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절규에서 생명으로 (로마서 8:1-11)
(로마서 7장의 절규에서 8장의 생명으로)
*예배의 부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탄식에서 자유로,
정죄에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처절하게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자리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모습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율법 앞에서 갈라진 마음,
선과 악 사이에서 흔들리던 존재의 진실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육신의 연약함 속에 머물러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영으로 일으키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예배로 초대하십니다.
육신을 따라 살던 길에서
영을 따라 걷는 길로,
죽음의 논리에서
생명의 숨결로
우리를 옮기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이제 마음을 여십시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정죄가 아닌 은혜로,
두려움이 아닌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이제, 생명의 영이 다스리는 예배로 나아갑시다.
설교의 부름 · 말씀 앞으로의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두 길이 만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한쪽은
“원함은 있으나 행함이 없던”탄식의 길이며,
다른 한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생명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분열을 숨기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 분열을 정죄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이 드러낸 연약함 위에
하나님은 성령의 생명을 놓으셨습니다.
이제 말씀은 우리에세 묻습니다.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따라
새 생명으로 걸어갈 것인가?.
오늘 선포될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부르심이며,
정죄가 아니라 해방이며,
죽음의 진단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생명의 영이 말씀하시는 자리로
함께 나아갑시다.
이제, 로마서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부르는 말씀 앞에 섭니다.
Ⅰ. 인간의 가장 정직한 고백에서 설교는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에서 로마 교회의 실제 구성은
유대기독교인과 이방기독교인 사이의
긴장과 오해를 배경으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쓰인 편지입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먼저 유대기독교인 중심이었습니다
바울이 세우지 않은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 이후,
로마 교회는 소주지만 이방기독교인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얼마후 유대기독교인들의 로마 귀환으로
기득권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바울은 신학을 통해
로마교회 공동체를 재구성합니다.
1-8장까지 유대기독교인(우익)들에게 이방기독교인(좌익)들을 변호합니다
9-11장까지 이방기독교인들에게 유대 기독교인들을 변호합니다
12-16장까지는 두 기독교 공통체에게 함께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성서는 종종 우리가 숨기고 싶은 말을 대신 말해 줍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서 7장은
성서 안에서 가장 정직하고, 가장 불편한 인간의 자기 고백입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9)
이 말은 신앙이 약한 사람의 탄식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신앙을 진지하게
살아보려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죄를 가볍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죄를 “실수”라 부르지 않고,
“습관”이나 “성격”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죄를 ‘나 안에 거하는 어떤 힘’,
곧 나를 나 자신에게서 분리시키는 권세로 말합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7)
이 말은 책임 회피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은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Ⅱ. 철학적 인간 이해 질문으로: 나는 왜 나를 배반하는가?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붙들어 왔습니다.
플라톤은 말했습니다.
“이성은 선을 알지만, 욕망은 우리를 끌고 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문제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자기 자신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절망”이라 불렀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분열을
자아와 무의식의 긴장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 급진적으로 말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8)
바울에게 인간은 선악의 선택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어떤 질서 안에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 질서가 바로 바울이 말하는‘육신(sarx)’입니다.
육신은 몸이 아닙니다.
육신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삶의 구조,
곧 자기 완결적 인간의 환상을 말합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I can do anything.”)
Ⅲ. 율법의 비극: 선한 것이 나를 살리지 못할 때가 문제다
로마서 7장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이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7:12)
문제는 율법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이 너무 선하다는 데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이렇게 살아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숨을 불어넣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거울이지, 심장이 아닙니다.
율법은 방향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선 인간은
점점 더 선명하게 자신의 실패를 보게 되고,
그 실패는 곧 자기 혐오와 수치로 바뀝니다.
“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타락한 영혼에서
이 세속적 세계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망의 몸”입니다
문제는 몸 그 자체가 아니라
정죄와 죄의 지배 아래 놓인 몸의 존건입니다.
이 절규는 개인의 회개 기도가 아니라
율법 체제 아래 놓인
인간 전체의 집단적 탄식을 대표합니다.
이 고백은 신학적 결론이 아니라
실존적 붕괴의 언어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절망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열려 있습니다.
Ⅳ. 그리고 마침내 터져 나오는 한 문장
로마서 7장은 질문으로 끝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
그리고 바울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로마서 8장에서 전혀 다른 음성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의
절망과 실패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합니다.
이 말은 율법으로
정죄를 작동시키던 질서의 종료를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울리던
비난의 목소리가 침묵하는 순간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충분히 회개한 자가 아닙니다”
“성화에 성공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이 문장은 설명이 아닙니다. 선언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판단이 중단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율법으로 인간을 정죄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는 바울신학의 핵심 키워드 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자격이나 계급이나 어떤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왜”가 아니라
“무엇이 이미 일어났는가”를 말합니다.
Ⅴ. 정죄 없음: 법정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판결
‘정죄 (katákrima)’는 로마 법정 언어입니다.
사형 선고, 최종 판결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 율법의 판결은 이미 무효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가 없는 무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른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8:3)
문제는 율법의 명령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살릴 능력이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을 강화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준을낮추지도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달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 사건 성탄입니다.
이것이 현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입니다.
Ⅵ.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육신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입니다
바울은 가장 위험한 표현을 씁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3절)…
여기서 육신은 몸이 아니라 자기 완결적 인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존재 방식을 말합니다.
율법은 이런 인간에게 이렇게 작동합니다.
더 노력하게 만들고
더 비교하게 만들고
더 가면 (페르소나)을 쓰게 만들고
결국 더 분열시킵니다 (프로이드).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7:24)
프로이드는 인간의 분열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에 가깝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동시에 여러 요구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① 늘 원하고 싶다 (욕망)
② 그래서는 안 된다 (규범)
③ 그렇게 보이고 싶다 (사회적 시선)
사실은 다르다 (내면의 감정)이런 것들이
서로 충돌하는 힘들이
하나의 자아 안에 공존할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분열됩니다.
문제는 분열 그 자체보다,
분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폭력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프로이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분열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고통을 “나쁜 선택”이나
“의지 부족”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내적 갈등에서 찾았습니다.
① 이드 (Id): 욕망의 자리
쾌락 원칙에 따라 작동
즉각적인 만족을 원함
비이성적, 비도덕적
② 초자아 (Superego): 금지와 이상
부모, 사회, 종교의 내면화
“그래서는 안 된다”
여기서 죄책감과 수치심이 발생합니다
③ 자아 (Ego): 중재자
현실 원칙에 따라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늘 과부하 상태입니다.
분열은 병이 아니라 정상 상태입니다.
병은 자아가 이 갈등을 더 이상 중재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은 원래 하나가 아니다.
분열은 실패가 아니라 조건이다.
성숙이란 통합이 아니라 갈등을 견디는 능력
치유는 욕망 제거가 아니라 의식화
그래서 프로이드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인간은 분열되어 있다.
문제는 그 분열을 숨기려 할 때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3절/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가장 취약한 조건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고통, 불안, 유한성, 죽음의 그림자.
하나님은 그것을 멀리서 고치지 않으셨고,
인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은 철학적 언어로 말하면 존재의 연대입니다,
신학적 언어로 말하면 성육신입니다,
심리적 언어로 말하면 깊은 공감과 동행입니다.
Ⅶ. 성령은 명령이 아니라 숨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8:9)
여기서 ‘거하다’는 말은
잠시 방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을 짓고, 머무르고,
함께 숨 쉰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외부에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부에서 “살아라”고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취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연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숨입니다.
숨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 있게 합니다.
Ⅷ. 수치 (7장)에서 평안 (8장)으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늘 말합니다.
“너는 충분하지 않다.”
“너는 아직 아니다.”
“더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정반대로 속삭입니다.
“너는 이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숨 쉬어도 된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6)
평안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안은 고통과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평안은 모든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율법같은 정죄의 목소리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Ⅸ.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부활은 지금 시작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죽을 몸 (네피쉬/프쉬케)도 살리시리라.” (8:11)
구원은 영혼의 탈출이 아닙니다.
부활은 몸의 폐기가 아닙니다.
설명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롬 11:25~36)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신앙을 위하여…)
예배의 부름 · 초대글
(로마서 11:33, 11:36 중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 없는 길 앞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주님의 길은 다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는
정답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신비 앞에 머무는 이들의 침묵입니다.
이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고백하며
말씀과 숨 사이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예배로 나아갑시다.
설교의 부름 · 초대글 (로마서 9:1–2, 11:32 중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으려는 말씀은
쉽게 정리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확신으로 말해지기 전에
먼저 탄식으로 태어났고,
교리로 정리되기 전에
먼저 눈물로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그러나 그 고통의 끝에서
주님은 사람을 나누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넓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판결하기 위해 가두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긍휼 안에 두기 위해
잠시 멈추게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 앞에 섭시다.
서둘러 이해하려 하지 말고,
빨리 결론내리지도 말고,
질문한 채로,
상처 입은 채로,
하나님 앞에 그대로 머물며
말씀을 듣겠습니다.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왜 그렇게 빨리 결정하고 설명하려 하는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안할 때 설명을 원합니다.
고통 앞에서 이유를 찾고,
상처 앞에서 의미를 붙이고,
이해할 수 없을 때 서둘러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믿는 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9–11장은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정면에서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1.로마서의 실제 상황:
“교리 논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로마서는 추상적인 신학 논문이 아닙니다.
유대기독교인과 이방기독교인이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차별로 배제하던
현실에 대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엄중한 분석입니다.
역사적 배경 핵심
1)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 (주후 AD 49년)
2) 로마 교회에서 유대기독교인들이 강제로 추방되어 사라짐
3) 이방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중심을 차지
4) 이후 유대기독교인들이 귀환 → 권력 (기득권), 구원에 대한 정체성 (유대인 / 이방인), 해석의 충돌
로마서는 이 갈등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였습니다.
2.유대기독교인의 주장과 문제입니다
1) 유대기독교인의 핵심 주장입니다
— 하나님의 선택은 율법과 언약을 통해 드러난다
— 할례, 토라, 선민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 이방인은 “뒤늦게 초대된 손님”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는 율법을 맡은 민족이다.”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으로 재 무장)
2) 유대기독교인의 문제입니다
— 선택을 특권으로 오해
— 언약을 배타적 정체성의 근거로 사용
— 은혜를 개인 소유물처럼 다룸 (은혜는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의 비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롬 2:23)
문제는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 타인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태도입니다.
3.이방기독교인의 주장과 문제입니다
1) 이방기독교인의 핵심 주장입니다
— 우리는 율법 없이도 성령을 받았다
—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 유대적 전통은 낡았다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백성을 만들고 계신다.”
2) 이방기독교인의 문제입니다
— 은혜를 우월감의 근거로 전환
— 유대인을 “과거의 종교”로 폄하
— 유대 기독교인들이 했던 것처럼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침묵시킴
바울의 경고:
(롬 11:18) 그러나 여러분은 잘려져 나간 가지(올리브나무) 대신에 접붙임을 받았다 해서 자만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귀중한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나무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지에 불과할 뿐 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뿌리를 자랑하지 말라.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 (롬 11:18)
이방기독교인은 차별받던 자에서
차별하는 자로 이동할 위험에 많았습니다.
4.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 누가 옳은가?”(의로운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차이가 나도 누구와 함께 서 있는가?”입니다
1) 바울의 근본적 선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하지만 이 말은
개인의 내면적 구원 공식이 아닙니다.
‘이신칭의’의 원래 의미는
·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 “누가 의롭다 인정받는 공동체 구성원인가?”
즉,
‘하나님은 율법도, 민족도, 문화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 질서를 만드신다.’
Ⅱ. 그래서 바울의 질문은 교리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고통에서 시작됩니다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주권은 위대하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증언하노니
내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롬 9:1–2)
여기에는 교리적 여유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적 안정감이 없습니다.
오직 찢어진 고통의 마음만 있습니다.
바울은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이 넘어졌는가?
왜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가?
하나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공정하신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탄식 없는 예정론은 바울의 것이 아닙니다.
눈물 없는 교리는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Ⅲ. 인간이 가장 쉽게 범하는 신앙의 유혹은 성서의 신비를 ‘설명’으로 바꾸는 순간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첫째 길
아 정말“모르겠다”라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 침묵하는 길
둘째 길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다”고 말하며
질문을 닫아버리는 길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너무 자주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신비는 유지되지 않았고,
설명은 교리가 되었고/ 권력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받아들여라”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믿음이 약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롬 11:34)
이 말씀은
질문을 금지하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자리에 앉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Ⅳ. 토기장이의 비유는 고정된 운명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 (롬 9:21)
이 말씀이 얼마나 자주 폭력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뿌리는
예레미야 18장입니다.
“그가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망하매
다시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더라” (렘 18:4)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다시’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빚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무너지면 다시 빚으시는 분입니다.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고정된 판결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Ⅴ. 바울은 끝내 설명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9–11장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이렇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다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이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찬양입니다.
바울은 설명하지 않고
무릎을 꿇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신학 (교리)은 여기서 멈춥니다.
그러나 새로운 신앙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Ⅵ. 하나님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한 가지 선을 넘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롬 8:32)
하나님은
설명 없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라,
설명 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는 순간,
신앙은 폭력이 됩니다.
Ⅶ. 한국교회를 향한 조용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 왔습니까?
–질문하면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아파하면 믿음 약한 사람입니다
–남으면 순종, 떠나면 배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 (고후 1:24)
교회는
정답을 관리하는 곳이 아닙니다,
삶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함께 견디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문제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Ⅷ. 맺는말: 설명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머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믿음이란?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얻는 확신이 아니라,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용기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롬 11:32)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결론은
율법으로 선택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율법으로 판결이 아니라 포옹입니다.
역지사지 (易地思之 / 맹자)
로마서는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로마서가 바울의 교리서라면,
왜 그렇게 중요한 부활론도, 성만찬도,
정식 교리 체계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까?”
로마서는
교리를 세우는 복음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정죄하지 못하게 막는 복음입니다.
— 그래서 로마서의 중심은 이것입니다
로마서의 핵심 질문은 이겁니다.
“무엇을 믿어야 구원받는가?”아니라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왜 여전히 서로를 정죄하는가?”
그래서 바울은
— 부활을 설명하지 않고
— 성만찬을 규정하지 않고
— 교리를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 14:19)
오늘 우리는
설명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서야합니다.
말을 멈추고 (주장을 멈추고),
정죄를 내려놓고 (판결을 내려놓고),
서로를 붙드는 믿음으로.
서로를 세우는 믿음으로
서로를 지키는 믿음으로
“그에게서 (주님에게서) 나오고 그로 (주님으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주님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6)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