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26)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Colosseum)과 포로 로마노 (Forum Romanum)
10월 21일 (토) Ergife Palace 호텔에서 조식 후 우리 일행은 트레비분수를 시작으로 베네치아광장과 엠마누엘 2세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어 캄피돌리오 언덕과 고대로마 공화당 터를 둘러보고 원형경기장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로 방문 후 로마국제공항에서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 경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의 주최지로 사용되었다. 이 공연들은 항상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주최하는 행사들이었으며, 주최자의 권력과 부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인기를 얻고 가문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가장 인기있었던 공연은 동물 사냥이었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입한 야생동물들을 활용하였는데, 코뿔소, 타조, 호랑이, 사자 등이 주요 구경거리였다. 사냥은 움직일 수 있는 나무들과 건물들이 있는 정교한 세트장에서 진행되었고, 대중들은 이와 같은 방식에 열광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를 정복한 기념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는데, 11,000마리의 동물들과 10,000명의 검투사들이 이때 희생되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은 알몸으로 맹수 앞에 서게 되고, 산채로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결투가 진행되는 도중도중, 마술사나 곡예사들이 나와 군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콜로세움 초기에, 이 곳에서는 모의 해상 전투가 열렸다고 한다.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가 개최한 행사에는 특별히 조련된 동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경기장을 물로 채웠다는 기록들이 있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해상 전투를 재현한 행사도 열렸었다고 한다. 다만 이 경기장에서 어떻게 물이 새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는지, 군함이 들어올 정도로 충분한 크기가 있었는지, 어떻게 물을 끌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경기장에서는 종종 실제 관목과 숲들도 옮겨져 전시되었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세트장은 신화의 이야기나 영웅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때때로 죄인이 짐승들에게 산채로 으깨지거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잔인한 행사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Colosseum)
콜로세움 (Colosseum)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타원형 경기장이다.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 홍예석 등으로 지어져 있고,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고,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 동상인 콜로서스 (巨像: colossu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콜로세움은 수 세기 동안 계속 개축되어왔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다만 중세에 이르러 제국이 쇠퇴하고 로마가 폐허로 변하자, 콜로세움도 이와 같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요새, 교회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콜로세움은 지진과 약탈, 채석 같은 파괴 행위로 상당 부분이 손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로마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며 2018년에는 480만 명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콜로세움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는 1센트 유로화 동전에도 새겨져 있다.
콜로세움의 본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다. 이와 같은 이름은 네로 황제를 쫓아내고 즉위한 플라비안 황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인데, 다만 현대에는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
로마시대에는 ‘콜로세움’이라는 단어가 로마 시에 위치한 건물에만 국한된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지은 경기장에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콜로세움이라는 단어는 근처에 서있었던 거대한 네로 황제의 동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조각상은 후대의 황제들에 의해 개조되어 태양신 헬리오스의 동상으로 바뀌었다.
중세 시대에 헬리오스는 이교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데에 반해, 이 동상은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파괴되지 않고 계속 보존될 수 있었고, 무언가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가 지속적으로 쇠퇴하면서, 로마 도시 전체가 하나의 채석장으로 변하자 사람들은 청동을 녹여 사용하기 위해 동상을 무너뜨려 버렸고, 현재는 그 기단만이 남아있다.

– 콜로세움의 역사
.고대 로마 제국
본디 콜로세움의 위치는 주거지역이었다.
하지만 서기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나고 그 곳에 서있던 건물들이 모두 타버리자 네로 황제는 현재 콜로세움이 서있는 자리, 즉 팔라티노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 사이에 거대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와 인공 호수, 정원들을 지었다.
기존 수로들이 이 정원에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거대하게 개축되었고, 궁전과 정원들은 모두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또한 궁전의 옆에 그의 모습을 본딴 거대한 청동 거상을 지었다.
네로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는 살해되었다.
후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의 궁전을 헐어버린 후, 그 부지에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결정은 황제의 사유지였던 공간을 다시 군중에게 돌려준다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깃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근처에 검투사 양성 학교, 기타 지원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원형극장들이 주로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있었던 것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독특하게도 도심의 한가운데에 정확히 계획되어 지어졌다.

70년 경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가져온 황금과 부를 사용하여 콜로세움의 건축에 보태기 시작하다.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대 원정의 전리품들을 콜로세움의 건축에 사용할 것을 명령했고 전리품과 함께 들어온 10만 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건축에 동원되었다.
노예들은 로마에서 20km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을 옮겨 왔고, 로마인 건축가들과 전문가들이 보다 전문적인 작업들을 수행하였다.
콜로세움은 목재, 응회암, 석회암, 콘크리트, 타일과 같은 재료로 지어졌다.
콜로세움은 서기 70~72년 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79년에 콜로세움의 3층이 완공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티투스 황제 치세 하에 완공되었다.
80년에 건축이 완료된 콜로세움의 개막식에는 9,000마리가 넘는 야생 동물들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주화까지도 발행되었다.
콜로세움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개축되어 콜로세움 하부에 지하 터널이 생겼으며, 좌석 수도 크게 늘어났다.
217년, 콜로세움에 낙뢰로 인한 화재가 일어나 목재로 지어진 상층부가 전소했고, 240년까지 복구되지 않다가 250년에 완전히 복구되었다.
443년에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 콜로세움을 다시 복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기장은 6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고, 동물 사냥은 적어도 523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콜로세움은 유럽 전역에 기독교가 급속히 퍼져나가며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6세기 후반, 작은 예배당이 경기장 한 귀퉁이에 세워졌으나 아직 그로 인한 큰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기장은 묘지로 바뀌었고, 원래 좌석이 있던 자리들에 상점과 주택들이 들어서며 적어도 12세기 후반까지 임대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약 1200년도에 한 가문이 콜로세움을 점령하여 자신들의 성으로 개조, 사용하려 하였다.
1349년에 로마의 대지진으로 인해 경기장의 남쪽 벽이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벽의 잔해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건물들에 사용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교회는 이로 인해 14세기 중반 콜로세움의 북쪽 부분으로 이전했고 19세기 초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경기장 내부의 석재들은 모두 벗겨져 다른 곳에 사용되거나 생석회를 만들기 위해 불태워졌다.
석재들과 함께 콜로세움의 무게를 지탱했던 청동 골조들도 이 때 대부분 뜯겨나갔고, 아직까지도 그로 인한 피해를 콜로세움의 벽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
16~17세기 사이, 교회는 콜로세움을 보다 더 생산적인 용도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교황 식스투스 5세는 콜로세움을 양모 공장으로 사용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그가 조기에 사망하여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1671년 한 추기경이 콜로세움에서의 투우 경기를 승인하였으나, 대중들의 급격한 반발로 인해 곧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콜로세움이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았던 상징적인 장소였음을 주장했고, 이 곳을 성지로 지정했다.
그는 이 곳을 채석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순례길을 만들어 콜로세움 전역을 성역화하고자 했다.
그는 이 곳에서 기독교인들의 피가 흘려졌고, 이 피가 콜로세움을 성스러운 장소, 신에게 바쳐진 장소로 만들었음을 주장했다.
다만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는 없으며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저 추측과 가정에 의해 만들어진 주장이라 생각한다.
교황은 후대에 콜로세움의 일부를 복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세웠고, 당시 건물 전체에 무성하게 자라있던 잡초와 초목들을 모두 제거했다.

1807년, 1827년에 외벽이 쐐기로 인해 보강되었으며 내부는 19~20세기에 지속적으로 수리되었다.
경기장의 하부 구조는 19세기에 점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되었으며, 1930년대 무솔리니의 독재 하에 모두 발굴되어 그 구조가 완전히 노출되게 되었다.
콜로세움은 현재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명소이며, 매년 수백만 명의 관람객들이 이를 방문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염, 훼손과 같은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400억 이탈리아 리라를 들여 1993~2000년 동안 보수 작업을 실시하였다.
최근 몇 년간 콜로세움은 사형제 폐지와 관련된 국제적 캠페인의 상징이 되었다.
몇몇 반-사형제 캠페인들이 바로 이 콜로세움의 앞에서 펼쳐졌고, 이때부터 로마 시는 사형수들이 석방되거나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나라가 생길 때마다 그날 하루 콜로세움을 비추는 야간 조명의 색깔을 흰색에서 금빛으로 바꾼다.
가장 최근의 변화는 2012년 11월에 미국 코네티컷 주가 사형제를 폐지하며 일어난 것이다.
워낙 경기장 내부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기 때문에, 콜로세움 내부에서 행사를 여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현재 콜로세움 내부에 비치된 임시 좌석들에는 겨우 수 백명의 사람들만이 앉을 수 있다.
다만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하여 바로 앞에서 열리는 행사들은 많은데, 폴 매카트니, 엘튼 존과 같은 전설적인 가수들이 이 곳에서 공연을 한 바 있다.

– 콜로세움의 구조
.외부
언 덕 과 같 은 자 연 지형에 기대어 지어진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들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완전히 독립적인 건축물이다. 그 길이는 189m이고 너비는 156m이다. 또한 그 면적은 24,000제곱미터이다. 외벽의 높이는 48m이고, 둘레는 본디 545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장 내부의 중앙 무대는 길이 87m, 너비 55m의 타원형 구조이며 높이가 5m에 달하는 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외벽은 10만 입방 미터에 달하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졌고 300톤에 이르는 청동 구조물로 지탱되었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지진들이 일어나며 곳곳에 균열이 갔고 남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현재에는 북쪽 벽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고, 외벽 끝부분에 발라져 있는 삼각형 모양의 콘크리트 지지물은 19세기 초, 비교적 현대에 추가된 것이다. 다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벽들이다.
외벽은 층층이 쌓여있는 3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둥의 열들은 층마다 그 양식이 다른데, 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을 모두 사용하여 지었다. 2층과 3층의 아치에는 원래 신화 등장인물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200개의 가죽 차양이 콜로세움 내부에 설치되어 관중으로부터 태양빛과 비를 차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차양은 경기장의 3분의 2를 덮을 수 있었고,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안쪽으로 기울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근 로마 해군 본부에서 특별히 선별된 인원들이 이 차양을 설치하고 내리는 데 투입되었다.
콜로세움은 거대한 규모였지만, 유사시 관중들을 빠르게 대피시킬 수 있는 기능 또한 갖고 있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관중들의 빠른 유입과 퇴장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콜로세움에는 약 80개의 출입구가 있고, 이 중 76개는 일반 군중들이 사용했다. 각 출입구는 고유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북쪽의 정문은 황제와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동, 남, 서쪽에 있는 문은 로마의 엘리트층이 주로 사용하였다. 4개의 주요 문은 타일과 황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파편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외벽 자체가 많이 무너지며 현재는 32개의 문만이 남아 있다.
관중들에게는 입장할 때 번호가 새겨진 도자기 파편 형태의 입장권이 주어졌으며 그가 예약한 관중석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 그들은 넓게 뚫린 통로를 통해 좌석으로 움직여갔으며, 이와 같은 방식은 사람들을 빠르게 흩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콜로세움의 실용적 구조는 몇 분만에 모든 관중들을 밖으로 대피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내부
콜로세움은 최대 8만 7천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좌석들은 로마 사회의 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경기장과 가까운 하부의 좌석을 쓸 수 있었고, 계급이 낮을 수록 경기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위쪽의 좌석을 분배받았다. 특히 황제와 베스타 사제들에게 가장 전망이 좋은 북쪽과 남쪽의 자리가 헌정되었고 그 바로 옆에 원로원 의원들을 위한 널찍한 연단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재 콜로세움에는 5세기 경 원로원 의원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의원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미리 알려주기 위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지어졌다. 도리아는 남성, 이오니아는 여성으로 주로 표현된다.
그 위의 좌석들은 원로 의원들이 아닌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주어졌다. 그 위는 또다시 로마의 평민들 중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이 둘로 나뉘는 등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다만 교사를 동반한 소년, 군인, 외국 고위 인사, 서기관, 사제와 같은 특권 계층에게는 따로 그들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콜로세움의 최상층에 목재로 지은 좌석열이 마련되었다. 이는 도시의 최빈층과 노예들을 위한 것으로, 아마도 서있거나 거친 의자에 겨우 앉아있었어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콜로세움 내부에 무덤 관리인, 배우, 전직 검투사들은 아예 그 출입이 금지되었다.

.중앙 경기장
경기장 자체의 크기는 길이 83m, 너비 48m이다. 본래 모래로 뒤덮인 나무 바닥으로 정교한 지하의 구조들을 가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지하의 구조물들은 콜로세움이 지어질 때는 없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지시로 지어진 것이다. 이 구조물들에는 노예와 검투사들이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맹수와 동물들이 이 곳에서 갇혀 대기하고 있었다. 이 구조물들은 여러 차례 개축되었고 적어도 12번에 달하는 변화를 겪었다.
이 구조물들은 곧바로 콜로세움 외부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물들과 조련사들은 경기장 근처의 마구간에서 이 구조물을 통해 곧장 콜로세움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고, 황제와 베스타 신녀들도 군중의 눈길을 피해 이 터널들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경기장에는 많은 양의 기계 구조물들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도르래는 동물들을 곧바로 경기장 내부에 풀어놓을 수 있게 했고, 심지어는 나무와 조형물들까지도 들었다 내렸다하며 풍경들도 바꿀 수 있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어떤 기계는 근처 수로와도 연결되어 있어 곧바로 경기장 내부에 물을 가득 채워넣을 수 있게 했다고도 한다. 다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모의 해전과 물을 사용한 경기를 제한하며 없어졌다고 한다.
.부속 건물들
부속 건물들은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행사들의 실무를 맡았다. 경기장 자체 외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이 행사의 진행을 도왔는데, 바로 동쪽에는 검투사 양성 학교가 있었으며, 이 학교에서 곧바로 검투사들이 콜로세움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또한 근처에는 무기고, 병원, 시체 처리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 18m정도 떨어진 장소에 일련의 기둥들이 있었는데, 현재는 동쪽에 5개만이 남아있다. 이 기둥들의 용도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매표소의 경계, 종교적 경계였다는 등 다양한 학설들이 나오고 있다.

포로 로마노 / 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
포로 로마노 (라: Forum Romanum)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지이며, 이탈리아어로는 포로 로마노 (이: Foro Romano)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로마 구도심 가운데에 있다.
주요 정부 기관 건물들이 직사각형 모양의 광장을 감싼 형태다. 고대 로마 시기에 이 곳을 포룸 마그눔(Forum Magnum)이나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로마 역사 내내 포룸 로마눔은 로마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개선식, 공공 연설, 선거, 심지어는 검투사 경기까지 국가의 중대 행사를 열었다.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 있으며, 현재는 몇몇 잔해와 기둥만 남아있다. 현재 어느 정도 발굴을 진행했고, 연간 450만 명 관광객이 방문한다.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 대부분 바로 이 포룸 로마눔에 있었다. 로마에 세운 최초 사원과 신전은 이 곳에 있었으며, 고대 왕궁, 베스타 신전, 베스타 여사제들 거처 등 모두 이 곳에 있었다. 포룸 로마눔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로마 제정 시기에 크게 확장했었다.
유적 동남쪽에는 로마 공화정 시기 의회장이 있었다. 그 외에도 공화국 정부 기관, 신전, 동상, 사원이 곳곳에 즐비하다. 포룸 로마눔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 한차례 탈바꿈하게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룸 한복판에 ‘율리우스 바실리카’를 짓고 그 곳으로 원로원 회의장과 재판장을 모두 옮겼다. 로마 공화정 후반과 제정 초반에 시민은 이 곳에 모여 국가의 핵심 업무와 과제를 수행하였다.
제정 시대에 이르러, 포룸 로마눔이 차지하고 있던 경제적 업무는 대부분 트라야누스 포룸 같이 조금 더 거대한 건물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 포룸 로마눔의 정치적 중요함과 상징성은 퇴색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여전히 로마 제국의 상징처럼 여겼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포룸 로마눔을 마지막으로 크게 확장하였으며, 이후 약 200년 간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중심으로 남았다.

포룸 로마눔은 수 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건물군들이 추가되고 덧붙여지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비록 후대의 황제들이 이 곳의 배치를 조금 더 질서정연하게 바꾸어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 곳의 뒤섞여진 듯한 배치는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제정 시대에는 워낙 많은 건물들이 추가적으로 지어져서, 원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던 중앙 광장의 크기가 크게 줄었을 정도였다.
포룸 로마눔의 전체적인 배치 구조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있는 형태였다.
원래 포룸 로마눔이 위치한 장소는 자주 침수되기 쉬운 습지대였다. 하지만 로마 왕정 시기 에트루리아 왕들이 이 곳을 대대적으로 간척하고 메우면서 단단한 평지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르 강이 끊임없이 범람하고 토사물들이 쌓이면서 이 곳의 지면은 끊임없이 올라갔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와 같은 현상은 로마 공화정 시기부터 꾸준히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공화정과 제정 시기에 이 곳은 주로 개선식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들은 서쪽의 개선문을 통과하여 도시로 들어와 팔라티노 언덕을 우회하여 마침내 포룸 로마눔에서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이후 그들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으로 들어가 그들의 승리를 신들에게 고한 다음, 다시 포룸 로마눔으로 돌아와 귀족들과 함께 화려한 연회를 즐겼다.

– 역사
.로마 왕정 시기
원래 포룸 로마눔이 있던 곳은 풀들만 무성하게 자라는 습한 저지대였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경 거대한 간척 사업이 진행되었고, 점차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이곳은 로마를 세운 전설적인 왕 로물루스와도 관계가 있다. 당시 로마는 로물루스와 티투스 타티우스, 이 두 사람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티투스 타티우스는 캄피돌리오 언덕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포룸 로마눔은 두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자연스레 두 세력이 서로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그때 포룸 남쪽 부분은 물웅덩이들이 군데군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북쪽 부분에서 만나 교류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무기를 들고 나올 수 없었고 서로 싸울 수도 없었다.
포룸은 사비니족의 요새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요새는 로마인들이 연합하여 공격했을 때 대부분 파괴되거나 헐려 나갔다. 로마 시가 점차 커지기 시작하자, 포룸 로마눔은 점차 거대한 시장으로 변해갔다. 정치가들은 점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곳의 용이성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이곳은 정치적 집회나 재판과 같은 공공 행사들이 점점 더 많이 열리기 시작했다.
점차 강성해지는 로마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이곳에 더 많은 정부 건물들이 들어섰다. 로마의 두 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이곳에서 최초로 베스타 여신을 섬기는 의식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 여사제들을 위한 거처들을 지었고, 그의 왕궁 또한 이곳에 지었다.

.로마 공화정 시기
로마의 왕들이 쫓겨나고 공화정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포룸 로마눔은 여전히 로마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다만 이곳에는 전보다 더 큰 공공 광장이 만들어졌고, 개인 주택들을 밀어내고 공공 정부 건물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몇몇 집정관들이 이때 세운 포룸의 기본적인 구조가 나중에 제정 시기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갔다.
기원전 5세기경,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건물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사투르누스 신전,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등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콩코르디아 신전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연설가들은 포룸의 북쪽 부분에 앉아있는 원로원 의원들과 귀족들을 바라보며 연설을 하는 전통이 생겼다.
기원전 80년에 술라가 포룸의 바닥에 대리석으로 판석을 깔았다. 이 판석은 거의 제정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78년에는 이곳에 공공 기록관이 정식으로 세워졌고, 기원전 63년에는 키케로가 이곳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기원전 44년, 이곳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고, 안토니우스가 그의 장례 연설을 했다.
카이사르의 시신은 이곳으로 운구되어 화장되었고,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기리는 신전을 지었다.
나중에 안토니우스는 키케로를 죽인 후 그의 머리와 오른손을 잘라 대중들이 볼 수 있게 이곳에 걸어놓았다.

.로마 제국 시기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일어난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전역을 확고히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포룸에 추가적인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아치와 디부스 율리우스 신전을 지었다.
69년에 늙은 황제 갈바가 이곳에서 반란군에게 암살당해 죽었다.
그는 제국 전역에서 반란과 음모가 들끓자 당황하여 급히 피신하려 하였으나, 오토 장군이 이끌던 기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초기 제정 시기에, 이곳에서 이루어지던 대부분의 경제적, 사법적 업무들은 트라야누스 포룸과 같은 더 거대하고 전문적인 건물들로 옮겨갔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 203년에 백색 대리석으로 포룸의 북서쪽에 지어졌다.
당시 세베루스 황제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왔고, 원로원과 시민들은 그에게 개선문을 세워줘 그의 공적을 기리기로 합의했다.
이 개선문은 아직까지도 남아있고, 가장 눈에 잘 띄는 유적들 중 하나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도 로마 시내 전체를 다시 설계하며 포룸 로마눔도 같이 리모델링하였다.
이때 포룸 로마눔에 영화로운 기념관들, 신전들이 다시 새롭게 지어졌고, 불타버렸던 베스타 신전도 이때 다시 재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 하에 포룸 로마눔은 마지막 전성기를 맞는다.
이 때에 쇠퇴해가던 서로마 제국의 정치력이 대부분 이 곳으로 다시 모여들었으며, 이후 200년 후에 오도아케르에 의해 제국이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 포룸 로마눔은 로마 제국의 상징적 중심지로 남아있게 된다.

.중세
제국이 쇠퇴하고 결국에는 끝내 망하면서, 한때 80만 명에 달하던 로마 시의 인구는 500년에는 25만 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사람들은 포룸에 세워져 있던 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와 같은 시도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고, 6세기 들어 포룸 내의 건물들 일부는 서서히 성당으로 변하게 된다.
608년에 동로마 제국의 포카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돌기둥이 하나 세워졌고, 이것이 포룸에 추가된 마지막 건물이었다.
665년에 로마를 방문한 동로마의 황제는 이곳에 있던 납 지붕들과 신전들을 통째로 뜯어갔고, 이는 안그래도 심각했던 풍화와 침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8세기경 이곳은 성당과 교회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다.
8세기에 이곳을 여행했던 익명의 스위스 방랑자는 그의 시대에도 이미 이 곳은 완전한 폐허였다고 말한다.
중세 시기 거의 대부분 동안 이곳은 대리석 조각들에 파묻힌 채로 부서져 갔고, 사람들은 점차 옛 영광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교황 우르바노 5세가 아비뇽에서 다시 돌아오며, 사람들은 황폐했던 교황궁과 성당들을 복구하기 위해 포룸 로마눔에 다시 관심을 쏟게 된다.
그들은 이곳에 간신히 남아있던 기둥들과 유적들을 대부분 떼어갔으며, 무자비한 채석을 감행했다.

.발굴과 보존
17세기에서 19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과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들은 이곳의 옛 영화를 그리워했으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 작품들 중 몇몇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어 현재의 보존과 복원 작업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1803년에 한 고고학자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쌓여있던 잔해들을 치웠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포룸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1898년에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크게 3개의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첫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둥, 잔해, 조각상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 둘째 문화재들을 파손하지 않고 흙과 돌 속에 파묻혀 있는 건물들을 다시 파낼 것, 셋째 이미 발굴된 건물들의 용도와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2008년에 폭우가 내려 유적들 일부가 손상되었다. 다만 발굴 작업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2009년에는 추가적인 결과들이 출토되었다.
아래 포로 로마노의 건물들 (신전, 바실리카, 개선문 등)에 대한 세부내용은 이어 게재하고자 한다.
포로 로마노 건물들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 건물
.신전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디부스 아우구스투스 신전
콩코르드 신전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카이사르 신전
야누스 신전
유피테르 신전
사투르누스 신전
베누스 신전
베누스와 로마 신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베스타 신전

.바실리카
바실리카 아에밀리아
바실리카 줄리아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개선문
티베리우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