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무 목사의 주일묵상

침묵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 목사의 시 “나는 침묵했다”를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처음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묄러 목사의 이 말은 “부당한 억압과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강력한 교훈을 전하며, 인권과 정의를 위한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명언으로 전 세계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는 독일 루터교 목사로서 제1차 세계대전의 잠수함 지휘관이었고, 전쟁 후에는 국가주의적 열정 속에 나치 정권의 부상을 처음에는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히틀러의 독재와 인권 유린의 실체를 목격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나치가 교회를 통제하려 하자 그는 목회자로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결국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그가 남긴 유명한 시구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한 문장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던진 통렬한 자기 고백이었다.
“처음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첫 구절은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자기 보호 본능과 무관심의 심리를 드러낸다. 불의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불의와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잡혀가도, 사회주의자들이 억압받아도, 노동조합원들이 투옥되어도, 그때마다 그는 침묵했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압은 결코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느 한 부류의 사람이 억압당할 때, 침묵은 곧 폭력에 동조하는 행위가 된다. 결국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고백은 인간의 이기적 침묵이 낳는 파국을 가장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어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울림을 준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 체제는 아닐지라도, 다른 형태의 독재, 억압과 불공정 그리고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 특정 사람이나 계층, 집단, 혹은 사회적 약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우리는 종종 “그건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침묵하는 동안,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다. 당신의 침묵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고 있는가?”
성경에서도 정의와 공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잠언 31장 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맡기신 사명 중 하나는 억울한 자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 소외된 자, 죄인들과 함께하셨다. 그분은 불의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다. 니묄러 목사가 경험한 ‘침묵의 죄’는 결국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우리는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때로는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이 모여 세상은 더 어두워진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침묵은 투표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또한 국가의 불공정하고 불의한 법이나 제도, 정책이 시행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직장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질 때 모른 척하는 것,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있을 때 눈을 돌리는 것, 이런 모든 순간들이 니묄러의 “침묵”과 다르지 않다. 정의를 위한 목소리는 거창한 정치적 투쟁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작은 연대와 따뜻한 한마디가 억눌리고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니묄러 목사의 이 어록은 단순히 과거 나치의 잔혹함을 기억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을 묻는다. “너는 불의 앞에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목소리를 낼 것인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나치’가 될 수도 있고, ‘작은 니묄러’가 될 수도 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서는 행위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침묵은 바로 ‘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는 죄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수많은 갈등과 차별, 혐오의 언어로 상처받고 있다. 미디어와 정치가 갈라놓는 이념의 벽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기 쉽다. 하지만 니묄러 목사의 고백은 이렇게 요구한다. “그들이 누구든, 침묵하지 말라. 그들이 나와 다르다 해서 외면하지 말라. 정의는 너의 안락함보다 더 소중하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누군가의 권리가 억압당할 때,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침묵하고 있는가, 아니면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정의는 거대한 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말, 한 사람의 작은 연대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침묵하지 말라. 누군가를 위해 목소리를 내라. 그것이 곧 너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니묄러 목사의 고백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복음
제국의 군마가 흙먼지를 일으킬 때
새로운 문화의 바람이 도시를 덮어
철학은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예술은 눈부신 신들을 그렸다
많은 도서관의 두꺼운 책들조차
영혼의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숱한 신전을 만들고 이끌었지만
돌벽 속엔 갈급한 침묵만이 자랐다
때가 차매, 역사의 시계를 돌릴
베들레헴 말구유에서의 아기 소리
하늘의 말씀 권능의 로고스 되신
그 이름 예수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
그는, 어둠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이론이 아닌 삶의 현장 속으로
무너질 성전이 아닌 심령 속으로
권력이 아닌 사랑으로 다가왔기에
십자가 형틀은 약함의 대명사였으나
그 안에서 의심과 질문이 풀리고
역사적 로고스, 빛 되신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진리와 생명 길이 열려
헬라의 언어는 그의 메시지가 되고
로마를 향한 넓은 길은
소식을 전하는 네트워크가 되니
아테네의 한 광장에서도
알지 못하는 신은 이름을 바꾸었다
지혜만으로는 닫히는 길이지만
사랑으로는 열릴 길을 활짝 여셨다!

한상무 목사
시드니생명나눔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