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실크로드 문명의 교차로, 팔미라 제국 (Palmyrene Empire)
팔미라 제국은 로마의 식민 도시 팔미라에서 일어나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 상황에서 제노비아 여왕에 의해서 세워진 제국이다. 한때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속주와 소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었다. 팔미라 제국의 공식적인 왕은 어린 와발라트였으나, 그의 어머니인 제노비아가 후견인으로 섭정을 하였다. 실질적으로 왕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여왕이라고 부른다.

– 팔미라 제국 (Palmyrene Empire)
.수도: 팔미라
.언어: 라틴어[공식], 그리스어
.정부: 군주제
.왕: 오데나투스(260년 ~ 267년), 와빌라트(바빌라투스, 267 – 273)
.여왕(섭정): 제노비아(264 – 273)
.역사: 설립(고대 후기), 멸망(260년, 273년)
.현대 국가 : 시리아 (Syrian Arab Republic), 유네스코 등재 : 1980년
팔미라(Palmyra)는 다마스쿠스(Damascus) 북동쪽의 시리아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고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로, 대도시의 기념비적인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세기부터 2세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교차로에 있었으며, 이러한 팔미라의 예술과 건축은 전통 기술에 그리스 로마 기술이 가미되고 페르시아의 영향이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 제국의 건설
로마 제국은 3세기에 이민족의 침입과 내란의 이중고를 겪는다. 이러한 위기는 황제인 발레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힘으로서 최고조에 이른다. 이어서 황제에 오른 갈리에누스는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제국의 동방이었던 소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는 사막 유목민족인 베두인족의 침입이 이어진다. 팔미라의 귀족으로 태어난 오데나투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이러한 오데나투스를 정규 사령관에 임명한다. 황제가 납치된 이후에도 오데나투스는 페르시아군을 수차례 침착하게 물리쳤으며, 갈리에누스 황제는 이러한 그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의 방위를 책임지는 동방 사령관에 임명한다. 260년부터 267년까지 동방을 훌륭하게 방위해 낸 오데나투스는 고트족에게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 석상에서 조카의 칼에 찔려 맏아들과 함께 죽는다. 오데나투스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제노비아는 그 자리에서 살인자를 살해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인 와발라트를 남편의 후계자로 앉힌다. 그리고 스스로 후견인이 되어 실권을 장악한다. 오데나투스와 달리, 제노비아는 소아시아 동부의 카파도키아와 이집트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 황제와 여왕
– 루키우스 셉티무스 오데나투스(260 – 267)
– 와빌라트(바빌라투스)(267 – 273)
.사실상 제노비아 여왕이 섭정(264 – 273)
○ 수도 ‘팔미라’
팔미라(Palmyra)는 기원후 1~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고대 도시이다. 현재의 시리아 타드무르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역사
팔미라는 고대 그리스군의 전초 기지로서 중요한 장소였다가 217년 로마에 합병되면서 막강한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267년부터 팔미라를 지배한 제노비아 여왕은 암살당한 남편을 대신해 팔미라의 새로운 주군으로서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군대에 맞서 싸웠다. 여왕은 271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를 정복했을 때 감옥에 갇혔고, 2년 후 팔미라는 로마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 후 1089년의 지진으로 남은 석주들마저 쓰러져 폐허가 되었다. 그 가운데 셈족이 모신 태양신의 신전 벨(Bel)만이 화를 면하였다. 그 이후로도 이곳은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는데, 2011년에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시리아 최고의 관광지가 되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 벨 신전
팔미라의 정문 길 건너편에는 버팀목을 세워둔, 무너져 가는 벽이 안타까운 벨의 신전이 있다. 현재 팔미라 유적지 중 기원후 32년에 셈족의 신전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사원은 사각의 성벽과 내부 성소로 구분되는데 200m 길이의 성벽이 사면으로 매우 높게 둘러싸여 있는 요새화 되어 있는 곳이다. 넓은 마당 안쪽에 가장 신성한 장소인 신전이 있는데 이곳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전 앞쪽에 거대한 문이 있고 주위로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현재 건물의 뒤쪽에만 남아 있다.신전 내부에는 양쪽으로 움푹 들어간 예배당이 있다. 천장에는 별자리가 묘사되어 있고 오른편엔 팔미라의 세 신이 묘사되어 있다. 전형적인 아랍, 시리아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건물 앞에는 제사를 위한 재단과 식을 진행하던 성직자가 몸을 깨끗이 하도록 물을 받아둔 웅덩이가 남아 있다. 팔미라의 왼쪽으로는 원형 극장, 오른쪽으로는 계속해서 폐허가 나타난다. 길이 끝나는 곳은 일종의 공동 묘지로 동굴속으로 들어가면 석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정면으로는 17세기 아랍 제국의 성(城)인 Qala’at ibn Maan이 높은 언덕의 꼭대기에 우뚝 서 있다.
– 시리아 내전
2011년 이후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유적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또한 2015년 5월 이슬람 국가(IS)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IS에 의한 유적 파괴가 우려되었고 이들은 실제로 8월에 벨 신전 등을 파괴하였으나, 2016년 3월 시리아군이 탈환하였다. 다행히 몇몇 신전이 파괴된 것을 제외하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

제노비아(라: Zenobia, 240년경 ~ 274년경)는 팔미라 제국의 황후(재위: 260년 ~ 267년)이자 여왕(재위: 267년 ~ 272년)이다. 시리아 팔미라를 거점으로 삼았던 로마 제국의 반독립 국가인 팔미라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 아나톨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로 확장해 나가는 한편 팔미라 제국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 생애
.생애 초반
제노비아는 240년경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리아의 고대 도시인 팔미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제노비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전한다. 그 중에서도 제노비아의 아버지가 율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제노비우스(Julius Aurelius Zenobius)였다는 가설이 전한다. 제노비아의 조상은 2세기 후반에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황후로 알려진 율리아 돔나와 가까운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제노비아는 어린 시절부터 이집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시리아어를 구사했고 승마, 사냥을 취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팔미라 제국의 황후
제노비아는 14세 시절이던 255년경에 팔미라의 영주였던 오데나투스의 2번째 아내가 되었으며 슬하에 3명의 아들(바발라투스, 하이란 2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을 두었다. 오데나투스는 팔미라를 침공하던 사산 제국 군대를 연달아 격파하면서 로마 제국 군대의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60년에는 로마 제국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제국과의 에데사 전투 도중에 샤푸르 1세 황제가 이끌던 페르시아 군대의 포로로 잡혀나가면서 갈리에누스가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오데나투스가 갈리에누스 황제의 승인을 통해 팔미라를 거점으로 삼았던 반독립 국가인 팔미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노비아는 팔미라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267년에는 팔미라 제국의 오데나투스 황제가 자신의 조카였던 메오니우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과정에서 오데나투스의 아들인 하이란 1세도 메오니우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제노비아는 자신의 아들인 바발라투스를 오데나투스의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팔미라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팔미라 제국의 발전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이탈리아, 발칸반도에서 게르만족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고 트라키아에서 고트인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서 270년에 팔미라 제국이 독립 국가임을 선언했고 사산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팔미라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자신을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여왕에 버금가는 “이집트의 여왕”, “전사 여왕”임을 자처했다. 자브다스 장군이 이끄는 팔미라 제국 군대는 270년에 이집트(아이깁투스), 시리아(시리아 속주)를 정복했으며 270년 10월에는 이집트 총독을 살해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271년 중반에는 아나톨리아(아시아 속주), 팔레스타인(아라비아 페트라에아)을 정복하면서 팔미라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의 여제(Augusta, 아우구스타)임을 자처했는데 팔미라 제국에서는 제노비아의 초상화가 그려진 주화가 주조되었다. 제노비아는 자신의 궁정을 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연구 공간으로 개방했을 정도로 교양 있는 군주이자 지적인 군주로 여겨졌다. 또한 기독교 신자, 유대인에 대한 관용 정책을 시행하여 팔미라 제국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최후
270년에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가 이끌던 팔미라 제국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272년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한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 군대는 안티오케이아(현재의 터키 안타키아), 에메사(현재의 시리아 홈스)에서 팔미라 제국 군대를 연달아 격파했고 팔미라 제국의 수도인 팔미라를 포위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바발라투스를 비롯한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팔미라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로마 제국은 273년에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274년에 로마에서 열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개선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혀 행진했지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을 역임했던 귀족과 결혼한 다음에 티부르(현재의 이탈리아 티볼리)에 위치한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자녀들과 함께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 평가

고대 로마의 역사서에서는 제노비아가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 평범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검은 눈, 거룩한 정신,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 하얀 치아를 가진 여자”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제노비아가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여왕에 버금가는 여걸”이라고 평가했다.
제노비아는 중동, 서양의 학자들,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영감을 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 부디카에 버금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영웅적인 여왕으로 여겨졌다. 제노비아와 관련된 전설은 제노비아를 여러 작가들과 역사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재해석할 수 있는 우상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노비아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영웅, 자유의 투사, 여성의 롤 모델을 갖춘 여왕으로도 여겨졌다. 러시아의 역사가인 미하일 로스톱체프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황제가 제노비아를 “군사력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여자”로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이집트의 여성주의 언론사가 제노비아를 높이 평가하면서 제노비아는 아랍 세계에서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강력한 여성 지도자로 여겨졌다.
오늘날 시리아에서는 제노비아를 시리아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시리아 국민들이 갖고 있는 애국심의 상징, 폭정에 맞서 싸운 지배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특히 19세기에는 서양에서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지식인들이 제노비아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시리아의 관점에서 제노비아는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 유네스코의 팔미라 소개

– 현대 국가 : 시리아 (Syrian Arab Republic)
– 유네스코 등재 : 1980년
– 영문명 : Site of Palmyra
– 유네스토 등재기준
.기준 (ⅰ) : 다마스쿠스 북동쪽 시리아 사막 위에 솟아 있는 팔미라 유적은 3세기까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상인들이 오가는 비옥한 오아시스 지역에 독특한 미적 가치를 담아 낸 곳이다. 웅장한 콜로네이드는 예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건축물의 예이다.
.기준 (ⅱ) : 17세기, 18세기 여행자들이 팔미라 유적의 아름다움을 찾아냄에 따라 서양의 고전주의 건축 양식과 도시 설계가 크게 부흥하였다.
.기준 (ⅳ) : 양쪽은 감싸여 있고 중앙은 뚫린 웅장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도로, 주요 공공건물들과 비슷하게 설계된 작은 교차로들은 로마가 확장하면서 동양과 관계를 맺었던 전성기의 건축과 도시 배치를 보여 주는 실례이다. 1세기에 세워진 독특한 디자인의 바알 신전은 가장 중요한 종교 건물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 대신전에서 도시로 들어갈 때 볼 수 있는 아치형 입구의 조각 장식은 훌륭한 팔미라 예술을 보여 준다. 또한 묘지 계곡이라고 알려진 도시 성벽 밖의 큰 묘지 유적에서는 특징적인 장식과 건축 방식을 볼 수 있다.
– 탁월한 보편적 가치 : 다마스쿠스 북동쪽의 시리아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는 고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로, 대도시의 기념비적인 유적이 남아 있다. 1세기부터 2세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교차로에 있었던 팔미라의 예술과 건축은 전통 기술에 그리스-로마의 기술이 가미되고 페르시아의 영향이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마리(Mari)의 고문서에서 처음 언급된 기원전 제2천년기(2nd millennium BC, 기원전 2000~기원전 1001)의 팔미라는 상인들의 오아시스였으며, 서기 1세기 중반에는 로마의 속주(屬州)인 시리아의 일부가 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도·중국을 로마 제국과 연결하는 무역로에 있는 도시로서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고대의 여러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
길 양쪽으로 웅장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1,100m 길이의 주도로는 도시의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보조기둥들이 서있는 교차도로와 함께 바알(Ba’al) 신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주둔지, 아고라(Agora), 극장, 기타 신전들과 도시 구역 등의 주요 공공 건축물들이 연결되어 건축되어 있다. 묘지의 조각을 포함하여 건축물의 장식은 그리스 로마의 예술 형식과 전통 형식, 페르시아의 영향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도시 성벽 밖에는 로마의 수로와 광활한 공동묘지 유적이 있다. 17, 18세기에 여행자들이 폐허가 된 도시를 발견함으로써 건축양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완전성 :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 주요 공공건물, 장례 유적을 비롯한 주요 유산들은 도시 경계선 안에 있다. 탑으로 된 묘와 요새는 작은 지진에도 매우 취약하며 허술하게 보존되어 있다. 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인접 도시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고고학적 유적지를 잠식하고 있다. 통행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유적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는 이곳을 우회하고 있다.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유산 지역 내의 시설을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주요 유산들은 그 모습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인접 도시로 인해 이 지역이 잠식됨에 따라 나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생겨났다. 유적은 오아시스에 있으며 주변 사막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 진정성 : 주요 유산들은 그 모습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인접 도시로 인해 이 지역이 잠식됨에 따라 나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생겨났다. 유적은 오아시스에 있으며 주변 사막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 보존 및 관리체계 : 유적은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1999년에 개정된 국가 유물관리법 222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2007년에 완충 지역이 설정되었으나, 세계유산위원회에 아직 제출되지 않은 상태이다.이 지역에서는 현재 고고학적 유적과 오아시스 및 도시 주변의 점이 지대에 관한 유적을 문화 경관으로 확장하고, 재정의할 지침을 제공할 전략적 사업 계획을 준비 중이다. 현재는 유적과 관련하여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보존 및 복원 계획이 필요하며, 계획이 마련된다면 통합 관리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항, 문화 관광 전략을 세울 수 있고 인근 도시의 확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산면적 : 0.36㏊
– 본문 : 팔미라는 고전주의 건축 양식과 현대 도시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도시는 아고라, 극장, 신전과 같은 큰 공공건물이 있는 고대 도시의 복합 단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와 함께 거주민이 살고 있는 구역도 보존되어 있으며, 요새 밖에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현재 세계 박물관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 팔미라의 예술은 그리스 로마 예술 형식과 전통 형식, 페르시아의 영향을 독창적인 양식으로 결합한 것이다. 이 도시는 몇몇 문명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특히 묘지 조각에 독특한 예술이 가미되어 있다.
시리아 사막 중심 산악 통행 지역 근처의 비옥한 오아시스 지역에 있는 팔미라에는 선사 시대 이후,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까지 사람이 거주하였다.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알샴(Al-Shaam)과 이라크, 아라비아 만과 페르시아, 그리고 지중해 사이의 기착지로 발달할 수 있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무역로를 잘 활용하여 번창했다. 팔미라는 페트라(Petra)가 담당했던 중간 경유지 역할을 이어받아 동양의 물건들을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에 내다파는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서기 105년~106년,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가 이 도시를 아라비아의 새로운 주로 통합하고, 나바테아(Nabatea)를 병합하면서 동양과의 무역을 관장하는 속주가 되었다. 3세기에는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Parthians)의 왕위에 즉위하고 로마를 적대시함에 따라 팔미라도 전략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셉티미우스 아데나투스(Septimius Odaenathus)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로마에 협력함으로써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가 파르티아의 왕에게 패한 후 포로로 잡혔을 때, 아데나투스는 제국과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를 보호하겠다는 태도를 보였으며 연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그는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어린 아들 와발라트(Wahballath)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어머니인 제노비아(Zenobia)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들의 지도 교사로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를 궁정에 초대하였다. 제노비아는 시리아를 모두 정복하고 이집트와 아나톨리아(Anatolia)까지 세력을 뻗쳤다.
팔미라는 처음에 정복을 면할 수 있었지만, 반란을 꾀함에 따라 곧 함락되고 약탈당하여 도시의 성벽까지 파괴되었다. 이때 도시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지만, 팔미라의 여왕인 제노비아의 신화 같은 이야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녀는 훌륭한 남녀가 갖추어야 할 덕의 화신으로 고대 세계가 붕괴된 이후까지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팔미라는 기원전 44년부터 기원후 272년까지 부유한 상인들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고 독립국이기도 하였으며 2세기와 3세기에는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길 양쪽으로 웅장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1,100m 길이의 도로는 도시의 축을 형성하고 있고, 두 번째 기둥들이 서 있는 교차로는 바알 신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주둔지, 아고라, 극장, 기타 신전과 도시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기둥이 받치고 있는 포르티코(portico)는 기둥들이 서 있는 주도로와 수직으로 이어지는 작은 도로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2세기의 것이다. 콜로네이드(colonnade)는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두 부분이 서로 일렬로 정렬된 것도 아니며, 세베루스 시대의 것인 3개의 아치 개선문에서 직선으로 뻗기 전에 급회전하는 곳도 있다. 또한 테트라필론(Tetrapylon)이라고 하는 웅장한 기단 위에 세워진 두 쌍의 기둥과 열을 맞추고 있다. 32년에 세워진 신전은 성역의 중간에 서 있었으며 나중에 포르티코를 댄 벽으로 둘러쌌는데, 내벽은 기둥들이 이중으로 열을 지어 있었고 외벽은 우아한 코린트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주 지역 밖의 도시로 이어지는 4개의 주도로를 따라가면 세 가지 양식으로 된 묘지가 4개 있다. 가장 오래된 탑 모양의 무덤은 부유한 가문의 것이며 사암으로 높이 쌓은 형태이다. 맨 앞에 있는 ‘엘라벨의 탑(Tower of Elahbel)’ 중간에는 석관을 넣은 아치가 있으며, 고대에는 비스듬히 누운 조각상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통로와 내실은 주검을 세로로 안치하도록 칸이 구분되어 있으며 고인의 모습이 새겨져 색이 칠해진 석판으로 덮여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