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 Amazing Grace
감독) 마이클 앱티드 / 주연) 이안 그루퍼드, 로몰라 가레이, 알버트 피니 / 2006년
– 영국 역사상 가장 숭고한 사건의 중심에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었다!
“신앙이란 늘 입으로 고백될 뿐 아니라 반드시 삶 속에서 실천돼야 한다.”
18세기 영국의 젊고 유능한 국회의원 윌리엄 월버포스. 그는 정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명예로운 삶과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운 삶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윌버포스는 신께 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불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싸우기로 한 윌버포스는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세력들을 결집해 나가고, 그와 동료들은 청원과 보이코트, 대규모 군중집회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뜻을 전파해 나간다.
하지만, 윌버포스 일행의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들은 국왕을 비롯한 권력 세력들의 방해에 부딪혀 난항을 겪게 되고, 윌버포스는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힘들어하게 되는데…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Michael Apted
.각본: Steven Knight
.제작: Patricia Heaton, David Hunt, Terrence Malick, Edward R. Pressman, Ken Wales,
.주연: 이안 그루퍼드, 로몰라 가레이, 알버트 피니
.촬영: Remi Adefarasin
.편집: Rick Shaine
.음악: David Arnold
.제작사: FourBoys Films, Walden Media, Bristol Bay Productions, Ingenious Film Partners
.배급사: Momentum Pictures (United Kingdom), Roadside Attractions, Samuel Goldwyn Films (United States)
.개봉일: 2006년 9월 16일 (TIFF), 2007년 2월 23일 (US), 2007년 3월 23일 (UK)
.시간: 118분

– 출연진
이안 그루퍼드
로몰라 가레이
알버트 피니
마이클 갬본
루퍼스 스웰
유쑨두

[ 등장인물 ]
서술하는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거의 다 실존인물이다.
영화상 단역으로 등장하는 클래펌 파의 인물들도 실존인물이 많다.
.윌리엄 윌버포스 – 요앤 그리피스
.바버라 스푸너 – 로몰라 거레이 : 윌버포스의 아내로, 영화 상에서는 맞선 상대로 등장한다. 친척이 맞선을 주선하자 퇴짜를 놓았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는 서로 노예 무역 폐지 운동으로 대화를 나누다 거기에 꽂혀 결혼까지 한다. 윌버포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등장하며, 영화는 중반 이후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로 진행된다.
.소(小) 윌리엄 피트 – 베네딕트 컴버배치 : 극중 윌버포스와의 브로맨스를 보여준다.
.찰스 폭스 – 마이클 갬본 :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의 알버스 덤블도어 교장 역으로 유명한 그 마이클 갬본이다.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는 당시 영국의 유력 정치가로 피트의 정적이었으나, 영화에선 두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폭스가 정치적으로 피트와 대립한 건 맞지만, 종교적 소수자와 정치적 급진파의 자유를 옹호했던[3] 그는 노예제도에도 반대하는 운동가였기에 이 부분에선 협력 가능한 관계기도 했다.
.탈턴 의원 – 키어런 하인즈 : 본명은 배너스터 탈튼(Banastre Tarleton). 아메리카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손가락을 몇 개 잃은 상이 군인이며, 의회 내에 대표적인 매파. 윌버포스와 수시로 대립 각을 형성하는 정적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상당한 강경파 군인이었다고 한다. 독립 전쟁 때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며, 멜 깁슨의 주연 영화 패트리어트에서는 태빙턴 대령이라는 악역으로 각색되었다.
.클래런스 공작 – 토비 존스 : 영화상으론 일단 왕의 조카이며 탈턴과 마찬가지로 윌버포스의 정적으로 등장한다. 탈턴이 주로 의회 내에서 설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인다면, 클래런스 공작은 주로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식으로 방해하는 편.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의 뜻과 달리 노예무역이 폐지되는 법안이 통과되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언급하며 윌버포스를 인정해주는 대인배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참고로 격식 차리는 것을 싫어하는 한량끼가 있는 인물인데, 이 인물은 훗날 왕위에 오른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정체는 1830~1837년 재위하는 윌리엄 4세.(…) 이땐 노예제 폐지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 모양.
.존 뉴턴 – 알버트 피니 : 한때 노예 무역선 선장이었으며, 현재는 성공회 사제. 윌버포스의 멘토로 등장한다. 실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토머스 클락슨 – 루퍼스 수얼 : 윌버포스에게 노예무역 폐지의 불씨를 당겼으며, 수많은 위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정열적으로 폐지 운동을 밀어붙인 사람이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영화상으로는 잠시 공화파로 나오며 윌버포스와 대립하기도 한다.
.올라우다 에퀴아노 – 유수 은두르 : 노예로 끌려왔다 해방된 노예이며, 자신의 회고록을 판매하여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다.
.헨리 손턴 – 니컬러스 패럴 : 영국의 은행가이자 금융이론가로 다운손턴프리은행을 대은행의 하나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사적으로는 윌버포스의 친척이며, 윌버포스의 건강을 염려하여 가정을 꾸릴 것을 권하며 부인과 함께 바버라 스푸너를 소개한다. 윌버포스의 가장 큰 조력자로 등장하며, 노예무역 폐지안이 통과하는 순간에도 그의 곁에서 한결같이 있어주는 든든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메리앤 손턴 – 실베스트라 르 투젤 : 헨리의 부인이며, 윌버포스를 많이 염려하는 친척. 출연 비중이 그리 높지는 않다.
대사 한 마디 외에는 딱히 비중 있게 출연하지 않은 클래펌 파 역의 배우들도 모두 이름과 설정이 정해져 있다.

[ Special Tip ]
– ‘윌리엄 윌버포스 (Willam Wilberforce)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람, 영국의 양심 … 영국 반노예제도의 선구자
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영국 헐(Hull)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 칼리지를 졸업하고 정치에 입문해 21세 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20대 후반, 윌버포스는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반추하기 시작했다.
1787년 10월 28일 27세의 젊은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당시 상류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품위를 위한 교양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날 이후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모두 떨쳐버렸다.
그 당시 영국은 노예 무역을 통해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얻고 세계 최고의 해군력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그는 암살 위협, 중상 모략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매진했다. 결국 의회에서 싸워온 지 50여 년 만에 노예 무역 폐지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또한 조지 3세를 독려해서 ‘관습 개혁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도록 했고 몸소 개혁에도 힘썼다.
–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 대해서 : 전 세계 최고의 히트곡인 ‘어메이징 그레이스’
아마도 국경과 종교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려지는 노래 중의 하나가 ‘어메이징 그레이스’ 라는 찬송가가 아닌가 한다. 국내에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405장)’으로 잘 알려진 이 노래는 찬송가 이지만 기독교 신앙 여부에 관계없이 세계인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체로키 인디언 부족은 백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동료를 제대로 장사 지낼 수 없을 때 이 노래로 장례를 대신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체로키 부족은 이 노래를 자신들의 ‘국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미국 남북 전쟁 때 북군과 남군이 모두 ‘전쟁 찬송가(Battle Hymn)’로 불렀다. 요즈음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는 재활원이나 교도소에서도 치료와 교화 목적으로 환자와 재소자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있다.
세계적인 애창곡이 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태어난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싣고 미국으로 가는 노예선의 선장이며 노예 상인이던 영국인 존 뉴턴은 1748년 5월10일 항해 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의 위험에 처하자 하나님께 매달리며 구원을 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뉴턴은 크리스찬으로 개종한다. 그 후 몇 년간 그는 노예 사업을 계속했으나 결국 노예 상인 생활을 청산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뉴턴은 그 후 누구보다도 앞장서 노예제도에 반대하게 된다. 나중에 목사가 된 그는 자신을 구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다.
방탕하고 부도덕한 노예 상인이었던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내용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널리 애창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가사에 지금의 곡이 붙은 것은 1830년경의 일이라 한다.

– ‘노예 매매와 영국의 반 노예 운동’에 대해서
고대서양에서는 노예제도가 지극히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아리스토 텔레스가 노예제도는 인간 사회의 당연한 질서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 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기독교 인들이 신 앞에서 만인의 평등함을 주장함으로써 노예제는 서서히 끝이 보이게 된다.
이후, 대항해 시대 때 다시금 노예제도의 포문을 열었다. 1444년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인 “ Black gold” 가 리스본에서 팔렸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에 처음에는 상아와 금을 구매하기 위한 거점을 세웠으나 물량이 고갈되자 매매물은 인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서인도 제도에서 식민지의 형성으로 노예시장이 열리게 된다.
영국에서는 처음에는 이 인간매매에 대해 방관하는 자세였다. 1562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존 호킨스 경이 산토 도밍고 300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을 배로 보내자 질겁을 했다. 그러나 1713년 영국인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주, 상인들, 노예상들이 설탕과 럼에서 오는 수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기초를 마련해 줌으로써 서인도 제도 식민지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노예 매매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노예상들은 세 단계로 항해를 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무역품을 가져와서 노예와 맞바꾼다. 그리고 산 노예들을 배에 태워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 제도로 보낸다. 그리고 나서 설탕, 럼, 향신료, 열대의 작물 등을 실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시 이 무역은 고 위험 고 수익의 비즈니스였고 많은 젊은 영국인들은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아프리카 왕국과 부족국가에서 노예는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인들은 유럽의 좋은 물건들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민족을 팔기 시작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부족 전쟁의 포로였고, 일부는 범죄자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노예 사냥꾼들에게 납치된 사람들이었다.
노예선의 상태는 가히 참혹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모두 쇠사슬로 연결되어 쥐가 날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뱃멀미로 토하거나 배설을 해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프거나 사망한 노예는 그대로 배 밖으로 던져졌다. 이 노예 항해를 미들 페세지 (The Middle Passage)라고 했는데 거의 100일간 계속되었다.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면, 노예들은 몇 일 동안 배에서 내려지지 않은 채로 팔 준비를 하기 위해 깨끗하게 닦여지고 살이 찌도록 먹인다. 판매 가치가 없는 아픈 이들과 약한 사람들은 부두에 그대로 내버려져 죽게 되고 나머지는 기름을 바르고 발가벗겨져 경매에 넘겨지기 전에 거리를 행진하였다. 일단 팔린 노예들은 새로운 임무를 익히고, 사탕수수밭의 힘든 노동을 시키는 등 적응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일단 숙련이 되고 나면 그들은 냉혈한 감시자들에 의해 강요되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각계각층의 목소리들, 시인, 철학자, 성직자들이 노예 매매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노예제도는 국부의 총재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787에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대의 주장을 의회에 피력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최초로 연합했을 때, 그들은 노예제도의 폐지냐 아님 노예 매매의 폐지에 초점을 맞출 것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왜냐하면 일단 노예 매매가 없어지면 노예의 소유주들이 그들의 노예를 잘 보살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2인의 노예제 폐지 운동 위원회가 1787년 5월에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들은 일년 동안 런던의 커피숍, 시골의 술집들, 그리고 집집마다의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논쟁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이게 했다. 더 많은 탄원자를 모으기 위해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한가지 이슈에 대해 의회는 최고로 많은 수의 탄원 서명을 받게 되었다. 팜플렛이 출판되었고, 곧 삼십만 명의 사람들이 차 마실 때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을 넣기를 거부하였다. 조슈아 웨지우드는 동정을 호소하기 위해 운동의 지지자들이 하고 다닐 수 있도록 체인에 묶여있는 흑인을 그린 뺏지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위원회의 실에 쓰여있는 것과 같은 문구인 “ 나는 인간이 아닌가? 또한 동포가 아닌가?” 라고 새겨져 있었다. 멋쟁이 여인들은 팔찌나 장식용 핀에 이 뺏지를 달았다.
1788년에 조지 3세는 여론의 압박에 반응하여 Privy Council (추밀원, 식민지에서의 총독 보좌 기관)로 하여금 노예제 실상을 조사하게 했다. 1789년에 영국 노예선에 실을 수 있는 노예의 수를 한정하는 Dolben’s Middle Passage 법안이 단 두 표의 차이로 통과 되었다.
2년간 위원회와 함께 증거자료를 수집한 후, 윌버포스는 1791년 의회에 노예제도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친 노예제도파는 로비를 통해 그들의 재정적인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지지운동을 폈고, 그들의 발의는 좌절되었다. 다음 해에는 서인도 제도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반란과 프랑스 대혁명에서 비롯된 반 군주제의 정서가 영국해협을 건너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해져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이 주춤해 졌다. 그 뒤로 18여 년간 윌버포스는 법안을 제출하고 거부당하기를 계속했다. 결국 노예 매매 폐지 법안이 1807년에 통과되었고 5월 25일에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노예제의 폐지와 노예 해방을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1825년 65세의 나이에 윌버포스는 의회에서 물러났고 자신의 자리를 TF Buxton에게 물려주었다.
1833년 6월에 노예 폐지 법안이 중의원의 3차 심사에서 통과 되었고 그로부터 3일 후에 윌버포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웨스트 민스터 교회에 묻혔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북쪽 통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2,000만 파운드의 보상금이 노예 소유주들에게 지급되었고 그것은 해방된 노예들의 원래 값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보상금이었다.

[ Impression ]
– 2008년 최고의 감동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담긴 ‘윌리엄 윌버포스’의 숭고한 감동 실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한 남자의 열정과 인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영국 노예제 폐지운동의 리더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실제 삶의 이야기에 바탕하고 있는 이 영화는 18세기 후반에 노예 매매 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그의 영웅적인 노력의 연대기이다.
영화는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이상주의 정치인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20대와 30대 시절을 그려낸다. 윌버포스는 정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잘 나가는 커리어와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의 목사이자 개혁된 노예선의 선장으로 오늘 날에도 사랑 받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 작사가인 존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신께 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무기로 불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뉴턴의 말에 자극 받은 윌리엄은 노예제도를 이슈화 하여 뜻을 같이하는 세력들을 결집해 나간다. 투쟁 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은 윌버포스는 불굴의 의지로 마침내 영국 전역에 노예제도 폐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윌리엄 윌버포스의 마음과 영혼을 담은 듯한 노래인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다. 그가 노예제 폐지를 위해 헌신하면서 당당하게 맞서 싸울 때, 이 노래를 숭고하게 부르며 혼신의 힘을 쏟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나온다. 노래는 아름다우면서도 숭고한 선율과 함께 노예제도 폐지라는 역사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윌버포스의 삶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가 이제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재현된다. 명예와 부를 쫓지 않고 꿈을 향해 한걸음 더 나선 윌버포스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차별화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 세계 최초! 영국 반 노예제도 선구자 이야기의 소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세계 최초로 영국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소재로 영화화한 것이다.
흔히 미국의 노예제도 반대로 남북전쟁이 일어났던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영화 속 배경 혹은 소재로 많이 다뤄져 왔으며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반면 영국의 노예제도가 어떤 식으로 종식이 되었고, 누구에 의해서 되었는지에 대해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기에 검증되지 않은 소재를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이 통과된 지 200주년 되는 해인 2007년을 기념하여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제작하게 되었다.
세계 영화사상 최초로 영국 노예폐지의 선구자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을 그릴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드라마의 감동은 물론, 그 동안 일반인들이 알지 못했던 영국 역사의 매력을 선사할 것이다.

– 할리우드 최고의 제작진이 선사하는 기적 같은 이야기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의 리더인 ‘윌리엄 윌버포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윌버포스가 이 운동을 하면서 시련과 고통을 겪지만 그의 열정과 인내 그리고 음악으로 극복해 나가는 기적 같은 감동 스토리를 담아낸 영화이다. 사랑, 믿음, 기적 등 세상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영원불변의 키워드와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2008년 봄 전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할리우드 최고의 스탭들이 만들어낸 완성도로 그 특별함을 더한다.
<넬>, <007 언리미티드>, <이너프> 등의 색깔 있는 영화만을 고집하는 천재 감독 마이클 앱티드가 연출을 맡았으며, <뜨거운 녀석들>, <007> 시리즈, <고질라>, <인디펜던스 데이>등 실력 있는 데이빗 아놀드가 음악에 참여하여 신뢰감을 높인다
<슬라이딩 도어즈>, <어바웃 어 보이>, <인 굿 컴퍼니>, <매치 포인트> 등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아데파라신 촬영 감독이 합류하여 완성된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탄탄한 스토리를 빛나게 하는 탁월한 연출력, 감성을 자극하는 배우들의 연기, 역사와 함께 살아 숨쉬는 화려한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하모니를 선보인다.
– 이안 그루퍼드, 로몰라 가라이, 알버트 피니, 베네딕트 컴퍼배치 등 배우들의 재능과 열정이 만들어 낸 특별한 감동!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영국의 노예 폐지운동의 선구자로 나섰던 ‘윌리엄 윌버포스’, 윌버포스와 개혁에 대한 열정을 나누고 격정적인 연애 끝에 그의 아내가 되는 아름답고 강인한 젊은 여성 ‘바바라 스푸너’, 영국의 최연소 수상이면서 윌버포스의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피트’, 윌버포스의 목사이자 개혁된 노예선의 선장으로 오늘날에도 사랑 받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가인 ‘존뉴턴’까지.
노예 폐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이어져있는 이들 캐릭터는 깊이 있는 연기력을 겸비해야만 하는 어려운 역할이었다. 이들은 이안 그루퍼드와 알버트 피니를 비롯한 할리우드 최고의 실력파 배우들이 있었기에 더욱 리얼하고 진실된 캐릭터로 완성될 수 있었다.
<판타스틱 4>, <킹 아더>로 스타덤에 오른 이안 그루퍼드는 세상의 모든 사랑과 기적을 보여주었고, ‘윌리엄 윌버포스’ 역을 맡아 실제 그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다.
<에린 브로코비치>, <빅피쉬>, <오션스 트웰브>의 명배우 알버트 피니는 존 뉴턴 역을 연기해 놀라운 열정과 집념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윌버포스의 부인 역의 로몰라 가라이 역시 지적이면서 따뜻한 마음을 지닌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일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깊이와 리얼리티를 위해 자신이 가진 열정과 재능을 남김없이 쏟아 부은 이 배우! 그리고 그들을 든든히 뒷받침 해주는 할리우드 배우 베네딕트 컴퍼배치 등 신뢰할 수 있는 명배우들의 열연까지 보태어진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진정성과 진심이 묻어나는 특별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 가슴을 적시며, 영혼을 휘 젖는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18세기 영국의 모습을 그대로 스크린에 재현하다!
18세기 후반 노예 매매 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힘겨운 투쟁을 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를 그린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어떤 허구보다도 감동이 넘치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마이클 앱티드 감독은 물론 출연 배우들마저도 영국 출신의 배우들이었다. 주인공인 이안 그루퍼드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되기 위해 촬영 전부터 관련 서적을 읽었고 그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18세기의 영국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전망 좋은 방>, <고스포드 파크>, <애나 앤 킹>, <센스 & 센서빌리티>의 의상을 맡았던 제니 비반이 담당해 그 당시의 매력을 선보인다.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 ~ 1833) 개관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년 8월 24일 ~ 1833년 7월 29일)는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정치인이다.

–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출생: 1759년 8월 24일, 영국 킹스턴어폰헐
.사망: 1833년 7월 29일, 영국 런던 카도간 플레이스
.배우자: 바바라 윌버포스 (1797 ~ 1833)
.자녀: 사무엘 윌버포스, 헨리 윌버포스, 로버트 윌버포스, 윌리엄 윌버포스
.학력: Hull Grammar School, St John’s College, Pocklington School
.직업: 정치인
.업적: 노예제 폐지
미국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다면 영국엔 윌버포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영국 정치인들이 닮고 싶어하는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인물이다.

○ 생애 및 활동
할아버지인 윌리엄 윌버포스 (1690년 – 1776년)는 발트 교역에서 부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로버트 윌버포스 (1728년 – 1768년)이다. 윌버포스는 만 18세인 17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들의 모임에 몰두하고 공부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친구 중에서, 특히 윌리엄 피트를 사귀었고, 둘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만22세인 1781년에 학사학위를, 만29세인 1788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공회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 존 벤 신부(Rev. John Venn) 등과 더불어 18세기 성공회의 3대 복음주의자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에 그의 노예제 반대운동을 기독교적 정치운동의 모델로도 볼 수 있다.
18세기 당시 영국은 경제의 주된 원동력이었던 노예제 폐지 문제로 국회가 매일 대립각을 세우며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윌버포스는 1784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1787년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에 평생을 몸바쳤다. 다행인 것은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윌리엄 피트가 총리여서 반대파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었다는 점이다.
1807년 드디어 영국 내에서의 노예무역금지법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1814년에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시키기 위하여 온갖 운동을 조직, 법안을 만들었고 1833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3일 전인 26일, 노예제도 폐지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것을 목격하고 눈을 감았다.
윌버포스가 주장한 노예제 폐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도덕- 윤리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국익 문제도 걸려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금지법안에 대해 “필요에 따라선 영국이 다른 국가의 선박도 수색해서라도 노예 무역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를 적용할 경우 노예 무역의 단속을 한다는 빌미로 영국 해군이 마음대로 타국 선박들을 수색, 억류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물론 당장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막대한 상황에서 자국의 법을 억지로 타국 상선에까지 적용시켜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노예무역금지법을 통과시킨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 이익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영국은 최강의 해군을 갖춘 나라였지만, 타국의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할 정도는 아니었고, 군함으로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하면 영향력이 확대되는 게 아니라 전쟁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조치였지만 법안이 통과된 때는 바야흐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있던 나폴레옹 전쟁 시대 (미국과도 전쟁철)이었으므로, 영국은 국력뿐 아니라 명분과 실리까지 쥐고 수만 명의 노예를 바다 위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서도 이러한 노예무역 폐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빈회의에서 노예무역 폐지조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노예무역 폐지를 빌미로 타국 선박을 수색한 사례도 극히 적었다.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법안에 대해서 미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타산적인 부분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의 초입으로 흘러가는 시대의 경제적인 동기도 있지만 윌버포스가 정치인이었던 것만큼 그에게 동조했던 정치인들은 당시 영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식 중 새뮤얼 윌버포스가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셋째 아들). 새뮤얼은 영국 성공회 주교로 활동하였는데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서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그 원숭이는 당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중 어느 쪽 조상입니까?”라고 말했다가 토머스 헉슬리에게 “나는 진리를 왜곡하려 드는 당신 같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의 자손이 되겠습니다.”라고 반격을 당한 사람이 바로 그이다.
이 때문에 새뮤얼 윌버포스를 변호하는 쪽에서는 새뮤얼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에 민감했고, 진화론이 인종차별에 악용될 것이라고 생각해 반감을 가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장도 무시당하거나 반론당하는데 바로 용불용설에 나오듯이 이걸 체계적으로 주장한 라마르크가 죽을 때 조사로 비웃던 고생물학자 조르주 쿠비에 (Georges Cuvier, 1769 ~ 1832)만 해도 종의 정착이라면서 창조 이후 종은 그 모습 그대로라고 진화론과 반대였음에도 흑인이나 아시아인은 원숭이리고 인종차별을 주장해오고 신이 원래부터 차별하여 백인과 차별을 두었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이렇듯이 얼마든지 진화론 아닌 이들도 인종차별에 창조론을 인종차별에 이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있기에 진화론만 악용되는 게 아니다. 참고로 쿠비에는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와서 서커스 구경거리로 비참하게 살던 흑인 여인 사라 바트만 (Sarah Baartman, 1789 ~ 1815)이 죽자 해부하곤 원숭이에 가깝다고 주장하던 인물인데 같이 해부에 참여한 다른 이들이 백인이나 차이가 없다고 반론할 때도 화냈던 바 있다.
– 행동하는 신앙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 (주일학교 창설자), 존 벤 신부 (Rev.John Venn)등과 더불어 18세기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성공회 신자로서 그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기독교 정치운동의 모델로 볼 수 있다
– 한계
윌리엄 윌버포스는 정치 및 사회 제도에 대해 그의 정치적인 동지이기도 한 에드먼드 버크의 영향을 받아서 신분제에 대해 보수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불평등한 인간의 신분제에 대한 도전과 인권에 대한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윌버포스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토머스 페인이 저술한 ‘인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이는 당시 영국의 시민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 기타
– 영화화 :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 하원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를 폐지하는 과정을 그렸다. 한국에서는 2008년 3월에 개봉하였다.
영화는 고증이 상당히 잘 된 영화이며, 윌버포스와 클래펌 파의 정치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적인 정치운동인 설탕 불매운동과 포스터 및 배지 제작, 서명운동 등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 일을 진행하면서 윌버포스가 어떻게 몸이 망가져 가는지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서적 : 윌리엄 윌버포스의 위대한 유산
.윌버포스는 노예해방의 십자군일 뿐 아니라, 기독교 개혁가로서 그의 저작 ‘윌리엄 윌버포스의 위대한 유산’ 은 오늘날 교회의 부흥에도 필요한 음성을 들려준다. 고전이 된 그의 저서「이 나라의 상류층과 중산층에서 자칭 기독교인들 가운데 널리 퍼진, 진정한 기독교와 전혀 다른 신앙 체계에 대한 실제적 고찰」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고래가 된 새우’ 윌리엄 윌버포스를 알게 될 것이다. 윌버포스의 가장 큰 소망과 기도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였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되기 바란다.
○ 어록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이후로는 이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