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무 목사의 주일묵상
바벨탑 (성전)에 갇힌 믿음에서 탈출하라!
하늘 대신 탑을 올려다보는 신앙이 있다. 인류의 거대한 신전 종교 건축물은 바벨탑이었다. 그 탑은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야심이 돌과 진흙으로 쌓아 올린 신앙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탑을 흩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신앙’(창 11:4) 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자기들 탑을 쌓고 있다.‘큰 교회’‘아름다운 예배당’‘성공하는 목회’라는 이름으로 돌을 나르고 벽돌을 굳힌다. 그러나 그 탑의 꼭대기에 서면, 정작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높이 올라갈수록 주님은 작아지고, 인간의 이름만 커진다.
그것이 바벨탑 신앙이다.
바벨탑의 유혹은 신앙을 성취로 착각하게 한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자, 성읍과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자” 그들의 언어는 하나였고, 그들의 협력은 완벽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오늘날도 우리는 신앙을 쌓아 올리는 것으로 오해한다. 교회 건물을 세우고, 사역을 확장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얻는 것이 믿음의 결과라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로 향한 탑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성전일 뿐이다.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행사가 되고, 기도가 하늘을 향한 간구가 아니라 세속적 성공의 주문이 되면, 그 신앙은 이미 바벨탑 안에 갇힌 것이다.
갇힌 믿음은 하나님을 감금시키려는 인간의 신앙으로 변질된다. 바벨탑의 후예들은 돌로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모시려 했다. 성전을 높이고, 제사를 화려하게 하고, 제도를 완벽하게 세우면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전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을 때(요 2:13–16), 그분은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그들은 성전을 사랑했지만, 성전의 주인을 미워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감금하고 있었다.
바벨탑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을 가두고 인간이 그 위에 서려는 욕망이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신앙이 오늘날 그와 같지 않은가? 기도는 늘 “내 뜻이 이루어지이다”이고, 헌신은 “내 이름이 알려지이다”로 변질된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자기 숭배이요 우상 숭배의 제단이다.
그래서 주님은 헐라 그리고 다시 세우라고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바벨탑 성전에서의 탈출을 명하신다. “이 성전을 헐라.” 헐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허상의 성전주의 자기중심의 믿음이다. 내 이름을 높이려는 탑을 헐라. 교회라는 조직 안에 주님을 가두는 성전을 헐라. 외형의 영광 뒤에 숨어 있는 위선의 벽을 헐라.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헐어내고 보이지 않는 십자가 복음의 성전을 짓고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십자가는 무너짐의 자리였고, 부활은 새 성전이 세워진 자리였다. 참된 교회는 돌이 아니라 십자가의 헐림 위에 세워진 부활의 생명이다. 탈출은 언제나 무너짐에서 시작된다. 바벨탑에서 탈출하려면 높아지려는 이기적 욕망을 내려놓고, 성전의 벽 안에 가둔 하나님을 내 마음의 빈 들판으로 다시 초대해야 한다.
흩어진 곳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은 새 성전에 임하신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사람들을 흩으셨다. 그 흩어짐은 저주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나님은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각자의 언어 속에서 새로운 구원의 언어를 준비하셨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각 나라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하신 것(행 2:4–11)은 바벨의 저주가 복음의 은혜로 전환된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하나로 모여 높은 탑을 세우는 데 있지 않다. 흩어진 곳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 그것이 진짜 믿음이다.
작은 가정과 직장에서의 예배, 조용한 기도 모임, 이름 없는 봉사 헌신 속에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그분은 성전 탑의 꼭대기가 아니라, 낮은 들판의 가난한 심령 속에 임하신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 없고 예수 없는 교회를 과감히 떠나라는 말이다. 말이 아니라 행위가 없는 집단에서 머물러선 안 된다. 이는 진리 안에서 내 영혼이 귀하기 때문이다.
바벨탑 성전에서 탈출하라는 말은, 나 자신부터 당당한 주님 모신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는 부르심이다. 교회가 건물, 제도, 형식, 관행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위한 신앙인이 아니고, 교회에 의한 신앙을 하는 게 아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삶으로 돌아와 맡은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높이 쌓는 대신 깊이 내려가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 새 일을 시작하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인생을 보시니, 그들이 자기 이름을 내려 하도다.” (창 11:5)
이제 우리는 하늘을 향해 탑을 쌓던 손을 멈추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곳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 탑을 헐라. 내가 네 안에 새 성전을 세우리라.”
바벨탑 신앙은 결국 자기 확신의 감옥이다. 그러나 그 감옥의 벽이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 자유는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만 높이는 믿음으로 완성된다.
“바벨탑 성전에서 탈출하라”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귀환이다. 돌로 쌓은 탑에서 벗어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주님께로 돌아가는 귀향. 그곳이 진짜 교회요, 살아 있는 성전이다.
사악한 정치권력을 보며
정치권력은 인간이 만든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장치다. 권력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통제되지 않은 권력은 반복해서 사악함으로 기울어져 왔다. 역사는 이를 예외 없이 증명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 네로는 권력을 사유화하며 공포 정치로 제국을 잠식했다. 20세기에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국가 권력을 통해 대량 학살과 체계적 폭력을 합리화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인의 악의보다도 제도화된 권력이 도덕을 압도했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정치권력이 얼마나 쉽게 일상의 폭력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치권력이 사악해지는 순간은 대개 3가지 조건이 겹칠 때이다. 첫째, 권력이 집중될 때. 둘째, 비판과 견제가 제거될 때. 셋째, 국가나 안보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될 때이다. 이때 권력은 스스로를 절대 선으로 규정하고 반대자를 적으로 만든다. 역사는 이 구조가 반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국민의 투쟁 방법은 무엇인가. 폭력은 가장 직관적인 대응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를 외쳤지만 곧 공포 정치로 전락했고 무장 혁명은 새로운 억압 체제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효과적이었던 투쟁은 대부분 권력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시민 불복종, 동유럽의 평화적 민주화는 권력이 유지되는 핵심과 복종 그리고 침묵을 흔들었다. 권력은 총보다도 시민의 동의에 더 의존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정확히 꿰뚫었다.
투쟁은 단번에 승리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루하고 느리며 때로는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 사법의 독립, 시민사회의 연대, 기억의 기록은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요소이다. 잔악하고 타락한 권력은 빛보다 어둠에서 강해지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의 사악함은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인간이다. 질문하고, 기록하고, 연대하는 일. 그것이 거창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역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바꿔왔다. 투쟁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각성과 참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안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 중 한 명으로, 정치권력, 전체주의, 자유와 인간 책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긴 학자>

한상무 목사
시드니생명나눔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