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인문학과 신정론(Humanities and Theodicy)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고통을?
1. 창조와 악 그리고 신정론
전통적인 신학뿐만 아니라 창조 신학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큰 불편함 중의 하나는 악에 대한 이성적이고 모두에게 납득될 만한 설명을 주는 것이다.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창조 세계안에 그렇게 많은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허락하셔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 자연적인 악은 가뭄, 기근, 홍수, 쓰나미, 태풍, 지진, 화산폭발, 여러가지 질병 등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 이다. 이러한 자연적 악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많은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준다. 도덕적인 악은 인간의 악한 성품이 만들어 내는 여러가지 나쁜 것들(bad things)과 악들(evils)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도덕적 악은 살인, 강간, 폭행, 상해, 증오, 박해, 따돌림, 소외 등 다양한 형태로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 도덕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악을 세상에 허락하신 것일까? 이것은 고대 이후로 모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물어온 질문이다. ‘악’의 실체는 풀리지 않는 난제로 기독교신앙 뿐만 아니라 인류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씨름해온 문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악’의 실존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성 나아가서는 기독교신앙을 도전하는 딜레마라 할 수 있다.
다니엘 L. 밀리오리(Daniel L. Migliore)는 악의 실재가 우리 인류의 삶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악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계속해서 긍정할 수 있는가? 또는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한 분이라면,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많은 악이 존재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소위 자연적 악(natural evil)과 도덕적 악(moral rvil)의 두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여기서 자연적 악이란 인간이 자연의 손에 의하여 경험 하게 되는 고난이나 악을 의미하고, 도덕적 악이란 인간의 죄나 잘못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 세계에 저질러지는 고난이나 악을 뜻한다. 이 두 가지 경험의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잔인한 사실들을 연관시키려 하는 우리의 노력이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의 미로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데이비드 퍼거슨의 인용대로 악에 대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지적은 정당해 보인다.
“에피쿠로스(Epicurus: 341-270 BC)의 오래된 질문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악을 막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그는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할 뜻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사악하다. 그는 할 수도 있고 할 마음도 있는가?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그는 왜 악을 제거하지 않는가?”
기원전 오래 전부터 에피쿠로스는 신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했었다. “악을 제거하기 원하나 할 수 없으면, 그는 전능한 분이 아니고, 그가 악을 제거할 수 있으나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선한 분이 아니다. 만약 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 한다면,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도대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신정론이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개념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은 선(Goodness)하시고, 전능하신(Almighty)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악과의 관계의 도식에서 딜레마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런데도 악은 존재한다.” 이 세 가지 명제는 한꺼번에 존재할 수 없는 명제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이 세상에 악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이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시더라도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전능하시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은 악을 제어할 능력은 있더라도 그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게 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악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거나 전능하시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명제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삼중 딜레마를 가져온다. 기독교의 정통 신앙을 강조하면 하나님은 분명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분명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인류와 동·식물을 포함한 피조세계가 까닭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다.
2. 창조세계와 악의 실재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인간들과 모든 피조세계가 경험하는 악은 허구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고 실제의 사건이다. 이러한 악은 인간들에게 고통과 슬픔, 경악과 분노, 자포자기와 죽음 등을 가져다준다.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그렇지, 자연적 악 때문에 겪는 피조세계안에 있는 동물들과 식물들 역시 고통과 울부짖음 속에 있는 것은 동일할 것이다(롬 8:19-22). 이와 같이 실재하는 악과 기독교 유신론이 맞닥뜨리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정론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2004년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Tsunami)는 무려 30만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쓰나미를 바라보며, 또 이 지구상에 수없이 일어나는 자연재해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질문들을 던진다.
자연재해 뿐만아니라 인간의 악함으로 벌어지는 수 많은 참사들은 인간에 대해 다시 절망하게 만든다. 그중 에서도 2014년 4월, 304명의 무고한 생명들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비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비극적 참사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시대를 공유하고 있는 신학자들의 외침은 차라리 공허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린 영혼들이 죽어가며 살 려달라고 절규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아우슈비츠 학살이후 이러한 신정론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계 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과서적인 대답의 문제는 실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나 가족들 에게는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신학자 칼바르트는 “신앙으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들을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고전 13:12)이라 면, 모든 신학은 어쩔 수 없이 파편적인 생각(broken thought)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세계 안에 있는 악의 실재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려고 할 때 우리는 신학의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구현된 거대한 악의 실재들을 직면하고 나서(1차, 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아우슈비츠 대학살 등 파괴적인 전쟁을 경험하고) 인류는 절망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질병, 사고 지진, 화재, 홍수등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과 선하심에 대하여 회의를 가져왔다. 다니엘 밀리 오리(Daniel L. Migliore)의 지적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변하려는 노력들은 안스러울 정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 앞에 놓인 엄청난 악은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신학적 노력을 특히 하나님의 섭리적 다스림을 주장하는 신학적 주장을 동요하게 하며 중단하게 만든다.
3. 하나님의 섭리와 악
이신론(Deism)은 신이 세상을 창조한후 별도로 존재하며 피조물들이 스스로 굴러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심을 믿고 신앙한다. 성경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고 계시고 섭리하심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주장한다.
“섭리란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인데, 그는 이를 통하여 마치 그의 손으로 붙잡으시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을 지탱시키시고, 식물들과 풀들,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양식과 음료 등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우신 손길로 임하도록 그렇게 그것들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린다는 기독교의 진리에도 불구하고 세상안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와 악한 현실은 창조세계를 왜곡하고 기독교 신관에 심각한 도전을 가한다. 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 적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물인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을 고통과 저주의 심연으로 내몰고 있다. 악은 인간이 착각하는 환영도 아니고 사변과 가상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이론이 아니다. 실제 이전 세대에는 악을 실재하는 존재로 이해하기 보다는 문화가 뒤떨어짐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이나, 불충분한 교육, 부적합하고 불충분한 사회계획의 결과로 발생하는 무형의 부조화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계속 발전하여 우주와 인류가 낙원을 향해 진보하면 이 세상에 더 이상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어떠한가?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대인이란 이유 하나로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끔찍하게 학살되는 대참상을 목도하면서 전(全)인류는 경악했다. 달과 우주로 우주선을 보내고 과학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한 20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인류간 벌어지는 전쟁과 파괴, 인종학살, 핵전쟁 등을 겪으며 인류는 악의 실재를 경험하고 분명히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명한 악의 실재에 맞서, 만약 하나 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섭리로 붙들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시다면 사랑하는 인간들과 당신의 피조세계 가 경험하는 엄청난 고통과 악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한편으론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독교 신관이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악의 실재를 경험하고 악한 현실을 마주하는 인류의 질문인 것이다.
4. 악에 대한 고전적 접근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세상에 실재하는 악한 현실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사상”과 “인간의 타락”을 주장함으로 문제를 풀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 전통신학은 창조질서의 선함을 주장할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타락이후 발생하게 된 악의 현실에 대해서도 적절한 설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 안에 벌어지는 모든 도덕적 무질서는 첫 인류 아담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타락한 결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우주 세계안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무질서도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결과로 벌어진, 자연에까지 끼친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실과를 먹었 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창 3:17-19).
사도 바울도 피조세계 전체가 함께 허무한데 굴복하여 썩어짐의 종노릇 하면서 궁극적인 해방의 역사를 고대하고 있다고 피력한다(롬 8:19-22).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이 피조세계에 어떻게 이와 같은 무질서와 악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어거스틴은 그것은 첫 인류가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도덕적 자유를 방탕한 곳으로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타락이고, 원죄이며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한 ‘선의 거절’인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질병과 죽음, 지진과 폭풍, 그리고 가뭄과 홍수 등 자연적인 악 외에도 전쟁, 불의, 박해와 폭행, 잔인함 등 모든 종류의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초래된 것이다. 이러한 타락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악의 기원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돌림으로서 하나님을 변호하는 전통적인 서방세계의 신정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타락으로 빚어진 고통에 대한 설명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묘사되고 있다. 악은 원래 우주의 본래적인 구조안에 내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천사이든지, 인간이든지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남용함 으로 발생하게 된 선으로부터의 타락으로 기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악뿐 만 아니라 자연적 악까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금생도 생이라고 한다면, 거기 가득한 무서운 재난은 인류 전체가 그 원초에서 이미 정 죄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점은 아담의 후손들을 둘러싼 깊고 무서운 무지와 거기서 생기는 모든 오류가 증명하지 않는가? 아무도 노고와 고통과 두려움을 경험함 없이 이 무지에서 구출될 수 없다. 또 허다한 허망하고 해로운 것을 인간들이 사랑하는 것도 이 점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런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들은 가슴을 찢는 염려와 불안과 슬픔, 열광과 다툼과 소송과 전쟁과 반역, 분노와 미움과 기만과 아첨과 사기, 절도 와 강도, 배신과 교만과 야망과 시기, 살인과 부모살해와 잔인과 흉악, 사치와 불손과 파렴치, 음란과 간음과 근친상간과 기타 무수한 성적 불결과 동성애등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짓들이다. … 이런 것들은 악인들이 짓는 죄지만, 그 근원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타고난 근본적 오류와 그릇된 사랑이다. …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신체를 위협하는 무서운 재난들을 생각하여 보라; 그리고 그 재난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극도의 더위와 추위에 대한 공포; 큰 폭풍과 홍수의 공포; 천둥과 번개의 공포; 우박과 벼락의 공포; 지진과 지각변동의 공포; 건물의 붕괴와 참사에 대한 공포; 공황이든 악의에 의한 것이든 동물들의 공격에 대한 공포; 야생동물들이 무는 것에 의한 공포인데 이것은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 … 그리고 우리의 신체 까지도 병이 너무 많아서 의학서에도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리고 치료법이나 치료약 자체가 심한 고통인 병인 많으며, 거의 전부라고 하겠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그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로마제국의 붕괴과정 안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을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불의와 전제주의, 전쟁과 탐욕 등으로 붕괴되는 악한 사건들은 하 나님으로부터 오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오용함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사용하신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어거스틴보다 더욱 강력하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를 강조할 뿐 아니라 인간의 일을 포함하여 자연과 역사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강조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행운, 우연, 변덕에 의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의지적으로 결정한 것을 제외한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알고 의지로 작정한 것이 아니면 어떤 일도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의 모든 과정을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 다스린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칼빈은 섭리론을 운명론과 구별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의 제 1원인이지만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또한 그에 걸맞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험을 미리 내다볼 수 있고 분별력을 사용하도록 이성을 주셨다. 만약 위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무작정 그 곳으로 달려가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잘못을 다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는 사변적이기 보다는 실천적으로 다 가온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악은 결단코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 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건실한 도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고난이 오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다는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섭리론은 고난이 지나고 번성하게 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섭리론의 틀안에서 신학은 신정론에 대하여 세 가지 답변들 사이를 오고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측량하기 어려운 분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도처하는 수많은 악들,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악의 구조와 악의 현실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며 인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지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까닭모를 고통과 불행에 처했었던 욥은 하나님에게 질문을 퍼부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측량하기 어렵고 인간의 유한성과 제한성만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의 지혜로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악의 경험을 역경을 당한 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에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해 주는 부분들이 보이는 것 같지만(모세오경, 욥기) 예수는 분명히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소경 된 것은 본인의 죄와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요 9:1-3).” “실로암의 탑이 무너진 것은 실로암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다(눅 13:4).”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될 것이며 모든 고난이 심판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인간들을 훈련하시지만 고난에 대한 주의 깊은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세 번째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고난과 악의 경험을 하나님의 교육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이 세상의 고난이 다 좋은 경험만이 아닌 것이 분명하며 인간의 재앙과 고난이 하나님의 교육을 위한 일반 적인 진리로 변질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또한 만족할 만한 완벽한 답변으로는 부족하다.
이렇듯 그 어떤 전통적인 섭리론도 신정론에 대해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 신정론에 대한 현대 신학적 접근
데이비드 퍼거슨의 지적대로, 신정론의 문제는 교회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20세기말과 현대 신학자들에게 강렬한 주제로 다가왔다. 칼 바르트 이후 많은 신학자들은 전통적 섭리론과 악에 대한 고전적 접근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고 여러가지 다른 제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한 움직임들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묶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저항하는 신정론(protest theodicy)이라고 할 수 있다. 항의하는 신정론은 존 로스(John Roth)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의 증언과 성찰로부터 영감을 받아 주장했던 신정론이다. 존 로스 외에도 유대인 신학자인 리차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과 아더 코헨(Arthur Cohen) 역시 이 항거하는 신정론에 동의하는 대표적 학자이다.
저항하는 신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선하심(perfect goodness)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뻔한 명제에 문제를 제기하고 현실의 고통의 문제에 정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침묵에 저항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혹시 언약들을 잊으셨는지 그 약속들을 하나님께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성경의 얍복강가에서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의 용례”(창 32:22-32), 시편 기자들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숨기시겠나이까?” 등과 같은 끊임없는 회의와 탄식(시 13, 35, 74, 82, 89, 90, 94), 극심한 고통속에서 번뇌하는 욥의 모습(욥기),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에서 버림받는 예수의 모습(막 15:34) 등을 전거한다.
이러한 신정론은 사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감히 생각해 볼 수없는 접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극심한 고 난과 악한 현실에 맞닥뜨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정직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숨어계시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는 암담한 현실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해 신실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갖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정직한 태도인 것이다.
저항하는 신정론은 악에 대한 신학적 응답; 왜 악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서 악의 최종적인 결과를 내다본다. 그런 점에서 저항하는 신정론은 종말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두 번째는 과정적 신정론(Process theodicy)이다.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제한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힘은 강제적이기 보다는 설득적(persuasive)이어서, 타자의 자유를 범하지 않으면서 타자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라 원래 있는 물체를 잘 설득하는 가운데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계는 다양한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존재들은 각자의 자유와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힘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그런 적도 없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존재한다.
악과 신정론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은 모두 서방신학의 거장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거스틴의 악에 대한 사상과 신학은 논리적, 역사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중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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