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외치는 군중과 듣는 종 (사50:4~9a, 마21:1~11)
[예배의 부름 초대글]
오늘, 우리는
두 길이 만나는 자리로 부름받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치는 길과,
고요히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 사이에서
우리의 영혼은 조용히 서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깨우치사…” (사 50:4)
환호와 기대로 가득한
세상의 소리 너머에서
우리 존재의 깊은 중심을 흔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려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외침을 내려놓고
듣는 존재로 서기를 원합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
예수를 맞이하며
권력이 아닌 사랑으로,
힘이 아닌 순종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설교의 부름 초대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 선 우리는
군중의 외침과 종의 침묵 사이에 서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입술과
“나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리라”는 고백 사이에서
우리의 존재는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주님을 따르는가,
우리는 무엇을 들으며 살아가는가.
이 시간, 우리의 소리를 잠시 멈추고
우리 안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낮고도 분명한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그 음성은
우리의 욕망을 흔들고
우리의 길을 다시 묻고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빚으실 것입니다.
이제, 듣는 자로서
말씀 앞으로 나아갑시다.
1. 예배의 문을 여는 질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예배로
우리 교회입구부터 강단 앞까지
종려나무 가지가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던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마 21:9)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또 다른 길 앞에도 서 있습니다.
그 길은 침묵으로 조용합니다.
그 길은 고통스럽습니다.
그 길은 처절하게 혼자입니다
그 길은 아무도 환호하지 않습니다.
“나는 등을 때리는 자들에게 내주었고(사 50:6)
이사야 본문으로 설교할 때 마다 늘 말씀 드리지만
이사야는 3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 제1이사야(1-39장/ 예루살렘 이사야)
2) 제 2이사야(40-55장/ 바벨론 포로 이사야)
3) 제 3이사야(56-66장/ 바벨론 포로 후기 이사야)
그래서 이사야서 전체는
이스라엘 200년 역사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제2이사야는 바빌론 포로라는
역사적 고통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을 잃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공동체.
바벨론 포로는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는가?” (사 50:1)
이 질문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붕괴에 대한 절박한 절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180도 다른 방식으로 답합니다.
(사 50:1) 하나님은 이혼하지 않으셨고
빚 때문에 팔아버린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신학적 선언인 동시에
정치적 저항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제국은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패배했다,
그러므로 무가치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름받은 존재다.”
역사적으로 이 본문은 패배의 해석을 거부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재구성하는
“해석의 혁명”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외치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듣는 종인입니까?
2. 본문 1: 듣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사야 50:4–5)
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말하다”가 아니라 “듣다”입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 이전에 듣는 존재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부름을 듣는 자(Dasein)”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더 깊이 나아갑니다.
인간은 단순히 존재의 부름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존재입니다.
이사야의 종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傾聽)
이것이 왜 중요한가요?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은
듣지 않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들었으나 왜곡했고
가인은 들었으나 거부했고
이스라엘은 들었으나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의 종은 다릅니다.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귀를 하나님께 내어드립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인간의 고통은
“왜곡된 해석”에서 비롯됩니다.
칼 융은 말합니다:
“인간은 외부 사건보다
그 사건에 부여한 의미에 의해 고통받는다.”
그런데 이사야의 종은 다릅니다.
그는 고통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에게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3. 본문 2: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자아 (이사야 50:6–9)
“나의 얼굴을 수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6)
이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선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사 50:7)
여기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질문과 만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자신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종은 다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 (사 50:9)
이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자유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서는 것이다.”
종은 고난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적 중심성(inner core)”입니다.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리라” (사 50:7)
이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정체성입니다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내면의 확신으로 살아가는 존재.
그는 맞아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정체성은
외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0장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힘으로 존재하는가?
인정으로 존재하는가?
성공으로 존재하는가?
바벨론 포로의 종은 대답합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존재한다.”
이것은 존재의 근본적인 재정의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이 아닙니다
외적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형성됩니다.
바벨론 포로의 종은 말합니다:
나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조롱당했습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4. 본문 3: 왕의 입성인가?, 오해의 시작인가?
이제 장면은 바뀝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환호, 종려나무 가지.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께서 계십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도다” (마 21:5)
로마의 장군은 전차를 타고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나귀를 타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권력의 재정의입니다.
군중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정치적이었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릴 왕이었습니다
민족을 회복할 지도자였습니다
권력을 재편할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기대를 거부하십니다.
“호산나!”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욕망의 외침일 수도 있습니다.
며칠 후 그들은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군중은 쉽게 열광하고 쉽게 배신합니다.
왜일까요?
인간은 자신의 기대를 투사하기 때문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외부 대상에 투사합니다.
군중은 예수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대를 사랑했습니다.
5 권력의 두 길
군중은 외칩니다 종은 듣습니다
군중은 요구합니다 종은 순종합니다
군중은 기대합니다 종은 맡깁니다
군중은 쉽게 변합니다 종은 끝까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힘은 내려놓음 속에서 드러난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면 인간은 왜곡된다.”
군중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용합니다.
그러나 종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을 내어줍니다.
6. 종려주일의 역설은 왕이지만 고난받는 자
종려주일은
승리의 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고난의 시작입니다.
예수는 왕으로 오셨지만
왕처럼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진정한 강함은 무엇인가요?
지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견디는 것일까요?
성서는 말합니다
“견디는 자가 참된 강자이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함께 행동하는 능력”으로 보았지만,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갑니다.
참된 권력은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나옵니다.
7. 오늘 우리에게 주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군중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종의 자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보호입니까?/ 문제 해결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묻고 있습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8. 고통의 삶의 길 위에서
고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에는 두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호산나”의 외침이었고
다른 하나는
침묵 속의 순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외침을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침묵을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은 왕을 환영했지만
그들은 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나귀 위에 앉아 있었지만
실은 진리 위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는 환호 속으로 들어가셨지만
고난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9. 마지막 초대입니다
오늘 종려주일,
주님은 우리를 두 길 앞에 세우십니다.
외치는 길과 듣는 길입니다
요구하는 길과 순종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님의 길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진리입니다.
주님의 길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사 50:7)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처절한 삶의 고통속에 있던 바벨론 포로의 종과
나귀 타시고 입성하시는 종의 모습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의 이민자의 삶 한 복판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가 모시는 주님으로 함께 삶을 나누고 생명을 나눌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고전15:12-20절; 요11:25-27)
[예배의 부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끝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관계의 끝, 희망의 끝,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마주할 삶의 끝.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한 음성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제, 끝이라고 말하는 세계를 지나
시작을 선포하는 그 음성 안으로 들어갑시다.
[설교의 부름]
이제, 끝을 말하는 세상 속에서
시작을 살아가십시오.
죽음이 중심이 된 삶을 내려놓고
생명이 중심이 된 삶으로 걸어가십시오.
부활은
기다리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는 현실입니다
1. 끝을 아는 존재, 인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인간은 끝을 아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묻습니다.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사랑은 사라지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차갑지만 정직합니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는
그 길 위에 서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 무너지는 세계 /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 전체를 흔드는 질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됩니까?
정의는 결국 패배합니다
사랑은 결국 사라집니다
기억은 결국 잊혀집니다
이것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허무의 세계입니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말하게 됩니다: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이 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합니다.
우리는 끝을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질 때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전부인가?”
부활이 없는 세계는
결국 힘이 지배하는 세계가 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도
마지막 회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왕이 된 세계입니다.
죽음의 정치
죽음으로 압박하고 억압하는 정치가
바로 작금에 벌어지는 전쟁들입니다
개인에서/ 교회에서/ 기업에서/ 국가에서
3. 전환의 순간 / “그러나 이제”
그때, 사도 바울은 한 문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
이 “그러나”는
우주를 가르는 한 줄기 빛과 같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으로 끝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끝에서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3-2. 존재의 재구성
부활이 일어나면 세계의 구조가 바뀝니다.
끝은 끝이 아니고,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며
절망은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죽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명으로 다시 정의됩니다
4. 눈물의 자리 — 베다니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으로 갑니다.
한 마을이 있습니다.
베다니. 그곳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입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이 말은 우리의 말입니다.
“하나님, 왜 늦으셨습니까?”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5. 예수의 선언 / 존재의 중심이 바뀝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선언은 짧지만 우주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인격 / “부활”은 미래 /
“생명” 은 현재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5-1. “나는”
인격은, 존재의 중심입니다
“나는”이라는 말은 단순한 주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현존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리는 체계도 아닙니다.
진리(예수)는 한 인격을 말합니다
이 선언은 출애굽기 3장에서 들려온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 역사 속으로 끌어옵니다.
즉,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관계 안에서 만나는 분이 됩니다.
5-2. “부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의 현재화입니다
“부활”은 원래 미래의 언어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미래를 끌어당깁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지금 여기로 당겨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 이동이 아닙니다. [遺體離脫]
이것은 종말이 현재로 침투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더 이상
“언젠가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서 시작된 현실입니다
5-3. “생명”
현재, 지금 여기의 숨결입니다
“생명”은 단지 생물학적 호흡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생명은
관계 속에서 흐르는 존재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말합니다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즉, 생명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말은 이렇게 들립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죽은 삶이 있고
지금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살아 있는 삶이 있다”
5-4. 세 가지의 신비한 통합
이제 이 세 가지를 함께 봅니다.
“나는”예수의 인격입니다 (존재의 중심)
“부활”예수의 미래입니다 (시간의 완성)
“생명”예수의 현재입니다 (존재의 흐름)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시간의 붕괴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나뉘지 않습니다.
미래(부활)가 현재(생명)가 되고
그 모든 것이 인격(나는) 안에 머뭅니다
즉, 시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구성됩니다.
둘째 존재의 재정의가 일어납니다
인간은 더 이상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 인간은
생명 안으로 초대된 존재
부활을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셋째 신학의 중심 이동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무엇을 믿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와 관계 맺는가”의 문제입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를 부르는 음성입니다.
생명은 언젠가 얻는 보상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숨 쉬기 시작한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한 인격의 부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는 마르다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 질문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존재의 방향입니다.
죽음을 중심으로 살 것인가
생명을 중심으로 살 것인가
이것이 믿음입니다.
6. 부활의 공동체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갑니다.
용서합니다
기다립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압니다.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개인적 위로가 아닙니다.
부활은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억압은 영원하지 않다
불의는마지막이 아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부활의 정치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고린도와 베다니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의심과 믿음 사이
눈물과 희망 사이
그때 그 음성이 다시 들립니다.
“나는그때 그 음성이 다시 들립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끝을 믿을 것인가
시작을 믿을 것인가
죽음을 붙들 것인가
생명을 붙들 것인가
죽음은 말합니다.
“여기가 끝이다.”
그러나 생명은 속삭입니다.
“여기가 시작이다.”
무덤은 닫혀 있지만
하늘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눈물은 흐르지만
존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두 복음을 하나의 복음으로 엮어보면
매우 중요한 복음의 진수를 엿 볼 수 있습니다
1 바울에게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고
2 요한에게 부활은 “인격적 사건”입니다
6-1. 바울에게 부활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부활은
무엇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 장사되었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셨다
사도바울의 역사적 부활복음입니다
6-1-1. 왜 “사건”인가요?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는가?’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믿음은 공허해지고 / 복음은 무너지며
구원은 허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증언 가능한 사건”으로 제시합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건이 있습니다
6.1-2. 사건으로서의 의미입니다
부활이 사건이라는 것은
단순한 과거 사실이 아니라
우주 질서가 뒤집힌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패배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선언한 순간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즉, 바울에게 부활은
객관적이고 공적인 역사적 돌파 사건입니다
바리새인 사도바울은
여기서 인생 전부를 걸 수 있었습니다
6-2.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인격”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6-2-1. 왜 “인격”인가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부활이 “언제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누구 안에 있는가”입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부활은 사건 이전에
이미 한 인격 안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즉,
부활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관계 속 현존”입니다
6-2-2. 인격으로서의 의미입니다
부활이 인격이라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부활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부활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는 것이다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 이렇게 정의됩니다
“예수를 믿는다” 는 것은
“부활 생명을 가진다”는 겁니다
영혼이 불멸하기 때문에 구원(부활)받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어거스틴/루터/칼벵/한국교회)
부활 생명으로 구원(부활)받는 것입니다
성서신학은 교리나 조직신학이 아닙니다
교리나 조직신학으로 성서를 해석하면 안됩니다
6-3. 바울과 요한의 부활 핵심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복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울은 사건이지만
요한은 인격입니다
바울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요한은 예수 안에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바울은 증언과 증거를 강조합니다
요한은 관계와 믿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요한은 실존적 만남입니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일어났다”
요한은 “삶의 한 복판에 지금 있다”
6-4. 그러나 바울과 요한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합니다.
6-4-1. 바울만 있으면
부활은 과거의 사건으로 남습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난 일”
나와는 거리가 있는 사실입니다
6-4-2. 요한만 있으면
부활은 주관적 경험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역사적 기반이 약해짐니다
6-4-3. 두 복음이 함께 연결 될 때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사건이기 때문에 실제이고
인격이기 때문에 현재적입니다
즉, 부활은?
바울은“정말 일어났다”
요한은“지금도 살아 있다”
6-5. 철학적 의미로
이 차이는 시간 이해와 연결됩니다.
바울은 선형적 시간입니다 (歷史)
(과거 사건이 미래 완성)
요한은 존재적 시간입니다 (神學)
(현재 안에 영원이 침투)
여기서 우리는
마르틴 하이데거를 넘어서는 통찰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단순히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 현재로 침투한 존재가 됩니다
부활은 두 가지입니다
사건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인격입니다 (그래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 공동체(종말론적인 상황)과
요한 공동체(고난받는 상황)의 복음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각자의 처절한 상황속에서
1차 독자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2차 독자인 우리들에게
이 두가지 부활 복음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여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살아 있으며
요한은“지금도 살아 있다”
7. 마지막 초대입니다
이 두가지 부활 복음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여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무덤에서 시작된 사건이
지금 이 순간
한 인격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은 있었는가?
요한은 부활은 만났는가?
그리고 이 두 질문이 만나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