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브루노 뒤몽 감독의 작품 시리즈 ‘예수의 삶’ (The Life Of Jesus; La vie de Jésus) / ‘휴머니티’ (Humanity: L’humanité)

예수의 삶 (The Life Of Jesus; La vie de Jésus)
감독_브루노 뒤몽 / 출연_데이빗 도체 외 / 제작년도_1997년
프레디는 북부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엄마와 산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지나가거나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다. 20살이 되도록 취직도 않고 말도 거의 하지 않으며 할 일도 없다. 그들의 무료함은 아랍계 소년이 프레디의 여자 친구에게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비극으로 돌변한다.
프랑스 시골의 비전 없는 10대들을 다룬 브루노 뒤몽 감독의 초기 작품이다.
○ 출연 / 스탭

– 감독, 각본
브루노 뒤몽 (Bruno Dumont)
– 출연
데이빗 도체 (David Douche)
마조리 코트릴 (Marjorie Cottreel)
카델 채토프 (Kader Chaatouf)
세바스티앙 델바에레 (Sébastien Delbaere)
사무엘 보이딘 (Samuel Boidin)
세바스티앙 바일레울 (Sébastien Bailleul)
○ 수상
1997년 칸느영화제 칸느 황금카메라 특별상
유럽 영화상 올해의 영화발견상
Sutherland Trophy
수상 후보 : 세자르상 신인감독상
○ 줄거리
현재, 프랑스 북부의 한 마을. 프레디와 그의 친구들은 모두 실업수당을 받는 신세.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죽을만큼 달릴 뿐이다. 프레디는 수퍼마켓 계산원 마리와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중동 청년 캐더의 청혼을 받던 날, 프레디와 그의 친구들은 캐더를 골탕먹일 계획을 짜내려고 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예수의 삶”은 예수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성스러운 인류의 보편적 구원이 아니라, 한 세대 다음 세대에 들려주는 희생과 관용, 즉 대속을 의미하는 듯 하다.
차별, 질투, 약자에 대한 폭력 등이 아무런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일상에서 생겨난 의미 없는 것임을 주인공이 각성하는 순간 그는 세속 안에 있는 초월자가 되는 것이다.
○ 메마름과 떨림, 두 명의 예수를 변두리에 버리다

영화는 온통 떨림으로 가득하다.
본편 전체의 시간 기제이자 리듬간의 부여물인 오토바이 자체가 하나의 떨림 전도체이기도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공간에서든 항상 떨린다.
떨림은 일종의 불안함, 벗어날 수 없음으로부터 오는 경고음이다.
주인공 남성은 간질 발작을 언제든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안하게 오토바이를 운전한다.
그와 그의 친구들 동네 악대에서 허리춤에 찬 북을 두드리는데, 영화는 그들 중 1인의 북 두들김을 손과 허리를 보여주지 않는 상반신에만 제한해서 신체의 떨림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신체와 영혼의 연계를 명백하게 거론하며 불안을 쉽게 명명한다.
떨림의 영화 속 인물들 중 남성 주인공 5명의 영적 속성이라면 감독의 전작에서 배경으로 제시되는 공간들이 늘 그러하듯이 프랑스 북부 바이얼의 전경은 “트웬티나인 팜스”의 연인들이 여행하는 미국의 사막만큼이나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신체의 떨림과 땅의 메마름은 영화를 구성하는 두 개의 축으로 즉시 불임과 죄악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할리우드 청춘물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온다.
아무 것도 할 일 없는 남성청춘들(두 명의 중요한 여성은 종업원이나 술집을 운영한다.)의 무료한 나날들 무엇도 할 일이 없는, 하고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일을 하려면 떠나야하는 십대 남성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들이 오토바이라는 불안전한 성인 기구와 떼지어놀기라는 불안 제거의 또래문화, 윤리의 각성에 이르지 못한 무분별한 행위의 연쇄, 무책임하고 무계획적인 치기 어린 반항으로 뒤덮이는 것은 어쩌면 모든 청춘물의 상업적 코드였기에 다수 관객에게는 그리 신선하게 다가오지 못한다.
할리우드의 청춘물이 대개의 경우 성인 시장으로의 진입이라는 항복 선언식 봉합이라는 속성을 지니거나 여전히 어른-아이의 철학을 간직한 채 현실 외부에서의 외톨이라는 존재론을 유지했다면 브루노 뒤몽의 본편 속 청춘물은 단순히 나이에 따른 설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사회 진입 이전의 시간들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존재들로 설정된다.
즉, 그들은 십대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인간 존재 전반 중 하나의 추출된 효과적인 표본인 것이다.
브루노 뒤몽에게 가해지는 일단의 평가들, 현실의 추악한 사회적 병리를 형이상학으로 둥둥 뛰어버린다는 지적을 따르면 영화 속 인물들이 직업이라는 자본주의 내 노동 시장의 제 몫을 찾기조차 거부하는 사유를 감독은 정확히 짚지 않는다.
마치 그것은 영화 속 그들에게 아버지가 부재하여 그것으로 가부장제 자본주의 자체가 희석되는 것과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그가 너무 쉽게 아버지를 제외시키고 주인공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가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가족은 자본주의 내 안정과 욕망의 유혹 단위인데, 그것을 사회학적인 근거 내에서 삭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창조주의 추방 아래 카인의 후예들로 지목되어 비속한 삶의 전경화에 동원된 군상만을 제시하는 데 있다.
즉, 자본주의내적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아버지를 잃은 존재들로 인물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초반부 병실에서 죽어가는 남자의 면면은 벽면의 예수 부활의 그림을 들지 않더라도 명백히 예수의 초상이다.
그를 방문하는 주인공 및 4인의 남성에게서 할리우드 70년대 버디 장르물의 동성애적 오독 현상이 일어난다.
여기서 AIDS가 실제하는 질병인가 아닌가 하는 의학적 음모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지만, 80년대 AIDS가 동성애에 대한 천벌이라는 이성애 가부장제들의 무지한 명명은 기억될 필요가 있는데, 영화의 다른 시퀀스에서 중년의 남성은 AIDS를 즉각적으로 게이와 연관시켜 발언한다.
영화 내에서 5명의 남성 중 누구도 의심을 살만한 시선을 주고 받지 않지만, 그들 중 남자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가족도 여자친구도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자동차를 타고 바다로 갔을 때 그들은 거의 유사한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뛰어든다.
유일하게 여성 애인을 가진 남자 주인공은 몇 번의 성관계 장면(포르노 배우가 대역한)을 보여주고 키스씬을 비롯한 따뜻한 말의 애정 관계를 확인하는 시퀀스들의 조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 1인을 제시함으로서 이들이 결코 동성애 남성 집단이 아님을 부인하는 기표로 이탈된다.
“트웬티나인 팜스”의 종결부에서 강간당하는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점도 추가해서 기억해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남녀 주인공의 과도한 실제 정사 장면이 얼마나 필요한 숏이었는가에 대한 역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은 오히려 남성 동성애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패막이로 사용되면서 그리스도교 내 동성애 혐오를 또하나의 내재된 지옥으로 보는 감독의 은폐된 관점의 기능물이다.
주목할 것은 시퀀스 안에서 아랍인에 대한 인종적 발언을 한 것은 주인공들이지만. 그들이 나갈 때 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려는 동참을 한 것은 단역 배우인 다른 악단원이었다는 점이다.
기꺼이 감독은 프랑스의 인종주의까지 삽입시키면서 이를 파시즘적 살인을 연상시키는 길을 선택하는데, 전형적인 내부의 공허가 허약한 외부에 대한 공격형태로서 이들이 구조될 수 없는 존재임을 재반복한다.
문제는 전술했다시피 이것이 다만 주인공 5명만 일으킨 희롱과 비아냥이 아니라 그 마을의 말없는 프랑스 백인 다수가 동참하고 지지한 행태라는 점에서 하나의 공간적 함의를 지닌다는 데 있다.
즉, 주인공 청춘들은 다만 이 마을의 무너진 윤리와 욕망의 허기를 대표하는 인자일 뿐인 것이다.
전술한 주인공의 간질 발작이 굳이 치료로 과학적인 치료 장면으로 이어져야하는 이유가 발견되는 시퀀스는 그의 외에 장착된 뇌파 검사 기구와 MRI 자기 공명 장치 촬영 장면의 관습적인 활용보다는 주인공이 정기적으로 찾아올 때 그에게 말하는 간호사의 성의 없고 기계적인 말투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주인공이 기계와 관성의 불친절 어느 쪽에 민감했을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감독이 의도적으로 단역 간호사의 단독 출연 숏을 폐쇄적으로 배치할 때 이들 사이에 소통은 부재하다.
즉, 고통이 소통되지 않으므로 인해서 다시 재발견되는 것이 고통이 되는 희안한 순환 논리와 말장난이 프랑스 변두리 마을 자체의 추락을 인물로서 대변하는 주인공의 간질은 떨림으로서 주의를 주지만, 구제되지 않는다.
지저귀지 않는 새에게 지저귐 소리를 녹음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일종의 인공적인 몸부림이다.
계절의 의미를 상실한 새의 자리에 울음으로서 존재를 부여하려는 주인공 남자의 시도는 성공적일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새의 지저귐의 횟수를 기록하는 시합 시퀀스는 역으로 이 마을에 아무도 말하고 존재하지 않음을 제시하는 음향 효과가 된다.
영화 전체에 하나의 리듬감이자 거의 전부를 아우르는 오토바이 5대의 질주는 70년대 미국 버디 무비들의 환영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을 뿐이다.
브루노 뒤몽의 작품 내 모든 컷들이 주는 일련의 데자뷰처럼 그는 선배 작가들의 조각들을 빌려와 자신만의 목소리를 더하지 못하고 선배들이 그들의 당대에 대해 표했던 절망 선언에 대해 그저 불변의 동의만 첨가시킨다.
가령 위 시퀀스에서 아랍 청년의 오토바이를 추격하다가 멈춘 곳은 공동 묘지 앞에서이다.
그들은 여기서 자신들의 미래이자 현재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흩어지고 아랍 청년은 예상대로 공동 묘지에서 숨어있다가 빠져나오지만, 이후 첨가되는 운명의 세례로 희생을 암시한다.
영화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공을 들인 장면이라할 이 시퀀스는 이후 감독이 작품마다 찍는 인장과도 같다.
우선 짚어야할 것은 브루노 뒤몽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시작이자 종편일 것인데. 영화에는 두 명의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좋겠다. (성희롱당하는 여성을 일단 제외시킨다.)
주인공 남성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은 남성에게 사랑을 확인받기를 원하는 평범함을 보이면서도 남성 집단에게 위협당하는 아랍인 청년을 끌어안고 “미안하다”라는 말을 마을을 대표해서 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 한 명의 여성, 그녀 역시 영화 속에서 나신을 보여준다는 점은 특히 강조될 필요가 있겠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사회 안에 정착하고 살 길을 찾으라는 참견과 조언을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경찰에게 잡혀갈 때 극악하게 나서서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젊은 여주인공이 일종의 대속 이미지라면, 어머니는 사회 유지라는 미래에 대한 독촉제로 기능한다.
그 외에 영화 속 어떤 이도(아버지는 없다) 두 여인이 맡은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투사받은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브루노 뒤몽은 여성에게 거대한 책무를 넘기고 남성 동성(애)집단에게서 허약함과 부정성만을 부여한다.
근작 “하데비치”의 여성 주인공의 재림은 결코 우연이 아닌 데뷔작에서 이어지는 역할론이 된다.
여기에 어떤 예외로서 아랍 청년의 존재가 부각되는데, 그는 마을 내부자이지만 동시에 외부자로 선태된 존재다.
위 시퀀스에서 여성 주인공의 말을 들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때 그는 “미안해”라는 말에서 자신의 죽음이라는 미래 암시를 읽는 것과 더불어 지금 이 마을에서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종교적으로 질문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던 영화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하늘=아버지의 자리가 끼어드는 것이다.
살인이 일어나고 주인공 남성이 체포되는 시간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순순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주인공의 경찰서 탈출 시퀀스로서의 영화의 엔딩이 환타지이거나 무책임하다는 지적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을 경작지 한 곳에 누워서 아랍 청년처럼 하늘이 아닌 마을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의 흐름 상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만큼 반복해서 제시된 마을 이미지의 재생이라는 의미에서 불필요하다.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다시 바라본다는 측면에서 독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답답한 눈요기일 뿐이다.
무의미한 오토바이와 자동차 질주로 시작해서 친구이자 형인 AIDS 환자의 죽음을 거쳐 지저귀지 않는 새, 벌레들처럼 건조한 교미, 영화가 TV에서 방영 전 이탈, 인종주의와 파시즘적 살인, 뚱뚱한 여인에 대한 집단 성희롱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변두리 마을의 남성 집단에 대한 브루노 뒤몽의 구원 불능의 시선은 폭력적인데, 그 폭력은 전혀 신선하거나 극랄하지 않은 평탄한 침묵 위에 세워진다는 점에서 얌전하다.
“예수의 삶”은 그림 이외에 어디서도 예수를 만나볼 수 없는 것처럼 버려짐과 떨림의 영혼은 감지되지 않고 신체들의 가혹한 수난들만 덩그라니 풍경처럼 남겨진 채 대속의 여인을 남겨두는 종교적 망부곡이다.

휴머니티 (Humanity, L’humanité)
감독_브뤼노 뒤몽 / 출연_Emmanuel Schotte, Severine Caneele / 제작년도_1999년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강간, 살해된 어린 소녀의 벌거벗은 시체가 발견되자 파문이 인다. 마을 경찰인 파라온 드윈터는 이 살해사건을 맡아 조사하지만 통 진전이 없다. 매사 답답할 만큼 느릿하고 순박한 드윈터는 상관에게 들볶이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게다가 그가 짝사랑하는 도미노는 친구인 조셉과 사귀며 섹스에 탐닉한다. 소녀가 살해되고, 마을 공장 노조의 시위를 저지하고,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현실에서 드윈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묵묵히 슬퍼하고 견디며 살아가는 한편 요원한 삶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을 뿐이다.
○ 출연 / 스탭

브루노 뒤몽 (Bruno Dumont) – 감독, 각본
엠마누엘 쇼테 (Emmanuel Schotte) – 파라온 드 윈터 역
세브린 카닐 (Severine Caneele) – 도미노 역
필리페 툴리에르 (Philippe Tullier) – 조셉 역
기슬라인 게스퀘레 (Ghislain Ghesquere) – 경찰관장 역
이브 카페 – 촬영
○ 수상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 줄거리
11살 된 여자아이가 강간 살해된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형사 파라옹 드 윈터가 사건 수사를 맡게 된다. 그는 몇 년 전 사고로 아내와 아이를 잃은 후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파라옹은 옆집의 여인 도미노를 좋아하지만 그녀에게는 조셉이라는 애인이 있고, 조셉은 파라옹을 바보 취급한다. 살인범을 잡기 위한 탐문수사가 계속되지만 사건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휴머니티 : 가장 인간적인 고뇌 (브루노 뒤몽 감독 Humanity, 1999) _ 박재환 영화리뷰(2000.9.1.)

이 영화는 깐느영화제에서 남녀주연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그 시상식장에서는 영화팬과 영화평론가들의 야유와 조소의 고함소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다른 훌륭한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장인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엉뚱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때에는 많은 ‘고급’영화팬들이 2시간 28분의 상영시간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자리를 떠나거나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어제 서울의 오즈극장에서 ‘프랑스영화제’를 맞아 특별상영했다.
영화는 저 멀리 영국의 해안절벽이 바라다 보이는 프랑스 북부 프랑드르의 조그만 마을 바이유라는 평화로운 농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강간범’ 이야기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림같은 들판 속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는 파라옹 (이마뉴엘 쇼떼) 이며, 30대의 이 지역 경찰 부서장이다. 그가 막 발견한 시체는 이제 11살인 어린여자애였고, 강간당한 후 발가벗겨진 채 살해당하고는 숲속에 내버려진 상태였다. 이 남자는 이 소녀의 음부를 보고는 속이 메스꺼워진다. 그는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의 이 잔악한 범죄에 대해 치를 뜬다. 그는 울적해지면 온종일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흠뻑 흘린 후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그의 옆집에는 도미노 (세브린느 까릴르)라는 여자가 산다. 도미노에겐 스쿨버스 운전사인 조셉이라는 애인이 있다. 이렇게 결코 어리지만은 않은 ‘남, 남, 그리고 여’ 트리오가 기묘한 감정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멍청해 보이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경찰 파라옹. 그에게는 부서장이면서 숨겨진 책임감 위에 감춰진 욕망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그는 도미노에게 어떤 눈길을 주는 듯하면서도 결코 애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단편적으로 관객들은 몇 해 전 그의 애인과 아이가 죽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파라옹은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아이의 시체를 본 후 자전거를 타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을 달리고, 도미노와 조셉의 데이트에 끼기도 한다. 그러한 이상한 어울림을 통해 관객은 줄곧 파라옹의 이상한 심리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어떤 장면에선 파라옹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도미노와 조셉의 섹스장면을 멀뚱히 지켜보게 되고, 경찰서에 붙잡혀온 피의자를 이상하리만치 포옹한다든가, 성 정체성의 의문을 제기시킨다. 그것은 나중에 돼지우리에서 돼지의 목 부위를 쓰다듬는 그의 지루한 손길에서도 감지된다. 도미노가 어느날 자신의 하부를 다 드러낸 채, “날 만져, 날 가져..”라고 하지만 파라옹은 관객마저 미안한 마음이 들만치 냉정하게 돌아서 버린다.
이 영화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을 연상시킨다. 테렌스 말릭 감독처럼 영화는 순간순간 멈춤에 가까운 느릿한 카메라 워킹을 선사한다. 그래서 주인공 파라옹처럼 사건의 본말에서 뛰쳐나온 심리로의 잠복을 요구한다. 그래서 일상의 단조로움에 내재한 인간본성의 처절함을 ‘느리게’ 뽑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이 의도한 ‘도덕의 질’보다는 정체된 일상의 파괴와 그 속에 내던져진 자아의 욕구를 그린다.
하지만 영화는 의외로 세속적인 고민을 안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우나기’에 근접하는 영화이다. 그것도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고급스런 이야기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남자의 성욕과 느낌에 대한 어른들의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영화에선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는 살해의 동기, 혹은 유아강간의 이유에 관해서이다. 조셉은 영화 내내 줄곧 애인 도미노와 격정적인 섹스 씬을 보여주었었다. 그래서 관객은 유아강간살해범이 바로 조셉이었다는 의외성에 놀라게 되면서 그 살인의 동기에 대해 몇 가지를 유추해보기 시작한다. 조셉이 몇 차례 보여주는 도미노와의 섹스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에 대해서 관객은 뒤늦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한 성적 접촉만이 이들을 방황이나 심태를 그럴싸하게 알려주는 장치이다.) 그래서 세 명이 바닷가로 놀려갔을 때 도미노가 타이츠한 수영복을 입은 파라옹의 옛 친구인 해안구조대원의 아랫도리를 자꾸 흘깃거렸던 것에 대해 생각해내고, 도미노가 줄곧 파라옹에게 사랑인지 추파인지 모를 시선을 던졌던 것에 대해 그 의미를 분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셉은 그러한 도미노에게서 얻지 못한 성적 욕구불만을 매일 실어 나르는 스쿨버스에 탄 아이에게서 얻고, 그 죄의식에 사로잡혀 그 소녀를 살해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흉악범은 마치 ‘애정만세’의 양귀매처럼 그칠 줄 모르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울음은 전혀 뜻밖에 파라옹의 키스로 마무리된다. 관객은 마지막 순간까지 파라옹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며, 이 영화에서 감독이 의도한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잠재된 욕구인 것이다. 살해의 의도가 되었든, 불륜의 씨앗이 되었든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침울하게 응결되어버린 욕정인 것이다.
이렇게 영화를 보면 여기서 말하는 휴머니티는 결국 ‘우나기’에서 선보인 남성의 성적 열등의식의 고급스런 형상화에 머문다. 감독이 이 작품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박재환, 2000/9/1)
[휴머니티 – L’Humanite, Humanity 1999]
감독: 브루노 뒤몽 (Bruno Dumont)
출연: Emmanuel Schotte, Severine Caneele
1999년 깐느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심사위원대상
○ 부르노 뒤몽의 “휴머니티” 그리고 “예수의 삶”

부르노 두명의 작품 “예수의 삶”은 ‘죄인의 탄생’과 ‘각성’이다. 그리고 “휴머니티”는 그 각성한 죄인이 행하는 ‘대속’이다.
두 영화는 따로 떼어 놓으면 이해되질 않는다. 내가 그랬다. 휴머니티를 처음 봤을 때 드는 불쾌감과, 황당한 결말. 내 머리와 내 양심으로는 그의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감성도 그 영화를 밀쳐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영화를 연결하면 두 주인공인 결국 한 인물의 젊은 시절 (예수의 삶)에 대한 각성과 자신의 죄를 반복하고 있는 새로운 젊은이 (휴머니티)를 향한 대속의 과정임을 알게 된다.
결국 1편 격에 해당하는 “예수의 삶”은 예수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성스러운 인류의 보편적 구원이 아니라, 한 세대 다음 세대에 들려주는 희생과 관용, 즉 대속을 의미하는 듯 하다.
차별, 질투, 약자에 대한 폭력 등이 아무런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일상에서 생겨난 의미 없는 것임을 주인공이 각성하는 순간 그는 세속 안에 있는 초월자가 되는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2편 격에 해당하는 “휴머니티”는 그러한 대속의 정신, 즉 극한의 화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는데, 감독이 (뒤르케임적 의미에서) 한 사회에서 가장 큰 분노를 일으키는 ‘소아성애’를 소재로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때 이러한 극한의 화해는 단순히 보수적이라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이 대속이라는 주제가 인간과 사회에서 반복되는 폭력성에 대한 성찰를 외면하고 이를 긍정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보수적 특성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폭력 발생의 어쩔 수 없음과 원죄의식을 연결짓고 이를 ‘대속’과 결부시키는 것은 악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끊어낼 수 있는 다른 선택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운명의 승리를 선언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속’의 의미를 우리가 기억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반복되는 폭력과 억압의 꼬리를 끊는 가장 평화적이고 극력한 몸부림이 이 영화에서 ‘대속’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에 등장한 ‘대속’의 의미를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속이라는 메시지는 세속에 살면서 세속을 뛰어넘으라는 내재적 초월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아를 유지하는 삶에서 극한의 지점으로, 자신의 경계의 극점으로 가보라는 명령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대속이라는 메시지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니체적인 의미 (초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대속’이라는 순전히 개인적인 사건을 통해 등장하는 보수적 메시지만 자각한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속’의 긍정성을 받아들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 감독 ‘브루노 뒤몽’ (Bruno Dumont)

브루노 뒤몽 (Bruno Dumont)은 1958년생이다.
브루노 뒤몽만큼 팽팽히 양쪽의 의견이 대립되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내놓는 작품마다 찬반 양론에 휩싸이는 라스 폰 트리에와는 또다른 경우에 속하는 그는 이제까지 배출한 5편의 작품들이 현학과 허세로 무장한 유럽 예술주의 감독군의 모호한 위치에 머문다는 비판과 구원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완전히 탈색된 악몽의 구현자라는 찬사가 오가고 있다.
양비론이나 초월된 중간자의 위치를 점하는 편리함을 벗어나서 굳이 일반관객으로서 내 진지를 구축하자면 전자에 가깝지만, 브루노 뒤몽을 선배들의 경로에 무임승차한 사이비 작가로 보기보다는 나름 자신만의 지독한 염세주의와 성악과 성선(타고난이 아닌 변해간다는 의미로서)의 경계를 프랑스 변두리 마을의 건초더미 속 불임과 부동의 풍경과 접합시켜 제시하는 비천함의 관찰자로 정좌한다.
이를 스크린 위에 올릴 때 그가 취하는 카메라 기법들과 상징 코드들은 감독이 의도했건 아니든간에 유럽 예술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진한 기사감을 느끼게함으로서 철학자로서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극악하고 소스라치게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여타 유럽 작가들의 작품들처럼 브루노 뒤몽은 층층히 쌓여가는 내러티브의 구축이나 부드러운 감정의 잉여, 기존 스타들이 가진 이미지의 활용, 감각적인 편집과 카메라워킹을 멀리하고 흔히 말하는 느린 영화의 조류 안에서 풀려나가기를 거부하거나 애시당초 해결될 수 없는 구조를 재현한다.
즉, 그는 읽기보다는 보여주기라는 틀 안에서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한다.
드문드문 주어지는 해석 코드들는 극히 조악하고, 극 전체가 조그마한 벽돌을 쌓아올리듯 하나의 벽화로 완성될 때까지 무너질 듯 허술하다. (기실 그의 벽화들은 완성된 이전이나 이후 어느 쪽도 그리 튼실해보이지 않는데, 이 점이 그의 노림수일 것이다.)
작품의 주무대가 파리가 아닌 그의 고향땅인 프랑스의 변두리라는 점을 감독이 자본주의 심장인 대도시를 이미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의 질적 이탈을 위해서 국가 내부의 식민지적 황폐함을 과장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모호하지만, 혁명을 동반한 자본, 진보 따위의 구술어로 읽어내기보다는 신이 이미 포기한 땅, 인간들이라고는 말해질 수 없는 생물체들, 인생론의 형이상학적 가치조차 부인하는 비속한 존재들에 대해서 그는 마치 그 자신을 대속하는 예술가의 존재로 자리매김한다는 인상을 준다.
할리우드적인 말랑말랑한 구원과 희망의 요소들이야 당연히 배제되지만, 그렇다고 브루노 뒤몽의 지옥 발현이 동년에 발표된 하모니 코린의 “구모 (Gummo)”만큼이나 철저하게 기괴하고 과거-사건-미래라는 시간대 전체를 관통하여 엄습하지는 못했다.
이는 어쩌면 20대와 40대라는 나이차의 데뷔작이라는 간극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하모니 코린은 브루노 뒤몽을 능가하지만 그것이 그를 상승 지지할 이유는 되지 못하듯 브루노 뒤몽의 다소 진부한 숏들과 인물들의 질주는 어이없게도 할리우드의 청춘물들의 철학 패러디버전처럼 보인다.

계획이나 대안이라는 사회과학적 측면을 배제하는 이들 작가군들은 영화 언어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줄기차게 생의 혐오와 무의미를 포착하는데 전념하지만, 그만큼 그들에게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가하는 관객에게 ‘저 너머는 없다’는 달콤한 변명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예술의 구원 윤리가 궁금한 것일게다.
이미 묵시록은 하나의 장사 품목이 된 지 오래되었고, 작가마다 장르마다 당대의 영화는 그것을 환타지화했다.
강요할 바는 아니겠지만, 인간 종말의 이야기는 거꾸로 인간 존재론의 씨앗으로 상생하니 지금 브루노 뒤몽의 예수의 수난과 대속적인 시선들은 소위 예술관객층들이 환호할 신무기를 장착하지도 못하였고 나같은 일반 관객들이 궁금해할 지하갱의 심층을 뜷고나오는 목적론도 발견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가 언제까지나 영화속처럼 변두리에만 어슬렁거릴 수는 없을 터이니 대도시로 들어섰을 때는 완전히 색다른 과제를 짊어진 변신을 기대해본다.
현재까지 6편의 작품을 영화사에 등재한 그의 작품 중 “휴머니티”와 “트웬티나인 팜스”는 먼저 만난 바 있다.
그리고 아래 두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아트시네마 개관 기념 영화제에서 그의 신작 “하데비치”를 상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예수의 삶”만을 보고 감상을 쓴 이후 “플랑드르”로 이어가려했는데, 주목받았던 데뷔작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깐느의 선택을 받았던 “플랑드르”까지 연이어 보고말았다.
이번 깐느에서 “Hors Satan”을 선보인 브루노 뒤몽은 점점 더 신(정확히는 인간)에의 배신과 속죄를 서구 카톨릭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부유하며 스스로 어디까지 가야할지를 되묻는 중이다.
역사와 경제를 무시하는듯한 영혼의 관념론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지를 질문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