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서로를 향한 숨
(서로-함께 공동체, 창 2:4b-9)
한 줌의 흙이 있었습니다.
바람도 머물지 못하던 그 흙 위에
하나님이 다가와 손끝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줄기 숨을 불어 넣으셨지요.
그 숨이 흙을 지나 마음이 되었고,
그 마음이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볼 때
처음으로 ‘너’를 보았습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생명은
언제나 서로를 향한 숨입니다.
혼자서는 노래할 수 없는,
함께여야만 어울리는 음표처럼—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숨을 잊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삽니다.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며,
사랑보다 두려움으로 숨을 막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흙이지만, 내 숨 안에 있다.
너의 숨으로, 서로를 살리라.”
이제 그 숨을 따라
다시 서로를 향해 걸어갑시다.
우리의 눈빛이 마주치는 그곳,
그곳이 곧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Ⅰ. 서론 — 고립된 인간의 시대 속에 존재
우리는 모두 ‘흙’에서 왔습니다.
흙은 우리를 연결하는 존재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 흙과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연과 단절되고, 노동과 분리되고, 타인과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창 3:19).
이 말은 단순히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너의 본질은 관계이며,
너는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연결되어 있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와 소통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연결’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토록 많은 연결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관계는 좁아지고,
공동체는 해체되며,
인간은 점점 더 “나 홀로” 존재로 좁혀집니다.
혼밥 혼숙의 시대
이런 현실을 철학자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 (Dasein-in-der-Welt)”라 불렀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함께 있음(Mitsein)’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인간은
‘함께 있음’을 잃어버린
‘던져진 자’로, 타자와 단절된 채
스스로의 존재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창세기 2장은
단순한 고대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 존재의 원형,
즉 우주 안에 그냥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서로-함께 존재하는 인간”의 회복을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Ⅱ. 본론 1 — 인간은 흙에서 온 존재 (관계의 출발점)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을 비교하면
보편적 우주 창조와는 다른, 인간 중심의 대 서사입니다.
창세기 1장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엘로힘의 우주적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장은
“흙으로 빚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신”
야훼 하나님의 관계적 창조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이라는 언어 사용과
토지·흙·숨결의 상징은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과
농경 사회로의 전환 속에서 형성된 신앙적 고백입니다.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구절에서
‘흙’ (히브리어 adamah/ 복수)과
‘사람’ (adam)의 어근이 같습니다,
인간이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땅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자족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안에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연과,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존재가 형성되는 자입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탄생이 아니라,
관계의 탄생,
공동체의 시작을 말합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들에게 즉 바벨론 포로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창조이야기는
당대 바벨론에도 에누마 엘리쉬’/ 위에 하늘이라는 뜻라는
대 서사시에 창조의 신이 나옵니다.
인간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벨론의 창조의 신과 전혀 다른
“인간은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동산을 가꾸는 공동 창업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이 차이는 엄청납니다
창세기 2장은 인간 본질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의 인간”
Homo Communicans라고 정의 합니다.
서로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실현하는 존재로 소개합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Ⅲ. 본론 2 관계적 상징으로서의 ‘흙과 숨결과 동산’
창세기 2장의 내러티브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땅 (’adamah)을 준비하십니다.
· 그 흙 위에 사람 (adam)을 빚으십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 이어서 동산을 만드시고,
나무를 심으시며,
인간을 그 가운데 두십니다.
이 흐름 속에는 세 가지 ‘관계 축’이 등장합니다.
1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2인간과 자연 (흙, 나무)의 관계,
3인간 자신과의 내적 관계.
이 세 축이 서로 얽혀 하나의 생명 구조를 만듭니다.
이 구조는 분리나 경쟁이 아니라
조화와 상호의존성의 존재라는 겁니다.
“흙 (adamah)”은 인간의 유한함과 뿌리를,
“숨 (breath, ruach)”은 하나님의 생명적 개입을,
“동산 (garden)”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상징합니다.
이 세 상징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흙은 숨이 없으면 죽은 존재이고,
숨은 흙 안에서만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동산은 그 둘이 함께 머물며
“서로-함께” 살아가는 공간적 비유입니다.
이 내러티브의 인간의 실존 구조는
인간은 혼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숨결이 관계 속에서만 살아 있듯,
인간의 존재는 ‘함께 있음’ 안에서만 완성됩니다.
어거스틴은 이를 “사랑이 곧 존재의 형식”이라 했습니다.
즉 존재는 혼자 설 수 없고, 사랑—곧 관계—를 통해만 자신이 됩니다.
Ⅳ. 본론 3 —공동체의 해체와 회복
더 넓은 의미로
창세기 2장은 공동체의 기원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에덴이라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신(神)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인간을 관계적 존재가 아닌 기능적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
이것을 막스 베버는 “근대는 탈주술화된 세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탈주술화는
인간의 ‘함께 있음’을 제거한 탈인간화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조차 이 논리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서로 돌봄의 공동체’ 대신 ‘성과 중심의 제도’
능력중심 제도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바벨론의 창조의 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신의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
그러나 성서적 공동체는 다릅니다.
창세기 2장의 인간은 “서로-함께 있음 (Mitsein)”을 본질로 하는 존재입니다.
타자의 얼굴을 통해 나를 깨닫는 관계 속 존재,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윤리’가 바로 여기서 기원합니다.
공동체란 단지 함께 사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비의 공동체라는 겁니다.
Ⅴ. 결론 — ‘서로-함께’의 회복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 2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와 함께 숨 쉬고 있는가?”
인간은 흙에서 왔고,
하나님의 숨을 받아 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이 세 관계가 끊어질 때,
인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단지 아다마 ‘흙덩이’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서로-함께 공동체’란
하나님의 숨결이 서로를 통하여 흐르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는 권력보다 사랑이,
경쟁보다 나눔이,
고립보다 연대가 생명의 호흡이 됩니다.
Ⅵ. 맺음말 — 교회, 다시 하나님의 에덴을 향하여
교회는
‘서로-함께 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는
단지 의례나 의전이 아니라
하나님과 타자와의 관계를 다시 숨 쉬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
사랑은
이웃의 손을 잡는 행위가 되어야 하며,
나눔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생명의 호흡을 서로에게 불어넣는
창조적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통해서만 나가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홀로 있지 말라. 서로-함께 살아라.
그것이 나의 형상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
하나님의 숨결이 다시 흐르는 ‘서로-함께 공동체’,
그곳이 바로 이 땅 위의 새로운 하나님의 에덴입니다.
🕊 기도
주님,
우리의 숨결이 당신의 숨결과 만나게 하시고,
서로의 존재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보게 하소서.
고립된 세상 속에서도 “서로-함께” 살아가는
에덴의 공동체로 우리를 새롭게 빚으소서.
아멘
………………
서로-함께 공동체 / 전현구 (20251116 설교)
고난과 영광
찟긴 살과 흔린 피의 영광 (요한복음 17:1~5)
“주여, 때가 이르렀나이다”
(요 17:1)
별빛도 숨죽인 그 밤,
당신은 하늘을 우러러
영광의 문을 여셨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요 17:5)
이는 찢긴 살 속에 감추인
영원한 생명의 빛을
우리로 보게 하셨습니다.
그 손에 못이 박히기 전,
그 옆구리에 창이 닿기 전,
당신은 이미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흘린 피는 저주가 아니라
영광의 붉은 인장,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생명의 문을 여는 열쇠.
이제 우리도 그 부름 앞에 서서
그 영광의 길에 초대받았습니다.
자기를 비우신 그 사랑,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은혜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찢긴 마음에도 임하시고.
자기 비움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님의 기도에 응답되게 합시다.
1.서론 – 열리는 시간의 문
주님의 평강이 예배드리는 교우들에게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교회 전통에 따라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국 주일입니다.
짐승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신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주신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립니다.
일 년 동안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영원한 중심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인생길을 걷는 동안
주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일부를 함께 마주합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은 지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오늘의 본문은,
이른바 ‘대사제적 기도’는
예수님의 고백인 동시에 세상을 향한 선언입니다.
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 때가 이르렀사오니…’”
“때가 이르렀다”는 선언은 한 시대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임을 알리는 천둥 같은 선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구원사의 절정’,
‘시간의 분수령’,
‘영원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2.역사 속의 때 – 흔들리는 끝자락에서
오늘의 본문 예수님의 기도의 배경은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압제 아래 유대 민족은 불안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의 진리를
땅의 힘으로 조작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왔다’고 하신 순간은,
인간적 의미로는 실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당대 제시된 역사적 악 조건 속에서
로마식민지 시대의 권력 질서를 완전히 전복하십니다.
힘을 역전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비우심으로,
하늘의 영광을 처절하게 땅의 수치 위에 올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때’는 단순히 십자가를 향한 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투하는 거대한 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때’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종종 기회를 ‘성공의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로 보이는 순간에도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3.오늘 본문구도 –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예수께서 눈을 드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 장면의 언어미학을 주목합시다.
1절에서“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예수님의 시선은 단순히 위를 향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을 바라보는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절규나 요구가 아니라
시간을 교차비교하여 존재론적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과 ‘하늘’,
‘시간’과 ‘영원’을 교차하여 비교시키는
‘교차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 구조의 중심에는 영광(δόξα)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핵심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1절“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말에는,
상호적 사랑, (평등사랑)
영광의 흐름, (내리사랑)
왕적 권위의 교환이 담겨 있습니다.(신뢰와 섬김)
3절에서 예수는 영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 (kennen, erkennen)’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참여, 존재적 결속을 의미합니다.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안다’는 것은
상대와 존재가 서로 얽히는 것,
삶과 삶이 깊이 만나는 것을 뜻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죽은 후에 얻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삶입니다.
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
믿음은 동의가 아니라 참여
구원은 도착이 아니라 여정
영생은 지금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빛이 스며드는 사건입니다.
4.그리스도 왕국에서 왕이시되, 비우시는 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광’을 사회적 성공, 명예, 군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영광은
로마황제의 영광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는 만왕의 왕이시되
그 왕권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만왕의 왕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를 드십니다.
이 만왕의 왕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다스립니다.
이 만왕의 왕은 백성들을 자기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백성을 얻으십니다.
사도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6–7)
‘케노시스’ (κένωσις)는
헬라어로 ‘비우다’, ‘자기 비움’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자기포기와 낮아짐을 통해 드러난
구속적 사랑의 본질이며,
바울 신학의 중심인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역설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왕’의 개념을 통체로 해체하고,
새로운 왕권, 하나님의 나라의 권위를
생명을 내어주면서 거룩하게 세우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전하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은 땅의 권력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바꿉니다.
5.마지막 때의 영광 – 비움으로 채워지는 왕의 길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예수님의 ‘마지막 때’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내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이로서의 예수님의 때는
임무를 완수하고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그 때는 죽음의 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입니다.
고난과 영광이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때를 앞당기려고 조바심치지도 않았고
그 때를 회피하려고 도망치지도 않으십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셨을 뿐입니다
예수의 말씀의 “때”는
단순히 십자가 직전의 시간만이 아니라,
인류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죽음을 향한 목적지가 아니라
‘통과의 문’으로 바꾸어놓습니다.
그 ‘마지막 때’는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영광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때는
심판의 시간인 동시에,
영광의 회복이며,
진짜 만왕의 왕의 즉위식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순간,
하늘에서는 왕의 대관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6.우리의 시간, 우리의 왕, 우리의 영광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질문해야 합니다.
내 삶의 ‘때’는 무엇입니까?
내가 드리는 영광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드려집니까?
나는 어떤 왕을 따르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7장은,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성공의 순간이 아니라 실패의 자리에서도,
주도권을 쥐는 모습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자리에도,
우리는 왕의 백성으로서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7.결론 – 마지막 순간, 마지막 기도, 마지막 영광
예수께서 눈을 들어 기도하신 그 순간은,
‘끝’이 아니라 ‘영원’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때’ 앞에 서 있습니다.
매일 작은 십자가와 선택의 시간을 지나며,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크르누스 (Chronos)가 아니라
카이로스 (Kairos)의 시간입니다.
“나는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나는 어떤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오늘도 예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1절)“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이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우리를 초대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때’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온전한 왕,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왕되심과 영광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마지막 때,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주님,
아버지여, 내 삶도 당신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약함 속에 당신의 힘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나의 용서 속에 당신의 사랑이 보이게 하옵소서
나의 고난 속에 당신의 빛이 비추게 하옵소서
나의 관계 속에 당신의 생명이 흐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때가 주님의 때와 만나게 하시고,
우리의 영광이
주님의 영광 안에서 사라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말씀으로의 깊은 초대 속에서,
마지막 때, 우리 조은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 해맑은 빛으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그리스도 왕국주일 설교원고 (교회력 마지막 주일)
설교제목과 본문 (20251123): 찟긴 살과 흔린 피의 영광 (요한복음 17:1~5)
전현구의 설교의 부름 초대시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