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27)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포로 로마노 (Forum Romanum)의 신전, 바실리카, 개선문, 궁전, 기둥들
10월 21일 (토) 우리 일행은 로마 일정으로 트레비분수를 방문하고 베네치아광장과 엠마누엘 2세 기념관, 캄피돌리오 언덕과 고대로마 공화당 터, 원형경기장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방문했다. 포로 로마노 (Forum Romanum)를 둘러보자니 혹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쓴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1737~ 1794)이 이곳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는 이탈리아 로마시 1구 몬티 (Monti)동에 위치한 유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구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이 곳을 중심으로 로마 도심이 뻗어나갔으며, 이 곳에서 로마 공화정 시기의 개선식, 공공 연설, 선거 발표, 즉위식 등 국가의 중대사가 열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 대대적인 개축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제정 시기에도 트라야누스 황제가 포룸을 짓는 등 몇백 년간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징으로 남았다. 전성기에는 제국 전역에서 가장 호화로운 장소이자 로마 문명의 핵심이었고, 수백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사실 포로 로마노는 현대 이탈리아어 지명으로,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이라고 부른다.
다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친 이후,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고 로마가 속한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쇠락해갔다.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한때 장려했던 신전과 포룸들은 무너져 내렸고,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보수하기 위하여 포룸의 석재를 떼어갔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에서도 성당을 짓기 위하여 포룸의 대리석 기둥들과 장식물 등을 대거 떼어가면서 포로 로마노는 현재와 같은 폐허로 전락하였다.
포로 로마노의 건물들 (신전, 바실리카, 개선문, 궁전, 기둥 등)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 신전
고대 로마 신전은 로마 문화의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가장 시각적이며, 로마 건축 이해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신전 (神殿) 만들고 유지하는 게 고대 로마 종교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다. 켈라 (cella)라고 불린 주실(主室)에 해당 신전이 모시는 신의 신상(神像)이 놓여 있었으며, 종종 향을 피우거나 제주(祭酒)를 올리는 작은 제단이 함께 놓여 있었다. 켈라 뒤에는 신전의 수행원들과 관리인들의 용품이나 봉헌자들의 봉헌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방이 있었다.
신전 (神殿) 뜻하는 영어 단어 템플 (temple)은 라틴어 템플룸 (templum)에서 유래하였다. 본디 템플룸 (templum)은 빌딩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의식을 통해 측량하고 구획한 신성한 장소를 뜻하는 낱말이었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항상 템플룸이라는 낱말을 신성한 장소 또는 구역, 즉 성역 (聖域 · sacred precinct)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으며 건물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건물로서 신전 또는 전당을 가리키는 용도로 자주 사용한 일반적인 라틴어 단어는 아에데스 (aedes), 데루브룸 (delubrum) 또는 파눔 (fanum)이었다.
공공 종교 의식은 신전 건물 내부가 아닌 밖에서 열었다. 어떤 의식은 어떤 신전 또는 전당에서 출발하거나 혹은 어떤 신전 또는 전당을 중간에 방문하거나 혹은 어떤 신전 또는 전당에서 끝마치거나 하는 행렬 의식이었는데, 이것은 그 신전 또는 전당에 의식에 사용하는 용구나 봉헌물을 저장했다고 볼 수 있다. 희생 의식 (Sacrifice)이 성역 내 옥외 제단에서 열리곤 했는데 주로 동물 희생 의식 (Animal sacrifice)을 행했다.

-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Temple of Antoninus and Faustina)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은 고대 로마의 포룸 로마눔, 비아 사크라에 세워져 있던 로마의 신전이다.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으로 용도가 전환되었고, 산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 (San Lorenzo in Miranda)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안토니누스 파우스티나 신전은 141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사별한 아내이자 황후였던 대 파우스티나 황후에게 바쳐졌으나, 피우스 황제 사후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피우스 황제도 함께 봉헌하였다.
이후 7세기 경에 가톨릭 성당으로 용도가 전환되었었다.
현재는 성당으로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 디부스 아우구스투스 신전 (Temple of Divus Augustus)
디부스 아우구스투스 신전은 신격화 된 첫 번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주요 신전이다.
이 신전은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 바실리카 율리아 뒤편에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공직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집터에 지어졌다.
로마 주화를 통해 이 신전이 원래 이오니아식 육각형 디자인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크기, 물리적 비율,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않다.
현재 크로아티아에 있는 풀라에 있는 훨씬 작은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같은 아우구스투스의 지방 신전은 이미 그의 생전에 건설되었다.
아마도 대중의 저항으로 인해 그가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신격화된 것은 그가 죽은 후였는데, 그가 죽은 캄파니아의 놀라에 신전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에게 신전이 바쳐졌다.
이 신전은 서기 1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서기 14년 황제가 사망한 직후 로마 원로원이 서약을 했다. 고대 자료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그의 미망인 리비아가 신전을 건축했는지, 아니면 티베리우스 혼자 건축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사망한 후에야 그의 후계자 칼리굴라가 신전을 완공하고 봉헌했다.
일부 학자들은 신전 완공이 지연된 것은 티베리우스가 전임자의 명예를 거의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로마에 입성하여 신전을 봉헌하기 위해 마지막 여정을 떠났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황제는 수도로 출발하기 전 나폴리 만의 미세눔에서 사망했다.
이타이 그라델은 신전의 오랜 건축 기간이 건축에 들어간 엄청난 노력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 사투르누스 신전 (Temple of Saturn)
사투르누스 신전은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497년에 지어졌다.
포로 로마노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로마 왕정 말기에 지어져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였다.
특히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 중 하나로 여겨지며, 로마 제국 시대에도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잔해는 세 번째로 지어진 신전의 유적이다.

- 콩코르드 신전 (Temple of Concord)
콩코르디아 신전은 평화의 여신인 콩코르디아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콩코르디아는 로마의 화합과 일치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포로 로마노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367년 경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기원전 121년에 한 번, 그리고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에 또 한 번 개건하였다.
신전 꼭대기에는 니케의 신상이 서있었으며,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복원되었다.
제단 중앙에는 콩코르디아 여신이 평화의 여신 팍스와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 여신과 함께 모셔져 있었다.

-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Temple of Castor and Pollux)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최후의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낸 레길리우스 호수 전투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기원전 495년에 지어진 신전이다.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와 폴룩스에게 바쳐졌다.
공화정 시기에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은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서 있어 원로원 회의장소로 자주 사용됐으며, 정치인이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놓고 연설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제정 시기에는 황실의 수장고이자 도량형을 담당하는 행정 부서가 이 곳을 사용했다.
4세기 경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오직 3개의 대리석 기둥만이 남아있다.

- 카이사르 신전 (Temple of Caesar)
카이사르 신전은 사후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카이사르 신전 (Temple of Caesar)의 공식 명칭은 율리우스 신전 (Temple of Divus Iulius)으로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신격화된 그를 기리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포럼에 세운 신전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29년에 완공되었으며, 카이사르가 암살 직후 화장되었던 장소에 지어져 그의 혜성 영혼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29년에 완공하였으며, 특히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나타난 혜성을 그의 영혼으로 생각하여 이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참고로 이 신전으로 인하여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포로 로마노에 자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진 인물이 되었다.
중세 시기에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 야누스 신전 (Temple of Janus)
야누스 신전은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게 바쳐진 소규모의 신전이다.
야누스 신전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두 얼굴을 가진 문과 시간의 신인 야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로마 포로 로마노에 위치했다.
이 신전의 주요 특징은 평화 시에는 문을 닫고 전쟁이 시작되면 문을 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으로, 이는 전쟁의 종결과 평화의 시작을 상징했다.
로마의 누마 폼필리우스 왕이 호전적인 로마인들을 진정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추정된다.
구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이었으나, 내부는 신상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상당히 협소한 편이었다고 한다.
야누스 신전의 문은 전쟁 시기에는 열린 상태로, 평화로운 시기에는 닫힌 상태로 두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 유피테르 신전 (Temple of Juppiter)
유피테르 신전은 고대 로마의 최고 신인 유피테르에게 헌정된 여러 신전을 지칭하며, 가장 유명한 곳은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로마 공화정 및 제국의 종교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르네상스 건축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Campidoglio)이 있는 곳이다.
또한, 레바논 바알베크 단지에 있는 로마 제국 최대의 신전인 유피테르 헬리오폴리타누스 신전도 유피테르 신전에 해당하며, 이곳 역시 신탁의 역할을 수행했다.
유피테르 신전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었다.
현재는 로마 시청사가 이 곳에 세워져 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바로 아래쪽, 색색의 석재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 직사각형의 광장과 이를 둘러싼 건물들이 바로 포로 로마노로, 당시 로마 권력의 심장부였다.
유피테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6남매 중 막내로, 12신 중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와 더불어 가장 지위가 높고 하늘을 지배하는 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자 지배자 (혹은 우주를 주관하는 하늘과 땅의 통치자)이며, 곧 만물의 아버지인 동시에 올림포스의 주신 (主神)이자 우주를 주관하는 신들의 왕이다. 율법, 정의, 우정, 힘을 관장한다.

-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 (Temple of Venus Genetrix)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은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신전이다.
이 신전은 0세기 카이사르에 의해 건립되었다.
베누스 (라: Venus는 로마의 여신으로 사랑, 미, 욕망, 성교, 생식력, 번영, 승리 등을 주관한다.
로마 신화에서, 베누스는 본인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멸망을 피해 이탈리아로 달아난 아이네이아스를 통해 로마인들의 선조이기도 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베누스를 본인의 선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여러 종교 행사들의 중심이었고, 다양한 숭배의 대상으로 로마 종교에서 숭배되었다.
로마인들은 로마 미술 및 라틴 문학에 있어서 그리스 동격신 아프로디테의 신화와 이미지를 도입하였다.
후대 서양의 고전 전통에서, 베누스는 사랑과 성생활의 화신으로서 가장 널리 언급되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따라 그녀는 일반적으로 나체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 베누스와 로마 신전 (Temple of Venus and Roma)
베누스와 로마 신전 (Temple of Venus and Roma)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컸던 신전으로, 베누스 (Venus Felix, 복을 가져다주는 비너스)와 로마 (Roma Aeterna, 영원한 로마) 여신에게 봉헌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121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35년에 헌정되었다.
7세기 이후 파괴되었으며, 9세기 초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교황 레오 4세가 그 자리에 성당을 지으라 명하여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고대 로마 포룸의 유적 중 일부로 남아 콜로세움과 인접해 있다.
베누스와 로마 신전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들 중 하나로, 미의 여신이자 로마의 수호신인 베누스 여신에게 바쳐졌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직접 설계를 했다.
그리스식 신전의 특징을 가지며, 두 개의 거대한 셀라 (가장 안쪽의 성소)가 등지고 배치되어 있었다.
‘로마 (ROMA)’와 ‘아모르 (AMOR, 사랑)’의 스펠링이 서로 거꾸로 되는 것을 이용해, 로마와 베누스(사랑의 여신)의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유희가 숨어 있다.

-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Temple of Vespasian and Titus)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은 고대 로마 포로 로마노의 서쪽 끝에 콩코르디아 신전과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위치한 신전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가 아버지가 죽은 79년 이후 짓기 시작하여 티투스 사후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은 콩코르디아 신전과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위치한 신전으로, 사후 신격화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인 티투스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기원후 79년에 완공되었다.
중세 시기에는 대부분이 헐려 나가고 요새로도 사용되는 등 풍파를 겪었다.
이 때문에 현재는 셀라의 일부,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 3개만이 겨우 남아있다.
베스파시아누스아 티투스는 부자간으로 전임과 후임 황제 간이다.

- 베스타 신전 (Temple of Vesta)
베스타 신전 (Temple of Vesta)은 불과 화로의 여신인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이다.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후 천년의 역사 동안 한 번도 불이 꺼진 적이 없는 신성한 장소이며, 신전의 불은 로마와 가정의 불멸을 상징해 처녀들에 의해 지켜졌다.
베스타 신전은 베스타 여신을 모시던 신전으로, 여신의 성화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여사제들에게는 이 성화를 절대로 꺼뜨리지 말 임무가 주어졌다.
여사제들은 순결의 의무를 졌으며, 만일 성화가 꺼진다면 로마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베스타 신전은 직경 15m의 거대한 원통형 건물이었으며,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 20개로 지어져 있었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었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복구되어 있다.

– 바실리카
바실리카 (라: Basilica)는 원래 고대 로마인들의 공공건물 (고대 그리스의 경우에는 주로 법정을 칭함)을 칭하는 데 사용한 라틴어로 대개 고대 로마 마을의 포룸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경우, 공공 바실리카는 기원전 2세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바실리카는 또한 종교적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1915년 포르타 마조레 근처에서 1세기 것으로 인정되는 지하의 거대한 신피타고라스주의적 바실리카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바실리카 내부의 둥근 천장에 발라진 치장 벽토는 살아남아 있는데, 이것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른 의견이 많아 논쟁 중이다. 4세기 기독교 바실리카의 평면도는 세 개의 중랑(中廊)과 한 개의 후진(後陣)이 있는 구조인 이 신피타고라스주의적 바실리카의 평면도와 유사하다. 사람들을 많이 수용하기 위해서 장방형의 건물에 3~5개의 열주를 세우고 지붕을 씌워 실내공간이 넓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바실리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크며 교황이 특별한 전례 의식을 거행하는 성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따라서 현재 바실리카에는 두 가지 뜻이 있게 되었는데, 하나는 고대 건축의 문맥에서 공공건물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건축의 문맥에서 대규모의 유서 깊은 성당 (유대교는 회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 아에밀리아 회당 (Basilica Aemilia)
아에밀리아 회당은 길이가 100m, 폭이 30m에 달하는 거대한 공공 회당으로, 16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아치가 2열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3개의 출입구가 있었다.
기원전 19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전소와 재건을 반복하였다.
대 플리니우스는 이 아에밀리아 회당을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기도 했다.
다만 410년에 고트족의 침략으로 불에 탄 이후 재건되지 못하며 현재는 유구만을 찾아볼 수 있다.

- 율리아 회당 (Basilica Julia)
바실리카 율리아는 로마 시대에 건설된 바실리카로, 주로 민사 재판소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건설을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쳤다.
바실리카는 재판 기능 외에도 시민들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체스나 체커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제공했다.
410년 로마 약탈로 파괴된 후,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101m x 49m 크기의 직사각형 기초 부분과 일부 잔해만이 남아있다.
15세기부터 시작된 발굴을 통해 바실리카의 구조와 역사적 가치가 연구되었으며, 로마 포룸의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남아있다.
율리아 회당은 로마 제국 시기 원로원 의원들이나 황제가 고관과 국사를 논하던 곳으로, 지금은 기단부와 타일을 깐 바닥, 그리고 조그만 아치들 일부만이 겨우 남아있다.
갈리아 전쟁에서 가져온 전리품을 이용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지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재위기에 완공되었다.
다만 410년에 사코 디 로마가 일어나면서 부분적 파손되었고, 이후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결국 폐허로 전락하였다.

-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 회당 (Basilica of Maxentius)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 회당 (Basilica of Maxentius)은 로마 포로 로마노에 있었던 로마 제국 시대의 가장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312년 막센티우스 황제 때 시작되었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완공된 웅장한 구조물입니다.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 회당은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건물이었으며, 포로 로마노에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회당이었다.
막센티우스 황제 시기인 312년에 완공되었으며, 8개의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는 아름다운 백색 건물이었다고 전한다.
이 회당은 거대한 콘크리트 돔 형태의 지붕 구조와 화려한 대리석 장식이 특징이며, 당시 로마의 강력한 건축 기술과 공학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다만 지진과 풍랑, 그리고 채석 과정으로 크게 훼손되어 모습을 잃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북쪽 벽과 아치 뿐이다.

- 산티 코스마 에 데미아노 성당 (Santi Cosma e Damiano)
산티 코스마 에 데미아노 성당은 작은 규모의 가톨릭 성당으로, 본디 310년대에 집정관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신전이자 도서관이었다.
시간이 흘러 527년에 아랍의 의사들이었던 성 코스모스와 성 다미안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이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된 뒤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환자와 가축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형제는 의료기술이 뛰어나 명의라고 칭송받았다. 특히 약으로 낫기 어려운 병자도 간절한 기도로 돌봄으로써 육신은 물론 환자의 영혼 구제에도 각별히 마음을 기울였다. 이들의 의술과 자선에 대한 명성은 널리 퍼졌고, 형제는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 형제는 체포되었다. 집정관은 형제에게 “배교하라”고 강요하며 모진 고문을 가했지만 굳은 믿음을 지닌 형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참수형을 선고받은 형제는 그들의 남동생인 안티모·레온시오·에우프레피오와 함께 처형 당했다.
형제가 순교한 뒤 4세기 초부터는 예루살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형제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립됐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형제가 순교한 지 100년이 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플에 그들의 유해를 모신 대성당을 건축했고, 펠릭스 4세 교황도 6세기에 로마에 대성당을 지어 두 성인에게 봉헌했다.
내부에는 귀중한 기독교 초기 모자이크들과 성화들이 전시되어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1947년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된 결과 현재에는 가장 보존이 잘 된 옛 고대 로마 유적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 개선문 (凱旋門, Triumphal Arch)
개선문은 전쟁에서 승전하고 돌아오는 인물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문이다. 개선문은 특히 고대 로마에서 성행했는데, 공화정기에는 개선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제정기에 접어들면서 팍스 로마나가 정착되자 개선문을 세울 승전의 기회를 얻지 못한 황제들은 공공사업을 통해 쌓은 업적도 개선문을 세울 만한 명예가 된다며 개선문 건립을 정당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다. 로마 시대 이후에는 국왕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인식되어 근대 유럽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개선문을 세웠다.

- 티베리우스 개선문 (Arch of Tiberius)
티베리우스 개선문은 서기 16년에 포룸 로마노에 건설된 개선문으로, 서기 9년 바루스가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독수리 기를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로마 장군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5년 또는 16년에 이 기를 되찾았다.
이 아치는 사투르누스 신전과 바실리카 율리아 사이의 비쿠스 유가리우스에 걸쳐 있었다.
제정 시대에 황제만이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정되었고, 게르마니쿠스의 승리는 티베리우스의 개선식으로 기념되었다.
이 기념물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문헌 자료 및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부조를 통해 알려져 있다.
후대의 티투스 개선문 처럼 코린트식 기둥 두 개가 양쪽에 있는 단일 아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조된 아치의 기초는 포럼에서 발견되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진 않는다.

- 티투스 개선문 (Arch of Titus)
티투스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의 남동쪽에 위치한 개선문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티투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81년에 세웠다.
71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의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이 부조에 몇 남아있지 않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유대교의 상징인 메노라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우아한 균형미 덕분에 16세기 이래 수많은 개선문들의 모델이 되었으며, 가장 대표적으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도 이 개선문을 본뜬 것이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Arch of Septimius Severus)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 북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개선문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203년에 지어졌다.
세베루스 황제 사후 2명의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에 올랐는데, 이후 황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카라칼라는 게타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렸고, 이때문에 개선문에 새겨졌던 게타의 모습도 지워졌다.
현재는 포로 로마노에서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로, 포로 로마노의 상징물들 중 하나이다.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h of 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봉헌된 개선문으로, 대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315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로마 시에서 가장 거대한 개선문이었으며, 높이는 21m, 너비는 29m이다.
3개의 문이 있으며, 가장 가운데 문의 높이는 11.5m, 너비는 6.5m 정도이다.
개선문을 만들 때 처음부터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전임 황제들이 지은 건물들에서 부조와 석재를 떼어와 만들었다고 한다.

-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Arch of Augustus)
포로 로마노 동쪽 끝단에 위치했던 개선문이다.
로마 시내에 지어진 삼문식 개선문들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지어졌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후 로마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개선문을 지어주기로 합의하며 처음 건설되었다.
다만 13세기에 쓰여진 로마 여행록에 이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의 폐허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었던 것을 보면 13세기가 되기도 전에 이미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부지 면적은 17.75m x 5.25m 정도로 추정된다.
– 궁전

- 레기아 (Regia)
레기아는 로마 왕정 시기 로마의 왕들이 살던 궁전으로,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는 로마 최고 종교지도자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베스타 신전과 안토니누스 파우스티나 신전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건물이었으며, 현재는 불타 사라져 기단부분만이 겨우 찾아볼 수 있다.

- 쿠리아 율리아 (Curia Julia)
쿠리아 율리아 (Curia Julia)는 로마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에 위치한 제정 시기의 로마 원로원이 위치했던 건물이다.
해당 건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착공되어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완공되었다.
쿠리아 율리아 앞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지은 개선문이 있다.
쿠리아 율리아는 원로원의 공식 회의장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착공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 완공되었다.
7세기 경 성당으로 용도가 전환된 덕에 아직까지도 로마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에 지붕과 위쪽 널을 리모델링하면서 이 부분만 현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타불라리움 (Tabularium)
타불라리움은 고대 로마의 공식 기록 보관소로, 카피톨리누스 언덕 발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78년에 술라의 명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이후 화재로 인하여 불탔다가 다시 재건되었다.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불탔으며, 중세 시기에 유적 위에 거주용 건물이 지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에도 1층은 고대 유적이고 그 위에 3층짜리 건물이 새로 지어져 있다.
타불라리움 (Tabularium)은 포로 로마노에서 캄피돌리오 언덕을 바라볼 때 이상하게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건물 밑에 보이는 세 개의 아치가 있는 부분을 말한다.
원로원의 평화 조약이나 법령 혹은 법률 같은 중요한 기록을 로마인들은 타불라에 (Tabulae)라는 청동판에 기록했는데 이 청동판을 보관하는 곳을 타불라리움 (Tabularium)이라고 불렀다. 이런 청동판은 함부로 지우거나 고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타불라리움 (Tabularium)은 기원전 78년에 건축가 루치오 코르넬리오가 기원전 83년에 화재로 망가진 건물을 복원하는 임무를 맡아 완성한 건물이다. 길이가 무려 73.6미터나 되고 캄피돌리오 언덕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높이 쌓은 기초 위에 건물을 건설했다.
지금은 아치가 세 개밖에 안 남아 있지만 원래 아치는 11개가 있었다. 포로 로마노의 모든 신전의 배경처럼 당당하게 서있었다. 이곳으로 올라가려면 바닥에 있는 입구에서부터 67개나 되는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때문에 입구가 막혀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야만 했다.
기초가 단단했기 때문에 12세기에 들어서 타불라리움의 기초 위에 세나토리오 궁을 짓는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모습처럼 타불라리움의 정면이 세나토리오 궁의 뒷면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후 교황청에서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세나토리오 궁 앞의 계단에서는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무려 1800년대 중반까지 감옥으로 사용했다.
중세 후기에는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고, 드디어 1536년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언덕을 지금의 모습으로 재정비하면서 세나토리오 궁전은 다시 탄생한다.
1930년에 로마시는 캄피돌리오 언덕의 세 개의 궁전 지하를 서로 연결하기로 결정했다.

- 포티쿠스 데오룸 콘센티움 (Portico Dii Consentes)
포티쿠스 데오룸 콘센티움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발치에 자리한 건축물로, 한때 무너져 내린 대리석 돌더미였던 것을 1835년에 다시 복구하여 현재에 이른다.
367년에 마지막으로 개건되었으며, 12개의 방이 있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업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 아트리움 베스타에 (House of the Vestals)
아트리움 베스타에는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순결한 여사제들이 주거하던 건물이었다.
베스타 신전 뒷편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3층짜리 건물로 50여 개에 달하는 방이 있었다.
동쪽 끝에는 베스타 의식을 창립한 로마의 2대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쇠락하면서 11세기 경에 이미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렸다.

- 툴리아눔 (Mamertine Prison)
툴리아눔은 고대 로마 시기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기원전 640년에 처음으로 완공되었으며 이후 끊임없이 개축과 보수 작업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렀다.
마메르틴 감옥은 초기에는 툴리아눔 (Tullianu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많은 죄수를 가두는 곳은 아니고 사형이나 재판을 앞두고 죄수를 잠시 가두어두는 임시 감옥이었다.
다만 중세에는 감옥에서 성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베드로가 이 곳에 갇혔다는 전설 덕분에 기독교인들에게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 외에도 골족의 전설적 지도자인 베르킨게토릭스도 이 곳에 포로로 끌려와 수감된 바 있다고 전해진다.

– 기둥
- 포카스의 기둥 (Column of Phocas)
포카스의 기둥은 동로마 제국 시기인 608년에 황제 포카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둥으로, 포로 로마노에 최후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 있으며, 이 기둥 밑에는 포카스를 찬양하는 내용의 라틴어 글이 적혀 있다.
원래는 꼭대기에 동상도 있었는데, 이라클리오스의 반란으로 포카스가 죽임을 당한 뒤 기록말살형으로 동상도 같이 끌어내려졌다.
포로 로마노의 신전, 바실리카, 개선문, 궁전, 기둥 등을 둘러보자니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 이집트와 로마 일정을 모두 마친 우리 일행은 로마국제공항에서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는 10월 22일~24일, 2박 3일간 강릉 오죽헌, 허난설헌 생가, 설악산, 남양주 다산생가 등을 방문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