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인생 : Lifetimes, 人生
감독) 장예모 / 주연) 공리, 갈우 / 원작) 위화 / 1994년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장예모 감독, 갈우, 공리 주연의 1994년작 중국 영화. 원제는 活着 (훠져, 살아간다는 것, Lifetimes).
영화는 크게 1940년대 (국공내전), 1950년대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0~70년대 (문화대혁명)로 나뉜다.
1940년대 중국,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부귀 (갈우)는 경제적 풍요로움 아름다운 아내 (공리)가 있어 부러울 것이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도박에 빠져 전재산을 잃고 아내는 그를 만류하다 못해 떠나버린다. 아버지마저 충격으로 숨을 거두자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후회 뿐이다. 삶의 의욕을 잃은 부귀에게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고 부귀는 가족들을 위해 그림자극을 시작한다.
○ 출연 / 스탭
장예모 (Zhang Yimou) 감독
공리 (Gong Li) 주연
갈우 (Ge You) 주연
갈복홍 – 제작
증경초 – 제작
푸궤이(福贵): 거유
지아전(家珍): 공리
펑시아(凤霞): 장누(어린이), 초총(청소년), 유천지(성인)
요우칭(有庆): 동비
촌장: 우분
춘생: 곽수
이가: 강무
룡이: 아대홍
노전: 이운의
○ 수상내역
제47회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
제47회 깐느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제47회 깐느 영화제 박애주의상 수상
제48회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
1994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 내용
1940년대 중국,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부귀는 경제적 풍요로움, 아름다운 아내 가진이 있는 부러울 것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한순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도박에 빠져 살던 그는 결국 전 재산을 잃고, 아내는 노름에 빠진 그를 만류하다 못해 떠나버리며 아버지마저 충격으로 숨을 거두자, 삶의 의욕을 잃는다.
그러나 가진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자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한번도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자극뿐이다. 단원들을 모아 고달픈 공연길에 오른 부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생의 활기가 가득하다.
어느날 공연 도중 갑자기 국민당군이 들이닥치고 부귀는 동료 추생과 함께 집에 알리지도 못하고 전쟁터로 끌려간다. 민중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전쟁에서 부귀는 생존의 방법으로 그림자극을 선택한다. 내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후에 딸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 줄거리
– 40년대 : 국공내전
부유했던 지주의 자제로 태어났던 푸궤이(福贵)는 도박으로 진 엄청난 빚이 있다. 도박에 빠진 푸궤이를 견디다 못한 아내 지아전(家珍)은 딸 펑시아(凤霞)를 데리고(아들 요우칭[有庆]을 임신한 채로)집을 나가버린다. 마침내 도박 상대였던 룽얼에게 푸궤이의 마지막 재산이었던 집문서가 넘어가고 그 충격으로 푸궤이의 아버지는 사망. 결국 푸궤이는 거리로 쫓겨나게 된다.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도박을 끊고 근근이 살아가던 중 지아전과 펑시아, 아들 요우칭이 푸궤이에게 돌아오고, 이들을 먹여살리는 처지의 푸궤이는 밥벌이를 위해 그림자극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곧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국민당에게 끌려가게 되고, 그 후 국민당이 급히 철수하면서 푸궤이는 후배 춘셩(春生)과 함께 졸지에 전장 한가운데 남겨져 도망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 국민당군 부역자로 오인받았지만 푸궤이가 가지고 있던 그림자극 인형 덕분에 오해가 풀렸고 짐꾼 생활을 하며 간간히 그들에게 그림자극을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자 푸궤이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춘셩은 좋아하던 차를 몰 수 있는 이유 등으로 운전병으로써 홍군에 남는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푸궤이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딸 펑시아가 열을 앓다가 그만 실어증에 걸리고 만다.
그 후 반우파 투쟁이 벌어지고 도박으로 푸궤이의 재산을 딴 롱얼이 공산당에게 지주로 몰려 숙청당하는데 “도박으로 재산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내가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고 생각한 푸궤이는 몸서리치며 부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허나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을 뿐, 부유했던 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자기도 끌려가 처형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 했고, 마침 끌려가는 롱얼과 잠시 눈을 마주친 뒤 곧장 집으로 뛰어가 지아전에게 롱얼의 총살형을 알리고 온 집안을 뒤져 인민해방군에서 짐꾼으로 있었다는 증명서를 찾았다. 그러나 그 증명서는 푸궤이의 겉옷 주머니에 들어간 채로 지아전이 세탁하는 중이었다. 푸궤이는 급히 옷을 꺼내 군데군데 찢어진 증명서를 잘 말려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그제서야 안심한다.
– 50년대 : 대약진 운동
얼마 후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푸궤이가 사는 마을 사람들도 좋아라 하면서 집집마다 철 공수를 하여 토법고로를 돌리고 조리기구가 없어지자 난생 처음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푸궤이의 아들 요우칭은 집에서 염소를 길렀는데, 이를 어찌나 소중히 여기던지 평소에도 근처에 올라가 염소 먹일 풀을 가득 뜯어오고, 학교에 있는 도중에도 집에 뛰어와 염소에게 먹이를 줄 정도였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으로 철 공출이 되며 이 염소 역시 공수되고 마는데, 염소를 보낼 수 없었던 어린 소년은 마을에 염소를 모아놓은 곳까지 따라가서 자신의 염소에게 밥을 주는 일을 계속한다.
대약진운동이 지속되며 어른부터 어린애까지 밤낮으로 혹사 당한다. 이 마을에선 제철생산작업을 하고 있었고, 요우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루는 이런 일 때문에 요우칭이 잠이 모자라 너무 피곤해 학교를 가기 싫어했는데 푸궤이는 부득불 아들을 업어 학교에 데려다준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도 담장 밑에서 졸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부딪혀 무너진 담 밑에 깔려 사망한다. 그런데 그 트럭을 몰았던 사람은 국공내전시기 푸궤이와 그림자극을 같이 하며 다니던 후배인 춘셩으로, 당 간부가 되어 마을로 금의환향하려 오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춘셩은 푸궤이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에서 보상을 하려고 하지만 푸궤이는 아들을 죽인 춘셩을 용서하지 않는다.
– 60 ~ 70년대 : 문화대혁명
세월이 흘러 딸인 펑시아가 공산당원 완얼시 (万二喜)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춘셩은 주자파로 찍혀 모진 고생을 당하고, 아내까지 자살하는 비극이 닥치게 된다. 견딜 수 없게 된 춘셩은 자신의 모든 돈을 푸궤이에게 건내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나 푸궤이는 통장을 다시 돌려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견뎌내야 한다. 지옥같은 전장에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려고 하나?’라고 하면서 춘셩을 다독인다. 지아전 또한 돌아가는 춘셩에게 ‘당신은 우리에게 목숨 하나를 빚졌으니 열심히 살아나가야 한다.’고 격려해준다. 지아전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춘셩을 용서해준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장면.
세월이 지나 만삭의 펑시아가 산통으로 병원에 입원하는데, 당시는 문화대혁명 시기라 병원에 있던 의사이란 의사들은 죄다 반동으로 분류되어 홍위병들이 죄 잡아가 버려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병원을 지키고 있었던 건 생초짜나 마찬가지인 학생들 뿐이었던 것. 한 마디로 병원에 의사는 없고, 웬 중고딩들이 의사, 간호사랍시고 병원에 진을 치고 있었던 거다.
상황이 걱정된 푸궤이는 완얼시에게 부탁해 잡혀간 의사를 하나 빼와서 진료를 부탁해보자고 하여 잡혀간 대학 교수급 전문의를 데려와 진료를 보게 하려 했지만, 오랫동안 굶주렸던 의사는 푸궤이가 준 만터우와 물을 급하게 먹다가 갑자기 음식을 먹어 체한 데다 위속에서 만터우가 물을 만나 불어서 혼절한다.
결국 펑시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인 홍위병 학생들이 어버버 하고 있는 가운데서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그나마 그 와중에 펑시아의 아들은 무사히 태어났다.
– 에필로그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 역사의 피바람을 몰고 왔던 사건들이 모두 끝나고 평온한 시대가 찾아온 이후의 이야기… 노년이 된 푸궤이와 지아전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가족은 사위인 완얼시와 그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만터우(馒头) 뿐. 아들 요우칭과 딸 펑시아를 잃었기에 매년 요우칭과 펑시아의 묘에 온 가족이 성묘를 하고 만터우의 성장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펑시아 묘에 보여주며, 성묘가 끝난 뒤 가족의 오붓한 식사장면과 함께 만터우가 살아갈 앞으로의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란 푸궤이의 말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개봉 당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도 영화관을 나가는 사람들이 극소수였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이다. 몸이 아픈 외할머니, 그런 아내를 위해 묵묵히 일하는 외할아버지,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고도 홀로 장인, 장모를 모시고 사는 사위이자 아버지… 본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주연들의 인생과 가족애를 거짓 없고 애절하게 보여주었던 식사 장면은 지금도 최고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영화는 개봉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중국에서 상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현대 중국의 명암 역사가 고스란히 나와있기 때문이다.
○ 감상후기 1
이욱연 씨의 책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를 읽다보면 중국 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각 지명마다 언급되는 중국 영화들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내가 읽던 위화의 <인생>의 영화를 풀어내는 장을 읽고, 디비디가 믿을 수 없게 “싼” 가격에 나왔기에 얼른 구입했다.
그런데, 역시, 옛말 틀린 게 없다더니, 싼 게 비지떡이다. 화면은 부옇고 초반부는 배우들의 목소리와 입술 모양이 엇갈리는 듯 해서 영 어색하기만 한데다 중문, 영문 자막 위로 겹치는 우리말 자막도 이상했다. 중국어를 모르니 영문 자막과 비교해서 한글 자막은 많이 줄인데다 틀린 번역도 많고 이욱연 씨가 설명했던 감동적인 장면의 명대사 마저 다 건너 뛰었다. 한글 자막을 없애고 영문 자막만 읽자니 부연 화면에 부연 자막이 눈을 괴롭힌다.
영화 시작 후 삼십 분 정도 이렇게 고행을 하다보면 어느 정도 영화 속 이야기에 익숙해 지는데, 오늘 읽은 <몽실이>가 자꾸만 겹쳐서 떠오른다. 푸쿼이 주변이나 몽실이 주변에나 다 너무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힘든 세상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다 잃고 마는 푸쿼이와 그 부인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리기도 했는데, 화질과 자막 덕에 감동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극은 원 소설 <인생>에는 없었지만 영화에서는 유용한 도구로 쓰였다. 억지스러운 중국 문화 알리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림자극이나 영화, 그리고 소설 모두 인생을 펼쳐 보여주는 놀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한 판 신나게, 구성지게 놀고 나면, 다들 쓸쓸해지는 것.
아, 그리고 계속 해서 나오는 만두, 만두, 만두. 나는 그 중 늙은 의사 선생이 일곱 개나 먹고 기절해 버린 왕만두가 제일 탐났다.
○ 감상후기 2
영화가 있기전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면 누구나 그 원작에 관심이 가는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원작을 찾아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영화를 먼저 접하고 읽을 수도 있고.. 원작을 읽고나서 영화가 나와 볼 수도 있다. 암튼, 무엇이 먼저이든 간에 중요한건 영화판처럼 원작과 불가불의 관계도 없을 것이다. 여기 그렇게 불가불처럼 나온 작품이 있으니 바로 장예모 감독의 <인생>과 ‘위화’의 원작 <인생>이다.
영화든 책이든 둘중에 하나라도 접한 분이라면 내용을 알고 있듯이.. 어느 늙은 노인 ‘푸구이(극중 후우꿰이)’의 인생 역정을 회고식으로 다룬 이야기다. 우선, 책은 한 젊은이와 푸구이의 대화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영화는 푸구이의 젊은 시절부터 곧바로 나온다. 바로 부자집 도련님이었지만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며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그림자극으로 연명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국공내전을 겪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1940년대다. 영화는 이렇게 시대별로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950년대는 바로 대약진운동으로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들이 각출되고 그러면서 동네마다 큰 드럼통에서 제철을 뽑아내며 푸구이가 칭찬을 받는다. 그러면서 개구쟁이 아들 유칭이 누나 펑샤를 괴롭히던 녀석들을 혼내주는등 나름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유칭은 차사고로 죽게 된다. 책에서는 교장 선생님을 위해서 피를 한없이 뽑다가 죽었는데.. 둘다 어의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는 바로 문화대혁명 시기로 마오쩌둥의 그림과 사진등이 화면에 자주 비추어지고 푸구이는 ‘마오’를 주제로 한 그림자극을 하라 제의도 받는데.. 한편, 착한 딸 펑샤는 그녀와 같이 착한 남자 얼시와 ‘인민의 결혼’을 올리며 행복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아기를 낳다가 그만 죽고만다. 두 부부는 애통해 마지 않는데.. 이렇게 결국 두 부부는 자식을 잃었지만 남겨진 사위와 손자 이렇게 넷이서 맛있는 식사를 하며 나름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것이 영화가 보여준 내용이다. 여기서 푸구이역을 한 남자 배우는 ‘갈우’로 마치 모습은 우리 개그맨 ‘한민관’처럼 마른 모습이지만 심도있는 연기력을 선보이며 당시 1994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그의 부인역 ‘자전’은 바로 그 유명한 ‘공리’가 맡았는데.. 사실 부인역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책에서는 구루병을 앓으며 가열차게 매말라가 죽음의 순간까지 맞는데 여기서는 남편 푸구이에 켵가지로 묻어간 느낌이다.
이렇게 본 영화는 위화의 원작 ‘인생’과는 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원작은 푸구이의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부터 아들 유칭, 딸 펑샤, 사위 얼시, 손자 쿠건까지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애달픈 인생의 보편적 삶속에 역경의 과정을 그렸고, 그런 그림들은 중국의 근현대사를 장식한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속에 관통시켜 물흐르듯 리얼리티를 살리며 잘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반해서..
영화가 보여준 비주얼의 장면들은 이런 푸구이 가족의 죽음을 모두 담아내지 않고 오로지 푸구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와 아들 유칭과 딸 펑샤의 결혼과 죽음 그리고 마지막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국공내전의 전쟁통은 많은 쪽수로 밀어부쳐 잘 그렸지만 이후의 그림들은 때로는 관조적으로 밋밋하게 그려낸 그림들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한 남자의 가열찬 인생 역경보다는 그냥 ‘인생살이’를 보여준 느낌이다.
결국, 위화의 원작을 접하고 나서 만난 장예모의 <인생>은 원작을 오롯이 담아냈다기 보다는 장예모식 연출력과 당시 시대을 보는듯한 분위기속에 그런 비주얼은 한 남자 ‘푸구이’를 중심으로 그려내 원작처럼 전체를 아우르는 힘은 부족한게 아니었나 싶다. 물론,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박애주의상 등을 수상한 작품답게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임에 이견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전체적 총평은 장예모의 영화 <인생>보다는 위화의 원작 <인생>이 운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보편적 삶을 다룬 푸구이의 인생 역경이라는 점에서 더 와닿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접하든 못 접하든 위화 원작인 <인생>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 원작소개 : 위화의 ‘인생’ (위화 / 푸른숲 / 2007.6.28)
‘인생’은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해방 전후부터 약 40년간의 중국 역사를 가혹하다는 의식조차 없이 묵묵히 살아낸 중국 민초들의 삶을 ‘생명과 죽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기꺼이 인정한 작품으로, 위화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
작가 위화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인생’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장편소설로, 국내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원제는 ‘活着’.
위화는 <인생>을 통해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이 시대를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애정 어린 헌사와도 같은 소설이다.
– 저자소개 : 위화 (Yu Hua, ユイ.ホア, 余華)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단편소설 ‘첫 번째 기숙사'(1983)를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1988) 등 실험성 강한 중단편소설을 잇달아 내놓으며 중국 제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첫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1993)을 선보인 위화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생'(1993)을 통해 작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든 ‘인생’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이는 세계적으로 ‘위화 현상’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작품은 중국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매년 40만 부씩 판매되며 베스트셀러 순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허삼관 매혈기'(1996)는 출간되자마자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위화는 명실상부한 중국 대표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 중국 현대사회를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낸 장편소설 ‘형제'(2005)와 ‘제7일’ (2013)은 중국 사회에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 독자들에게는 중국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산문집으로는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등이 있다.
1998 그린차네 카보우르 문학상 Premio Grinzane Cavour, 2002 제임스 조이스 문학상 James Joyce Foundation Award, 2004 프랑스 문화 훈장 Chevalier de 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2004 반즈앤노블 신인작가상 Barnes & Noble Discovery Great New Writers Award, 2005 중화도서특별공로상 Special Book Award of China, 2008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 해외도서상 Prix Courrier International, 2014 주세페 아체르비 국제문학상 Giuseppe Acerbi International Literary Prize, 2017 이보 안드리치 문학상 The Grand Prize Ivo Andric, 2018 보타리 라테스 그린차네 문학상 Premio Bottari Lattes Grinzane을 수상하였다.
– 역자 : 백원담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 밖에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기획집행위원장, 중국 상하이 대학교 해외 교수, ‘진보평론’, ‘황해문화’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중국문화론 1-3’, ‘인문학의 위기'(편저), ‘중국철학산책'(공편), ‘민중문화운동론의 실천론’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인생’, ‘동아시아의 문화 선택, 한류’, ‘색동저고리 입고 꼬까신 신고’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 첫문장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 본문 중에서 접기
펑샤가 아이를 갖자 얼시는 그 애를 더 아껴줬다네. 여름이 되니 모기가 많아졌는데 그 애들 집엔 모기장이 없었어. 그래서 날이 저물면 얼시는 먼저 자기가 침대에 누워 모기들을 배불리 먹였지. 그동안 펑샤는 밖에서 시원하게 앉아 있으라 했고 말이야. 집 안의 모기들이 배가 불러 더 이상 물지 않게 되면, 그제야 제 처를 들어가 자게 했다네. 몇 번인가 펑샤가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얼시는 조바심을 내며 펑샤르 ㄹ밖으로 밀어냈다더군. 이런 이야기는 모두 얼시네 이웃집에서 들려준 거라네. 이웃집 여자들은 얼시한테 이렇게 말했대
“가서 모기장을 사오지 그래요?”
그러나 얼시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더라구. 한참 지난 뒤에야 나한테 조심스럽게 말했지
“아직 빚을 다 갚지 못해서 마음이 편치 않아요”
얼시는 모기한테 하도 듣겨서 몸 여기저기가 붉은 반점 투성이였지. 나도 마음이 아파 말했다네.
“그러지 말게나”
“저 혼자 몸이야 모기한테 몇 번 물려도 그리 불편할게 없지만 펑샤는 두 사람이잖아요.”-247쪽
살아간다는 것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10쪽 – 오월의바람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어 안 가려네-16쪽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13쪽)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63쪽)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려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도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278쪽)
또한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푸구이 노인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좋아했고, 자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다. 마치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 또 한 번 그 삶을 다시 살아보는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는 새의 발톱이 나뭇가지를 꽉 움켜잡듯 나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으면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은 법이란다.”
우리는 한평생 제법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지.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배가 다 익으면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지.
자전은 좋은 여자였어. 나 같은 놈이 그처럼 어질고 지혜로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건 전생에 개 노릇을 하며 팔자를 고치게 해달라고 짖어댔기 때문이라네. (30p)
˝도리를 생각한다면, 나도 자네한테 몇 푼쯤 빌려줘야겠지. 옛말에 당장의 위급함은 도와도 가난은 돕지 않는다고 했네. 나는 자네의 위급한 사정을 도와줄 수 있을 뿐이지, 자네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네.˝(67p)
우리는 한평생 제법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지.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배가 다 익으면 땅으로 떨 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지.(210p)
그러나 춘성은 그 후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 한 달쯤 지나서 성안의 류 현장이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사람 목숨이 아무리 질겨도, 일단 자기가 죽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슨수를 써도 살 수가 없는 법이라네. (243p)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 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 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내 주변 사람들을 보게나, 룽얼과 춘성, 그들은 한바탕 위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제 명에 못 죽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또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278-279
P. 5 나는, 작가로서, 동일한 내 작품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받는다. 생활이 변했고, 감정도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자기 작품의 서문에 쓰는 내용은 사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느낀 바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나 다른 누군가가 어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P. 198 자전은 마을 어귀에 좀 다시 가보자고 하더군. 그곳에 다다랐을 때 내 옷은 흠뻑 젖어 있었지. 자전은 울면서 말했다네.
˝유칭은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흩뿌려놓은 것 같았어.
P. 278 내 한편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야.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주신 재산으로 거드름을 파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내 주변 사람들을 보게나. 룽얼과 춘성, 그들은 한바탕위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제 명에 못 죽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P. 63 푸구이 노인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뚷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P. 63 그런 노인을 시골에서 만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가간하고 고생스러운 생활이 그들의 기억을 그들의 기억을 흐트러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대개 지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에 별다른 애정이 없는 듯, 마치 길에서 주워들은 것처럼 몇 가지 사소한 일들만 드문드문 기억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소한 기억마저도 자기가 아니라 남에 대한 것이었고, 한두 마디 말로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해버렸다.
P. 63 그의 이야기는 새의 발톱이 나뭇가지를 꼭 움켜잡듯 나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P. 111 후에 나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됐지. 내가 나 자신을 겁줄 필요는 없다고 말일세. 그게 다 운명인 거지. 옛말에 큰 재난을 당하고도 죽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있을 거라 했네. 그래서 난 내 나머지 반평생은 점점 더 나아잘 거라 믿기로 했지. 자전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이로 실을 끊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P. 165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게 된 거지. 믿지 않는 것이기도 했고, 감히 믿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나날들을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거든.
P. 196 그날부터 나는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면 자전에게 성안에 가서 유칭이 좀 나아졌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지. 그러고는 천천히 성 쪽으로 걸어가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발길을 돌려 유칭의 무덤 앞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네. 밤이 깊어져 바람이 얼굴 위로 불어오면 죽은 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떠나니는 탓인지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어. 그렇게 한밤중까지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네.
P. 199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훝뿌려놓은 것 같았어.
P. 200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잠은 아무데사나 자서는 안 되며, 문간은 잘못 밟으면 안되고, 주머니는 잘못 만지면 안 되는 거야.˝
P. 200 나는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가 하도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꼭 내가 그를 위해 뭐라도 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느 자기 신세타령을 다른 사람이 관심있게 들어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나타냈던 것이다.
P. 278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P. 282 ˝푸구이는 괜찮은 녀석이야. 간혹 몰래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뭐 사람도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는데 소야 더 말할 게 있나. 나는 놈한테 언제 일을 시켜야 하고, 언제 쉬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내가 피곤하면 그놈도 피곤할 테니 쉬게 하면 되고, 내가 좀 쉬고 나서 정신이 들면 놈도 일할 때가 된 거야.˝
P. 15 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그것은바로 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어지러이 노니는 참새처럼,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햇빛 가득한 시골 마을 들녘에서 빈둥거렸다.
P. 50 나는 고개를 저었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하루아침에 내 비단옷은 엉망이 되었고,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네.
혼자 집으로 가면서 울고 또 울었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겨우 하루 돈을 나르고도 사지가 다 풀릴 정도로 힘든데,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고생했을까 싶더라구. 그제야 난 아버지가 왜 은화가 아니라 동전을 고집했는지 알게 됐지. 바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려고, 그러니까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하려고 그러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걸을 수가없었어. 그대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허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지.
P. 95 날이 어두워지자 눈까지 내렸어. 그리고 꽤 오랫동안 포성이 멎었지. 우리는 참호 바깥에 누워 있는 부상자 수천 명의 비명을 듣고 있었는데,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네. 어쨌거나 그건 고통에 겨워 내는 소리였지.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사람을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 그 소리는 커다랗게 용솟음치는 밀물처럼 우리 몸 위로 사정없이 밀려왔어. 그 와중에 눈꽃이 떨어졌지만, 하늘이 너무 어두워 눈으로 볼수는 없었지. 그저 몸이 얼었다 축축해졌다 하고, 또 손 위에 보드라운 솜조각 같은 게 앉았다가 천천히 녹아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두꺼운 눈꽃 층이 쌓이는 걸 느낄 뿐이었다네.
P. 283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당시엔 가장 흔한 게 총알이라 어디에 누워도 총알에 긁혀 다치곤 했다.. 사방의 집이란 집은 다 부수고 나무도 깡그리 베어낸뒤, 온 천지의 국민당군은 총검을 들고 마른 풀을 베러 갔어. 농번기에 벼를 베는, 딱 그 모양새였지. 어떤 이들은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나무뿌리를 파냈다네. 또 어떤 이들은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무덤에서 꺼낸 관을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였지. 그렇게 관을 꺼내 쓴 뒤에 죽은 사람의 뼈는 그냥 참호 밖으로내버렸다네. 다시 묻어주는 일 같은 건 없었어. 그런 지경에 이르면 누구도 죽은 사람의 뼈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거든, 아마그 뼈들을 옆에 두고 잠을 잔다고 해도 악몽을 꾸는 일은 없었을거야. 그런 식으로 땔감은 점점 줄어들고, 쌀은 오히려 점점 많아졌지. 그렇다 보니 이제 누구도 쌀을 차지하려 다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셋은 쌀 몇 부대를 지고 와 참호 바닥에 깔고는 침대인 양 했지. 그렇게 하고 누우면 총알 때문에 몸이 쑤실 일은 없을테니까. – 본문중에서
˝여기가 어디야?˝
나와 춘성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지. 하지만 우린들 거기가 어딘지 어찌 알겠나? 하는 수 없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지. 그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뜨는데, 글쎄 눈이 점점 커지는 거야. 입은 잔뜩 일그러져 쓴웃음을 짓는 것 같았고 말이야.
잠시 후 우리는 쇳소리 같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
˝이 몸은 어디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구나.˝
라오취안은 말을 마치고는 곧 눈을 감았네.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보고, 나와 춘성은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 우리는서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춘성이 먼저 울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에나도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네. – 본문중에서
˝온몸이 점점 굳어 가는데, 딱 한 군데만 날이 갈수록 부드러워진다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아래쪽으로 불룩 튀어나온 그의 바지를 보니 몇 가닥의 풀이 붙어 있었다. 그도 허허웃으며 내가 자기 뜻을 이해한 걸 무척이나 기뻐했다. – 본문중에서
– 내용
이야기는 농촌으로 민요를 수집하러 간 ‘나’에게 늙은 농부 푸구이가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부유한 지주의 외아들이었던 푸구이는 전문 도박꾼 룽얼에게 걸려들어 하룻밤 만에 전 재산을 잃고, 초가집에 사는 농사꾼 신세로 전락한다.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뀐 그날 이후 푸구이는 운명과의 장난 같은 줄다리기, 늘 끌려 다니기만 하는 불공평한 줄다리기를 시작하게 된다.
성안에 의원을 부르러 갔다가 얼떨결에 국민당군에 끌려간 그는 2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아 집에 돌아온다.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벙어리에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
그 즈음 진행되던 토지 개혁 과정에서 자신에게 빼앗은 땅으로 부자가 되었던 룽얼이 공개 처형되자, 푸구이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운명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1958년 인민공사가 성립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집 안의 솥까지 빼앗긴 뒤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지만, 식량은 곧 바닥이 나고 홍수까지 겹쳐 최악의 기근이 찾아든다.
그 와중에도 마을에서는 강철을 만든다며 쇠붙이를 녹일 길지를 찾는데, 풍수 선생과 아내 자전의 인연으로 푸구이는 또 한 번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긴다.
시름시름 앓던 자전은 불치병 진단을 받고 푸구이와 펑샤는 고된 노동에 지쳐갈 무렵, 아들 유칭이 출산 중인 현장 부인에게 수혈을 해주다 의사의 무지로 어처구니없이 죽고 만다. 아들을 죽게 한 현장이 옛 전우 춘성이란 걸 알게 된 푸구이는 “자네는 나한테 목숨 하나를 빚진 거라네. 다음 생에서 꼭 돌려주게나” 하며 아들을 조용히 가슴속에 묻기로 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펑샤는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신랑 얼시를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성안으로 딸 부부를 보러 갔던 푸구이는 조리돌림을 당하던 춘성을 구하지만, 얼마 후 춘성은 푸구이 부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끊는다.
펑샤의 임신 소식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아이를 낳던 펑샤는 유칭이 죽은 바로 그 병실에서 죽음을 맞고 곧이어 자전도 훌륭한 남편, 착한 아이들과 살았던 한평생에 흡족해하며 눈을 감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 푸구이는 다시 사위 얼시, 손자 쿠건과 오순도순 그런대로 괜찮은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착한 사위 얼시도 운반 일을 하다가 시멘트 판에 끼어 끔찍한 죽음을 맞고, 하나 남은 쿠건마저도 갑자기 콩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 출판사 서평
작가 위화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인생’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장편소설로, 국내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원제는 ‘活着’.
위화는 <인생>을 통해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이 시대를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애정 어린 헌사와도 같은 소설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