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봉건사회의 해체 원인 : 중세 경제와 사회의 변화를 중심으로 _ 문성준
Ⅰ. 서론
중세유럽의 특징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뽑으라고 한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봉건제를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서구사회에 있어서 봉건제는 역사 큰 획을 그었다. 8~9세기경 중세유럽사회에서 성립된 봉건제는 11세기 전환점을 맞아 13세기 까지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절정을 향했던 봉건제는 몰락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도시의 성장과 농촌 사회의 변화로 자급자족적 장원제가 붕괴되었고, 흑사병의 발생과 전쟁으로 인한 민중봉기를 통하여 농민의 의식과 지위가 이전보다 크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국 종합적으로 합해져 중세시대 봉건제를 흔들었다.
이에 본 발제에서는 중세시대의 봉건사회가 어떻게 붕괴되는지 경제적·사회적 변화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 봉건사회 해체의 원인
1) 중세 농촌사회의 변화
중세 초기에 농노는 영주 지영지의 경작을 포함하여 성채와 장원의 건설 등 부역 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11세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영주 직영지가 축소되거나 소멸되고 이에 따라 농민 보유지 보유자들의 부역이 경감되거나 면제되어 노동지대가 생산물지대 또는 화폐지대로 바뀌는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가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영주의 직영지가 남아있지 않고 지대로 생산물이나 화폐를 영주에게 바치는 순수 장원 또는 지대 장원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가 유행했다. 영주 직영지의 축소는 영지 상속인들 사이의 분할이나 봉신에 대한 봉토의 수여 또는 교회에의 기증 등등 축소되었다.
영주 직영지가 대폭적으로 축소되자, 기존에 영주에게 부역을 제공하던 농민 보유지들도 영주에게 노동지대를 제공할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지대를 생산물이나 화폐 형태로 납부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폐지대는 일정한 액수로 고정이 되면서 농민에게는 더욱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으며, 영주와 농민사이의 봉건적 관계를 해소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영주와 농노라는 인신적 지배-예속의 관계로부터 단순한 토지 소유관계에 기초한 화폐 관계로 변질되었고, 이것으로 농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커졌고 법적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토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농민은 화폐경제의 발달과 사치 생활로 화폐부족난을 겪고 있던 영주에게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대가로 인두세·결혼세·상속세에 대한 해방금을 주어 자유로워지던가, 영주에 대해 무력 투쟁을 감행하여 해방특허장을 수여받아 해방하는 등 농민의 지위는 크게 신장하게 되었다.
2) 도시의 발달로 흔들린 봉건제
중세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이탈한 농민이 집단화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도시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1~13세기의 상업의 부활이 이루어지면서 이다. 11세기 이후 생산력의 향상으로 인해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정치적 안정으로 인구가 증가하자 교역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교역이 일어나는 자리에 시장이 생기고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 이후 동방 무역과 원격지 무역이 확대되어 각지에 상업이 활발하게 되어 도시가 발달하게 된다.
도시의 성장은 도시주민, 즉 시민의 지위 향상을 이끌었다. 봉건제 하에서 중세의 도시는 영주와 주교의 지배를 받았으나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에게 대항하면서 특허장을 얻어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 결과 도시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자치구가 되어 농촌에서 도시로 도주한 노예라 할지라도 ‘1년과 하루’를 도시에 거주하면 자유인으로 인정되는 관습도 생겼다. 이러한 신분의 자유는 도시가 갖는 지역적 특권으로서, 장원제로 지배ㆍ예속관계로 묶인 농노들을 도시로 유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도시민들이 자치권 획득에 있어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시민이 화폐를 가진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급자족의 장원경제에 기초를 둔 봉건제는 붕괴되어 갔다. 또한 르네상스처럼 근대 유럽의 새로운 운동은 바로 이 같은 새로운 힘의 성장과 더불어 자라났다.
3) 흑사병이후 농업구조의 변화와 농민의 신분상승
13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럽은 위기에 봉착했다. 늘어나는 인구를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농민들은 땅이란 땅은 모조리 개간했으나 농촌인구의 절반 정도가 생계를 유지할 만한 정도의 토지를 보유하지 못했다. 또한 자연재해까지 겹쳐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출생률 감소로 이어졌다. 이러한 극심한 기아로 봉건적 생산양식이 구조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시작되었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1/3을 격감시켰고,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어 인구 감소가 만성적인 현상이 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영주와 농민과의 계급대립을 야기했다. 인구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농민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이에 지배계층은 농민들의 요구에 위협을 느껴 이를 막고자 여러 법률을 추가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지대의 감면과 부역의 폐지를 주장하며 영주에 대립하였고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더 좋은 보유 조건을 찾아 도주하거나 이주했다. 이에 영주들은 장원인구 감소를 막고자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지대를 낮추고 부역을 경감하거나 폐지했다.
이제 여기저기 유리한 조건을 찾아 이동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이 여러 공한지를 경작하거나 영주의 직영지를 임대하여 부농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이제 요먼 (yeoman)으로 불리는 부농과 농업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빈농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여 그들 사이에 경제적인 차이가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 동시에 촌락 사회의 의사 결정이 부농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농민들 사이에 사회적인 위계질서가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이후 인구감소와 농민들의 지리적 이동, 더불어 사회적 이동의 변화는 기존에 붕괴되어가던 봉건체제를 급속히 붕괴시켰다.
4) 농촌과 도시의 민중봉기
백년전쟁과 질병, 그리고 수탈과 약탈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14세기 내내 봉기와 반란이 계속되었다.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노동력 부족으로 사회·경제적인 지위 개선을 기대하였지만, 그 같은 기대는 곧 무너졌다. 영주 계급이 흑사병 이전 수준의 임금을 받도록 농민들을 압박하는 법률을 추구하고, 또 농민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에게 전쟁비용 마련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358년 프랑스 파리 북부의 보베지역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주민들과 수비대 기사들이 충돌하면서 일어난 자크리의 봉기와 1381년 영국 남동부의 여러 주에서 무거운 세금 납세 회피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봉기가 있다.
민중봉기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고 또 궁극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럽의 풍토 속에서 간헐적인 것이기는 하나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봉기는 계급간의 대립을 촉진시켰고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Ⅲ. 결론
유럽의 중세사회의 봉건제는 사회적으로 봉건영주와 농노의 계약으로 이루어졌으며 토지 보유 농민의 부역을 사용한 자급자족적 장원경제 체제였다. 그러나 생산력의 향상, 인구의 증가,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동방무역의 발달로 인한 도시의 성장, 그리고 사회 체제의 변화로 인해 전통적인 봉건제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특히 14세기에는 흑사병의 만연과 경제적인 변화로 장원제가 붕괴되었으며, 농민 봉기로 인하여 결국 영주와 기사계급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이후 유럽사회는 중앙집권화, 즉 절대왕정시대로 넘어가게 되며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식민지 정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도시의 발달과 상업자본의 배경으로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시작되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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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