faithful)가 함께 통과하는 허영의 시장 (Vanity Fair) 장면은 신앙과 세상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으로 제시되었다. 이 시장은 단순한 이야기 속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교만, 그리고 덧없는 가치들이 거래되는 타락한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존 번연은 이 장면을 통해 신앙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구체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허영이라는 개념은 성경의 지혜문학인 전도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헛되고 헛되다” (전도서 1:2; 12:8)라는 선언과 깊이 연결된다. 전도서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헤벨 (hevel)은 단순한 무가치가 아니라, 붙잡을 수 없는 안개와 같은 덧없음, 곧 하나님 없이 추구되는 인간 삶의 공허함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영어 표현 Vanity로 번역되었고, 존 번연은 이를 Vanity Fair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형상화하였다. Fair는 중세 유럽의 큰 상업 시장 (trade fair)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허영의 시장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전도서의 신학적 통찰이 서사적 형식으로 구현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전도서가 인간 존재의 헛됨을 선언하였다면, 천로역정은 그 헛됨이 어떻게 인간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허영의 시장은 신앙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영적 현실이며, 동시에 그 속에서 드러나는 순례자의 정체성과 신앙의 본질을 해석하는 중요한 신학적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순례자 : 허영의 시장에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
주인공 기독도와 Faithful은 허영의 시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사지 않았고, 시장의 화려함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오히려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왜 아무것도 사지 않느냐?”
기독도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살 것이 없다.”
이 한 문장은 순례자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가치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다른 기준, 다른 목적, 다른 방향을 가진 존재이다.
예수는 제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였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나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요한복음 17:16).
따라서 순례자의 삶은 단순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였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였다. 신앙은 세상의 가치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성공을 말하지만 복음은 십자가를 말한다. 세상은 소유를 말하지만 기독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3. 충돌과 조롱 : 세상과 신앙의 긴장관계
기독도와 Faithful의 태도는 그들에게 곧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을 비웃고 조롱하였다.
“이 사람들은 이상하다!”
“이 시장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Faithful이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였다. 세상은 자신과 다른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을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러한 현실을 이미 말씀하였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한복음 15:18)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는 공적 실존이었다. 순례자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는 존재였다. 허영의 시장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이 시장을 지나가고 있다. 허영의 시장에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돈 / 성공 / 인정 / 쾌락 / 명예 등 무엇이든지 허영의 시장에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고 있는가?
기독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산다.”
따라서 순례자의 삶은 단순한 도덕적 삶이 아니라, 존재론적 방향성의 변화이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가치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4. 불의한 재판
결국 기독도와 Faithful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그 재판은 공정하지 않았다. 이미 결론이 정해진 상태에서 진행되는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증인들이 나서서 고발하였다.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의 풍습을 따르지 않았다!”
재판장이 물었다.
“이 말들이 사실이냐?”
Faithful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거짓을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진리를 따를 뿐이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신앙인은 단지 도덕적으로 다르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앙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어 핍박한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0)
이 재판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세상의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신학적으로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ordo amoris (사랑의 질서) 개념과 연결된다. 인간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방향이 결정되는데, 허영의 시장은 왜곡된 사랑의 질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Augustine, The City of God, trans. Henry Bettenson [London: Penguin, 2003], XIX.13–17). 그러나 하늘나라의 시민은 하나님을 제일 우선으로 앞세워 결정하고 따르는 하나님 중심적 사랑을 가지고 살아간다. 예수님도 빌라도 총독앞에서 재판 받으실때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역사적 질문을 받게된다. 로마의 진리는 영웅 군사적 힘과 힘에 의한 통치 행위였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평화 사랑 화해,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는 사랑의 진리이다. 그러니 빌라도가 로마의 언어로는 예수의 진리의 언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5. 순교 : 패배 속에 감추어진 승리
Faithful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절망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승리의 순간으로 나타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그리고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위하여 순교한 자였다. 그 순간 그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갔다. 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이 장면은 십자가의 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상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승리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성이었다. 신학적으로 순교는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는 사건이였다. 이는 십자가의 역설과 연결된다. 예수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듯이, Faithful의 죽음도 패배가 아닌 신앙의 거룩한 승리였다.
6. 순교의 열매
허영의 시장에서 Faithful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죽음을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깊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가 Hopeful 이라는 사람이였다. 그는 순교의 장면을 지켜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처형을 보면서 그 속에서 드러난 평안과 담대함, 그리고 진리를 향한 확고한 믿음을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Hopefu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기독도에게 다가와 함께 길을 가고자 요청하였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Faithful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교는 생명을 잃는 사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생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나타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Faithful의 죽음은 바로 이 말씀의 실현이었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으며, 그 사건을 통해 새로운 믿음의 사람이 태어났다. 또한 사도행전에서도 초대교회의 순교는 복음 확장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다. 스테반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과 같다. 순교자의 피는 새 선교의 문을 열게 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사도행전 8:1, 4).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였다. 이처럼 신앙의 증언은 억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확장되는 특징을 가진다. Hopeful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확산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증언 (witness)의 전염성을 드러낸다. 진리는 단순히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때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Faithful은 자신의 생명을 통해 진리를 증언하였고, 그 증언은 Hopeful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한 이야기의 전개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 형성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순례는 결코 혼자의 여정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쓰러지는 자리에서 또 다른 사람을 일으키셨다. 기독도는 동역자를 잃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동행자를 얻게 되었다.
결국 Hopeful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진리를 드러낸다. 첫째, 신앙의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다. 둘째, 순교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셋째,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 속에서 일하시며, 순례의 길을 계속 이어가게 하신다. 이 장면은 허영의 시장이라는 타락한 세계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의 자리에서 조차 생명이 태어나고,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소망이 시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Hopeful은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 – 죽음을 통해 생명을 이루시는 방식 – 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허영의 시장을 지나가는 존재
허영의 시장은 단순한 유혹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앙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자리였다. 기독도는 그 시장에 속하지 않았고, 그 시장을 지나가는 존재였다.
그는 세상의 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았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는 자들이다.” 이 사건 이후 기독도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동역자를 잃는 고통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확고해진다. 고난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련하고 성숙하게 만든다. 순례의 길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그의 시선은 더욱 확고하게 하나님 나라를 향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의심의 성 (Castle of Doubt)과 절망의 경험에 관하여 쓰게 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상택 목사
(아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