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아케다 산에 남겨진 침묵과 눈물 (창세기 22:1-14)
(묶인 이삭, 흔들리는 아브라함, 그리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답이 없고,
울어도 침묵뿐이며,
믿음으로 걸어왔는데도
길이 보이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은 바로 그런 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믿음의 영웅
아브라함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한 노인의 눈물의 기록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런데 우리는 묻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시험했을까요?
이미 고향을 버렸습니다.
이미 가족을 버렸습니다.
이미 평생을 순종했습니다.
무엇을 더 증명해야 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답보다 먼저 질문을 줍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답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날 밤 잠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는 수없이 이삭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어릴 적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
첫 걸음을 떼던 순간.
웃음소리, 장난치던 모습.
그 모든 기억이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라.”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설명하실 때
“네 아들” 이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네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아픔을
알고 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가장 아픈 곳을 만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우리의 적들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시험하십니다.
시험은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수천도의 불이 금을 파괴하지 않듯,
하나님의 시험은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믿음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은 사흘 길이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을 사흘만에 살아나십니다
성서에서 사흘은 고난의 시간을 나타날 때 사용합니다
성경은 그 사흘을 단 몇 줄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으로 보면 영원보다 긴 사흘입니다.
죽음이 예정된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의 하루는 얼마나 길겠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인생의 모리아 산을 걸어갑니다.
병원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의 시간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눈물만 흘리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가슴으로 흐릅니다.
본문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문장이 반복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
이 얼마나 가슴 아픈 문장입니까?
아들은 아버지를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아들은 손을 잡고 걷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둘은 함께 갑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함께 걷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픈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아브라함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 말은 믿음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절규입니다.
희망이면서도 눈물입니다.
신뢰이면서도 두려움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이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 정말 준비하실 거죠?”
라는 의문속에 떨림이 숨어 있습니다.
드디어 제단이 쌓입니다.
그리고 아케다의 순간이 옵니다.
이삭이 묶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순종” “희생”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셉투아진트(79인역)
“묶임”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소라텍스트
왜입니까?
본문의 중심이 죽음이 아니라
묶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묶여 있습니까?
겉으로는 이삭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미래에 묶여 있습니다.
약속에 묶여 있습니다.
성공에 묶여 있습니다.
아들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꿈에 묶여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은 이삭보다
먼저 아브라함을 풀어내고 계십니다.
인간은 늘 무엇인가에 묶여 삽니다.
돈.명예.성공.자녀.건강………
심지어 신앙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더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내가 준 것을 사랑하느냐?”
칼이 올라갑니다.
시간이 멈춥니다.
하늘도 숨을 죽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늘이 열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급한 음성입니다.
절박한 부르심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달려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여기서 모든 것이 뒤집어 집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희생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신뢰를 원하셨습니다.
역사비평적으로 보면 이것은
고대 인신제사와의 결별 선언입니다.
가나안의 신들은 첫 아들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이를 돌려주셨습니다.
인간을 죽이는 종교와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이
여기서 갈라집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그때 수풀에 숫양 한 마리가 걸려 있습니다.
참 신비로운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이삭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걷히자 숫양이 보입니다.
절망이 시야를 가릴 때는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아브라함이 울기 전에.
아브라함이 기도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알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숫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중에야 발견합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그런 고통이 왔는지.
왜 그런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왜 그런 이별을 겪어야 했는지.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하나님은 이미 거기 계셨습니다.
우리가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가 울던 자리에서.
우리가 절망하던 자리에서.
여호와 이레가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붙잡아 주신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날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원래 뜻은 “하나님이 보신다”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입니다.
아케다는
희생이나 순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는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돌려주셨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는 아케다 산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상실의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병상의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아케다 산의 마지막 장면은 죽음이 아닙니다.
생명을 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눈물이 아닙니다.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상실이 아닙니다.
회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묶임이 아닙니다.
풀려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산 정상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주님은 한 번도 저를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삭만 바라볼 때
주님은 이미 숫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울고 있을 때
주님은 이미 길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제가 끝이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주님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모리아 산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아케다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은혜의 노래입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