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구원이란 무엇인가?(2)
5. 회심, 전향(Conversion): 회개(repentance)와 믿음(Faith)
5.1 회심(Conversion) 표현의 다양성
구원의 서정에 따른 구원론의 세 번째는 바로 ‘회심(conversion)’이다. 먼저 회심에 대한 구약 성경의 단어를 살펴보면 나함(נָחַם)이 있다. 나함(נָחַם)은 “후회하다(삼상 15:11, 35; 렘4:28), 한탄하다(창 6:6, 7), 뉘우치다(출 13:17; 렘 31:19; 스 8:14), 뜻을 돌이키다(렘 18:8; 요 2:14; 시 106:45), 돌아오다(시 90:13)” 등으로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어 진 것을 볼 수 있다.
‘나함’보다 회심에 대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 구약성경의 단어는 ‘슈브’(בוּשׁ)가 있다. 슈브(בוּשׁ)는 신앙적, 영적 입장에서 ‘돌아오다’ ‘돌이키다’ ‘돌아가다’ 등의 의미를 가지면서 가던 길을 180°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로 번역 되어졌다.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는 항상 신앙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칠십인 역(LXX)에서는 슈브(בוּשׁ)가 메타노이아(Metanoia)로 번역되지 않고 나함(נָחַם)이 ‘메타노이아(Metanoia)’로 번역되어 진 것을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회심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메타노이아(Metanoia)’는 헬라어 전치사 ‘메타(Meta)’와 ‘알다(noew)’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이아(noia)’가 합성된 말로 ‘아는 것을 바꾸다’라는 뜻으로 곧 ‘회개하다’라는 의미로 번역 되어졌다.
회심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conversion’이 있다. 이 회심을 뜻하는 영어 단어 ‘conversion’은 우리말로 번역될 때 ‘전환’, ‘변환’, ‘개조’, ‘전향’, ‘개종’, 특별히 종교적인 ‘회심’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말 ‘회개’를 뜻하는 ‘repentance’를 찾아보면 후회, 회한, 회개, 참회’라는 단 어로 번역되어진다.
루이스 벌코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구원의 서정의 세 번째 요소로 영어단어 ‘convesion: 회심, 전향’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회심(conversion)’에는 두 가지 요소인 ‘회개(repentance)’와 ‘믿음(faith)’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말에는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가 구별되어 사용되어 지고 있지 않다. 교회안에서 회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그것이 ‘회심(conversion)’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개(repentance)’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5.2 탕자를 통해 본 회심, 전향(Conversion) 이야기
죄인이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의 모습(회심)을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눅 15:11-32)는 드라마틱하게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허랑방탕하게 살며 미리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한 탕자가 급기야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돌이켜(눅 15:17)”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탕자의 비유보다 회심의 내러티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본문은 흔치 않다. 삭개오의 비유(눅 19:1-10) 역시 죄인이 회심할 때 보여주는 진정한 변화에 대해 자세 히 묘사해 주고 있다. 회심한다는 것은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후회할 뿐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후회하고 뉘우치기(悔)까지는 잘 하지만, 고치는 일(改), 가던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탕자가 깨닫고 뉘우칠 수 있었지만,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결심한 것들은 어떠한 상황이 와도 다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믿음과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어려움들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결심을 한 탕자의 내면 세계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뿐 아니라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받게 될 멸시와 조롱 심지어 어떤 처벌이 주어지더라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볼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할 정도로 낮아진 마음으로 결연한 결심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의 특성은 “의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성”을 실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회개(悔改)를 단순히 우리 감정의 뉘우침과 후회정도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마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회개는 뉘우치고 후회하는 감정의 변화뿐만 아니라 실제 삶을 고치고 방향성을 바꾸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5.3 구원에 이르는 후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는 세상 근심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참된 회개로 이끈다고 하면서 세상 근심과 구별되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회개는 ‘생명얻는 회개’(행 11:18)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회개’(딤후 2:25)라고도 불리운다. 이러한 회개는 분명 부자관원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돌아가지만(눅 18:23) 진정한 회개로 이끌지 못하는 세상근심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스스로 뉘우쳤지만’(마 27:3) 결국은 목매달아 죽고 말았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뉘우쳤지만’ 그의 뉘우침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로 이끌지 못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悔改)는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후회하고 뉘우침이 생명얻는 진정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 님께로 돌이키는 ‘돌아섬’이 있어야 한다.
사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이미 믿음과 후회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후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섬, 돌이킴” 즉, “온전한 회심”으로 이끌어 준다(눅 1:16-17; 행 3:19; 11:18, 21; 15:19; 26:18; 고후 3:16; 7:10; 딤후 2:25).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7문에서는 회개를 이렇게 묘사한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곧 구원의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 죄를 바로 알고 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굳게 결심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새로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자기 자신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상한 마음,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는 결단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죄를 깊이 깨닫고 죄에서 돌아서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속사람안에서 역사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속사람(이성, 감정, 의지)에 역사하여 믿음과 후회(회개)를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돌이키시고, 설득하시며 지배하신다. 구원에 이르는 후회는 이전의 우리 죄 의 상태 전반에 걸쳐 반성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우리 생각을 바꾸게 한다(눅 15:11-32).
이것은 자연인으로서는 전혀 경험해 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후회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Metanoia)이다. 이 메타노이아(회개)는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여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의식의 변화” “속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기 자신, 죄에 대한 근본적이고 의식적인 관점의 변화(지성)가 일어나야 하고 뿐만 아니라 감정의 변화(정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결정의 변화(의지)가 따라올 때에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코프에 의하면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 나오며, 하나님에게로의 헌신의 삶을 살도록 일으킨다(고후 7:10)”고 강조한다. 이는 성령에 의해 죄인의 의식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고, 이전의 삶의 방향이 현명치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생의 전과정을 수정하는, 생각과 가치관, 욕망과 의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밀라드 에릭슨은 회개를 믿음과 관련하여 정의한다.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과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가는 행동이다”
회개가 죄로 부터 돌이킨다는 의미에서 회심의 부정적인 차원이라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약속들과 은혜를 견고하게 붙잡는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밀라드 에릭슨의 말처럼 회심, 전향(conversion)은 회개(repentence)와 믿음(faith)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즉 회개(repentence)와 믿음(faith)은 개념상 구분할 수 있지만 회심, 전향이라고 하는 한 사건안에서 분리할 수 없는 요소로 만난다. 그래서 에릭슨의 말처럼 개혁주의 신학 에서는 회심을 이야기할 때 회개와 믿음을 분리해서 말하지 않는다. 회개가 과거와 관계하는 것이라면 믿음은 미래와 관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4 그렇다면 회심에서 사람의 일은?
앞에서 본 것처럼 이미 회심의 주도권도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은 회심이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고 회심에서도 주도권을 가지시고 초자연적으로 일하시고 계심을 보여 준다(시 85:4; 렘 31:18; 행 11:18; 딤후 2:25).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회심하도록 하시지만,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회심에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임하는 것 또한 보여 준다(사 55:7; 렘 18:11; 겔 18:23, 32; 겔 33:11; 행 2:38; 행 17:30). 중생에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있지만, 회심에서는 인간은 협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회심의 조성자이지만 인간은 이 사역에 협조하므로 참여하는 것이다.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인간의 협조 없이 독자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이다. 그러나 회개에 있어서는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인간이 회심의 사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사 55:7; 렘 18:11; 겔 18:23, 32; 33:11; 행 2:38; 17:30). 물론 이러한 협력 조차도 인간안에서 먼저 역사하시는 성령의 선행적 사역에서 기인함을 알아야 한다.
5.5 회개와 믿음과의 관계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여기에는 학자들마다 이견들이 있어왔다. 어떤 학자는 회개가 믿음보다 먼저 온다고 주장한다. “바로 회개가 곧바로 구원받는 믿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고. 이 구원받는 믿음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조건이며 도구이다”라고 설명한다. 루터는 그의 95개조 반박문에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활 전체가 회개가 되기를 원하셨다”고 강조하면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믿음이 회개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 3장의 제목을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라고 하고, 제목을 설명하기를 ‘회개는 믿음의 열매이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오류를 고찰함, 1-4)이라고 하면서까지 믿음이 회개보다 앞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회개는 끊임없이 믿음을 뒤 따라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부터 나와야 한다. 이 점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 그러한 사람은 회개의 능력을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회개와 믿음 사이에서 어떤 것이 먼저 오는가 순서를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회개와 믿음사이에 어느 것이 먼저 오는지 말할 수 없다. 논리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지적인 차원에서도 둘 사이의 순서를 구분한다는 것은 많은 학문적 논쟁 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회개와 믿음의 순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보다 회개와 믿음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분명 회개가 믿음과 구별 되지만 이 두가지는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5.6 공동체 회심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회심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짐 월리스는 그의 책 “회심”을 통하여 진정한 회심은 개인적인 회심의 차원을 넘어서야 하며, 회심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머물게 하고 좁은 의미의 영적인 차원에 국한하여 가르치고 적용하는 모습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고든 스미스도 그의 책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을 통하여 회심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제시한다. 회심이야말로 교회를 위한 기초요 사회와 세상의 변화를 위한 소망의 근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경 요나서가 보여주는 것도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를 받고 공동체적인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등 청교도들도 무엇보다도 회심을 강조한 것을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은 회심을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인식했다. 개인의 온전한 회심은 이웃과 사회와의 바른 관계들을 맺을 뿐 아니라 교회 와 세상에 진정한 부흥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6. 칭의(Justification)
6.1 칭의(稱義)의 정의
칭의(稱義)를 있는 그대로 풀어보면 일컬을 칭(稱)자에 옳을 의(義)를 합쳐서 만든 한자어다. 다시 말해 옳다고 일컬어 주는 것, 즉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의미이다.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행위가 바로 칭의이다.
루이스 뻘콥은 칭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로 정의한다. 칼빈은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며, 죄를 용서하는 것 또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A. A. 핫지는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택한 자들에게 전가하기로 한 언약의 실행이며 그 주권적 전가에 의하여 율법이 우리에 관하여 완전히 만족함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 “전가 (transfer)”란 구약의 제사 개념에서 나온 말인데 죄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뒤집어씌우거나 돌리는 것, 혹은 죄를 담당시키는 것(Impute)을 말한다.
이렇듯 칭의는 죄책과 저주를 받을 죄인들을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 공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이 택한 인간에게 전가해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고 선언하시는 재판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칭의가 법정(Forensic)에서 사용되는 재판적 용어인 것을 알 수 있다.
중생이나 회심, 성화 등이 죄인된 인간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면, 칭의는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끼치는 것 이다. 즉, 칭의(Justification)는 죄인 밖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의(義)를 옷 입은 사람들을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의인(義人)으로 여겨 주시는 법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6.2 법적인 근거
레위기 16:6-10을 보면 속죄일에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짐승에게 안수하고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담당 시켜 대신 죽이거나 광야로 보내서 죽게 하는 것(아사셀 염소)을 볼 수 있다. 유대인의 대 속죄일에 아사셀 염 소가 백성들의 죄를 덮어쓰고(전가하여) 광야에서 죽었듯이(레 16:6-10)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처리되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 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죄인이 되었고 우리는 그의 의(義)를 짊어지므로 의롭게 된 것이다. 우리 의 ‘죄’가 그에게 돌아갔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고난과 천대와 멸시를 받고 법적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의(義)’가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가 칭의를 받을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한 사람의 행위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서 효력이 생기는 것을 전가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행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의로움이 된 것이다. 즉 우리의 행위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에 근거하여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임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된 것이다.
6.3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죄인을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주로 믿고 영접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고후 5:17), 인간의 누더기 의를 벗고 그리스도라는 의로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을 볼 때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의(義)로 가려진,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의로운 인간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칭의는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의롭다함을 받았어도 신자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있고, 자범죄를 다 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정당하지 못한데 하나님의 법정에서 정당하다고 선언하시는 것 이다.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자들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인이라고 선언해 주시는 것 이다.
6.4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며 믿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뿐만 아니라 칭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상속권은 물론 자녀가 받는 모든 법적인 권세를 부여하신다(롬8:17). 또한, 가장 큰 비밀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요15:1-10).
6.5 의롭다고 선언받다
우리는 앞에서 칭의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롭 다고 선언해주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제 우리의 행위가 의(義)로 워서가 아니라 그리 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의(義)를 입은 자들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우리 인간에게는 의(義)가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누더기 같은 의(義)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어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가 된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 죄인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으로 가려진, 그리스도의 의로 덮인 우리를 보기 때문에 의롭다 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실제 칭의는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은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이다. 그러기 때문에 칭의는 단 한 번만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 를 전 인격적으로 믿고 세례를 받는 순간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의인(義人)으로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6.6 칭의(稱義)를 받은 자들
그러므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들은 법적으로 무죄(Not guilty)인 사람들이다. 우리 마음의 상태는 여전히 죄와 갈등하며 싸울지라도 우리의 신분은 무죄 선고를 받은 자들이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참소(고소)하여 죄의식을 부추기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 (轉嫁)된 의에 근거해 용서받은 자들이고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그러므로 사탄이 우리 양심에 참소할 때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십자가의 희생과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문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라는 선언을 들은 것처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께 기쁨 받으시는 자들이 된 것이다.(신자는 중생하고, 신생하므로 영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양자됨으로 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요 1:12-13; 롬 8:15-16; 갈 4:5-6) 이것은 죄인들에게는 굉장한 특권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때, 그들은 자녀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다.
6.7 인격적 차원의 칭의 개념
우리는 “칭의”라는 용어가 율법이라는 법정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법정적(Forensic) 차원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칭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옳다고 선포된다”는 법적 의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칭의에 대해서 법적 의미뿐 아니라 인격적 차원의 칭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칭의는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가 맺어짐” 또는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워짐”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만들게 하시겠다고 약속(창 12:1-3)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아브라함은 아담의 죄를 무효화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외견상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믿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하나님께 서는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겨주셨 다고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창 15:6)
이처럼 구약에서 의(義)란 인격적(personal) 개념인 것을 볼 수 있다. 즉, 구약에서 말하는 의(義)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두 인격 간의 관계상의 의무와 요구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개인은 아들 에게는 아버지로서의 관계를 가지며, 아내에게는 남편으로, 왕에게는 한 시민으로, 또 고용자에게는 고용주로서의 관계를 갖게 된다. 이들 관계들은 저마다 입장에서 의무의 지배를 받게 되며 그 의무들의 신실한 이행이 “의(義)”를 구성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신뢰의 관계에서 실패하였다. 사실상 “죄(표적을 빗나감)”라는 개념이 법정적, 법률적 의미 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인격적 관계의 배반 이라는 개념 역시 성경적 죄의 개념을 설명하는 기초가 된다. 죄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약속을 견실히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시 106:24-27).
그러므로 다시 돌아가서 보면 하나님 약속의 신뢰가 곧 “의”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의는 하나님 을 신뢰함 가운데의 믿음이다. 바울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율법으로는 이룰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이루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써만 가능 하다고 피력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 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1)
바울에 따르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함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고, 모세에게 밝히셨으며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신실성을 증명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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