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말구유로 향하는 길
(설교의 부름 · 초대시)
오늘,
세상은 여전히 제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게 속도를 요구합니다.
숫자로 세고,
성과로 묻고,
강함으로 증명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 너머에서
다른 시간이 시작됩니다.
로마황제의 연대기 한 줄 사이에
한 아기가 태어났고,
역사는 그 순간
조용히 방향을 틀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위로 오르라는 부름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라는 초대를 듣습니다.
왕좌가 아니라 말구유로,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미완의 삶 한가운데로.
밤은 깊고 들판은 고요하며
양들은 숨을 고르고
목자들은 별 아래 서 있습니다.
그곳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자리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빛으로 압도하지 않으시고
연약한 숨결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말하지 못하는 입술로,
의존하는 몸으로,
타인의 품에 맡겨진 존재로.
존재는 그날 밤 다시 정의되었습니다.
존재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용기였습니다,
존재란
혼자 서는 완성형이 아니라
서로 기대는 미완성이었습니다
.
혹시
우리의 삶에도
방이 없다고 느껴지는 자리가 있습니까?
정리되지 않은 마음,
말 못 한 두려움,
부끄러워 숨겨 둔 연약함.
그러나 바로 그곳,
사람의 계산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하나님은 눕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하늘은 소리 높여 명령하지 않고
노래로 속삭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를 위하여 구원이 태어났다.”
이제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잠시 멈추어
이 풍경 안으로 들어갑니다.
말구유를 향해 한 걸음,
존재의 중심을 향해 한 걸음.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다시
우리 가운데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이 신비 속으로 다 함께 참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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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구유에 누우신 하나님 (누가복음 2:1–14)
I. 우리는 너무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낯설게 읽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너무 자주 보았고, 너무 익숙하게 장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익숙해지는 순간, 우리를 다시 흔들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2장은 한 아이의 탄생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울음보다 먼저 들리는 것은 황제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이미 중요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누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 아기는 개인의 신앙 이야기 이전에 세계 질서에 대한 질문이다.”이라는 겁니다
II. 로마 제국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왜 누가는 예수의 탄생을 이렇게 시작했을까요?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신을 구원자(soter)라 불리게 한 황제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Pax Romana, 로마의 평화로 선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세금과 군사력, 그리고 침묵 위에 세워진 거짓 평화였습니다.
호적(ἀπογραφή)은 중립적인 행정 절차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제국의 통제정치였습니다.
줄세워 갈라치기하는 정치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제국의 시간표 속에 한 아기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바깥에서 번개처럼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억압의 구조 한가운데로 조용히 들어오십니다.
성탄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도 결코 부재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신국론]에서 말합니다.
“역사는 두 사랑에 의해 형성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식으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호적은 어느 사랑에서 나왔는가?”
로마 제국 황제의 질서는 자기 보존과 자기 영광을 위한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말구유의 아기예수의 질서는 자기 비움에서 시작된 질서입니다.
성탄은 두 국가가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하나는 명령으로 유지되는 국가냐
다른 하나는 선물로 시작되는 국가냐
III. 오늘 본문 구조를 살펴보면
두 왕, 두 복음, 두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2장은 두 개의 서사가 병치된 구조를 가집니다.
한쪽에는 황제, 명령,이동,통제,
다른 한쪽에는 아기,탄생,포대기,선물
이 대비는 우연이 아닙니다.
누가는 1차 독자에게 묻습니다.
“어느 이야기가 진짜 현실을 설명하는가?”
로마 황제는 말합니다. “내가 세계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하늘의 황제는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이 평화는 권력과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입니다.
IV. 하나님은 왜 말구유인가?, 왜 목자인가?
아기 예수는 왕궁도, 성전도 아닌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말구유는 집이 아니라 임시 공간이며,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위한 자리입니다.
사회학적으로 말구유는 주변화된 공간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첫 증인은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은 1세기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부정하고
사회적으로 신뢰받지 못하며
도시 질서 밖에 내 몰린 천민들입니다.
이것은 목가적이며 서정적인 한 폭의 수채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동정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방식에 대한 거룩한 선언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종교를 비판합니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탄식이다.”
그렇다면 칼 마르크스 식으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말구유는 가난을 미화하는 장치 아닌가?”
그러나 누가는 가난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디에 서셨는지를 말할 뿐입니다.
말구유는 가난을 정당화하지 않고, 가난의 한가운데로 하나님은 직접 동참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약점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이 아기는 현실을 유지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V. “크게 무서워하니”
천사가 나타나자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한 놀람이 아닙니다.
익숙한 세계가 무너질 때 느끼는 공포
삶의 질서가 흔들릴 때의 불안
설명되지 않는 현실 앞의 인간 조건
그래서 천사의 첫 말은 정보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복음은 인간의 불안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안 속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아기의 탄생은 인간의 불안을 제거하지 않지만, 그 불안을 혼자가 아니게 만듭니다.
VI. 왜 하나님은 아기로 오셨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 전능자는 가장 무력한 형태로 오셨는가?”
아기는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스스로 이동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합니다.
하나님은 존재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존재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방식이다.
성탄은 존재의 본질을 다시 씁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불안은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열리는 순간이다.”
목자들의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게 되는 순간입니다.
하이데거는 묻습니다.
“이 불안은 인간을 고립시키는가, 아니면 열어 놓는가?”
천사는 대답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복음은 불안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불안 속에 함께 머뭅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존재란, 홀로 던져진 상태가 아니라 함께 놓여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오신 명백한 이유입니다.
VII. 말구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말구유에 누우신 하나님은 윤리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우리는 어떤 힘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중심에 두는가?
우리는 약함을 어떻게 대하는가?
성탄은 성공을 미화하지 않고,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말구유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이기에 더 이상 버려진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정체성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기둥입니다
우리는 이 기둥 위에 사랑공체를 세워야 합니다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국가를 세워야 합니다.
VIII. 그 밤, 존재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 밤 로마황제는 여전히 명령했고 제국은 여전히 작동했으며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말구유에서 존재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지배가 아니라 동행이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IX. 결론
– 오늘, 말구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은 과거의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삶의 말구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외면하고 싶은 자리
정리되지 않은 마음
드러내기 부끄러운 연약한 그 자리가 하나님이 누우시기 가장 거룩한 자리입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아멘.
해가 기울 때, 마음의 성벽 앞에서
(설교의 부름에 대한 초대시)
해가 기울고
달력이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우리는 묻습니다
무엇을 남겼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무너졌는지를…
말로는 견고했으나
마음은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던 자리
기도는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떨림은
어느새 사라진 자리…
주여
우리를 평가하지 마옵소서
오늘은
우리를 다시 부르시옵소서
부서진 마음이
당신 앞에 놓일 수 있도록
숨기던 이름들이
빛 아래 드러날 수 있도록
이 해의 끝에서
우리를 고치지 마시고
다시 빚어 주옵소서
송년 감사예배는
지나간 시간을 봉인하는 예배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여는 예배로 나아갑시다
251228 교회력 5 번째 주일
匍越의 송년 감사주일 설교 제목과 본문
구원의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서(시편 51:1–12)
기쁨의 벽 앞에 서서
(송년주일 설교의 부름을 위한 초대시)
오십시오, 흙으로 지음 받은 자여, 숨이 떠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여.
오십시오, 계명을 기억하지만 기쁨을 잃어버린 마음으로 오늘을 건너온 자여.
하나님은 오늘 행위를 묻지 않으십니다.
숫자를 세지 않으시며 이름표를 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창조의 첫 질문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알지요. 죄는 사건이 아니라 위치의 상실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서 있지 못하게 된 상태, 그것이 죄의 시작임을…
우리는 선을 알았으나 선 안에서 기뻐하지 못했고,
진리를 들었으나 진리 안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다른 기쁨을 찾아 방황했고, 영혼은 대체된 빛에 눈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은 떠난 자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에덴에서 아담을 부르시던 음성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찾으시던 숨결로, 다윗의 무너진 심장에서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
오늘의 부르심은 정결을 증명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관계로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씻김보다 먼저, 회복보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소서.”
이 기도는 두려움의 말이 아니라 언약을 기억하는 언어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을 자가 아니라 다시 불림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이 완성된 자로가 아니라, 기쁨이 메말라버린 자로.
설명할 말이 준비된 자가 아니라, 부서진 침묵을 안고 선 자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새 계명을 주시기보다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 새 법을 새기기보다 새 영을 숨 불어 넣으십니다.
“정결한 마음을 내 안에 창조하소서.”
이것이 회개의 깊이이며,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제 말씀 앞에 서십시오.
심판 앞이 아니라 창조 앞에.
과거의 죄가 아니라 회복될 기쁨 앞에.
기쁨이 사라진 그곳에서, 주님은 다시 말씀하시고 다시 숨 쉬게 하시며 다시 당신을 부르십니다.
오십시오. 지금, 영원한 기쁨이 전해지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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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편 51편 1–12절)
(송년 감사주일 설교)
Ⅰ. 들어가는 말: 죄의 목록이 사라진 시편 51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송년감사 주일예배로 드려집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려온
여러분 정말로 수고 많았습니다
송년이라는 마지막 주일예배를 통해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시편51편 앞에 모였습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간음, 살인, 은폐, 거짓, 권력 남용.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어두운 왕의 범죄 연쇄는 드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편 51편에는 그 어떤 범죄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간음이라는 단어도, 살인이라는 단어도, 거짓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이 침묵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침묵은 신앙의 결단이며, 영혼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침묵한 것이 아니라, 죄의 표면을 넘어서기 위해 침묵했습니다.
Ⅱ. 이 시는 왕의 참회록이 아니라 인간의 기도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시편 51편은 사무엘하 11–12장의 사건, 곧 밧세바 사건 이후에 쓰인 참회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지 한 왕의 사적 고백이 아닙니다.
히브리 전승 속에서 이 시는 성전 예배에서
공동체가 반복해서 암송하던 시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의 죄는 개인적이었지만, 그의 기도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시편을 부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죄는 다윗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다.”
이 시편은 권력자의 범죄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 내면 붕괴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권력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증폭기입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다윗은 권력을 가졌기에 범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그를 타락시킨 원인은 아닙니다.
권력은 단지 이미 무너진 내면을
확대경처럼 드러냈을 뿐입니다.
시편 51편은
사회 구조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핑계 삼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3)
다윗은 책임을 전적으로 자기 내면으로 돌립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이 음란을 만들었을까요?
인터넷이 욕망을 창조했을까요?
시대가 타락을 부추겼을까요?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미 비어 있는 마음을 채워준
도구였을 뿐입니다.
Ⅳ. 시편 51편은
‘요청의 시’가 아니라 ‘관계의 시’다
시편 51편 1–12절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주의”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
“주의 성령”
“주의 구원의 기쁨”
이 시편은 죄에 대한 분석보다
하나님에 대한 호명이 더 많습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이 시의 구조는 이렇게 흐릅니다.
자비를 구함 (1–2절)
내면의 붕괴를 인식 (3–6절)
정결과 새 창조 요청 (7–10절)
관계 회복의 절정 (11–12절)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절정은 윤리적 결심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기쁨의 회복입니다.
Ⅴ. 인간은 기쁨 없이 선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인간은 구원의 기쁨 없이 도덕적일 수 있는가?”
플라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파스칼도 모두 한 가지에 동의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선하다고 믿는 기쁨’을 향해 움직인다.
다윗의 문제는 선악의 기준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쁨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Ⅵ. 죄는 욕망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의 표현이다
현대 심리학은 말합니다.
중독은 쾌락의 문제라기보다 애착의 붕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애착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다른 대상을 통해 안정과 만족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은 “욕망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창조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bara는. 창세기 1장에서만 사용되던, 하나님만의 동사입니다.
다윗은 말하지 않습니다.
“한 해 동안 잘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
“고쳐 달라.” “수정해 달라.” “개선해 달라.”
다윗은 단 한 가지만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시 창조해 주십시오.”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
송년주일의 선포되는 복음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 해를
고쳐서 이어 붙이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본회퍼의 말처럼 은혜는 “과거를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부르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고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재창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회개는 윤리 훈련이 결코 아닙니다.
Ⅶ. 본문의 중심–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옵소서”(12절)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설교의 중심은 이 한 구절입니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옵소서” (51:12)
이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죄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유혹을 제거해 주십시오”
“내 환경을 바꿔주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다윗은 죄의 시작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Ⅷ. 왜 우리는 클릭하는 인생인가?
오늘 현대인의 죄는 대개 화면 앞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면 우리는 무언가를 클릭합니다.
의미를 찾기 위해
위로를 얻기 위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문제는 행위가 아닙니다. 문제는 구원에 대한 기쁨의 공백입니다.
우리는 죄를 끊으려고 몸부림치며 애쓰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Ⅸ. 수채화적 묵상: 사라진 기쁨의 색깔
시편 51편은 마치 빛이 바랜 수채화 같습니다.
한때 선명했던 색이 조용히 번져 사라진 캔버스.
다윗의 영혼은 색을 잃은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합니다.
“주여, 다시 색을 입혀 주십시오. 다시 숨 쉬게 해주십시오.”
회개는 검은색을 칠하는 일이 아니라 빛을 다시 들이는 일입니다.
Ⅹ. 맺는말: 죄와 싸우는 가장 깊은 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싸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더 거룩해지고, 엄격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하나님에 대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다시 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12절)
오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보다 우리의 구원의 기쁨을 먼저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끊고 사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입니다
주님은 2026년 앞으로
교우 여러분들을 조용히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다시 살아나라.”(12절)
아멘.
말씀 안에 거하라는 새해의 부르심
(설교의 부름 초대글)
사랑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새해의 첫 문턱에서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하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걸어가라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지나왔고,
많은 것을 잃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서 다시 살아남았습니다.
요한이 말하듯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 앞에서,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사랑으로 걷는 길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현현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음을 기억하며,
이 새해의 첫 감사의 제단 위에
우리의 삶과 시간과 걸음을 올려드립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차가운 교리가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진리와 사랑이 하나로 만날 때,
삶은 예배가 되고
시간은 은총이 됩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말씀 안에 거하며,
새해를 믿음으로 걸어갈 것을 다짐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진리 안에서 사랑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감사함으로, 경외함으로,
이 예배에 참여합시다.
==============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이유
– 진리 안에 거하는 한 해를 위하여 –
(요한이서 1:1–7, 현현주일 신년 감사예배 설교)
1.2026년, 신년의 문턱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새해를 시작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지만,
신년이라는 자리는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어 서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또 한 해를 건너왔고,
이제 새로운 해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신년 감사예배는
단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년 감사예배는 묻는 자리입니다.
“너는 무엇을 붙들고 이 새해를 살아갈 것인가?”
세상은 새해를 맞이할 때
계획을 세우라 말하고,
목표를 정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어디에 거할 것인가?”
“무엇 안에 머물며 살아갈 것인가?”
오늘 본문, 요한이서 1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신앙의 본질적인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2.역사적 배경: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쓰인 편지입니다
요한이서는 1세기 말,
초기 교회가 심각한
내적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회당모임도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원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가
교회를 위협하던 시대였습니다 (가현설)
교회는 겉으로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진리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난무했고
“사랑”을 말하지만, 삶은 무너뜨리는 사상
진리를 삶과 분리시키는 왜곡된 영성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오늘 우리의 시대와 억수로 닮아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진리는 상대적이라 말하는 시대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라 말하는 문화속에 살아갑니다,
말씀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 한가운데서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우리 안에 거하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2절)
신년의 출발선상에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방향 선언입니다.
3.진리, 사랑, 행함의 삼중주입니다
요한이서의 문학적 특징은 매우 분명합니다.
요한은 반복합니다.
진리
사랑
행함(걷다)
이 셋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차가운 관념이 되고,
사랑은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감정의 방종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행함’,
곧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복음이 됩니다.
요한이 말하는 “행하다”는 말은
단순한 행동 하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삶의 방향, 인생의 궤도를 뜻합니다.
2026년 새해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2026년도 나는 무엇을 더 할 것인가?”가 아니라
“2026년도 나는 무엇을 따라 걸을 것인가?”
4.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는 말씀
요한이서는 개인에게만 주어진 편지가 아닙니다.
이 편지는 요한 공동체 전체를 향한 목회적 호소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 자녀 중에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다.”(4절)
여기서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가 온전하다는 표지입니다.
초기 교회는 작은 가정 교회였습니다.
한 사람의 왜곡된 가르침은
한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분별을 말합니다.
“모든 영을 다 받아들이지 말라.”(7절)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공동체를 살리는 책임입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사고를 내려놓고
“우리가 함께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5.더 깊은 사유,
眞理란 무엇인가요?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논리적 정합성이나 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세 전통의 비교 표
항목 / 영지주의 / 플라톤 / 기독교
진리의본질 / 비밀 지식 / 불변 이데아 / 인격적 사건
진리의 성격 / 은폐됨 / 초월적 / 계시됨
진리의 접근 / 각성 / 인식 상승 / 관계적 신뢰
진리의 장소 / 세계 밖 / 이데아 세계 / 역사 안
몸의 역할 / 감옥 / 장애물 / 매개
시간 / 무의미 / 열등 / 결정적
도표를 종합하면
플라톤과 영지주의는 이원론이지만
기독교는 실존적 관계론입니다
기독교는 두 전통 모두를 한 문장으로 전복합니다.
“진리는 말씀이 되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
그 육신이 십자가에 달렸다.”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 진리는 비밀이 아니다
플라톤에 대한 반박: 진리는 역사 속에서 고난당한다
영지주의와·플라톤는 진리를 소유하려는 인간이라면
기독교는 진리에게 붙들리는 인간입니다
하이데거의 ἀλήθεια(드러남)조차도
기독교 앞에서는 이렇게 질문받습니다.
“드러남이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진리는 설명할 대상이 아니라, 동행할 인격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요한의 진리는 존재론적/ 관계론적 진리입니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 안에 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6.심리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말씀 따르기가 어려운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자주 흔들릴까요?
심리학은 말합니다.
인간은 즉각적인 만족과 안정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정신은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즉각적으로 추구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금, 당장, 덜 불안하고, 더 편안해지려는 존재라는 겁니다
프로이트에게 안정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신경계의 요구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조차도 인정합니다.
인간은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의미나 초월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말씀은 기다리라 말하지만
우리는 서둘러 결과를 원합니다.
말씀은 용서하라 말하지만
우리는 상처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씀을 따를수록 인간의 내면은 안정됩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줄어들고
삶의 기준이 분명해지며
관계 속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를 제한하는 규칙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7.신년의 핵심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까요?
1) 말씀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방향을 줍니다
새해도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예측이 아니라 방향을 줍니다.
“내 말 안에 거하라.”
2) 말씀은 감사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이 잘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버텨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줍니다
신년은 완벽한 사람이 시작하는 날이 아닙니다.
신년은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는 날입니다.
8.더 깊은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밝은 길만 걷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종종
우리를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었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
9.워밍 업 (Warming up)과 쿨링 다운 (Cooling down)
운동보다도
운동 전의 워밍업과
운동 후의 쿨링다운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1) 워밍업은 새해를 맞이하는 ‘존재의 준비’입니다
워밍업은 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몸은 이미 여기에 있지만,
마음·호흡·근육은
아직 과거의 리듬에 머물러 있습니다.
새해의 워밍업이란 무엇일까요?
지난 해의 속도와 상처를 그대로 안고 출발하지 않기입니다
“더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
“어디까지 왔는가”를 조용히 돌아보기입니다
목표 설정 이전에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의 인간인가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시간입니다.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리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둠을 통과한 뒤 일을 시작하십니다.
워밍업 없는 새해는
은혜 없는 열심, 성찰 없는 결단이 되기 쉽습니다.
2) 쿨링다운은 끝맺음의 영성입니다
많은 사람은 시작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끝내는 법은 배우지 않습니다.
쿨링다운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멈춰도 된다.
이 수고는 여기까지로 충분하다.”
새해의 쿨링다운이란 무엇일까요?
하루를 끝내며
“오늘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용기입니다
성취가 아니라
소진되지 않도록 자신을 돌보는 태도입니다
일을 내려놓고
자기 존재를 성과로부터 분리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시편의 언어로 말하면,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평안히 눕고 자게 하소서.”(시 4:8)
바울의 고백으로 말하면,
“내가 달려갈 길을 마쳤다.”( 디모데후서 4:7)
(완벽해서가 아니라, 맡겨진 만큼 걸었기 때문입니다)
쿨링다운이 없는 삶은
자기를 소모시키는 신앙,
번아웃으로 끝나는 사명이 됩니다.
3) 새해의 삶은
워밍업과 쿨링다운 사이의 ‘리듬’입니다
새해를 산다는 것은
더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리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0.새해,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해의 첫 예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성취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 말 안에 거하겠느냐?”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방향을 돌리는 삶입니다.
2026년 새해에는,
말씀을 장식으로 두지 말고
기초로 삼읍시다.
말씀을 소유하지 말고
말씀 안에 거합시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