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번째 잡기장 (85) 중에서 _ 11월 9일자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과’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음의 핵심을 비껴가는 우수개 같은 이야기 이지요.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행복 아니면 불행, 불행 아니면 행복, 그 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일 겁니다. 모든 것을 도 아니면 모로만 보려는 극단주의일수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이나 불행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개인적이며 심리적 현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다행이 있다’ – 여류 소설가 백영옥님의 글입니다. 그이의 그런 말에 대해 ‘모든 다행은 일종의 행복이 아니냐? Happy와 Lucky가 어떻게 다르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Happy 하면 그게 Lucky한 것이고, Lucky하면 그게 Happy한 것이지, 다행과 행복, 그 둘은 같은 것이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일 겝니다. 한국어가 갖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단어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유사성과 어감상의 차별성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평범한 일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많습니다. 인생살이란 모두 다 행과 불행으로 갈라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덤덤하게 지나가는 일들이 대부분인데, 그 중에서 가끔은 행복한 일로, 또 가끔은 불행한 일로 번져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 그 둘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을까요?
아주 많은 경우, 저는 행복감을 크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불행한 것도 아닌 나날을 살아갑니다. 저는 그것을 ‘일상’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우리는 일상성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 일상성의 반복 속에서 우린 행복과 불행의 교차를 경험합니다.
물론 불행하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만, 그렇다고 해서 매 순간 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꼭 만족스럽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우리네 일상 입니다. ‘웃으며 삽시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즐거워서 웃고 행복해서 웃고 좋아서 웃고 기뻐서 웃고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으세요’ 이런 카톡을 받기는 하지만, 우리가 바보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 주어진 하루 하루란 그렇게 웃을 일들만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일들,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일들이 비일 비재합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은 더더욱 행복을 인생 최고 최대의 목적인양 가르치고, 세뇌받고, 설교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같은 공리주의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나 하나의 행복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고, 심지어는 ‘당신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모두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 – 이 얼마나 무섭고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인생이란 불행한 사람을 곁에 두곤 결코 자기도 행복해 질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신의 불행은 나의 행복 마저도 깍아버립니다. 함께 행복하지 못하면 함께 불행해지는 것이 우주의 원리요,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젠 정말 깨달을 때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 그것도 ‘나의 행복’에다 두면 않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생이란 꼭 성공하고, 이기고, 승리하여, 만족을 얻고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못해도, 그져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행복하지 못하면 불행한게 아닙니다. 불행하지만 않으면 그게 행복일수도 있습니다. 순간 순간, 하루 하루, 그져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순간이 와도 그냥 한번 씽긋 웃고, 불행한 일을 당해도 그냥 한번 울음으로 매듭을 짓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일상성의 진실과 평범성의 성실함 같은 것이 아마도 행복과 불행 사이에 현존하는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린 성공할지 실패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린 건강할지 병들지 모르는 날들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어찌될지 몰라도 꼭 한 가지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면서 살아갑니다. ‘죽는다는 것!’ 우린 다 죽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 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죽을 것이니까, 그냥, 여기서, 일찍 죽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않됩니다. 우리 인간은 반드시 죽을 줄을 알면서도, 그래도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갑니다. 언젠가는 죽을 인생, 그냥 일찌감치 죽자거나, 아님 어짜피 죽을 인생, 적당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자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살이에서는, 그 일이 반복적 단순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일이 어디 한두가지 입니까?
우린 내일이면 다시 배고파진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또 배고파질 건데 먹어선 뭐하느냐’고 말하는 얼간이가 아닙니다. 우린 ‘몇일만 지나면 또 먼지가 쌓일 것이 뻔한데 청소는 해서 뭘하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덧없이 흘러갈 것이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우린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꼭 행복해야만 사는 것도 아니고 불행하다고해서 접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 그 둘 사이에는, 그 둘을 넘어서는 ‘말없는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 행복 (幸福)에 대하여

행복 (幸福)을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 ‘복된 좋은 운수’ 등으로 정의한다. 영어 happy 역시 어원적으로 ‘요행’, ‘우연’ 등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εὐδαιμονία(에우다이모니아)는 어원적으로 ‘좋은 신령에게 복을 받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한자어 ‘행복’과 뜻이 통한다.
의학적으로는 ‘건강한 상태’를, 심리적으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 등으로 입장마다 행복의 차이는 있다. 사전적 정의로는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하는 심리적인 상태’를 말한다. 반대말은 ‘불행’이다.
법률적으로 행복은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는 것’으로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기도 하다. 법률적으로 기본적인 인권에는 행복추구권 (幸福追求權)이 포함되어 있어, 법률에 의거하여 누구든지 동등하게 행복해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행복추구권은 천부인권 사상가인 로크 (J. Locke) 등이 주장하였으며, 근대 인권선언의 초기에 주장되었던 기본권들 중의 하나이나, 현대 헌법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기본권이기도 하다. 이 행복추구권은, 다른 사람의 행복추구권을 부당하게 침투하지 않는 한, 제약을 받는 일이 없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어떻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든 간에,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 면에서 본 행복은 전형적으로, GDP나 GNP 등의 지표가 국가의 경제면의 윤택함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들 수치가 높은 국가가 낮은 국가에 비해 행복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나, 연구에 의하면 GDP 15,000 달러 이상의 국가의 경우, 한 국가의 평균 소득과 그 나라 국민의 평균 행복감과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행복을 측정하는 지표가 전통적인 의미의 관점이 아닌, 공급이 얼마나 많은가를 따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 행복론 (幸福論)
인간은 옛날부터 행복해지려는 방법을 추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행복에 대한 고찰,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등의 방법론 등을 제시하는 문장 및 서적, 이론들은 일반적으로 ‘행복론’ (幸福論)이라고 불린다.
논자마다 ‘행복’이라는 개념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큰 혼선이 생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말하는 행복은 웰빙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사는 목적은 바로 이 행복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는 다른 점도 많은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으므로, 물질적 행복 및 당시 그리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명예 등은 타율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고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관조와 중용 같은 비교적 정신적인 것들을 말한다.
널리 쾌락주의 철학 (공리주의도 포함)에서 말하는 행복이 일상적인 의미의 행복에 가깝다. 단적인 예로, 제러미 벤담은 행복과 쾌락 (즐거움)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뒤집어 말하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행복의 개념은 쾌락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쾌락의 개념과 유사하다.
동양의 중국 상서 ‘홍범편’에서는 인간의 오복 (五福)으로 수 (壽), 부 (富), 강녕 (康寧), 유호덕 (攸好德), 고종명 (考終命)을 들었고, 고대 인도에서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네 가지로 kama (욕망), arta (재산), dharma (의무), moksa (해탈)을 꼽았다.
.종교의 역할
인간은 굶주린 상태에서 배부른 상태를 원해 왔으며, 비바람을 뒤집어쓰며 추위에 떠는 상태에서 견고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과 의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행복이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도 일정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만족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정신적인 면을 추구하여 왔다. 한 가지 예로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불가피한 손실이나, 종교를 통해 사후 (死後)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일정부분 해소하였다. 또한, 정토나 천국, 극락 등, 일종의 구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여느 ‘손실’에서부터 앞날에의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지역이나 문화 등의 성격에 따라, 사원, 교회 등의 종교시설의 관계자는, 일종의 상담인 (카운셀러)로서의 사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 종교시설은 근대의 생활 속에서 삶의 고비마다 작용하는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며, 지역 주민의 불안이나 고민을 해소하고, 또한 지역사회의 일체감을 향상시키는 시설이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러한 종교시설의 기능이 잘 작동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종교관의 쇠퇴 때문에, 또한 신흥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으로 말미암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예도 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 문제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하는 일도 있어 상황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행복의 복잡성
행복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사람들마다 다르다.
한가지 예로, 어떤 사람이 어릴 적 동경했던 직업을 갖기 위해, 자신의 적성을 무시하고 그 분야로 매진하여, 결과적으로 도중에 좌절하고 말았을 경우, 본인에게는 대단한 손실이며 불행이다. 설령 그 과정의 도중에서, 아직 되돌이킬 수 있을 여지가 있는 단계에서의 성공은, 그 순간에는 ‘행복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과론으로부터 말하자면 ‘드디어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현상이 그 사람에게 과연 정말로 행복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 뒤로 긴 시간을 거치기 전까지는, 단순하게 판별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
.행복의 공통점
하지만 행복의 복잡성중에도 공통점이 있다. 행복하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감당할 수 있는 대로 감정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SWB (주관적 안녕감)라는 개념으로 정립하여 행복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긍정심리학에 따르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몰입),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함 (사회적 지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행복 연구의 권위자들은 행복함은 대개 유전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본다. 이 분야의 최대 권위자로는 에드 디너 (E. Diener)는 누군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를 유전으로 본다. 30년간의 행복에 관한 연구들을 메타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 환경적 변수들은 모두 합쳐도 개인 간의 행복의 차이를 15%밖에 설명하지 못하며, 반면에 유전이나 성격은 전체의 50%를 설명했다. 즉 개인 간 행복의 차이의 반은 유전이다.
– 행복과 병리학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이미 밝혔듯이 객관적인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주위에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정신병 가운데는 행복감을 얻지 못하게 되는 증상도 있으므로, 이런 병의 발병자에게는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
.우울증의 문제
행복감을 얻지 못하게 되는 병으로 우울증이 있다. 우울증은 절망감 때문에 정신을 잃게 되며, 환자 자신에게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일으켜, 어떤 것에 대해서든 사고하는 것이 곤란한 상태에 빠지고, 극도의 절망감에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 상태는 아무 의미 없이 괴로워할 뿐이므로, 현대의학의 시점으로 보면 한시라도 빨리 신경정신과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또한 거리를 걸어다니는 등의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좋으며 간단히 시작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봉사활동을 시작 하면, 우울증으로 자살할 확률이 감소된다고 보고되고 있다.
우울증은 현대의학에서도 치료법이 확립되어 있어, 약물치료 등의 치료에 의해 회복이 되고 나서 본인 자신의 자각으로 회복하는 병이기도 하다. 또한, 우울증의 발병은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 말에서 볼 수 있듯, 누구나 발병할 우려가 있으나, 방치하게 되면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으므로, 조기치료야말로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인이 우울증에 걸린 것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도 받지 않은 채 절망감 속에서 방치되다가 결국은 자살하는 예도 있어, 이는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사회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