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복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로마서 1:8–17 / 로마서 9:16 / 갈라디아서 3:28)
예배의 부름 (현현주간 초대글)
우리는 오늘
옳고 그름으로 나뉜 자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선택된 자와 버려진 자로 구분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그 의는 정죄가 아니라 관계이며,
판결이 아니라 긍휼이며,
인간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숨 쉬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불려졌음을 기억하기 위해 왔습니다.
오늘 드러나시는 하나님은
율법 위에 서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 한가운데로
생명으로 관계를 맺고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없이,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숨기지 말고
이 십자가의 긍휼의 빛 앞에 서십시오.
지금,
복음이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으로 만나기 위해 이 예배를 여십니다.
설교의 부름 (초대글)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16절)
그 말은 강함의 선언이 아니라
두려움을 넘어서는 고백이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을 말씀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칼이 아닙니다.
선별하고 탈락시키는 기준도 아닙니다.
이 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는
정죄가 아니라 관계이며,
판결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17절)
그 믿음은 확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다시 연결된 삶의 방식입니다.
이제 말씀 앞에 서십시오.
증명하려 하지 말고,
숨기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으십시오.
지금 선포될 복음은
우리를 더 종교적으로 만들기보다
더 인간답게 만들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시는지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현주간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분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가?
권능으로입니까, 정죄로입니까,
아니면 관계와 긍휼로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16절)
이 고백은 신앙의 자신감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절대 신뢰입니다.
1,현현과 제국: 하나님은 어디에서 드러나시는가?
로마는 식민제국의 중심이었습니다.
황제의 얼굴은 동전에 새겨졌고,
황제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로마 주화 / 신약
DIVI F (신의 아들)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PAX ROMANA / 하나님 나라의 평화
IMPERATOR / 십자가에 못 박힌 주
AUGUSTUS (존엄) / 케노시스(자기 비움)
그 제국의 한복판에서 바울은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은 이미 황제의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단어를 탈취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복음입니다.
세상을 통치는 힘의 권력이 아니라
가장 미약하고 가장 무력한 십자가로
죽음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변 봅시다
성공을 현현으로 착각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큰 건물, 많은 헌금,
숫자의 성장을 하나님의 임재로 읽어 왔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 성장 속에서 사람은 더 인간다워졌을까요?
현현은 성공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감추고 싶은 자리인
연약함, 실패, 고난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2.이원론의 유혹: 영혼과 몸,
교회와 세상의 구조적인 분리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영혼의 문제로만 축소합니다.
몸은 세상에 맡기고,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복음은 결코 그런 이원론이 아닙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몸으로, 관계 속에서 살아낸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하고,
일터에서는 비인간적인 신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에는 성실한 신앙인인데,
월요일이 되면 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약자를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신앙은 영혼의 문제로만 남아 있고,
삶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복음은 영혼만 구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간 전체를 회복합니다.(영/혼/육)
몸, 말, 관계, 선택을 바꿉니다.
3.율법의 한계: 구분과 정죄의 언어입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목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구분하고 정죄하는 기준이 됩니다.
‘믿음의 기준표’를 만들어
사람을 차별해서 나누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누가 더 헌신적인지,
누가 더 바른 신앙을 가졌는지를 끊임없이 평가합니다.
봉사 시간, 헌금 액수, 직분 여부가 믿음의 잣대가 됩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하나로 묶이기보다, 서열화됩니다.
바울은 단호합니다.
율법으로는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율법은 질서를 만들 수는 있어도,
사랑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4.믿음의 본질: 선택받았다는 확신이 아니라
관계에 머무는 용기입니다
믿음은 ‘나는 선택받았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자신을 맡기는 용기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긍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9:16)
선택은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정죄가 아닌 긍휼: 하나님의 의의 참된 모습은?
하나님의 의는 법정의 망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쓰러진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신실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정죄하는 자리가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자리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6.복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복음은 우리를 종교적으로 우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더 취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취약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롬1:1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갈3:28)
이 말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 앞에서 같은 인간이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에서 로마서 1:16절과 갈라디아서 3:28절은
같아 보이지만, 신학적 위치와 목적이 분명히 다릅니다.
1) 본문 먼저
로마서 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 가장 중요한 차이 한 문장
로마서 1:16은
— 복음이 역사 안으로 어떻게 들어오는가를 말하고,
갈라디아서 3:28은
— 복음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구성되는가를 말합니다.
즉,
로마서는 복음의 운동 방향이고,
갈라디아서는 복음의 존재론적 결과입니다.
3) 로마서 1:16 — “질서의 언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직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
이 말은 차별의 언어가 아니라 역사적 순서의 언어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그러나 거기 머물지 않는다
유대인의 특권을 보존하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의 특권을 열어젖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아직 구별된 채 등장합니다.
이 로마서 상황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 율법의 세계와 비율법의 세계를
모두 해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기독교인과 이방기독교인의 나눔을
모두 해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율법을 가지고 나누고 차별하는 것을
해체하는 모든 과정을 선포한 서신입니다.
4) 갈라디아서 3:28 — “파괴의 언어”
반면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이상 순서도, 설명도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다 하나다.”
여기에는
“먼저”/ “그리고”“역사적 책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이미 복음이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건 더 이상 설명할 문제가 아니라
무너트려야 할 구조라는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3:28은
사회적 위계(종/자유인),
성별 질서(남/여),
종교적 특권(유대/헬라)
를 존재론적으로 차이를 무효화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급진적 선언입니다.
5) 철학적으로 말하면
로마서 1:16은
— 역사철학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
갈라디아서 3:28은
— 존재론의 언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무엇이 되었는가?)
헤겔식으로 말하면
로마서는 변증법적으로 진행하고
갈라디아서는 종합 이후의 상태입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로마서는 해체(Destruktion)의 과정이고
갈라디아서는 새로운 존재 양식의 드러남입니다.
6) 설교적으로 한 문장 요약
로마서에서 바울은
구분된 인간들을 데리고 복음 안으로 들어오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 구분 자체를 남김없이 불태워 버립니다.
그래서 이 둘은 모순이 아니라
시간과 상황이 다른 같은 복음의 두 얼굴입니다.
7) 현현주일 맥락에서
로마서 1:16 →
“복음은 모든 경계를 향해 움직인다”
갈라디아서 3:28 →
“복음은 더 이상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현주일에 이 둘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은 경계 너머로 오시는 분일 뿐 아니라,
경계 자체를 사라지게 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주제는
차이를 차별로 변질되는 폭력을 엄중하게 선포)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차이를 차별에서 기독교인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7.현현주간의 결단: 드러난 하나님 앞에서의 삶
사랑하는 여러분,
현현주일은 하나님이 드러난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해 왔음을 드러내는 날일지도 모릅니다.
복음은
우리를 심판의 자리에 결코 세우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관계의 자리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고백이, 언제 어디든
우리 교우들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옛 인간(율법), 새 인간(성령) (로마서 7:13–25)
[예배의 부름 초대글]
율법은 거룩하나
내 안의 옛 사람은
그 거룩함 앞에서 떨며 무너집니다.
선한 것을 원하되
행하지 못하는 깊은 분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 탄식이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은밀히 스며드는 또 다른 숨결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 신음하던 옛 인간을 넘어
성령 안에서 새로 빚어지는
존재의 약속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의의 그림자를 벗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던 오만함을 내려놓고,
우리를 건지시는 은혜 앞에 섭니다.
율법의 무게에서
성령의 자유로,
옛 사람의 탄식에서
새 사람의 감사로 나아갑시다.
주께서 우리의 곤고함을 들으시고
새 창조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설교의 부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율법 앞에 선 옛 인간의 탄식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선은 원하되 행하지 못하는 연약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깊은 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의 자리에서
은혜가 먼저 말을 건넵니다.
정죄가 아닌 성령의 숨결로,
절망이 아닌 새 생명의 약속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옛 사람의 무게를 내려놓고,
성령 안에서 새 사람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갑시다.
1.우리가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 가장 진실해질까요?
성공했을 때일까요?
칭찬받을 때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나는 왜 이 모양이지?’라고 중얼거릴 때
비로소 진실해집니다.
바울이 오늘 그렇게 말합니다. (7:19~20)
7: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7: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위대한 사도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나의 선한 의지 그 너머에 罪(Sin)가 있다는 겁니다.
대문자 단독으로서의 죄 Sin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복수 sins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제상황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단수 죄(Sin)란
여러가지 법적 위반행위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의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장소가 참 많이 있지요?
(영화/소설/음악/폭력현장/운전위반……etc)
여기서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장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의 말하는 죄라는 것은
단지 일련의 규율목록에 대한 위반 그 이상(以上)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균열/분열입니다.
모든 죄들(sins)은 소외와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데
바울은 이것을 세력이라고 표현하고
이런 세력이 작동하게 하는 힘이 죄(Sin)라는 겁니다.
이 세력(힘/죄)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자신과의 일체성을 잃도록 만드는
균열(분열)을 낳는겁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20)
우리는 이런 경험을 어떻게 체험할까요?
나의 자존심/나의 기득권/나의 경제력 /나의 권력 앞에 갈등할 때
아무런 문제도 없고 평안하고 어려움도 없는 상대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관심없이 만족하며 살아갈 때
사도바울은 이런 죄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면으로 대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무언가가 일어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다 큰 죄 속으로 밀어넣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참된 현실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는 우리는
이제 ‘자기 거부’라는 심연 속에서 질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이러한 자기거부라는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 용납의 힘인 기독교 메시지가 바로
자기를 거부할 것인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용납할 것인가?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 복음(예수 그리스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근본 문제는 왜곡(distortion)입니다
우리의 몸과 육신에 죄를 뒤집어씌우지 마라는 겁니다.
우리의 전 존재 즉 우리 몸의 모든 세포와
우리의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육신인 동시에 정신이다. 영/혼/몸 모든 것을 포함하여
그것들은 모두 죄의 힘(세력)에 예속되어 있고
동시에 그 힘에 맞서고 있습니다.
육체가 나쁜게 아닙니다. 性이 나쁜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 어떤 부분도
그 자체로 (악)나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의 그 어떤 부분도
그 자체로 (선) 좋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육신, 육신적 삶, 성욕
이런 것들의 자연스러운 추구를
“벌 받을 짓”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왜곡입니다.
생명의 성적 능력 안에서
죄의 권세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왜곡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왜곡된 죄책감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죄란 무엇일까요 ?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하나님(신적 근거/the divine Ground)에 대한
참여로부터의 등돌림이고
우리 자신을 향해 돌아서고,
우리 자신과 세상을
우리 자신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 모으려는 충동이
바울이 증거하는 죄(Sin)입니다.
죄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율법(현재/모든 규범)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안에 거하는 죄는
“너희는 ~ 하지말라”는 말에 의해
깨달음 받는 순간까지 잠들어 있습니다.
죄는 그때 인식되는 겁니다.
금지사항들은 잠들어있는 갈망을 일깨웁니다.
그것들은 죄의 능력과 죄에 대한 인식을 일깨웁니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를 깨뜨리진 못합니다.
여기서 율법의 한계를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차원의 삶에 사로잡힐때 ,
나보다 높은 삶의 차원을 발견했을때
오로지 그때에만 죄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날 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날 때
가능하다는 겁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가 죄의 능력이 깨졌다는 메시지를
우리의 전 존재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안에서도 깨지게 되는 겁니다.
죄를 이렇게 안다는 것은,
우리 존재라는 것이
우리보다 큰 힘들의 전쟁터임을 깨닫는 것 중요합니다.
인간은 매순간 모든 실존의 궁극적 의미와 관련해
결정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우주의 한 복판인 겁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도다.” (7:12)
C.E.B. Cranfield는 이 구절을 두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결코 악한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죄의 오용이다.”
James Dunn 역시 강조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나,
죄가 그것을 도구로 삼아 인간을 사로잡는다고.
여기서 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ἁμαρτία는 의인화되어 활동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7:11)
죄는 세력입니다.
능동적 힘입니다.
여기에서“나(ἐγώ)”는 누구인가?
이 질문이 핵심입니다.
어거스틴(후기)은 이 “나”를
중생한 신자의 내면적 상태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분열은 그리스도인 안에 지속된다고 보았습니다.
루터와 칼뱅도 이 전통을 따릅니다.
루터는 이를 simul iustus et peccator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이라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Rudolf Bultmann은 이 본문을
“실존적 자기 인식”으로 봅니다.
율법 아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James Dunn과 N.T. Wright는
이 “나”를 이스라엘의 대표적 인물로 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역사적 인간의 목소리입니다.
즉, 이것은 개인 심리 고백이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드라마입니다.
2.이 본문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닙니다
많은 설교는 여기서 멈춥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더 회개합시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더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조를 말합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계명은 거룩합니다.(12절)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계명이 탐심을 일으켰다.”(7:8)
금지가 욕망을 깨웁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보게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금지는 욕망을 강화합니다.
금지 → 의식 집중 → 욕망 증폭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심리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인용하는 계명은 십계명 마지막입니다.
“탐내지 말라” (출 20:17)
탐심(ἐπιθυμία)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경계를 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단지 물질 욕망이 아니라
존재적 욕망입니다.
—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
—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
—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
사도바울은 7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 왜 인간은 알면서도 어기는가?
— 왜 도덕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 왜 규칙은 욕망을 제거하지 못하는가?
바울의 답은 명확합니다.
율법은 구원이 아니라
진단 도구입니다.
3.인간은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다.
나는 선택한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그것을 행한다.”(17절)
이 말은 변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분열의 인식입니다.
내 안에 둘이 있습니다.
—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나
— 하나는 다른 법에 사로잡힌 나
19절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에서.
“자아(에고)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라고”설명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해의 분석을 말하고,
바울은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말합니다.
나는 나를 원하지만
나는 나를 배반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7:22–23)
여기서 “속 사람”과 “지체”는
영혼/육체 이원론이 아닙니다.
Bultmann은 이것을
인간 존재의 실존적 긴장이라 말합니다.
Conzelmann은
이를 종말론적 전환 직전의 상태로 해석합니다.
즉, 바울은 존재론적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체계의 충돌을 말합니다.
바울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통치 아래 있는가?
육 아래인가/ 성령 아래인가
사망 아래인가/ 생명 아래인가
4.율법은 빛이지만, 그림자를 만듭니다
율법은 어둠이 아닙니다.
율법은 빛입니다.
그러나 빛이 비칠 때
우리는 그림자를 봅니다.
계명이 오기 전에는 몰랐던 욕망이
계명과 함께 깨어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금지를 통해 욕망을 배웁니다.
규범을 통해 자신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 규범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속박을 경험합니다.
5.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24절)
바울의 절규는
자기 혐오가 아닙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절정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수도통합병원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인격적인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처럼으로 자기 객관화가 발생했습니다……
권력 앞에
돈 앞에
자존심 앞에
자기 지식 앞에서 거침없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뿐입니다
이 고백은 패배가 아니라
문턱입니다.
해방 직전의 균열입니다.
이 절규는 어둠의 끝입니다.
Karl Barth는 이 구절을
“인간의 모든 종교적 가능성이 무너지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율법을 통해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 절규는 자기 혐오가 아닙니다.
자기 의의 붕괴입니다.
자기 권력의 붕괴입니다
자기 돈의 붕괴입니다
자기 지식의 붕괴입니다
자기 자존심의 붕괴입니다
6.교회는 이 본문을 어떻게 사용해 왔습니까?
역사 속에서 이 본문은 자주 이렇게 해석되었습니다.
“보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우리는 항상 무능하다.”
“우리는 영원히 죄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상태를 영원한 본질로 말하지 않습니다.
7장은 지속 상태가 아닙니다.
경계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긴장은 8장으로 향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본문을 자주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합니다.”
“우리는 계속 죄인입니다.”
그러나 Dunn은 분명히 말합니다.
7장은 지속적 정상 상태가 아니라
8장으로 가는 과도기적 묘사라고 해석합니다.
즉, 바울은 우리를 죄책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해방으로 인도합니다.
7장의 절규는
8장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여기서 “법”은 규범이 아니라
지배 원리(세력)입니다.
죄의 통치가 끝나고
성령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 개선이 아닙니다.
존재의 이동입니다.
7.죄는 행위가 아니라 세력입니다
본문에서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활동합니다.
속입니다.
죽입니다.
죄는 구조입니다.
세력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실패만이 아니라
우리 안과 우리 밖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세력)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같은 악을 반복합니다.
8.그러나 바울은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절규 후에 질문이 나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이 질문은
구원자를 향한 방향 전환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해방은
내 의지의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의 도래입니다.
죄의 세력 대신, 성령의 세력입니다.
율법의 정죄 대신, 생명의 법이 통치합니다.
9.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 있습니까?
같은 죄를 반복하고
같은 결심을 무너뜨리고
같은 후회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바울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7장은 끝이 아닙니다.
절망의 언어는
은혜 직전의 언어입니다.
10.자기 분열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진짜 위험한 상태는
분열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자기 의에 취해
자기 의로움에 안주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분열을 느끼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선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 갈망은
새로운 창조의 흔적입니다.
11.새로운 인간의 선언입니다
8장은 선언합니다.
1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동입니다.
율법 아래서, 성령 안으로.
정죄 아래서, 생명 안으로.
분열된 주체에서, 새로운 창조로의 대 이동입니다.
로마서 7장은
인간의 본질적 타락 선언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상황에 직면한다는 겁니다
어거스틴은 이를 존재론화했고,
루터와 칼뱅은 교리화했으며,
현대 학자들은 역사화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말론화합니다.
이 절규는
이미 해방의 문 앞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곤고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12.설교 마무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은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의
자기 우상
자기 구원의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세워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죄/사망/율법(모든 규범)]으로부터
해방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입니다.
율법의 빛이 그림자를 드러냈다면
성령의 빛은 생명을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
감사의 자리로 옮겨집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곤고함 속에서도, 감사하십시오.
분열 속에서도, 소망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절규의 끝에서
이미 새 인간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